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4:4-5절) 세상과 벗된 것 2-65. 만일 누군가‘신앙은 결혼이다.’라고 말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신앙을 일주일에 한 번 예배당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종교 행위로 생각하기 쉽지, 결혼(結婚)이라고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많은 곳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를 남편과 아내 사이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호세아서일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구약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여러 곳에서 믿는 자와 그리스도의 관개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성도들을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고후11:2). 또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단장하고 예비하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앙을 이렇게 결혼 관계로 표현할 때, 문자 그대로의 결혼생활을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의 특별한 관계를 비유한다면, 가장 비슷한 것이 결혼한 부부 관계라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신앙이 결혼 관계와 비슷합니까? 그것은 신앙과 결혼관계가 가지는 배타적(排他的)인 성격을 들어 말할 수 있습니다. 결혼은 배타적인 관계입니다. 어느 누구도 부부 사이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아내나 남편이 ☞ 어떤 명목을 붙이든지 간에 ☞ 자기 남편이나 아내에게 해야 할 사랑을 다른 데에 쏟을 때, 이들의 마음속에는 불같은 분노가 일어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교제할 수도 있지만, 부부 사이처럼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원치 않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의존적(依存的)인 관계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의존합니다. 아내는 자신의 모든 필요를 남편으로부터 채움을 받습니다. 만약 남편이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남자로부터 필요한 것을 공급받는다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남자가 잘살든 못살든 일단 결혼하고 나면, 그 남편에게 자기 자신을 맞추어야 합니다. 즉 처녀 때, 화려하게 잘 살았는데, 결혼해 보니까 남자가 너무나 가난합니다.
그래서 남편을 무시하고, 다른 남자들을 통해서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려고 할 때, 부부 관계가 깨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의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채워주시기로 약속(約束)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6:25절)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채워 주실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옛날 방식대로 정욕 적으로 모든 것을 다 가질 때, 그의 신앙은 대단히 위험스럽게 됩니다. Ⅰ.세상과 벗된 것 목사님이 설교하는 중에 갑자기 교인들을 향하여‘이 도둑놈들아’라고 소리를 지른다면, 아마 성도들은 마음에 깊은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목사님으로부터 그런 소리를 들었다는 자체가 그들에게는 대단히 큰 아픔이 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교회에 편지들 보내면서‘간음하는 여인들아!’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이 한마디가 사도 자신이 교회에 대하여 얼마나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도대체 어떤 상태로 보고 있는지를 잘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교인들을 향하여‘간음하는 여인들아!’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그들 모두가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고, 음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도가 신앙을 이런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생각하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단지 일주일에 한두 번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을 찾는 종교 행위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거나, 인정하는 것 이상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알기만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보다 더 멋있고 하나님보다 더 놀라운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서에서 다시 이스라엘과 결합하게 될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約束)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寶石)이나, 진귀한 선물(膳物)보다 더 귀한 것이 하나님의 성품이요, 기질입니다. 왜냐면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이 가치를 올바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고, 엉뚱한데 열을 낼 때, 우리의 신앙은 자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썩어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생기(生氣)가 있습니다. 그는 살아 있습니다. 그에게는 기쁨이 충만하고, 무엇인가 그 속에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 그대로 사는 힘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것을 사랑할 때, 하나님이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즉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원망과 불평이 우리 속에 가득 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둘은 분명히 틀립니다. 부부는 자기 남편이나, 아내의 태도가 변하는 것을 금방 눈치를 챕니다. 왜냐면 부부는 서로 사랑할 때, 마치 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그런 열정이 나오는가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을 다 희생하고, 상대방만 추구합니다. 그를 기쁘게 하려고 하고, 그를 만나기를 원하고, 아무것도 없어도 즐겁습니다. 그런데 한 편이 다른 것에 열심을 내기 시작하면, 찬밥입니다. 말로는 사랑한다. 어쩐다. 하면서도 분명히 옛날과 같은 열심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무척 마음이 아파합니다. 마음속으로‘옛날에는 분명히 이렇게 하지 않았는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분명히 부부 사이의 사랑이 식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다른 사람과 분명히 다릅니다. 이것은 불처럼 타오르는 것입니다. 부부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이런 식으로 열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남편이 다른 불쌍한 여자를 돕는다고 하면서 밤늦도록 그 사람을 만나거나, 열정적으로 찾아갈 때, 아내는 속에서 불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저런 열정은 나에게 주어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저런 열심을 보일까?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을 내지 않고, 세상이 주는 명예나 즐거움에 열심을 낼 때, 속에서 분노를 느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가지는 열심과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는 열심이 같아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讀者)여러분, 하나님에 대해서는 질투심을 가지듯이 가까이 하십시오. 마치 하나님께서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질 수 없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사모하십시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이 헐떡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달려가십시오. 어떤 사람이 나보다 하나님의 진리(眞理)를 더 많이 발견하고, 하나님의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것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질투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죄(罪)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서로 경쟁하듯이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적인 열심이 이단의 절반만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상하게 이 집 아이들이 아닌 자들은 주야로 달려 나와서 은혜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 집 아이들은 하나님의 선물에 관심이 없을 때, 하나님은 그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이 세상의 일은 성실한 자세로 해야지, 신앙적인 열정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됩니다. 