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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1절-3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대적이라 할 때 말(言)의 대적, 인간 대 인간간의 대적, 신앙사상의 대적 등이 있는데, 자기 앞에 대적이 나타났을 때 내가 누구의 대적이 되어 있느냐? ‘저 자가 나의 대적이다’ 하기 전에 ‘내가 누구의 대적이 되어 있느냐?’ 그것부터 먼저 심사를 하라.
다른 사람이 나의 대적이기 이전에 내가 하나님의 대적이 될 수도 있는 거다. 내가 비진리이거나 육의 생각을 가졌다면 내가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거다. 이렇게 되면 상대편이 혹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쪽 편에 서서 나를 공격할 수도 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런 걸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내가 하나님의 대적이 안 되려면 내 고집에다 하나님을 끌어와야 되느냐, 내가 하나님의 의사, 뜻, 하나님의 소원 목적으로 가야 되느냐? 내가 하나님 편으로 가야 한다. 이러면 내가 하나님 편이고 하나님이 내 편이고. 이렇다면 내 뒤에는 하나님이 배경으로 되어 있는 것이니 상대가 나를 단순한 인간으로 생각을 하고 헐뜯어도 그는 내 배후에 있는 하나님과 대적이 된 상태가 되는 거다.
진리신앙을 가지지 못하고 비진리적 세상으로 흐르는, 육적 세상으로 흐르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진리신앙을 가진 나를 대적을 한다면 이것은 단순히 인간 대 인간으로 나의 대적이냐, 곧 하나님의 대적이냐? 하나님의 대적이다.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상대가 이런 상태로 나와 하나님의 대적이 되어있다면 그 사람을 붙잡고 말다툼을 하지 말고 내버려 둬라. 하나님은 알아서 하신다. 그걸 붙잡고 왈가왈부하면 자칫 잘못하면 그만 인간의 감정이 솟아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사단 마귀의 시험에 걸려들고 만다.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다윗을 치는 자가 많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여기서도 다윗의 신앙사상이 어느 편에 서 있는가? 다윗이 하나님 편에 서 있다면 일어나서 다윗을 치는 자는 하나님을 치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성도 다윗을 향해서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네 하나님은 너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다윗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만 다윗은 하나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이들의 이 말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이요, 하나님 무시는 곧 진리교회 무시요, 진리의 성도를 무시하는 소리요, 사람을 깔보는 소리이기 때문에 악한 자들이다. 남에게 무슨 악한 짓을 해서가 아니라 비진리적 사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악한 자들이다.
그 악한 자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너희들이 말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우리의 힘으로 이렇게 부요하게 잘 지내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방 불신자들이 이런 소리를 잘 한다. ‘너희들은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어디 있다고 자꾸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렵고 고통 중에 있는데 왜 안 도와주느냐? 너희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하나님이 너희들의 아버지인데 왜 안 도와주느냐’ 이런 말들을 한다.
말인즉 맞는 말이다. 말 자체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속마음이 영 주격으로 그렇게 말을 하는 건지, 육 주격으로 그렇게 말을 하는 건지? 육의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말을 하는 건지, 영의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말을 하는 건지? 육의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말을 하기 때문에 그 말은 악한 말이 돼버린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 앞에 바로 하려다보니 환난을 만났다. 환난도 하나님 앞에 바로 하려다보니 환난이 오는 경우도 있고, 이런 경우는 주로 타로부터 많이 되는 거다. 또 자기가 잘못해서 하나님께서 재앙으로 주는 환난이 있다. 죽는 것도 악인이 형벌을 받아서 죽는 게 있고, 또 의인이 순교를 당해서 죽는 경우도 있다.
