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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끝난 숨은 사람이 있으니 역관 홍순언,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과 기녀 류씨이디.
해주 석(石)씨의 시조는 조선 선조 때의 종계변무(宗系辨誣)와 임진왜란 때 명나라군의 파병에 공이 큰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이다. 그의 자(字)는 공진(拱辰)이며 호(號)는 동천(東泉)이다. 명(明)나라 신종제때 호부. 공부를 거쳐 병부상서를 역임 하였다. 그는 본시 중국 동명 사람으로 1559년 진사 이과에 급제하고 명나라 명종을 직간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등용되어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돕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군비손실을 이유로 심유경이 탄핵하여 투옥당하여 옥사했다. 그 후에 복권되어 그의 아들 석담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해주에 정착하여 살자 왕이 그를 수양군에 봉하고 땅을 하사했으며 본적을 해주로 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하였다.
석씨는 원래 주(周)나라 무왕의 아우 강숙이 위나라에 분봉된 후, 그 공실에서 갈리어 춘추시대에 순신으로 일컬어진 석 작을 비롯하여 한, 진, 당, 송, 등 역대에 큰 명성이 대대로 이어졌다. 석성에게는 전 부인 정씨에 이어 부인 류 씨와 장자 담과 차남 천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석성의 후손들이 조선에 나와 살게 되었을까? 왜 조선은 명나라 병부상서인 석성이 목숨을 바쳐 보은(報恩)을 한 나라였을까? 여기에 실로 옛날 소설에서 보는 공주와 왕자의 로맨스를 뛰어넘는 숭고하고 지순한 인간적 사랑과 감동이 있다. 또한 은혜에 죽음으로 보답하는 아름다운 충성심도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 엮은 조선시대의 사서(史書)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후대에 교훈이 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책의 별집 사대전고(事大典故) 역설(譯舌·역관)조에 따르면, 선조 25년(AD1592) 홍순언(洪純彦)이라는 역관(譯官)에 관한 기록이 있다. 홍순언은 젊어서 궁핍하였으나 의협심이 강했다. 그는 중국어가 능숙하고 학식도 풍부하고 장사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여러 차례 중국을 왕래하여 그 나라의 인심과 풍습도 잘 아는 외교관 겸 국제 장사꾼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가 중국 연경(지금의 북경)에 갈 때 압록강 근처 통주(通州)에 이르러 청루(靑樓)에서 놀다, 자태가 유난히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 그 여인과 하룻밤을 즐기고자 하였다. 그 때 그 여인이 소복(素服)을 입어 연유를 물었더니 “첩의 부모는 본시 절강(浙江) 사람인데, 경사(京師)에서 벼슬하다가 불행히도 염병에 걸려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의 관(棺)이 사관(舍館)에 있으므로 고향으로 옮겨 장례 치르려는데 돈이 없어 부득이 제 몸을 파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목메어 울었다. 홍순언이 불쌍히 여겨 장례비용을 물으니 300금(金)이면 된다 하여 공금(公金)을 유용(流用) 해주고 그 여인을 가까이하진 않았다. 그때 여인이 순언의 성명을 물었으나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인이 “대인(大人)께서 성명을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첩도 주시는 것을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하므로, 홍씨 성(姓)만 말하고 나왔다. 동행한 무리는 그 얘기를 듣고 그의 어리석다며 모두들 비웃었다.
그 후 혼순언은 귀국했으나 공금 횡령죄로 여러 해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명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가 이자춘(李子春)이 아닌 성주 이씨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돼 있을 뿐 아니라 고려 왕씨 네 왕을 차례로 시해했다고 기록돼, 그 오명을 벗기려는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로 전후 10여 명의 사신이 명에 갔다 왔으나 아무도 일을 이루지 못했다.
종계변무(宗系辨誣)란 중국의 공식 문서에 태조 이성계의 조상에 관한 종계(宗系)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는 일을 가리킨다. 일의 발단은 태조3년(1394)에 해악산천(海岳山川)의 제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도중 고제축문(告祭祝文) 내용 중에 ‘고려의 간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인 이성계’하는 구절이 있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상세히 변무(辨誣)하는 글을 명나라로 보냈다. 그 후로도 명나라의 의 조훈조장(祖訓條章)에 ‘이성계의 종계(宗系)가 이인임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고 알리고 그 후 대명회전(大明會典)에도 이렇게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200여 년이 지나도록 종계변무가 해결을 보지 못하자, 선조(宣祖)가 대노하여 명하기를 “이것은 역관의 죄로다. 이번에 가서 또 청을 허락받지 못하면 마땅히 수석통역관 한 사람을 목 베리라”라고 하명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중국어 역관들은 상의했다. "홍순언(洪純彦)은 어차피 살아서 감옥 밖으로 나오기 어려우니 우리가 빚진 공금을 갚아주고 풀려나오게 하여 그를 북경으로 보내자. 만일 그 일을 허락받고 돌아오면 그에게 행복이 될 것이고, 비록 죽는다 해도 진실로 한(恨) 될 바는 없을 것이다.”라고 의논하고 모두 함께 가서 그 뜻을 알리니 홍순언이 개연히 허락했다. 말하자면 중국어 역관들을 대표해서 죽어 달라는 것이었다.