즉 이 세상의 일은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다는 자세로 해야지, 그것을 목표로 삼고, 거기에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던진다면, 그것이 자신의 신앙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를 종교의‘교(敎)’자를 붙여서 하나의 종교로‘대학교(大學敎)’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대학교를 믿는 것입니다. 대학이 주는 혜택과 대학이 가져다주는 장래를 믿는 것입니다. 이때 야고보 사도는‘이 간음하는 여인들아!’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믿는 모습을 볼 때, 바로 본문 성경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이미 열정이 식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즉 텔레비전을 통해서 모든 것을 상세하게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금방 공감대를 가질 정도로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열정 없이 되겠습니까? 어떤 여학생은 인기 스타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의 방에 가면, 큰 사진이 붙어 있고, 그에 대한 모든 것이 파일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 가수의 노래는 녹음해서 서로 돌려 듣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열정을 가진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무리 좋아해도 이상해지지 않지만,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좋아하면, 그것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거기에 사로잡혀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나중에 자신을 되찾으려면, 그것을 모두 다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상(偶像)으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되찾지 못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물질적(物質的)인 것입니다. 결혼하게 되면, 아내는 남편에게 자신의 모든 필요를 의존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후,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공급해 주셨습니다. 무려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를 주셔서 그들을 살리셨고, 그들이 병들었을 때, 찾아오셔서 치료해 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다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무척 힘들게 살도록 조금씩 밖에 주시지 않습니다. 재클린이 오나시스와 재혼했을 때, 오나시스는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가 사달라고 하는 모든 것들을 다 사주었을 것입니다. 사실 재클린은 돈을 뿌리듯이 하면서 쇼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면 진정한 행복이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가지는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한정으로 누릴 것은 지금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서 진정한 우리의 것이라고는 땅한 평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빌려 쓰고 제자라에 갖다 놓아야 하는 빚입니다. 우리에게 무한정으로 주어질 것은 다음 세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다음 세상을 누릴 수 있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것은 꼭 살 수 있을 만큼만, 가지고 나머지는 모두 다 버리는 훈련입니다. 성경에서 계속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기서 모든 것을 다 누리는 것이 절대로 정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좋은 것들을 모두 다 누린 사람은 저 세상에서 누릴 것이 없습니다. 눅16:19절)부자(富者)가 죽어서 지옥(地獄)에 갔을 때, 아브라함이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25절)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미래의 삶을 위하여 꾹 참고 인내한 것이 없었습니다. 지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모든 것을 다 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누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천국은 모두 가난한 자만 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누리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산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잘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에서 절제하고, 어렵게 산 사람에게 모든 부귀와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대로 천국까지 연결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천국에 가서라도 큰 소리를 좀 쳐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어렵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참지 못합니다. 일단 우리 눈에 좋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지 않아도 스스로 얼마든지 가져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간음(姦淫)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을 욕심내어 내 마음대로 다 가지는 것이 간음(姦淫)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죄(罪)가 되지 않습니다. 또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삶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선 어떤 수입이 생기는데, 자기 양심이 괴로우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뭔가 내 마음속으로 이것은 아닌데, 하면서도 수입이 탐나서 양심을 속이고, 이득을 볼 때,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어떤 것은 분명히 자기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다른 사람의 눈 때문에 가지게 될 때,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는 지금 형편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그러면 남들이 다 지옥(地獄)에 간다고, 따라갈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데는 좌우간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분명히 자기 아이는 과외 할 여건이 되지 않는데도 남들이 다 하니까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과외를 한다면, 적어도 그 아이의 신앙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과외비가 다른 사람들의 한 달 생활비에 해당된다고 할 때,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좋은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또 요즘은 신용판매가 많으니까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얼마든지 일단 사놓고 봅니다. 즉 좀 더 기다려 볼 수도 있는데, 일단 쓰고 보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잘사는 것에 대하여 아주 싫어하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흥시키시지 않으면, 기다려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에 정결(淨潔)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것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자기 스스로 부흥해 버립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온갖 세상적인 것들이 모두 다 들어와서 여기가 교회인지, 세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런 교회를 토(吐)하여 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Ⅱ.세상과 벗된 결과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잠시 멀리 하고, 세상과 짝하는 것의 결과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4절)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하면, 잠시 하나님과 멀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 대하여 전쟁(戰爭)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怨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선, 하나님께서 이런 생활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주 싫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은 은혜의 문을 닫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만족스럽습니다. 