이미 말했지만 다윗은 인간의 감정대로 한다면 얼마든지 사울 왕을 죽일 기회도 있었다. 아들 압살롬도 얼마든지 죽일 수가 있다. 주님께서도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만능의 능력을 가지고,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당신에게 환난 핍박을 주고 고통을 주는 자들을 한꺼번에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의 구원을 위해서 그런 능력을 쓰면 안 되기 때문에, 말하자면 환난 핍박자들을 구원을 시키자면 예수님께서는 죽으셔야만 했던 것이다. 자기에게 환난 핍박을 주는 그 자들을 구원을 하려면 예수 당신이 죽어야만 했었다 그 말이다.
예수 당신이 안 죽고도 그들을 살릴 수도 있다.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구원적인 면으로 볼 때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지공법에 만족을 드린 의인이 죽어야만 했었다. 그리고 우리가 일반 이치적으로 볼 때도 사람을 죄에서 건져내서 살리자면 살리고자 하는 그 자가 고통을 느껴야 하고 그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이를테면 남을 도와주려면 자기에게 오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도와줄 수가 없는 거다. 그런 것처럼 죽은 자를 살리려면 기본구원 면에서 예수 당신이 죽어야만 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런 속사정도 모르는 자들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비꼬는 말을 했느냐? ‘네가 능력이 많다면 스스로 구원해봐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믿을게.’ 자신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주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인간 편에서는 예수님의 속사정을 모르니까 얼마든지 이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교회 인도자들이 하는 말이 ‘네가 예수님을 오래 믿어도 부자가 안 되는 것은 네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라고 한다든지, ‘예수 믿는 사람이 너무 가난하면 전도가 안 된다’ 하는 등의 말이 누구의 말 같으냐? 주님의 말 같으냐, 마귀의 말 같으냐? 마귀의 말이다.
예수님께 그런 식으로 ‘만능의 능력자야, 예수 당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가 믿을게’ 한다거나 ‘예수 당신은 너무 가난하다. 부자가 돼 봐라. 그러면 믿을게. 네가 부자가 돼야 전도가 될 게 아니냐?’ 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실까? ‘믿음이 작은 자여’ 그러겠느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러겠느냐? 예수님께 그런 식으로 말을 한다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하는 소리와 똑같은 거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이어든 성경을 가지고 세상에서 이용해먹고 부자로 살아라’ 한다면 이게 누구의 말이냐? 사단의 말이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사단의 지배하에 놓여있다. 이들은 주님의 비구원적인 통치를 받고 있다. 그러면 사단의 지배하에 놓여있는 이들의 소원성이 뭐냐? 세상 것을 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목사님이 성경을 가지고 ‘구하라. 세상에서 부자 되라’ 한다면 이게 누구의 말이냐? 마귀의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하나님의 자녀이어든 세상에서 부자로 살아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안 죽고 영웅이 된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땅의 운동을 해서 종교계에서 영웅이 되라.’ 뭘 가지고 그렇게 되라는 거냐? 성경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거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게 얼마나 많으냐? 그렇게 해서 땅의 운동으로 영웅이 된 목사를 목회 성공했다고 한다.
교회에서 ‘네가 부자가 안 되는 것은 안 구해서 그렇다’ 이런 말을 흔히 하는데, 우리 주님은 성도들이 안 구해도 속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알고 계실까? 구해야만이 아는 거냐? 안 구해도 다 아신다면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알고 계실까? 다 알고 계신다면 그 면에 대해서 구하지 않아도 주시지 않을까? 주님은 우리의 육신의 상태와 영적인 상태를 다 아신다. 그렇다면 안 구해도 주시느냐?
‘구한다. 안 구한다’는 말의 의미가 뭐냐? 영적인 상태가 빈곤한 사람이 성경은 안 보고 그냥 기도로 ‘나를 영적인 면에서 풍부하게 해 주옵소서’ 하는 게 구하는 거냐, 그 기도는 한 번도 안 해도 영적 갈급성을 메꿀 수 있는 성경을 보면 되는 거냐? 성경을 보는 그 마음 자체가 구하는 거다. 자기의 빈곤상태를 알고 ‘진리의 말씀을 내가 들어야 되겠다’ 하는 것이 구하는 행동이 되는 거다. 그런 면으로 마음이 치닫는 사람은 ‘영직인 면에서 충만하게 해 주옵소서’ 그런 기도를 한 번도 안 해도 그 사람은 충만성으로 채워져 간다.