선조 갑신년(1584)에 홍순언이 주청사(奏請使) 황정욱(黃廷彧·1532∼1607, 황희의 후손)을 수행해 북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일행이 북경의 입구인 조양문 밖에 도착하자 비단 장막이 구름처럼 펼쳐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한 기병(騎兵)이 쏜살같이 달려와 홍 판사(判事)가 누구시냐고 묻고는 “예부의 석 시랑(侍郞)께서 공(公)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마중 나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조금 있다가 보니 계집종 10여 명이 부인을 옹위하고 장막에서 나왔다.
당시의 장관급 인사가 조선의 중인에 지나지 않는 역관을 몸소 조양문(朝陽門)까지 맞이하러 나오는 일은 꿈에도 생각못 할 일이었다. 이 때 홍순언이 몹시 놀라 물러가고자 하니 석성이 “당신은 통주에서 은혜 베푼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내 아내의 말을 들으니 당신은 참으로 천하의 의사(義士)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서야 홍순언은 몇 년 전 통주 청루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 때의 여인이 후일 명(明) 조정의 예부시랑(禮部侍郞) 석성(石星)의 계실(繼室·후실)이 됐다. 그리고 석성은 홍순언의 의로움을 높이 여겨 동사(東使·조선 사신)를 볼 때마다 반드시 홍 통관(通官)이 왔는지 여부를 물었다.
그 내력은 이러하다. 그 후로 여자는 청루에서 나와 부모의 장사를 지냈다. 병부상서의 장례를 치르고 북경의 집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가려는 중에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던 예부상서 댁에 인사차 들렸다가 예부상서 처의 병을 간호하며 집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예부상서의 노력으로 병부상서의 죄가 혐의를 벗게 되었고, 전처가 죽자 그녀를 후처로 맞았던 것이다. 예부상서, 석 성이 그의 처로부터 홍순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고 조선에서 사신이 오면 홍순언역관이 있는가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석 성은 크게 연회를 베푼 뒤 “동사(東使·조선 사신)가 이번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입니까” 물었다. 홍순언이 종계변무 문제를 꺼냈더니 석성은 웃으며 그것은 자기 소관이고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니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사관에 머문 지 한 달 남짓한 동안에 그 일이 과연 청한 대로 허가됐으니, 석성이 참으로 아내의 은혜에 보답을 한 결과였다.
그 때에 조선사절은 宗系(종계)를 바로잡기 위하여 갔는데 일이 禮部尙書(예부상서)가 관장하는 일이고 보니 상서가 홍순언을 위해 강력히 주장해서 백년이 넘도록 해결하지 못한 宗系(종계)를 바로잡게 되어 왕통의 치욕을 벗게 되었다. 또 상서부인이 순언을 불러 후한 선물로 많은 錦繡(금수: 비단)를 내려 순언의 은혜에 보답했다고 한다. 宣祖大王(선조대왕)이 크게 기뻐하여 宗廟(종묘)에 고하고, 光國功勳(광국공훈)을 책록하고 홍순언(洪純彦)을 唐陵君(당릉군: 공신에게 내리는 封號)에 봉하였다.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이다).-정덕본-1510)⇒(이 성계는 이자춘의 아들이다.-만력본-1587)
(자료출처: KBS 역사스페셜)
홍순언이 돌아온 뒤 조정에서는 왕실의 계보를 바로잡아 왕실의 정통성을 회복해준 공적을 치하해 선조 23년(1590)에 그를 광국공신(光國功臣) 이등훈(二等勳)에 책봉하고, 역관으로는 처음으로 공신 작호인 당릉군(唐陵君)을 봉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가 사는 동리를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불렀다.
이로부터 태종-선조간 12대에 걸쳐 전후 15회의 사신을 보내는 등 186년 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선조22년(1599)에 종계를 바로 잡고, 2년 뒤인 선조 24년에 그 동안 종계를 바로잡는데 공이 큰 19인을 골라 輸忠貢誠翼謨修紀 光國功臣(수충공성익모수기 광국공신)』(약칭: 광국공신)으로 책록한 것이다. 선조24년에 종계변무에 따른 공로자 19인에게 공신책록을 하였는데 공신명(功臣名)은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며 보통 약해서 광국공신(光國功臣)이라 한다.
홍순언이 이러한 가운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국의 침공을 받으니 우선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수년간의 내란으로 국력이 약화되고 민심이 아직 안정 되지 않아 조선의 구원병 요청을 거절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워낙 사태가 급박하였으므로 수차례에 걸쳐 거듭 사신을 보냈으나 면담까지도 불응했다.
