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しいわれわれの江山」の美しい意味+

이한우 평문
이한우의 화업은 20세기 한국미술의 궤적을 반복한다. 그가 표상하는 바, 그리고 지향하는 바 세계는 한국미술의 목표를 반영한다. 거기에는 한국인의 조국사랑, 그리고 은근과 끈기라는 국민적 저력이 배어 있다.
50년 화업에서 이한우는 세 번의 변신을 겪는다. 그 첫 번째는 극사실적인 정밀묘사요, 두 번째는 추상적 상징적인 경향, 그리고 세 번째는 동양적인 화론과 한국적 감수성에 뿌리를 둔 ‘아름다운 우리강산’ 그림이다. 그것은 한국미술의 주기를 십년으로 봤을 때 20년, 혹은 30년간의 궤적을 닮았다.
서구미술이 해일처럼 밀려왔던 20세기의 한국미술은 1916년 김관호의 활동부터 대략 10년 주기로 세계미술의 궤적을 반복하면서 한국적 정체성을 계발하게 된다. 그 첫 번째인 재료의 실험기(1916-1927)에는 김관호의 평양개인전과 문전특선, 그리고 이종우의 프랑스 살롱 입상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개인전, 국제전 수상의 시작이었다. 두 번째 이즘의 검증기(1928-1937)에는 민족자존의 회화를 천명한 녹향회, 백우회, 목일회 등의 그룹활동이 시작된다.
이 시기의 활동에 해당되는 이한우의 첫 번째 시도는 극사실주의적인 정밀묘사였다. 처음 이 땅에 유화가 소개되면서 한국의 화가들은 유화가 지닌 뛰어난 기록성과 표현성에 주목했다. 서구의 인상주의, 표현주의 등의 표현방법을 빌어와 식민지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기록하고, 재현하며, 민족주체성을 선양하면서 이러한 노력들을 풍경화로 남겼던 선각자들에게 유화는 하루라도 빨리 정복해야하는 기적의 표현매체였다.
이어 한국미술에 있어서 세 번째 이념의 상충기(1938-1948)에는 좌우익의 대립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네 번째 기법의 모색기(1949-1956)에는 제1회 국전부터 국전보이콧 운동이 기록된다. 그리고 다섯 번째 사조의 육화기(1957-1967)에는 반국전의 흐름이 보편화에서 추상표현주의의 퇴조로 이어진다. 그것은 한국미술에서 야수파적, 추상파적인 경향과 함께 예술지상적, 전위적 경향이 동시에 시도되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이한우의 활동이 두 번째 경향인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경향의 작품들이다. 이한우는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즉 국전을 통해 화력을 쌓아나갔고, 추천작가에 이르는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는 곧 학연, 지연, 인맥과 무관히 뛰어난 묘사력과 작품성으로 개척한 국전 추천작가라는 보장된 위치를 벗어나 과감한 자기변혁의 추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한국미술에서 여섯 번째, 사상의 접목기(1968-1978)에서 한국미술에서는 청년작가연립전을 비롯한 반국전의 흐름과 동아미술대전, 중앙미술전 등 민전시대가 개막된다. 그리고 일곱 번째 국적의 확인기(1979-1988)에는 현실과 발언 등 민중미술의 대두와 백색주의라 부르는 한국적 미니멀리즘의 대립, 그리고 이른바 1988년의 올림픽 미술제를 기화로 한국미술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커튼을 걷고 세계의 빛에 노출된다.
이 변혁과 정체성 탐구의 시기에 해당되는 이한우의 작업이 아름다운 우리강산 시리즈이다. 동양화론과 한국의 전통적 미감, 민족정서의 재발견을 통해 이한우는 인본주의적인 한국화의 정형을 수립해나간다. 그 배경에서 이한우는 클로드 피사로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피사로는 ‘민족적 전통과 미감에서 비롯되는 민족적 조형’을 제시했다. 마치 1957년 한국미술이 국전에 대한 민전으로 대항했고, 미술집단에서 이념그룹으로 전향하듯이, 피사로의 충고는 이한우 화업의 지상명제가 되었다. 그렇게 발견된 것이 구륵전채요, 인자 준법이요, 혈맥이라는 이름의 회화적 질서였다. 구륵전채란 윤곽선을 그린 후에 물감을 채워넣는다는 뜻이다. 인자 준법이란 한자의 사람 인(人)자로 산의 주름을 해석하는 것이다. 혈맥질서란 화면에 마치 인체가 인간의 동맥과 정맥으로 결구되어 자율적으로 움직이듯이 화면이 자율적인 회화의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는 뜻이다.
