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이씨 은암공파 열전(固城李氏 隱菴公派列傳) ◀17世▶ 송암공(松巖公) 휘(諱) 노(魯)(1544~1598)
자(字)는 여유(汝唯)이고, 호(號)는 송암(松巖)이니, 인의공 효범(引儀公 孝範)의 아들이다. 중종(中宗) 갑진년(1544)에 출생하니 영리하고 빼어나서 강개(慷慨)한 지절(志節)이 있었다. 묘소는 경남 의령 부림면 입산리 설산에 있고 가족 으론 [증조] 문창(文昌) [조] 한(翰) [부] 효범(李孝範)이며 [외조] 문은(文垠) [처부] 정위(鄭渭)이다.
조식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을사사화 때 피화된 관원들을 신원하여줄 것과 간신들을 토죄할 것을 소청하였다. 봉선전 참봉(奉先殿參奉)을 거쳐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직장이 되었으며, 그간에 최영경(崔永慶)의 신원을 소청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창의하여 동생 이지(李旨)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종사관(從事官)·소모관(召募官)·사저관(私儲官)으로도 활약했고, 이여송(李如松)에 서계(書啓)를 보내 화의의 잘못을 따졌다. 형조좌랑 겸 기주관·비안현감·정언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낙산서원(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사성강목(四姓綱目)> <용사일기(龍蛇日記)> <문수지(文殊志)> <송암문집> 등이 있다. 정의(貞義)라는 시호가 추시(追諡)되었다. 중종 39년(1544) 경상도 의령현 부곡리(孚谷里)에서 출생했다. 16세 되던 명종 14년(1559)에 초계 정씨와 혼인하고, 이듬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서 거제에 귀양을 오게 된 유헌(游軒) 정황(丁熿)에게 나아가 수업을 받았다. 19세 때인 명종 17년(1562)에는 두 아우와 함께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을 좇아 배우고, 이듬해에 아우들과 함께 진주의 남명(南冥) 조식(曺植) 문하에 수학하여 평생의 정신적인 귀의처(歸依處)로 삼았다. 명종 19년(1564)에 진사(進士) 회시(會試)에 입격하고, 25세 되던 선조 1년(1568)에 성주의 큰 선비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과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방문하였다. 이듬해 성균관에 유학하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율곡(栗谷) 이이(李珥),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등과 친교를 쌓았다. 이때 을사사화에 피화된 윤임(尹任) 등의 신원(伸寃)을 청한 「청신토을사충간소(請伸討乙巳忠奸疏)」를 올려 그 당시 선비들 사회에서 강직하다는 공론이 있었다. 이송암의 이런 성품은 일찍이 남명에게 수학한 영향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조 남명이 「단성소(丹城疏)」를 올릴 때 소인(小人) 척결과 군자(君子) 발탁을 주장하며 윤원형(尹元衡)의 척신정권을 통렬하게 비판한 바가 있고, 이는 이미 조선 선비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준 바가 되었다. 이런 스승의 정신을 이어받은 이송암은 척신정치의 폐해를 직접 눈으로 목도한 후 을사사화에 피화된 윤임(尹任) 등의 신원(伸寃)을 청한 청신토을사충간소(請伸討乙巳忠奸疏)를 올렸는데, 이는 시대적 모순과 타협하지 않는 강우학파의 기질을 잘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29세에 스승인 남명의 장례에 참석하였고, 30세 되던 선조 6년(1573) 6월에 아우 보(普)의 죽음을 맞았으며, 34세에 부친상, 36세에 모친상을 당하는 등 30대 초반은 여러 우환이 겹쳐 상례를 치르는데 전념하였는데, 복을 마친 뒤 한동안 단성(丹城) 송암촌(松巖村)에 머물렀다. 이 기간에 집중적으로 학문을 증진하면서, 남명 학맥을 이은 강우학파들과 폭넓은 교류를 가진 시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선조 17년(1584) 41세의 나이에 비로소 봉선전 참봉에 제수되었고, 별과 초시를 거쳐 선조 23년(1590) 10월에 증광시 문과에 월사 이정귀·선원 김상용 등과 함께 갑과로 급제하였다. 송암은 급제한 후 과감하게 스승인 최영경 신원(伸寃)을 주장하는 소를 올려 주위를 놀라게 했다. 