왜냐면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결코 평안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例)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가졌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 사라의 노예를 첩으로 가졌습니다. 그가 젊은 여자를 취하니까 지금까지 기다린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싶을 정도로 바로 아이가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너무나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이제 그에게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교제(交際)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좋아하던 23년 동안 그에게 침묵하셨습니다. 그에게 진정한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좋았던 사라가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서 보낸 것도 바로 23년 동안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을 가진 23년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기쁘게 하였고, 하나님을 가장 가슴 아프게 한 기간이었습니다. 또 다른 예(例)를 들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도망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왜냐면 그때만큼 다윗이 하나님께 매달리고,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안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택한 길이 블레셋 사람들 밑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더 이상 사울의 사람들이 쳐들어오지 않으니까 좋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비록 다윗은 쫓겨 다니고 있어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생을 하더라도 이스라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시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유독 그가 블레셋 사람들 밑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 드린 시(詩)가 없는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편한 동안 다윗은 잠시 하나님과의 교제(交際)가 단절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영감(靈感)의 찬송이 없었습니다. 단지 육신만 편했지, 그의 영혼(靈魂)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할 것조차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어떤 경우에도 떠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일이 없습니다. 이스마엘을 버릴 때까지, 블레셋을 떠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로, 이때부터 우리의 원수(怨讐)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즉 지금까지 잘 지내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원수(怨讐)가 되어서 나를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들 뒤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요엘서를 보면, 먼저 메뚜기 재앙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어느 새 이 메뚜기들은 신식 훈련을 받은 바벨론 군대로 바뀝니다. 이 바벨론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이 누구입니까? 놀랍게도 그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변절(變節)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치기 위하여 이들의 원수(怨讐)가 되어서 적군(敵軍)들을 몰고 오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갑자기 악화(惡化)될 때, 이 원인을 그 사람에게서 찾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독자)여러분, 내가 그 사람을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자기 안에 하나님께 대한 교만(驕慢)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의 관계는 저절로 해결되어 버립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배후(背後)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는 신자(信者)들은 일시적으로는 형통한 것 같지만, 결코 그 속에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Ⅲ.시기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을 보면, 아주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는 것입니다. 5절)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믿는 자 속에는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시기(猜忌)하기까지 사모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기서‘사모한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아주 강하게 욕망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처음 인류의 조상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남자를 사 모하는’벌(罰)을 주셨습니다. 우리 생각에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는 것이 무슨 벌(罰)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사모한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마음을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여자가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지배하고자 할 때, 그 마음의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 가정은 편치 않습니다. 남자들이 바보가 되지 않고, 어떻게 여자가 자신의 모든 욕심을 채울 수 있습니까? 결국 이것은 남자가 바보가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여기서 성령께서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것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려고 하는 경우와는 다르지만, 결국 어떻게 해서든지 포기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때, 우리 안에서 시기(猜忌)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 안에 갈등(葛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요, 아픔이 되게 하십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기만 하면, 우리 속에서 갈등(葛藤)이 일어나서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갈등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잘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갈등 때문에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속에서 육신의 욕망과 성령의 욕망이 싸웁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하는 일마다 안 됩니다.
이 갈등이 끝날 때까지 우리 속에서 싸움이 있습니다. 이런 훈련을 받은 사람은 인간의 방법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아예 시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또 다른 것은 성령께서 그 사람을 치십니다. 갈등을 일으켜도 우리가 끝까지 세상으로 가려고 할 때, 그 사람의 육신을 치십니다. 롬8:13절)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마지막 방법은 결국 그 사람을 쓰러뜨려서라도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자기 기질과 정욕으로 달려가는 신자들의 육신을 치십니다. 지나친 우월감과 완벽주의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끝까지 자기 방식대로 나가면 결국 병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병(病)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도저히 욕망이 저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생은 너무나 어릴 때,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 학생은 그 다음 시험에서 실패해서 완전히 폐인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어린아이를 너무나 추켜세우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너무나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제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너무 지나치면, 병이 듭니다. 자신 만만하게 뛰어다니다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되찾고, 다시 겸손하게 신앙의 길을 걷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讀者)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쓰러지더라도 한번 선택한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고, 꼭 붙드셔서 다시 은혜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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