4. 심혈을 기울이다.
1939년 5월 30일,동북항일련군 제3로군은 덕도(德都) 차오양산 근거지에서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북만성위 서기에 선출된 김책은 주로 칭청, 수이링, 테리 지구에서 활동했다. 당시 군사활동은 현지중심 활동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김책은 항상 각 부대를 직접 순회하면서 군사업무를 챙겼다. 군정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그는 적극적으로 군정간부 훈련반 설립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훈련반의 상세 규칙을 제정하고, 맑스레닌주의, 당의 기본 지식, 항일유격대의 전략전술 등의 교재를 준비했다. 이것은 유격구가 분산된 환경하에서 당의 영도를 강화하고 견지하며,정확한 사상으로 북만당 및 군대의 사상을 통일하고, 항련 및 지방공작 대원의 정치수준, 군사기능 등을 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다.
동시에,김책은 지방당 및 항일구국회에 대한 영도를 강화했다. 그는 군대에서 유능한 인원을 산자오(하얼빈 서쪽 위치), 칭청, 나허 등지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현지에 잠입하여 일본군의 왜곡선전 폭로 활동 및 인민 공작활동을 전개하고, 산자오지구 공작위원회 (후에 롱장공위로 개칭) 및 나허현위, 칭청지부 등 당 조직을 설립하였다. 김책은 또한 북만항일구국총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았다. 북만성위 소속 각 특위, 현위 등이 지도하는 반일회는 모두 항일구국회로 개칭했으며, 책임자는 각 지방당 조직의 책임자가 겸임했다. 몇 개월의 짧은 기간에 수백명의 당원 및 항일구국회원을 확보했다.
김책은 북만성위의 간행물인 《통일》을 발간했는데, 동 간행물은 1939년 6월에서 1940년 8월까지 총 10호가 출판됐다. 김책은 직접 1940년 “붉은5월” 기념 《통일》 특집호에 “당 조직 및 투쟁의 완전을 위하여”라는 기고문을 실어 북만당의 투쟁역사 및 경험을 총결하고, “내외좌우의 반당분자의 철저한 분쇄”, “관료주의 , 명령주의, 형식주의 및 봉건종교주의 타파”, ”내재된 타협주의 및 무책임 경향 타파”, ”분열관념 및 개인주의 심리 분쇄”, “반간첩투쟁 강화” 등 당시의 긴급히 척결해야 될 문제들을 제기했다.
항련부대의 투쟁 및 임무를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 1940년 3월 8일 김책은 《동북항일련군제3로군행동강령》및《동북항일련군정치공작잠행조례초안》을 제정했다. 제1조에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규정했다. “항일련군에서 반드시 중국공산당의 정치영도를 공고히 하고-----”, 또한 정치공작의 목적, 주요 내용 및 방법을 명확히 하여 극단적인 역경과 유격구의 분산 상황에서 항일련군의 존재 목적을 명확히 하고 존속시키는데 중요한 작용을 했다.
적후방 투쟁은 혹독하고 또한 변수가 많다. 만약 냉정하지 못하거나 지략이 부족하면 바로 위험에 처하게 된다. 하루는 김책이 라오진고우산 밀영에서 문건 초안을 작성할 때,갑자기 총기를 휴대한 12명의 농민이 항련 산림대에 의탁하고 싶다며 찾아왔다. 김책은 농민복장으로 불시에 나타난 이들의 행동거지가 부자연스러고 의심스러워 경계했다. 그러나 당시 밀영에는 김책과 비서 김창택(金昌泽), 김창택의 부인 안경숙 3명만 있었다. 따라서, 김책은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고, 이들이 전혀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응대했다. 다음날 저녁 성위 교통원 위란각이 정보를 보내왔는데, 원래 이들은 배신자의 지령에 따라 성위를 파괴하려는 특무들이며, 이들은 김책을 일반 대원으로 여기고 성위 지도자가 밀영으로 돌아오면 처지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김책은 이들을 안전한 장소로 유인한 후 기습 공격하여 추진풍을 비롯한 12명의 특무들을 모두 무장해제시켰다.
1940년,항련1로군과 2로군은 남만, 동만 및 길동지구에서 연속해서 패전했다. 투쟁의지를 고무시키고, 1, 2로군의 잔존부대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김책은 1940년 3월 24일 《중공북만성위 붉은5월에 관한 통지》를 작성하여 붉은5월을 기념하기 위한 결정적 군사행동 채택을 확정했다. 소속부대는 반드시 현지 상황에 근거하여 “결정적 군사행동”을 최대한 추진하는데, 적의 도시, 방어거점, 기차역 등에 대한 습격, 철도, 교량, 전기시설에 대한 파괴, 무기, 군복 등의 노획, 대원 및 신규 당원의 증원, 지방 인민 조직의 건설 등을 추진하는 것이다. 지방당 조직은 또한 인민을 동원하여 괴뢰군의 약탈 반대 및 탈영을 고무하는 투쟁을 진행하며, 특히 북만 각 지역의 항련부대는 통일적 계획하에 “붉은5월” 투쟁 활동을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소위 “붉은5월”이란 “5·1국제노동자기념일”, “5·4중국신문화 운동기념일”, 5·5세계혁명시조맑스탄생일”, “5·7, 5·9 중국인민반일기념일” “5·30 기념일” 등이 5월에 집중되어 있어 달이어서 그렇게 불렸다. 김책은 “붉은5월”투쟁 활동에 모든 대원들이 적극적으로 임하여 좋은 전과를 쟁취할 것, 투쟁 결과에 따라 상벌할 것을 통보했다.