한 해 전에 일어났던 기축옥사(己丑獄事)에서 죄 없는 선비들이 수없이 희생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영경은 길삼봉(吉三峰)이라는 무함으로 희생된 남도의 거목이었다. 정철(鄭澈)을 위시한 서인들의 위세에 눌려 당시의 사류(士類)들은 감히 따져 논변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송암의 초개같은 선비 기질이 잘 묻어난다. 1591년에는 직장(直長)에 제수되어, 왜서(倭書)에 답하는 문제로 신묘봉사(辛卯封事)를 올려, 일본과 담판하고 변방을 방비할 계책을 아뢰었다. 부모의 내·외가를 밝히는 『사성강목 四姓綱目』을 완성한 시기도 이 시기였는데, 특이한 이 족보는 오늘날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노의 문장력은 이미 한 세상을 울릴 정도였다. 그가 비안 현감으로 있을 때 요동(遼東) 회자(回咨)의 초고를 고치는 일을 두고 조정에서 적격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유성룡 등 신료들이, “오늘날의 행문(行文)으로서 경상도의 이노(李魯)와 같은 문장은 지금 흔한 글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듯이, 행문뿐만 아니라 사륙문(四六文)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암 이노는 우국충정의 심정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의병 활동은 임진왜란 발발과 거의 동시에 경상우도 의병장들의 창의 기병과 궤를 같이 한다. 특히 그는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의 종사관(從事官)·소모관(召募官)·사저관(私儲官)으로 크게 활약했었다. 그럼에도 김성일의 초유(招諭) 활동에 묻혀 별로 부각되지 않았던 면이 있었지만, 경상우도 의병의 소모 과정이나 군량 확보를 위한 사저관 활약은 적은 것이 아니었다. 임진년 5월 4일에 초유사 김성일이 함양에 이르렀을 때, 이노는 전 현령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의병에 투신했다. 이때 조종도가 몸소 산에 들어가 여러 노씨(盧氏)들에게 창의(倡義)를 권면하였는데, 이는 판서 노진(盧禛)의 맏며느리가 바로 조종도 누이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의병도 인적 네트워크인 연줄을 따르는 경향이 많았는데, 함양 군내의 여러 선비들이 참여하게 된 것 역시 그런 경우가 많았다. 5월 10일 의병진들이 함양을 떠나서 산음(山陰)으로 향하였는데, 초유사(招諭使) 깃발을 앞세워 함양 선비 황윤(黃潤)과 소상진(蘇尙眞)을 군관으로 앞장서게 하고, 조종도와 이노는 후미를 맡았다. 저녁 때 쯤 산음에 이르러 고을 수령인 김낙(金洛)과 함양인 오장(吳長), 이노의 아우 이지(李旨), 단성인 김경근(金景謹)을 만났다. 김낙은 평소에 민심을 얻고 있었으므로 갑작스럽게 군사를 모집하였는데도 8백여 명이나 될 정도였다. 5월 12일 초유사 김성일이 진주로 향하면서 조종도를 의령 가수(宜寧假守)로, 이노를 삼가(三嘉)와 단성(丹城)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아 군졸을 모집케 하였다. 이때 이노가 “군사를 일으킨다는 것은 큰일이므로 마땅히 먼저 규율이 있어야 합니다. 잘못하면 혼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하여, 초유사에게 전령 목패(傳令木牌)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응모한 여러 고을 사람들에게 일일이 목패를 나누어 주어, 열읍(列邑) 호령에 명분이 서게 되었다. 이노가 단성에 이르러 지성으로 초유하니, 이곳 주민들도 창의 기병하였다. 산으로 도망간 단성 현감 이제(李磾)가 숨어 있다가 이런 사실을 전해 듣고 내려왔다. 때를 같이하여 김면이 거창에서, 정인홍이 합천에서 기병하였다. 이미 4월 22일에 기병했던 곽재우와 더불어 원근에서 토적을 부르짖는 향병단(鄕兵團) 수가 많아지자 기세가 올라가고 있었다. 이노는 삼가에서 단성을 거쳐 진주 촉석루에서 김성일과 회합하였다. 이때 곽재우가 김성일의 서신을 보고 달려와, 서로 국사(國事)에 힘쓰다가 죽기로 약속했다. 초계나 의령 땅에 수령(守令)이 없는지라, 명망 있는 자들을 가수(假守)로 삼아 의병을 모으게 했다. 오운은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첫날부터 군량을 공급한 자였다. 김성일과 조종도, 이노 등이 진양에 이르렀을 때, 목사는 산속으로 도망치고 군사와 백성들은 흩어져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조종도와 손을 부여잡은 이노는 김성일에게 사세가 다시 좋아지지 않을 것 같으니 함께 강물에 빠져 죽자고 했다. 