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와 함께
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제640호 2019. 1. 27 (다해)(2006년12월 19일 창간)
편집 및 발행 : 손석준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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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말씀
‘기름부음받은이’를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시며, 주님께서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당신을 파견하셨다고 선포하십니다. ‘기름’은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도 성령을 받아 파견된 사람이기에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거저 주어지지 않고 ‘일(사명)’과 함께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성령을 부어 주시며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셨습니다. 부모가 아기에게 사랑을 부어 주면, 아기는 부모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는 이들도 그 성령을 주시는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몸의 여러 기관들의 기능을 통하여 인간이 살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성령의 여러 능력을 통하여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라고 말하듯, 성령께서는 주님 뜻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기쁨의 힘이십니다. 기쁨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갈라 5,22 참조).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기쁘게 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셨기에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또한 베드로와 요한 사도도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성령을 받았다면 반드시 복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복음을 증언하되 기쁘게 증언해야 합니다. 복음 자체가 기쁜 소식이고, 그 기쁨을 전하는 이가 기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슬픈 그리스도는 없습니다.(전삼용 요셉 신부)(매일미사)
묵상해봅시다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말대로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믿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합시다. 우리가 배운 것은 진실한 것입니다.(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1,21)
알아봅시다
1. 해외 원조 주일
한국 교회는 해마다 1월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 주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03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해외 원조 사업에 대한 올바른 홍보와 신자들의 의식 강화를 도모하고자 ‘해외 원조 주일’을 정하였다.
2.봉헌생활의 날(2/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7년 주님 봉헌 축일을 '봉헌생활의 날'을 제정한 것은 온 세계 모든 봉헌생활자들, 곧 수도자들이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봉헌하는 봉헌생활의 참뜻과 부르심을 되새기도록 하기 위해서다.
봉헌의 의미
봉헌이란 일반적으로 인간이 신에게 무엇을 바치는 종교적 행위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신의 마음에 들고 신은 그에게 어떤 혜택을 줍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과 신 사이에 일종의 거래가 성립됩니다. 신에게 먼저 무엇을 바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신으로부터 받아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봉헌은 우리가 마치 어떤 힘 있는 사람으로부터 혜택을 받아내기 위해 취하는 행동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적 봉헌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의 거래가 아닌, 감사의 행위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바칠 때, 어떤 이기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결코 참된 봉헌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봉헌은 먼저 그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하물며 그 대상이 하느님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 봉헌하는 내용물이 순수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양이 아니라 질을 따지십니다. 그분은 부자의 금화보다는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을 더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우리 마음과 사랑이 담기지 않은 봉헌물은 하느님 보시기에 별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불가에 삼륜청정(三輪淸淨)한 보시(報施)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일 누가 보시를 할 경우, 먼저 보시하는 사람 쪽에서 그 동기가 순수해야 한다고 합니다. 자기과시나 생색내기가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보시를 받는 사람 쪽에서도 당당해야 한다고 합니다. 보시는 부처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기에 얽매임 없이 그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보시하는 물건 역시 흠 없고 깨끗해야 한다고 합니다. 부정하고 불필요한 물건이 아니라, 자기에게도 소중하고 필요한 물건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참된 보시가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불가의 이런 가르침은 우리 봉헌에 무언가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불순한 동기로 주어지는 선물이나 호의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부정부패를 낳는지 자주 경험합니다. 불순한 동기로 무엇을 주거나 받을 때, 그것은 뒷거래를 낳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봉헌, 깨끗하지 못한 봉헌물, 무엇을 받고 당당하지 못한 태도 등은 모두 참된 봉헌을 가로막는 요소들이라 하겠습니다.
참된 봉헌
여기서 우리는 참된 봉헌이 되기 위한 조건을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 동기의 순수성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참된 봉헌은 사랑의 봉헌이어야 합니다. 봉헌은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하며,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거래일뿐입니다. 봉헌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무언가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도에 따라 우리 봉헌의 가치는 평가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는 봉헌이 사랑의 지고한 표현일 때, 그것은 최상의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완전한 봉헌은 자기 자신,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봉헌은 가장 완전한 봉헌입니다. 그분은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참된 봉헌은 자발적인 봉헌이어야 합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위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내어 놓게 합니다. 타인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서 하는 봉헌은 참된 봉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봉헌은 사랑에 의한 자발적인 봉헌이어야 합니다. 사랑과 자발성 이 두 가지 요소 중 하나가 결핍되었을 때, 참된 봉헌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봉헌
수도생활을 흔히 봉헌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봉헌생활의 날을 수도자들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수도자들의 경우는 우리의 전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는 서원은 바로 이 봉헌을 공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서원의 내용들은 우리의 구체적인 봉헌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에 의한 자발적 봉헌, 곧 내어드림입니다. 봉헌생활은 비단 수도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이미 하느님에게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 삶 자체가 사랑에 의한 자발적인 봉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봉헌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을 봉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받은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생명이나 재능, 부,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봉헌은 감사의 응답이어야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을 다시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내어드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욥의 다음 고백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기 1,21).
봉헌생활의 의미
형제자매 여러분, 봉헌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빛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둠을 비추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오늘을 ‘빛의 축일’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일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복하여 성당과 각 가정에 비치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되었음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가 세례에서 봉헌되었다는 사실은 세상에 하나의 빛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초는 자신을 태움으로써 어둠을 밝히는 빛을 발산합니다. 예수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당신 자신을 온전히 태우심으로써 평화와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여 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전례가 주는 교훈이 아닌가 합니다.
봉헌생활의 두 번째 의미는 주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만남의 축일’이라고도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념함과 동시에 시므온과 안나가 구세주를 만남도 기념합니다. 이 두 사람은 세상의 구원자, 빛이 되어 오신 분을 만나 기쁨에 넘칩니다. 봉헌생활은 바로 주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의 시므온과 안나처럼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평생을 주님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가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순금이나 순은처럼 순수하게 되어야(말라 3,3 참조)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거룩하고 의로운 삶으로 이 세상에 빛의 역할을 다하며 주님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우리의 봉헌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기해 우리 봉헌의 의미를 새롭게 하여 우리 삶이 주님께 합당한 봉헌이 되도록 다함께 노력합시다. 아멘. [말씀자료 : 허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넥디도 왜관 수도회 ,가톨릭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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