“붉은5월” 투쟁 활동은 4월 13일부터 6월7일까지 계속 진행됐다. 3로군 각 부대는 모두 적극적으로 적군에 대한 공격 활동을 활발히 진행했다. 적군에 대해 3지대는 4차례, 6지대는 3차례, 9지대는 3차례, 12지대는 3차례의 습격을 감행하여 적군 116명을 사살하고, 64명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소총 128자루, 권총 5자루, 기관총 2정, 수류탄12발, 탄알 17,308발, 군마 4필, 군도 3자루, 군복 456벌을 노획했다. 이번 습격에서3로군은 21명이 전사했다. 이와 별도로 각 항련부대는 많이 증원되었는데 그 중에서 3지대가 200명에서 300명으로 가장 많이 증원되었다.
“붉은5월” 투쟁 활동을 통해 3로군 각지대의 주도적인 작전 능력이 많이 증대됐다. 비록 투쟁 활동은 종료되었지만, 그 여파가 계속 남아 있었다. 3로군은 헤이넌 평원에 처음 도착할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적극적으로 나허, 커산, 산자오지구 일만괴뢰군 거점에 대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3, 9지대는 9월 25일 커산현을 공격하여 적 23명을 사살하고 80여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적 차량 3대를 파괴하고 박격포4문, 소총150여 자루, 탄알 6000여 발을 노획했다. 또한 감옥에 갇혀있는 200여명의 인민을 석방시켰는데 이들중 100여명은 항일련군에 입대했다. 11월8일,12지대는 자오위엔진을 공격하여 적군 12명을 사살하고 116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기관총 2정, 소총219자루, 탄알 2만여 발을 노획했다. 이외 말 130여 필, 군담요 100장, 군복 50여 벌을 노획했으며 100여명의 현지 청년들이 항련부대에 입대했다. 또한 집단부락, 괴뢰경찰서, 일본무장개척단 30여곳을 습격하여 파괴했으며, 일만괴뢰군을 20여 차례 기습함으로서 항련부대와 인민들의 항일투쟁 결의를 크게 고무시켰다.
“붉은5월” 투쟁 활동으로 고무된 상황하에서 항련 3로군은 흑룡강성 18개현으로 확대하여 반년 이상 대평원 유격전을 지속했다. 커산, 라하, 나난, 통관, 자오위엔 등 중심적 도시들을 공격하여 무기, 탄약, 군복, 식량 등을 보충하고 광범위한 인민대중의 성원과 지지를 쟁취하였으며, 항련의 정치영향을 확대했다. 당초 대평원 유격전 추진에 대해 3로군 총지휘관 이조린은 위험성이 크기 때문에 반대했다. 그러나 김책은 북만 인민이 비교적 우호적이고 일만괴뢰군 세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하며, 동만, 남만처럼 집단부락이나 보갑제도가 없기 때문에 항련부대가 충분히 활동할 공간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항련부대는 1938년 심대한 타격을 입은 이래 대부분 부대는 인적이 없는 산악지대로 철수하여 유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유격대는 인민과 분리된 상황에서는 단지 약화될 뿐 절대로 발전할 수 없다. 실력을 키우고 역량 보존 및 확대를 위해서는 반드시 대평원에서 유격전을 전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김책의 의견이 정확함을 증명했다. 인민과 멀어지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적이 드문 지역에서 고립된 채로 연명하는 것은 설사 적에 의해 소멸되지는 않지만 결국 앉아서 스스로 괴멸되는 것이다. 1940년 대평원 유격전으로 오히려 대원들의 배반, 탈영 등의 현상이 사라지고 유격구가 확대되고, 군수보급이 확충되었다. 또한 나허,커산, 베이안 등지에서 초보적인 군민협력 체계가 형성되어 항련부대에 대한 식량 및 군복 등의 정기적인 공급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동, 남만 항련부대의 무장투쟁의 쇠퇴에 따라 북만 항련부대도 매우 어려운 시기에 진입했다. 3로군 각 지대도 공군의 지원을 받은 최소 1천여명의 일만괴뢰군 토벌대에 직면했다. 동시에 적들은 “분산 주둔, 분산 진격 및 합동 공격” 전술로 전환하여 “주력집중, 수시출동, 각개격파” 작전을 실시하였으며, 주력부대에 대한 추격 및 영도기관에 대한 공격을 주 목표로 삼았다. 이런 엄중한 형세하에서 김책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현재 적군은 강대하고, 항련부대는 제한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일본놈들이 이미 유격구에 대한 철저한 봉쇄 및 토벌하는 상황속에서 첫째, 기존 유격구에 대해 사수할 필요가 없으며 반드시 계획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해야 한다. 둘째, 강대한 적과 정면 공격을 할 필요가 없으며 반드시 적을 피해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여 실력을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첫댓글 방장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마 번역에만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임을 잘 압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무지랭이 우중에 불과한 우리 독자대중들은
그런 단순 벅역만으로는 그 진정한 의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부탁인데.....번역 외에도 그에 대한 논객님다운 추가적 해설과 코멘트로
우리 우둔한 독자대중들이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쉽게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저도 번역해 올리면서 배경이나 부연해설 주석 등이 없기 때문에
읽으시는 분들이 내용이 많이 헷갈릴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북한의 인물에 대해서는 이렇게 중국에 소개된 자료를 번역해서
올린다는 것은 완전히 낭비지요. 그냥 북한에 있는 자료를 읽으면 간단한데....
그게 안되니까, 어쩔수 없이 중국자료를 번역하게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제가 이 분야 전문가도 아니고 지식도 모자라서 (사실 초보거든요)
읽으시는 분들이 체계적으로 내용을 이해하시도록 해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앞으로 제 내공이 좀 더 많이 쌓이면
정론직필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