김성일은 웃으면서, “한 번 죽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헛되이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장순(張巡)처럼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셋이 술잔을 들어 ‘촉석루중삼장사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김성일이 이노에게 진주는 호남의 보장처로서 적이 반드시 싸우려 들 것이니, 성곽과 참호를 수축하고 무기를 수선하여 죽음으로서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여러 의병들이 군보(軍堡)를 지켜 점차 군세는 확장되고 있었다. 곽재우는 적의 머리를 베어 바치고 공을 기록하는 것이 의리에 맞지 않다는 생각에 참수를 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노의 생각은 달랐다. 선한 본의야 알겠지만, 그렇게 되면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이노의 말을 좇아 기산(岐山) 전투에서 적 60여 급을 베었다. 이노가 합천으로부터 돌아와 여러 장사들이 충의심을 분발하여 힘써 싸우고 있다는 내용을 보고했다. 이튿날 김성일을 좇아 의령, 초계, 합천을 돌아서 거창에 이르렀다. 일행이 수리원(愁離院)에 도착하였을 때 거창에서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지례, 금산, 개령에 있는 왜적이 합세하여 우지(牛旨)를 넘어오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김면이 고개 마루에 진을 치고 있다가 바로 치고 들어갔다. 인읍의 의병들도 모여들어 죽을 힘으로 싸우자 왜적이 퇴각하였다. 이노는 열읍 사저관(私儲官)으로 차임되어, 의령미 680석, 함안미 150석, 산음미 100여 석을 구했다. 산음 수령 김락으로 하여금 김성일 의진의 군량미로 실어 보냈다. 일찍이 이노의 외삼촌인 문덕수가 경상도 관찰사 비위를 그르쳐 구속된 바 있었는데, 당시의 감사가 김수(金睟)였다. 평소 원혐(怨嫌)을 두었던 차에 이번에는 곽재우에게 이노의 사주로 불궤(不軌)를 도모한다고 행재소에 무계(誣啓) 하였다. 당시 김수는 용인에서 크게 패하고 돌아와 산음에 머물렀는데,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리고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누어 붙임으로써 의병들의 노여움을 샀다. 민심이 떠들썩해지자, 그의 죄를 성토하고 격문을 돌려 스스로 달아나게 하려 했다. 이런 때에 곽재우가 김수의 죄를 나열하여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곽재우는 오히려 무함을 받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김성일은 혹시 이 일로 뜻밖의 변고라도 일어날까 곽재우에게 서한을 보내어, 역순(逆順)의 이치로 달래어 무마시켰다. 이노가 김성일을 좇아 거창에 오래도록 머물렀는데, 진양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왜적이 대거 진주로 침입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는 성화같이 진주로 달려와 여러 장수들을 일깨워 더욱 분발하니, 왜적이 밤새 도망하여, 사천․진해․고성 3읍이 회복되었다. 이때 김시민(金時敏),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곽재우(郭再祐) 등이 함께 구원하였다. 조정에서 8월에 김성일을 경상좌도 관찰사로 제수하였으니 우도(右道) 인심이 흉흉하다는 것을 듣고 다시 경상우도 관찰사로 제수하였다. 이에 이노는 지리산에 있다가 의병장 오장(吳長) 등과 함께 내려오고, 조종도가 함양에서 와서 다시 합류했다. 10월에 창원에 주둔한 왜적과 부산․김해의 적이 합세하여 그 무리가 수만이었는데, 장차 진주를 공격하리라는 첩보를 듣고 김성일을 좇아 의령에 도착, 제장들을 독려하여 분전하였다. 일곱 밤낮을 싸워도 왜적들 뜻대로 되지 않자 막사와 시체더미에 불을 지르고 물러갔다. 이때 진양의 세가대족(世家大族)들이 곡식을 지리산에 감추어 두었으므로 환곡 회수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산에서 내려 올 뜻이 없었다. 김성일이 진주에 이르러서 조안(糶案)을 가져다 보고는 크게 노하여 무거운 형률로 다스리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로가 “진주 토호(土豪)들의 습관은 갑자기 고치기 어려우니, 스스로 교화하여 순종하게 하자.”