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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흥학계와 장학사업
우리 마전파 정씨는 이곳 새능에 들어와 살아오면서 삭령공 할아버지를 비롯해 도정공, 감사공, 간성공, 황산공, 충장공, 청도공, 초당공, 죽당공할아버지 등 많은 인재를 배출시켰다. 그러면 이들 할아버지들은 당시 어떻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서 글을 배우셨을까?
조선 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중앙의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을 비롯해 지방에는 향교(鄕校) 및 서원(書院), 그리고 서당(書堂)이 있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에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 격의 유학교육기관이다. 학생 총 정원은 2백명으로, 이중 1백명은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여 전국에서 선발된 탁월한 유생들을 입학시켰고, 남어지 1백명은 상재생(上齋生)이라하여 생원과 진사 중에서 선발하였다(참고 1).
우리 선조 중 성균관 출신으로는 문헌상 죽당공 할아버지 한 분 밖에 안계시다.
죽당공 할아버지는 1657년(효종 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상재생(上齋生)으로 선발되어 성균관장의(城均館掌議;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기구인 재회/齋會의 임원, 지금의 학생회 임원)가 되었다(참고 2).
다음 향교(鄕校)는 성균관의 하급 관학(官學)으로서 지방에 설치되어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문묘(文廟), 명륜당(明倫堂) 및 중국. 조선의 선철(先哲). 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무(東廡).서무(西廡)와 동재(東齋).서재(西齋)가 있어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庶類)를 두었다(참고 3).
당시 연천군에는 연천향교, 삭령향교, 마전향교 등 3개가 있었다. 그중 우리 지역에는 미산면(嵋山面) 마전리(麻田里)에 '마전향교(麻田鄕校)'가 있었으나 지금은 건물의 자취조차 발견할 수 없고 문헌이나 다른 기록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참고 3).
따라서 당시 우리 할아버지들이 어느 향교에서 누구에게 공부를 하셨는지는 더욱 알 수 없다. 다만 삭령공 할아버지와 도정공 할아버지께서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인(門人)이라는 문헌상의 기록으로 보아 사림파(士林派)에 속하였음은 짐작 할 수 있다(참고 4).
이는 삭령공 할아버지의 비문을 성세창(成世昌, 1481-1548), 도정공 할아버지의 비문을 김귀영(金貴榮,1520-1593)이 쓴것으로 봐서도 알 수 있다. 이들이 모두 김종직의 학문을 이어받은 사림(士林) 학통이기 때문이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길재(吉再,1387-1388)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숙자(金淑滋,1389-2456)의 아들로 일찌기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워 사림파의 전통에서 성장했다.
'사림(士林)'이란 고려말. 조선 초 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두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은 15세기 말엽에 와서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니는 정치세력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본래 지방에 근거를 가지고 있는 중소지주 출신의 지식인으로, 중앙의 정계에 진출하기 보다는 지방에서 유향소(留鄕所)(참고 5)를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 해 왔다. 학문적으로는 사장(詞章) 보다는 경학(經學)을 중시하였고, 경학의 기본정신을 송대 신유학 가운데에서도 성리학(性理學)에서 구하였다.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김숙자(金淑滋)는 그의 학문을 아들 김종직(金宗直)에게 전하고 김종직은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면서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계승하는 기틀을 다졌다.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도 바로 이때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삭령공, 도정공 할아버지는 주계군에게서 배웠다.
주계군은 1478년(성종 9) 주계부정(朱溪副正)에 제수되어 성종의 신임을 받았으나, 임사홍(任士洪,1445-1506)의 무고로 장단. 이천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뒤 1487년 종친과시강경사(宗親科試講經史)에서 장원급제하여 정의대부(正議大夫)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류되어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우리 삭령공, 도정공 할아버지들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셨다.
삭령공, 도정공, 감사공, 간성공 등 우리 할아버지들이 벼슬에 오르신것은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이다.
반정 이후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정광필(鄭光弼,1462-1538)을 비롯한 유림들의 계(啓)에 의하여 1517년(중정 12)에 스승의 억울함이 신원(伸寃)되고 일종의 천거제인 현량과(賢良科)가 실시될 때이다(참고 6).