이한우에게 그림이란, 그리고 풍경화란 우리 조상들이 그랬듯이 인간의 땅이요, 인간의 그림이었다. 그래서 산과 강은 사람 인(人)자의 준법으로 재정립되고 그 속의 집과 인간은 혈맥으로 재표상된다. 하늘에서 보면 산의 주름은 사람 인자를 연결한 듯이 보인다. 국토가 그럴진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구륵, 즉 사람인자로 만들어진 윤곽선 안에 칠해지는 색채와 같다. 다시 그 사람들의 혈맥은 산하의 혈맥, 즉 사람 인자를 닮는다. 그렇게 한국인에게 산하는 사람이요, 다시 사람은 산하가 된다.
이한우의 발견과 표상은 20세기 세계미술과 나아가 한국미술이 추구했던 회화적 진실과 질서를 표방한다. 모리스 드니는 ‘20세기 화가의 제1신조’에서 시각적 표상을 화면 위의 물질적 현상으로 환원할 것을 촉구했다. 피카소 브라크 고갱 마티스 등의 화가들은 평면으로서의 캔버스 위에 평면으로 그려지는 회화적 질서를 구현하려 했다.
이한우의 예술은 20세기 서구미술의 탐구와 성취를 대변하되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오늘에 이르는 거대한 한국미술의 흐름, 즉 한국적 정형의 수립기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부상하고 있다. 평면 위에서 전개되는 평면적인 회화, 공기원근법과 색채원근법을 배제한 화면원근법, 동양회화의 전통과 한국적 감수성을 극대화한 구륵전채의 미학, 그리고 인본주의적인 동양철학을 시각적 진실로 환원한 사람 인자준법은 20세기의 개념미술 이후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세계미술의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 대안의 하나로서 프랑스 상원이 모딜리아니, 고갱, 보티첼리 등의 미술사상의 대가와 생존 거장들의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 전시에 이한우를 초청한 이유요, 명분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회화적 성취를 보다 감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한우의 조국사랑이다. 사랑과 추억으로 감싸주는 어머니와 고향과 조국에 대한 원천적인 사랑은 이한우에 의해 보편적이고 원형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한다. 그리하여 지역과, 국적과,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으로서 세계인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
「美しいわれわれの江山」の美しい意味
李漢雨の畵業は20世紀の韓國美術の軌跡を繰り返す。李漢雨の畵面に描かれるもの、そしてその繪の志向することは世界美術のなかでの韓國美術という目標を代弁する。そこには、韓國人の祖國への愛、それから慇懃と執念という國民的な底力が染み込んでいる。
50年の畵業にわたって李漢雨は3回の変身を経る。その一回目は、極寫實的な精密描寫であり、二回目は抽象的で象徵的な傾向、そして三回目は東洋的な畵論と韓國的な感受性に根付いた「美しい我の江山」という繪である。それは、韓國美術の實体を發見するための変身の身もだえのような軌跡を表している。
西洋美術が津波のように押し寄せてきた20世紀の韓國美術は、1916年、金觀鎬(キム・カンホ)の活動からおよそ10年ごとで、世界美術の軌跡を繰り返しながら韓國的な實体性を啓發するようになる。その第一である材料の實驗期(1916-1927)には、金觀鎬(キム・カンホ)の平壤(ビョンヤン)個展と門展での特選、それから李鍾禹(イ・ジョンウ)のフランス・サロン(Salon)での入賞があったことである。韓國初の個展と國際展での受賞のスタートと言えることであった。第二、イズムの檢証期(1928-1937)には民族自存の繪畵を明らかにした綠鄕會、白牛會、牧日會などのグループ活動が始まるようになる。
この時期の活動に当たる李漢雨の一番目の試みは、極寫實主義的な精密描寫であった。初めてこの國に油繪が紹介されて、韓國の畵家たちは油繪の優れた記錄性と表現性に注目するようになった。西洋の印象主義、表現主義などの表現方法を借りて、植民地祖國の陰鬱な現實を記錄・再現し、民族主体性を宣揚しながらこういった努力を風景畵として殘した先覺者にとって、油繪は一日でも早く征服しなければならない奇蹟の表現媒体であったものである。