하나님께서 ‘줄 게’ 한다면 나는 주는 쪽으로 달려가야 하느냐, 엄한 데로 달려가야 하느냐? 마음과 함께 행동이 함께 나타나는 그게 구함이다. 말만 하고 생각과 행동은 따로 들어있고 하면 소용이 없다. 돈을 벌려면 돈이 없는 곳에 가서 두드려야 하는 거냐, 돈이 있는 곳에 가서 두드려야 하는 거냐? 돈이 있는 곳에 가서 두드려야 한다. 이게 이치다. 또 일을 하려면 일이 있는 곳에 가서 일자리를 구해야지 일이 없는 곳에 가서 일을 구하면 일이 있겠느냐? 이치를 말하는 거다. 우리가 살면서 손으로 활동을 하는 이유가 뭐냐? 마음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움직이고 돌아가는 거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자기에게 써먹지 못할 해석은 아무 소용이 없다. 성경 안에는 나에게 써먹을 수 있는 무한한 이치가 들어있다. 쓸데없는 해석을 한다거나 성경의 역사만을 말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우리가 성경의 역사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 역사 속에는 우리의 구원이치 구원도리가 들어있으니 이게 중요한 것이다.
신학교에서 역사적으로 죽 가르쳐서 신학생들이 그걸 배워서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성경의 역사만 가르쳐서 교인들이 역사만 알고서 전도를 할 때도 역사만 가르쳐 줘서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그 역사를 배우려고 몰려오게 된다면 배우고 안 그 성경의 역사가 현실에서 이룰구원에 연관을 지어서 써먹을 게 뭐가 있느냐?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되면 성경의 역사를 아는 그것은 하나의 종교적 지식밖에 안 되는 거다.
‘네가 교회에 다녀도 부자가 안 된 것은 안 구해서 그렇다’ 한다면 이렇게 말을 하는 저의 아버지가 누군가 하면 마귀라. 마귀가 하는 소리와 똑같다 그 말이다. 성경구절을 들어서 자꾸 육에 갖다 붙이는 것은 분명히 제 아비가 마귀다. 성경에서 말을 하는 거다.
구약에 보면 한나를 격동시키는 브닌나가 있었다. 그런 것처럼 교회성도가 사람으로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때 어느 누가 옆에서 쿡쿡 찌르고 격동을 시킨다면 어려운 상황에 빠진 사람에게서 어떤 기도가 나올까?
내가 지금 최악의 어려운 상황에 빠져서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옆에서 육적인 개념을 가지고 푹푹 쑤시고 약을 잔뜩 올린다면 내 속에서 뭐라고 기도가 나올까? 첫째, ‘주여, 잡귀신을 불러서 저놈들을 다 잡아가게 만드소서.’ 두 번째는 ‘주여, 저놈들을 벼락불로 확 태워버리소서.’ 세 번째는 ‘주여, 당신은 나를 도우사 나를 세상에서 최고로 유명하게 되도록 만들어서 그들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게 해서 나로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네 번째는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 어느 것이 진짜 기도 같으냐? 어느 거냐? 네 번째냐? 네 번째는 뭔가가 기운이 푹 죽는 것 같고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을 줘서 저 놈들이 내 앞에서 팍 고꾸라지게 만들고 그들이 예수 믿게 하소서’ 이런 멋있는 스릴이 있는 게 좋지 않으냐?
브닌나가 한나 옆에서 한나를 격동을 시켰다. ‘너는 여자가 되어서 아기도 못 낳느냐?’ 이 소리를 들으면 여자로서 속이 되게 상할 거다. 한나가 그 소리를 듣고 저녁마다 남편보고 ‘왜 아들을 안 주느냐’ 하며 쥐어뜯고, 그러면 남편은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냐? 내가 하나님이냐’ 할 거고. 그런데 한나는 그러지를 않고 외부로부터 오는 격동 속에서 그 격동성이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기도가 나오고 있다. 그 참 멋있다.