이때 이 현량과를 통해 자기 세력을 중앙으로 크게 진출시키고, 지방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주자가 증손(增損)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군현(郡縣) 마다 시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훈신, 척신의 강한 반발로 또 다시 사화가 발생하여 그 세력이 크게 꺾였다.
이후 지방에서 서원(書院)과 향약(鄕約)을 토대로 기반을 강화하는데 주력하다가, 16세기 후반 선조(宣祖)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정치가 일단 종식되면서 사림 출신들이 중앙에 활발하게 진출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에는 척신정치의 척결문제를 둘러싸고 선배관인과 후배관인이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대립되었는데, 이때 우리 문중은 동인편에 서 있었다.
그러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光海君)이 물러나고 인목대비(仁穆大妃)가 복위 되는 계기로 17세기 후반 까지 학연을 기반으로한 서인. 남인을 중심으로 붕당정치의 질서를 수립하였다.
이때 우리 큰집 황산공 자손들은 남인(南人)의 거두(巨頭) 미수 허목의 학통을 따라 남인의 계열에 섰으나, 작은집 충장공 자손들은 노론(老論)의 거두 우암(尤庵) 송시열의 학통을 따라 노론(서인)의 계열에 섰다.
이것이 새능 큰집과 광동 작은 집이 서로 대립되게된 시초이다.
이는 황산공, 청도공 할아버지의 비문을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짓고, 충장공, 수사공 할아버지 비문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또 청도공 할머니 기(奇)씨가 선조 때 영의정에 증직된 아버지 기응세(奇應世,1539-1585)와 어머니 우찬성 임백령(林百齡)의 딸의 딸이며, 영의정 기자헌(奇資獻, 1567-1624)은 할머니와 남매 사이였다. 이에 반해 수사공 흔(昕, 충장공 아들)할아버지의 사위는 송시염(宋時琰)으로 우암 송시열과 4촌 사이였다.
그때 황상공 자손들은 미수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니, 화악(華岳), 동악(東岳), 태악(泰岳) 할아버지들이 바로 그분들이시다.
1690년(숙종 16) 미수 문인들은 마전현 군내면(麻田縣 郡內面; 지금의 미산면 동이리)에 미수서원(眉叟書院, 지금의 미강서원)을 세웠으며, 1693년(숙종 19) 임금으로 부터 '嵋江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았다(참고 7).
그뒤 1871년(고종 8) 서원은 철폐령에 따라 강단과 재실만 남고 훼철(毁撤)되었다.
그때 새능에 서당(書堂)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 된다. 우리가 어렸을 때 새능에서 광동으로 넘어가는 오른 쪽 골짜기를 '초당골'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그러나 지금 그 자리가 어디인지는 확인 할 수 없다. 다만 화(華)자, 악(岳)자 할아버지의 호(號)가 '초당공(草堂公)'인 것으로 보아 이를 추측할 수 있다. 서당교육의 목적은 수학하는 학생들로 하여금 상급학교 즉 향교나 서원으로 진학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데 있었다.
서당이 철폐된 뒤 1898년(광무 2) 유림에서는 단(壇)을 설치하고 '유지계(維持契)'를 조직해 단소(壇所)를 유지 했으나 1937년 대동아전쟁 이후 일제의 학대와 박해가 심해져 단소를 유지할수 없게 됐다.
이때 이 단소의 책임자(都總)가 우리 황산공 문중의 미좌(嵋左) 할아버지시였다. 미좌 할아버지는 당시 서당(書堂) 훈장(訓長)으로 문중과 지역 인재를양성하셨다.
이때 서당은 미좌 할아버지 사랑채였으며, 초당은 독재이 고개 넘어가는 작은비스메댁 건너편에 있었다.
'서당'은 지방의 사학(私學)으로 지방 자제들을 향교나 사학(四學)으로 진학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종의 '글방'이었다. 당시 서당은 다음과 같은 네 종류의 경영체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즉 첫째는 훈장 자신이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혹은 취미나 사업으로 서당을 경영하는 경우,둘째는 마을에서 가세가 비교적 넉넉한 이가 서당을 세워 자기의 자녀를 교육시키는 동시에 친지의 자제를 수용하여 가르치는 경우, 셋째는 마을의 유지 몇 사람이 조합하여 훈장을 초빙하고 장소를 마련하여 교육시키는 경우, 넷째는 마을 전체가 한 조합을만들어 서당을 설치하는 경우이다(참고 8).