라는 건의를 올렸다. 이에 김성일은 효유(曉諭)하는 방문(榜文)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판관에게 영을 내려 가두어 둔 사람들을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그러자 두 달이 못가서 곡식 수 만여 석이 굴러 들어왔다. 계사년(1593, 선조 26) 정월이 되어, 이로가 아이의 병으로 인해 집으로 들어가 김성일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왜적들의 형세를 보건대 7, 8년 안에는 소탕될 기약이 없는데, 여러 진영 장수들은 단지 속히 하고자 서두르는 마음만 품어, … 군량을 마치 흙 쓰듯 마구 낭비하니, … 영공(令公)의 일행 중에도 형식적으로 꾸미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군관 수십 명을 감하고, 영리(營吏) 10여 명 또한 도태시켜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김성일은 즉각 시행하겠다는 답을 보냈다. 2월에 함양 군수 보고서에, ‘명나라 군사가 정월 7일에 평양의 왜적을 섬멸하여 … 해서(海西)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들도 일시에 도망쳤다.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바야흐로 임진(臨津)에 이르렀으니, 한양(漢陽)은 금세 수복하게 생겼으니, … 호남에 통지해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웃 고을 수령들이 모여 도사(都事)를 하동․곤양․진주․의령 등 열읍의 군량과 필요한 것들을 운반해 오도록 하였는데, 이노는, ‘명나라 군사들이 평양을 회복하였으나 한양에 웅거해 있는 왜적들을 당장은 패배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왜적들이 반드시 군사와 말을 쉬게 한 다음 다시 덤비려고 꾀할 것이니, 명나라 군사가 문경 새재를 넘어 남쪽으로 오는 일은 몇 달 뒤에나 가능할 것이다. 하물며 새재 이하의 여러 성에는 왜적들이 아직도 꽉 차 있다. 설령 명나라 군사가 빨리 온다고 한들 우리가 양곡을 어디에 쌓아 놓고 기다리겠는가? 조정에서도 반드시 본도에 이것을 조처하기를 바랄 수 없을 것이며, 양호(兩湖)에 전적으로 책임지울 것이니, 상황이 변해 가는 것을 보아가면서 잘 조처하는 편이 옳다.’하였다. 그러자 온 좌중이 크게 놀라 너나없이 비난하고 나무랐으나, 김성일만은 홀로 옳다고 여겼다. 김성일이 이노에게 “명나라 군사들의 소식을 염탐할 뿐만 아니라, 농사철이 이미 박두했으니, 종자곡(種子穀)도 아울러 청해 가지고 오라.” 하고 유성룡에게 보낼 서한과 첩보를 내려 주었다. 이노가 여산(礪山)에 이르렀으나 명나라 군사에 관한 정식 보고가 없으므로, 한 군졸을 보내어 김성일에게 보고하기를, “상도(上道)에는 현재 명나라 군사에 관한 기별이 없습니다. 그러니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갈 길을 생각하게 하소서.” 하였다. 김성일이 이 서한을 보고난 뒤 바로 김영남(金穎男)에게 통지하여 서둘지 말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소요하지 않았다. 이노가 말을 달려 직산(稷山)에 도달하니, 직산 수령 박의(朴宜)가 동헌(東軒)에 묵고 있었다. 이때 도체찰사 유성룡은 임진에 머물러 있었고, 부사 김찬(金瓚)은 온양에 머물러 있었다. 직산 아전 조순걸(趙舜傑)과 함께 단기(單騎)로 임진을 향해 가려고 하였다. 수원(水原) 경계에 이르자 부사의 군관 2명이 말을 달려와서는, 용인․죽산․사평에 주둔한 왜적이 수원․금천 지역에 출몰하면서 약탈하는데, 날마다 쉴 새가 없으므로 가지 말라 하였다. 이에 되돌아 와 직산에 이르니, 직산 수령이 “그대의 하인들은 모두 병을 앓고 길은 이렇게 막혔으니, 단신으로 뚫고 나아갈 수 없는 형세이다. 종자곡을 운반하는 한 가지 일은 서한으로 품달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샛길로 가는 공차인(公差人)이 있어서 서애(西厓)에게 올리는 서신을 그 편에 부쳐 보냈다. 또 아산(牙山)으로 가서 바닷길로 갈까 하였지만 이 역시 어려웠다. 호부(戶部) 낭관(郞官)이 조창(漕倉)에 와 머물면서 호서와 호남의 전세(田稅)를 운반하느라 공사(公私)의 선척을 모조리 끌어갔기 때문이다. 이에 온양에서 공주(公州)를 거쳐 부사를 알현하고 종자곡을 옮기는 일을 요청하니, 부사가 도체찰사에게 여쭈어서 조처하겠다고만 하였다. 이노가 다시 간곡하게 여러 차례 간청한 뒤에야 겨우 전라 도사에게 500석을 넘겨받아 전주에 이르러서 운반하고 돌아왔다. 