また、韓國美術において第三の理念になる相反期(1938-1948)には、左・右翼對立のなかでの大韓民國政府の樹立、第四の技法の模索期(1949‐1956)には、第1回の國典から國典ボイコット運動が記される。それから、第五の詞藻の肉化期(1957-1967)には、反國典の流れが普遍化して抽象表現主義の退潮へつながるようになる。それは、韓國美術にて野獸派的、抽象派的な傾向とともに、芸術至想的、前衛的な傾きが同時に挑戰された時期であった。
この時期の李漢雨の活動が、二回目の変身傾向の抽象的で象徵的な性格の作品であるというものだ。李漢雨は大韓民國の美術展覽會、卽ち國典を通じて畵力を磨きかけていったあげく、推薦作家まで至る優秀な實力を認めてもらうようになる。しかし、彼は學緣、地緣、人脈とは關係なく、優れた描寫力と作品性で開拓した國典推薦作家という保障された位置を離れて、果敢な自己変革の抽象へ進んでいくようになる。
韓國美術にてその第六、思想の接木期(1968-1978)には、靑年作家聯立展をはじめとして、反國典の流れと東亞美術大展、中央美術展などの民展時代が開かれる。そして、その第七である國籍の確認期(1979-1988)には、現實と發言などの民衆美術の台頭と、白色主義と言われる韓國的なミニマリズム(Minimalism)の對立、それからいわゆる1988年度の五輪美術際をに乘じて、韓國美術は靜かな朝の國という幕を上げて世界の光に現れるようになる。
この変革と實体性の探求時期に当たる李漢雨の作業が、「美しいわれわれの江山」シリーズである。東洋畵論と韓國の伝統的な美感、民族情緖の再發見を通じて、李漢雨は人本主義的な韓國繪畵の定型を確立していく。そういう背景のもとで李漢雨は、クロード・ピッサロ(Claude Pissaro)との會話を思い出す。
ピッサロは「民族の伝統と美感からはじまった民族的な造形」を提示した。まるで、1957年に韓國美術が國典に反對して民展として對抗し美術集団から理念グループへ轉向したように、ピッサロの忠告は李漢雨畵業の最上命題になってきたのだ。そういうふうに見つけたのが鉤勒塡彩であり、人字 皴法であり、血脈という名の繪畵的秩序であったことである。
鉤勒塡彩とは、輪郭線を描いたあと染料を塗り滿たすということである。人字皴法というのは、漢字のひと(人)文字で山のしわを解釋することだ。そのなかに住んでいる人間は、ひと文字で描かれた輪郭線のなかに塗られる色彩または血脈のようである。血脈秩序とは、まるで畵面に人体が人間の動脈と靜脈に組み立てられて自ら動くように、畵面が自律的な繪畵の秩序によって動くという意味である。そういうふうに山が人間になって、人間はさらに山の山河、そして韓國人のふるさとになるわけなのだ。
李漢雨の發見と表象は、20世紀の世界美術と、ひいては韓國美術が追求した繪畵的な眞實と秩序を標榜している。モーリス・ドニ(Maurice Denis)は「20世紀畵家の第1信條」にて、ヌードや馬のように見分けることの出來る視覺的な表象の代わりに、畵面上の物質的な現象、すなわち染料の固まりということを思い出させた。ピカソ(Picasso)、ブラック(Braque)、ゴーギャン(Gauguin)、マティス(Matisse)などの畵家らは平面のキャンバスの上に描かれた繪畵的な秩序を具現しようとしたのである。
李漢雨の芸術は、こういった20世紀の西洋美術の探求と成就を代弁しているが、1988年度のソウル五輪の以降より今日に至る巨大な韓國美術の流れ、いわゆる韓國的な定型の樹立期(1989- )においても卓越した存在として浮かび上がっている。平面の上で展開される平面的な繪畵、空氣遠近法と色彩遠近法を外した畵面遠近法、東洋繪畵の伝統と韓國的な感受性を極大化した鉤勒塡彩の美學、それから人本主義の東洋哲學を視覺的な眞實へ還元したひと文字の人字皴法は、20世紀の槪念美術以來、著しい方向の提示の出來なかった世界美術の代案にもなれるだろう。
ということで、フランス上院が李漢雨をモジリア二(Modigliani)、ゴーギャン(Gauguin)、ボッティチェルリ(Botticelli)などの美術史上の大家と、生存巨匠たちの展示しか押し通していないオランジュリ(Orangeries)美術館の招請展を設けてくれたわけではないのか。
こういう繪畵的な成就を、より感動的につくるのは李漢雨の祖國への愛である。愛と思い出で抱いてくれる母親とふるさとと祖國に對する根本的な愛は、李漢雨によって普遍的で原型的な美しさへ昇華する。そのようにして、地域と、國籍と、時代を乘り越えた美しさとして世界人の心の琴線を触れるようになるだろう。
金永材(美術思想家・哲學博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