우리는 격동을 받되 바로 받을 줄 알아야 한다. 안 믿는 물질부자가 있는데 예수 믿는 나를 보고 “‘저거는 진리 진리’ 하면서도 맨 가난에 쪼들리고, 자식은 우글거리고” 한다면 그런 말에 열을 올리지 않고 ‘세상물질은 너희들이 다 가져라. 나는 하나님한테 영원한 부요성을 구하겠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영인성장 면에 합격이 되는 자녀들을 길러놓겠다’ 한다면 이게 얼마나 멋있는 격동성이냐? 이런 신앙은 하나님 앞으로 마음을 모으는 거다. 자기가 잘했던 잘못했던 거기에서 깨닫는 사람은 그 격동성이 하나님 앞에 신앙사상으로 바로 솟아나는 거다.
이런 게 있을 수 있다. 목사님들의 세계에서 자기 교회에 사람도 안 오고 할 때 이 진리를 들으면 ‘번쩍’ 한다. 이 진리를 전하면 교인들이 막 몰려올 것 같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이 진리를 전했지만 교인들이 몰려오기는 뭘 몰려오느냐? 그러면 또 풀이 죽어버린다. 이게 뭐냐? 잘못된 격동이다.
우리는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게 뭘로 일어나느냐’ 하는 것을 잘 심사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진짜 자기가 아니라 거짓 자기가 자기 속에서 일어나서 그것이 자기의 주격이 되어서 살 수가 있다. 이러면 바른 신앙으로 못 들어가고 힘들어진다. 이러면 신앙은 하지만 마음이 고통스러워진다.
선지 사도들과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로지 신앙으로만 나갈 때 환난 핍박을 받았는데 이럴 때 그들의 마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실한 신앙으로 살려고 하는 그 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표면적인 상황만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판단을 하고 놀림적으로 말을 한다면 이거는 하나님 앞에 대적자다.
‘쎌라.’ ‘쎌라’는 좋은 내용에도 나오고, 나쁜 내용에도 나오고 있다. 나쁜 내용으로 나오고 있을 때는 악한 자들을 경멸하는 마음으로 ‘그 놈들’ 하는 뜻이다. 이럴 때 ‘그 놈들’ 하는 이건 하나님 앞에서는 욕이 아니다. 영적인 면에서 영원히 망할 짓을 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면서 ‘그 놈들’ 하는 것은 바른 소리다. 같은 의미로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아’ 한 것이니, 이건 바른 소리다.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염두에 두고 구원운동을 하고 있는 일에 대적을 하는 그들을 볼 때 ‘독사의 자식들아’ 이게 나오는 거다. ‘쎌라’도 마찬가지다.
또 이 ‘쎌라’를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라면 즐겁고 감사해서 복을 받으라는 심정으로 ‘좋다’ 하는 감정이 들어있는 ‘쎌라’가 된다. 이는 마치 판소리를 할 때 옆에서 북을 치면서 ‘얼쑤’ 하는 그런 느낌, 그런 기쁨의 말이 된다. 교인들도 ‘아멘’ 하는 게 있는데, 이것도 그런 의미를 가진 거다. 진리의 말씀이 자기에게 와서 박힐 때 ‘아멘’ 하게 되는 것은 자동적이다.
3절: ‘주는 나의 방패시요.’ 방패는 전쟁터에서 적으로부터 날아오는 칼날이나 창이나 화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이 방패역할을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째서 하나님께서 다윗이 죽지 않게 방패가 되어서 칼이나 화살, 즉 악한 자들의 사상을 탁 탁 막아주는 것이냐? 왜 다윗을 위하여 방패역할을 하시는 것일까? 다윗이 평소에 어떻게 살았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방패역할을 해 주시겠느냐? 우리는 다윗이 평소에 가졌던 신앙을 전제로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다윗은 어릴 적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했고, 어린 몸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골리앗 장군을 향하여 나아갔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는 십 대 소년의 어린 다윗의 모습을 생각을 해봐라. 그 장면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마음이 뜨겁지 않겠느냐? 어떻게 느껴지느냐? 하나님께서 만능의 능력을 놔뒀다가 어디에 쓰겠느냐?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런 장면은 못 느낀다. 신앙의 사상이라야 만이 이게 믿어지고, 이게 느껴지고, 이게 보이는 거다.