공주에 들렀을 때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를 내방하고 국사의 어려움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3월에 김성일이 함양에 머물러 있으면서 서쪽 소식을 기다리다가 군국(軍國)의 걱정스러운 기미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는 울분과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수문장(守門將) 박경록(朴慶祿)을 보내어 치계(馳啓)했다. 유성룡이 그 첩장(牒狀) 및 서한을 보고는 딱한 생각이 들어 곧바로 주청(奏請)하여 승낙을 얻었다. 그 자리에서 2만 석을 넘겨주라는 공문을 호남 감사에게 보냈다. 그럼에도 호남 감사는 1만 석만 보내 주었다. 다급했던 김성일은 사람을 보내 여러 고을에 나누어 맡기지 말고 남원(南原)과 순천(順天)에 각각 5천 석씩을 운반토록 조치했다. 이때 박이장(朴而章)이 종사관으로서 남원에 가고, 이노는 순천에 파견되었다. 남원 곡식은 함양, 산음, 삼가, 합천 등 고을로 하여금 소와 말로 번갈아 가면서 실어다가 지례, 금산, 개령, 성주, 고령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순천 곡식은 진주, 하동, 곤양, 남해, 사천, 고성, 거제 등의 고을로 하여금 바다로 운반하여 사천, 거제, 고성, 함안, 단성, 진주 지방의 백성들에게 배부하였으니, 때맞추어 씨 뿌릴 수 있게 되었다. 곳곳에 역질(疫疾)이 창궐하였고, 김성일 또한 내상(內傷)에다 감기 기운이 겹쳐 4월 19일부터 두통을 앓기 시작하더니, 점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노(李魯)와 박성(朴惺)이 곁에서 약과 미음을 올렸으나 4월 그믐날에 졸(卒)하고 말았다. 곁을 지키던 이노와 박성은 함께 통곡하고 염하였다. 박성은 고을에 머물러 관 짜는 것을 감독하고, 이노는 지리산 밑에 들어가서 임시로 장례지낼 묘혈 파는 일을 감독했다. 3일 뒤에 박성이 단성 현감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관을 호송하여 그날로 장사를 마쳤다. 그리고는 세 사람이 모두 손을 잡고 목 놓아 통곡한 다음 흩어졌다. 이노는 덕산으로 들어갔다. 이해 6월 그믐날에 진양이 함락되고 말았다. 당시 진주성에 들어 간 관군과 의병은 10만 왜적과 맞닥뜨려 열흘간의 공방전을 펼치며 항전하였으나 끝내 성을 보존하지 못하였다. 임란 중에 송암 이노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격문을 보내고 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에게 서계(書啓)를 보내어 화의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그 사이에 이노는 형조좌랑 겸 기주관·거창 가수를 역임하였다. 1594년 3월에 아우의 상을 당하고, 7월에 비안현감에 제수되었다가 11월에 정언을 거쳐 다시 비안현감이 되었다. 1596년 봄에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였으나 12월에 다시 경상우도 도사가 되었다. 1597년 3월에 『용사일기』를 저술하였다. 9월에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별장으로 창원 등지에서 활약했다. 이때 이원익에게 서신을 내어 당시 지배층이 사병을 가지고 개인적인 원한을 갚는 데 급급하여 관군을 쇠약하게 만들고 적을 토벌하지 못하는 폐단을 지적하여 시정을 종용하였다. 선조 31년(1598) 1월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어 서울로 가던 중 금산의 객관에서 졸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55세였다. 순조 2년(1802)에 의령의 경산리에 경덕사(景德祠)가 건립되고 그의 위판이 봉안되었는데, 이는 후일 낙산서원(洛山書院)이 되었다. 순조 17년(1817)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의(貞義)이다. 청백수절(淸白守節)함이 정(貞)이요, 견의능충(見義能忠)함이 의(義)란 뜻을 담은 시호였다. 이 송암이 평생토록 실천하고 몸소 지향한 바를 잘 나타낸 시호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참으로 정인(貞人)이었고, 의인(義人)이었다. 저서로는 <사성강목(四姓綱目)> <용사일기(龍蛇日記)> <문수지(文殊志)> <송암문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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