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동 아이들
느티나무, 음성과 괴산에는 수령이 200 - 300년이 넘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많다. 한자(漢字)로 괴산 할 때의 괴자가 나무목 변에 귀신귀를 써서 느티나무 괴(槐)라 불린다. 오래되고 품위 있는 나무에는 귀신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귀신도 보는 눈은 있어 좋은 것은 독차지하고 싶어 한다. 아니 자신의 권위에 맞는 영역을 표시, 과시하고 싶어 한다.
마을마다 오래된 고목나무에 빨강, 파랑, 노랑, 흰색, 검은색의 띠를 둘러 바람에 날리고 이 자리가 수호신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린다. 적청황백흑(赤靑黃白黑)의 다섯 가지 태고의 기가 발산되어 근접키 어려운 위엄을 뿌린다.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머리를 조아리고 필요를 모아서 기원을 한다.
마을 이장님은 " 이렇게 오래된 나무를 자르면 안 돼요, 바다의 거북도 나이 많은 거북은 도루 낳아준잖여. 잉어두 나이 많음 그냥 놔주잖여. 더구나 고목에는 맡아놓은 임자가 있소." 하고 말렸는데 이를 무시하고 일본인들이 시켜서 나무를 베어내고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어려서부터 들었다. 동네 어른들이 고목나무의 전설에 관해서 나누는 말씀을 곁에서 자주 들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없는 귀신이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다 피부로 오감으로 다 경험해 본 것이었다.
방학 중 임시 소집일에 학교에 갔을 때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베어진 걸 봤을 때도 혹시 누가 어떤 피해자는 생기지 않았나 하는 우려가 자연히 들었다. 교문 주변에 베어져 나뒹구는 고목나무의 동강 사이를 걸을 때 그런 염려와 아쉬움과 슬픈 전설을 생각했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서광진이가 자기 집에 가서 놀자고 하였다. 입구에는 갑자 제재소라고 쓰인 상호 명패가 보였다. 하얀 거위 2마리가 경비병처럼 꺼억꺼억 소리 내며 돌아다녔다. 제재소 마당에는 작업 중인 나무들이 많이 쌓여있었다. 나무 더미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 집안으로 들어섰다.
밥상이 들어왔는데 광진이가 김을 싸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얼마나 놀았을까. 얼마 후에 충남대에 다닌다는 과외 선생님이 왔다. 광진이는 정형외과 의사가 되어 서울에서 만났다. 박외과 아들 박상진이는 유학 갔다 와서 교수가 되어 한번 만났다. 한남대 과 교수실에서 잠깐 보았지.
밖으로 나와 큰 신작로를 걷는데 미군 차량이 먼지를 일으키고 지나갔다. 아이들은 쫓아가며 헬로우, 헬로우 하고 외쳤다. 미군이 껌을 뿌려주며 지나갔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도로가 비포장이었기에 살수차가 하루에 몇 번씩 도로에 물을 뿌리고 다녔다. 가까운 곳, 대전고등학교 옆에는 미군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정문에 미군 MP가 경비를 섰는데 그중 하나가 지나가는 우릴 보고 " 예쁜 아가씨 어서 와" 하고 말해 어이가 없었다. 누가 그런 말을 가르쳤을까.
당시 미군은 식장산 꼭대기에 군사용 마이크로 웨이브 중계탑 시설 보호에 병력이 주둔했고 유성에 K5 미공군 비행장이 있었고 외곽 경비부대도 같이 있었다. 회덕 계족산 너머 장동에 미육군 ×××부대가 주둔했었다. 따라서 대전시내에서 미군 차량의 이동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 집 윗골목엔 가구점 아들 영대, 승렬이, 부라더 미싱의 정일룡, 계측기 제작의 엄세철이 살았다. 승렬이와 세철이는 내가 접은 딱지를 몽땅 따갔다. 세철이 팔은 괴력 있었다. 아무리 딱지가 크고 무거워도 다 뒤집었다. 그 위로 대전극장 옆 골목에는 박종세의 단짝이 된 신동환이가 살았다. 신동환이는 서울서 대전에 내려오는 추석 귀향 완행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게 마지막이다. 예술고를 나온 라이카 박종세는 내가 쓴 연극 대본을 보여주고 한번 해보자고 하였으나 받은 유산으로 사업하느라 바빠 정신이 없어 내게 긍정적으로 대답하고는 그걸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영대와 승렬이는 가끔 마주칠 적마다 참 잘 생긴 애들이다라는 느낌을 주었다. 승렬이는 얼마 전 잠자다 " 애들아, 먼저 갈게. 안녕! " 하고 세상을 바삐 떠났다. 승렬이가 죽었을 때는 참 많이 울었다. 승렬이는 내가 대전에 올 적마다 차를 터미널까지 가지고 나와 나를 태워갔다.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황송하게 그러지 말라. 시내버스 타면 된다고 해도 번번이 나왔다. 어느 날 불현듯이 승렬이가 보고 싶어졌다. 전화를 해 국불전에서 만나기로 했다. 번개팅에는 도수, 경호, 인수가 시간이 맞아 나와있었다. 이게 마지막으로 본 자리였고 마지막으로 나눈 소주잔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3일 후 승렬이는 몰래 혼자 꿈속의 먼 여행길을 떠났다.