1. 서당과 흥학계의 설립
우리 문중의 경우는 둘째의 경우로 특히 문중의 자제를 교육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문중에서는 서당의 운영을 위해 계(契)를 조직해 토지를 마련했다. 이것이 바로 '흥학계(興學契)'이다. 그러나 당시 정관 문서는 한국전쟁(6.25) 때 소실(消失)되고 매입한 토지문권만 남아 있어 1988년 1월 5일 '경주정씨황산공파흥학계'라 이름을 개칭하고, 정관을 다시 만들어 현재 보관하고 있다.
정관 제5조에 보면 "본 계원은 재산을 육성하여 자손들의 교육사업에 부여한다"라고 하여 이 계가 장학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오늘 날의 장학사업의 일환으로 우리 문중에서는 일찍이 교육사업에 힘을 기우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계원(契員)이 남북으로 흩어지고 또 사망하여 장학사업은 중단되었다.
현재(2017. 9. 16) 흥학계 자산은 토지와 현금. 예금인데 그 현황은 다음과 같다.
1) 토지
황산공 흥학계 재산목록 (등록번호 115111-3140074)
현재 이 토지는 정곡 명의로 되어 있음(자료 22-11,1988.4.5
임시총회). 토지 지번 및 면적은 다음과 같다.
부동산목록 (등록번호 115111-3140074)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740번지, 논(畓) 177평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741번지, 대(垈) 170평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743번지, 밭(田) 1,959평
2) 자금
정기예금 (ELS 특정신탁) 60,000,000원
보통예금 2,997,846원
총 62,997,846원이다.
3) 계원명단
흥학계 명단 중 이미 사망하였거나 현재 행방불명인 사람은 그 후손의
이름으로 바꾸기로 하고(자료 12-29, 2000.7.26 제38차 정기총
회), 다음과 같이 계원의 이름을 바꾸어 올렸다.
원래 등기에 등재된 명단(27명)
鄭蘭植, 鄭 黙, 鄭 烜, 鄭 炁, 鄭台植, 鄭 燮, 鄭 燧, 鄭 㷞,
鄭 熠, 鄭 烋, 鄭 堅, 鄭豪孫, 鄭 谷, 鄭 堉, 鄭 喆, 鄭 煌,
鄭學俊, 鄭 煥, 鄭大成, 鄭錫龍, 鄭泰植, 鄭 熚, 鄭福興, 鄭 堡,
鄭琮植, 鄭璡植, 鄭尙活.
새로 등기에 올린 명단 (27명)
鄭日元, 鄭遇弼, 鄭遇敏, 鄭 球, 鄭斗元, 鄭相元, 鄭遇常, 鄭遇萬, 鄭遇
漆, 鄭春培, 鄭遇彦, 鄭遇燮, 鄭 頳, 鄭 燦, 鄭遇悅, 鄭遇貞, 鄭明元, 鄭
遇龍, 鄭鳳燮, 鄭遇永, 鄭 坪, 鄭 谷, 鄭 炅, 鄭遇周, 鄭元培, 鄭元奎,
鄭遇鳳.
흥학계 자금은 1억원이 적립될 때 까지 사용하지 않고 1억원이 넘으면 그 때 장학금으로 지급하기로 했다.