명이 조선을 돕는데 주저하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명나라는 왜를 주목하면서 조선도 함께 의심하고 있었다.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공격하려한다는 소문이 요동에 널리 퍼져있었다. 선조가 몽진길에 올라 의주에 도착해 명나라 조정에 구원을 청했는데, 그들은 조선과 일본이 손잡고 명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임금이 피난을 가장하여 왜군의 길잡이가 되어 북상한다는 거였다. 명은 사람을 보내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명의 파병을 기다리는 선조로써는 암담한 일이였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병부상서(국방부장관) 석성은 다른 고위사신이 아닌 역관 홍순언을 급히 불러 명이 조선을 믿게 하려면 조선에서 명나라에 원군을 지원하도록 요청하게 한다.
조선사신이 명나라에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조선이 갑자기 왜병의 침범을 받아 나라를 잃고 새처럼 도망쳐 숨는 것은 반드시 스스로 저지른 일이 있을 것이요, 또한 우리나라의 정세나 형편을 충분히 알지 못하니 함부로 군사를 내어 멀리 외국에서 일을 벌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는데, 유독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만 군사를 보내 구원할 것을 극력 주장했습니다. 석성이 홍순언을 불러 ‘나 혼자 힘을 다하고 있으나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이러하니 귀국의 사신이 오면 내가 마땅히 힘쓰겠다.’고 했습니다.”
정사 정곤수는 명나라 조정에 가서 울며 졸라대며 막후에서는 홍순언이 활약한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압록강만 지키면 된다고 조선의 원군 요청에 모두가 반대하였다. 그러나 병부상서 석성만은 조선이 정복되면 요동까지 쳐들어 올 염려가 있으니 원조해야 된다고 황제를 설득해서 원군을 보내게 된다. 석성의 말대로 조선에서는 명나라에 급히 사신을 보내어 원병을 청했고, 결국 명에서 원군을 파병하게 된다. 당시 명나라에 들어간 홍순언은 명장(明將) 동정제독(東征提督) 이여송(李如松)의 통역관이 돼 평양성 탈환에 일조했다. 이렇듯 홍순언과 석성의 인연은 임진왜란으로 다시 이어졌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홍순언은 경비를 털어 무기재료를 구입한다. 당시 명에서 금지하는 품목이었으나 석성의 허락이 있었고 그리하여 활을 만드는 물소 뿔 과 화약의 재료가 되는 염초를 구할 수가 있었다. 병부상서 석성은 제독 이여송(李如松)에게 군사 4만 3천과 요동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에게 군사 5천을 주어 조선에 구원병으로 파견하여 위기에 처한 왜란을 막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후 석성은 조선 파병에 따른 막대한 군비소모로 국력쇠약의 원인을 초래했다는 반대파 심유경(沈惟敬)의 책임론에 몰려 옥에 갇혀 결국 옥사하고 만다. 석성은 자신의 사정을 조선의 국왕인 선조에게 알려 명나라 황제, 신종에게 자신을 석방하도록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조정은 국내의 피폐한 상황도 그렇고 자칫 명나라황제의 분노를 살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석성의 하소연을 묵살하고 만다. 이때 석성은 죽기 직전에 부인 류씨와 자녀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명나라를 떠나 조선으로 가라고 유언했다.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위험해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에 석성의 부인과 두 아들은 조선으로 넘어와 황해도 해주(海州)에 정착했다. 그러자 선조는 석성의 아들 석담(石潭)을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토지를 하사했으며, 후손들은 본관을 해주로 삼았다. 이 아들 담이 해주 석씨의 시조이며 자손들은 고위관리를 역임하고 가문을 빛냈다. 현재의 집성촌은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와 산청군 영서면 일원이다.
석성이 조선의 자존심을 찾게 해주고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명의 원병을 보내준 일은 자신의 아내에게 베풀어준 홍순언의 은혜를 뛰어넘는 의를 알고 도리를 아는 보답이었다. 명나라의 입장에서 조선파병의 결과 국력의 쇠약을 가져왔고 결국 청나라에 패망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 성의 은혜를 아는 마음과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하여 난구에 처한 조선을 돕고자 애썼던 마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올바르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도 한다. 특히, 기녀 류씨의 효심이 갸륵하다.
세상의 단 한 번의 인연(시절인연)으로 국가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국난을 헤쳐가는 도움을 받은 일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20만 명이 넘는 명나라 군사 중에 절반 이상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기의 일생을 조선에서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한국인에게 있어 중국은 단순한 외국이 아니라 우리의 가까운 이웃이고 친척이고 형제라는 생각을 가지게 됨은 개인적인 주관은 아닐 것이다.
[출처] 국민권익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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