물론 하나님께서 쓰실 분은 따로 있겠지만 가르치는 내 입장에서 보면 오늘날 이 세상에 참된 주의 종들이 없다고 느껴진다. 정말 하나님의 의중에 적중하게 들어가는 사상을 보기가 참 힘들다. 말은 진리라고 하면서 그 마음의 진함이 엷다거나 한 장면을 많이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진리의 성도들은 생활면에 부자가 별로 없다. 그러니까 생활면에 쪼들리면서도 진리의 길을 가는 거다. 그런데 생활이 저만하면 뭔가가 진리 쪽으로 달음박질을 해야 할 텐데 보면 그것이 아닌 사람이 많다. 또 보면 진리사상으로 들어왔다가 또 나가고, 또 들어왔다가 또 나가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보면 ‘저래서는 앞으로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헤치고 나갈까’ 하는 것도 있다. 생활면은 과학이 발전하면 아무래도 옛날보다 살기는 편할 거다. 그런데 말씀에 대한 갈급성 면에서는 약한 면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정도로 믿다가 안 굶고 죄 안 짓고 요만요만하게 살다 가련다’ 하는 그런 모습들도 보인다. 이건 힘이 없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를 했듯이 우리는 개인적으로 출생을 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늘 진리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떨어지면 안 된다. 떨어지면 어느 귀신이 물고 갈 런지 모른다. 이렇게 되면 재산도 재산이지만 사람이 망가질 수가 있다. 그 때는 어떻게 할 거냐?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얼마나 쫓아다녔느냐? 그 때 다윗이 사울 왕을 원수로 삼았다면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원수로 여겨서 죽이지를 않고 계속 사울을 피하며 도망을 다녔다. 그러니 제 삼자가 볼 때 그러는 다윗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보이겠느냐? 다윗이 ‘어이 좋다’ 노래를 부르며 다녔겠느냐? 잠자리도 불편하고, 모든 의식주가 불편하다.
사울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피해 다니는 다윗의 그 심정을 사울 왕이 알까? 전혀 모른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그 중심을 다 아신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오는 고통을 달게 받는 다윗의 마음중심을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는다. 이게 십자가를 지는 게 아니겠느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왕으로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셨다. 그러니 다윗은 자신에게 방패역할을 해주신 여호와가 신앙 인격적으로 믿어지는 거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다윗은 이 하나님이 믿어졌기 때문에, 그 역사를 체험했기 때문에 이 기도가 나오는 거다.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윗을 볼 때 다윗이 어느 면을 염두에 두고 ‘여호와는 나의 방패’라고 했을까? 1. 자기의 모든 재산을 보호해 주심에 방패역할을 잘 해 주셨다는 뜻으로 ‘나의 방패시니이다’ 했다? 2. 다윗 자기의 육신생명을 안 죽도록 보호해 주셨기 때문에 그 소리를 했다? 3. 진리의 신앙을 따라가는 그 마음 그 사상 그 사상 그 정신이 죽지 않도록,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기 때문에 그 소리를 했다? 자기의 마음과 생각이 빼앗기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서 방패역할을 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해석하기를 다윗의 육신의 생명이 안 빼앗기도록 방패역할을 해 주셔서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하고 있다. 이건 본뜻이 아니다. 다윗의 육신의 생명을 지켜주신 것은 진리신앙을 따라 살려는 다윗의 그 마음을 지켜주시기 위해 방편적으로 그냥 따라온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