2. 장학금 지급(1982년)
우리 황산공 종중에서 처음으로 장학금을 지급한 것은 1982년 정우영 회장 당시 학자금 보조로 중.고, 대학 입학생에게 수여되었는데, 이것이 우리 황산공종중의 첫 장학금 수였다. 이때 기금은 신정동 토지 보상금으로 마련되었으며, 그 이듬해 중단되었다. 이때 장학금 수여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1) 대학교 입학생(7명)
성명 대학 및 학과 지급일자
정정원(鄭貞元) 경기대(수원) 건축학과 1982.3.13
정화원(鄭和元) 서울시립대 환경공학과 1982.3.13
정근원(鄭根元) 명지대학 전자공학과 1982.3.13
정우택(鄭遇澤)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1982.3.13
정우기(鄭遇氣) 연세대학교 전자공학과 1982.3.13
정우갑(鄭遇甲) 청주대학교 전자공학과 1982.3.13
정석원(鄭錫元)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 1982.3.13
2) 고등하교입학생(5명)
정동원(鄭東元) 대일고등학교 1982.3.13
정보원(鄭寶元) 중경고등학교 1982.3.13
정준원(鄭俊元) 1982.3.13
정성원(鄭成元) 경민여자상업고등하교 1982.3.13
정우복(鄭遇福) 배재고등학교 1982.3.13
3) 중학교입학생(8명)
정혜정(鄭惠貞) 서문여자중학교 1982.3.13
정석원(鄭石元) 평택동중학교 1982.3.13
정효진(鄭孝鎭) 숭인여자중학교 1982.3.13
정현주(鄭鉉珠) 장충여자중학교 1982.3.13
정미수(鄭美秀) 영등포여자중학교 1982.3.13
정명화(鄭明華) 보영여자중학교 1982.3.13
정영원(鄭永元) 군남중학교 1982.3.13
정기원(鄭基元) 영남중학교 1982.3.13
3. 차기 종손 정병주(鄭炳柱) 등록금 지급
1984년 4월 2일, 황산공종중회(회장 장)에서는 22차 정기총회에서 지난 지급하던 장학금 지급을 중단하고 차기 종손 정병주에게만 대학 입학금 및 대학 졸업할 때 까지 등록금을 지급할 것을 의 결하고 이를 수행하였다.
<참고 1>
<역사탐방기> 제2집, 경동14회 동우회, PP.137-45,2015
조동원, <성균관대학교 약사>
<참고 2>
경주정씨중앙종친회, <경주정씨대관>, '정동악', P.649, 2010
경주정씨황산공종중, <황산공파보>, P.30, 1991
<참고 3>
연천군지편찬위원회, <연천군지>, '향교', PP. 558-9,1987
<참고 4>
경주정씨중앙종친회, <경주정씨대관>, '정세호','정세현',PP.527-
533, 2010
경주정씨황산공문중, <마전파황산공파보>, PP.23-26, 1991
<참고 5>
<지식백과>, 인터넷 naver '유향소(留鄕所)'
조선 전기에 악질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기 위해 지방의 품관들이 조직한 자치기구. 그 밖에 당시에 자치기구로 '향약소', '사마소' 등이 있었다.
'향약소(鄕約所)' 일종의 지방 자치기구로서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常規), 예속상규(禮俗常規), 환난 상휼(患難相恤) 등 권선징악(勸善懲惡)과 상부상조(相扶相助)를 목적으로 만든 자치규약이 있었다.
'사마소(司馬所)'는 16세기 초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인 사마시(司馬試) 출신의 젊은 유림들이, 그 당시 자치기관으로서 수령의 자문기관 노릇을 한 훈구파의 유향소(留鄕所)에 대항, 향권을 주도하기 위해 만든 자치협의 기구이다.
<참고 6>
<두산백과> 인터넷 Naver 검색
1519년(중종 14) 조광조(趙光祖)를 선두로 이희민(李希閔), 신용개(申用漑) 등의 건의에 따라 시행된 관리 등용제도다.
당시 인재등용 관문인 과거제도가 유생들에게 성리학 본질에 대한 탐구 보다는 사장(司章)만을 일삼게한다는 본질적인 문제와 함께 과거제 시행과정에서 폐단이 발생되고, 참다운 인재 선발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숨은 인재를 발탁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기 된것이다.
<참고 7>
연천군지편찬위원회, <연천군지>, '5.서원, 2) 미수서원', P. 561, 1987
마전읍지(麻田邑誌);
"문정공 허목의 서원이 군남 강상리에 잌ㅆ었는데, 1690년(숙종 16, 경오)에 건립되었고 , 1693년(숙종 19, 계유)에 사액된 것이다. 그후 1871년(고종 8) 봄에 조정의 령에 의하여 철폐되었으며 이를 안타까이 여긴 향리의 유생들이 그 자리에 터를 다듬고 단(壇)을 세뤄 기렸다(許 文正公 穆 書院 在郡南 江上里 肅廟朝庚午建宇 癸酉賜額 聖上八年 辛未 春 因朝令毁撤境內 諸儒築土設壇).
<참고 8>
연천군지편찬위원회,<연천군지>, 제3절 조선시대의 교육, 6. 서당
p. 562,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