영대는 지금도 살던 곳을 떠나지 않고 넓은 주차장을 운영하며 은행동 골목을 지키고 있다. 어린 날이 그리워 은행동 골목을 찾았을 때 영대는 간판을 제작하고 있었다. 옛날의 동네 꼬마가 찾아왔다고 반겨주고 커피도 대접하고 세철이 소식도 말해주고 이사 간 집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세철이가 몸이 좋아졌을 때도 오토바이 거리에 있는 세철이를 불러 거의 40년 만에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 우리가 원동국 70주년 개교기념식을 했을 때도 1년 선배인 영대는 참석했었다. 그리고 영대는 기념식이 끝난 후에 시장 횟집에 가서 소주 뒤풀이 자리를 베풀어주기도 했었다.
우리가 사는 골목을 가로막은 아래 블록에는 이동수네 집인 미락이라는 유명한 대형 음식점이 있었다. 대전극장 통로와 뚫린 길이었고 예식장이 있어 손님이 많았다. 이 집 아들 동수도 얼굴이 준수하고 건강한 체격에 공부도 잘했지만 아이들과 어울리진 않았다. 후에 KBS 드라마에 단역으로 나가곤 그만두었다는 말을 들었다. 전우곤이는 충남도경에 근무할 때 만났고 연락이 지속되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하자마자 삼성에 취직되어 잘 다니던 이명수는 장가도 못 가보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가장 많이 만난 친구는 이근수다. 근수는 내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준 사범이다. 집에 내가 없으면 만화방에 와서 나를 찾았다. 당시 최고의 우상 같은 라이파이를 보려 아이들이 만화방에서 줄지어 기다렸다. 라이파이는 천하무적이었으며 전 세계를 통틀어 지구 곳곳의 악당을 물리치는 정의의 사도였다. 라이파이는 멋진 복장에 탄탄한 체격으로 우주선처럼 생긴 제비호에서 밧줄을 잡고 번개처럼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 만화는 속편이 35편이 넘어가는 폭발적인 대인기를 기록했다. 근수도 나를 찾아왔다가 라이파이 만화도 보고 유도 만화도 보게 되었다. 잡고 있는 상대의 배에 발을 대고 상체를 뒤로 바닥에 눕히면서 머리 너머로 상대를 넘기는 기술이었다. 그 만화를 보고 실습할 생각이 든 근수는 3층 다다미 방에서 그 기술을 나에게 걸었다. 그런데 나도 그 만화를 보았기에 그 기술이 내게 통하지 않았다. 근수는 정치학박사가 됐지만 정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 국방연구에만 몰두했다.
김근종이라는 친구를 나는 만나고 싶다.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턴지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고 깡마르고 키가 좀 작은 아이인데 혹시 기억나는가. 얼굴이며 눈빛이 참 재주 있게 생겼다. 근종이는 중교다리 천변 인근 골목 어귀에 살았다.
이영희가 찾아와 그 아이 집에 가보자 했다. 할머니 하고 같이 산다고 들었다. 집에 혼자 있던 근종이가 우릴 보고 반가워했다.
근종이가 " 너희들 보여줄 게 있다." 며 다락에 올라가 권총 한 자루를 꺼내왔다. 정말 무시무시하고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근종이가 권총의 총구를 나를 향해 겨냥했다. 정말 무서웠다. 손을 내저으며 놀라 소리를 질렀다. " 야, 싫어. 싫어. 안돼. " 찰칵 방아쇠를 당겼다. 근종이는 웃으면서 " 떨지 마 총알이 없어. "라고 말했다. 정말이지 간담이 서늘하였다. 근종이 아버지가 군인이신가, 경찰이신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놀기에 바빠 그 길로 잊어버렸다.
와, 그래도 권총은 싫었다. 끔찍하고 차가웠다. 이 아이는 공부를 잘하고 똑똑했다. 재치도 있고 나를 다루는 솜씨도 있어 나는 그 아이에게 배우는 아동이었다. 아마 같이 사시는 할머니가 그런 분이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가 좀 큰 편에 속하는 영희하고 키가 작은 근종 하고는 서로 잘 통했으나 영희는 근종이에게 같이 시험공부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근종이는 자동차 정비사가 되어 시내 정비공장에서 일하며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전국기능 경진대회에도 나간다는 말을 들었다.
방학 중 더운 여름 어느 일요일 날에 세철이가 유천동 다리를 지나 안영리 방향의 기차 철교 아래로 수영하러 가자고 하였다. 물이 많아 수영하기가 좋다 하여 둘이 열심히 걸어갔다. 도착해서 얼마 놀지 않아 피곤해서 인지 자꾸 졸음이 왔다.
철교 교각 받침판으로 만든 시멘트 구조물 공간에서 엎드려 잤다. 세철이가 와서 깨웠다. 어떤 이상한 아이가 우리 옷을 뒤지고 있으니 자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도 그렇게 뜨겁게 해가 비추는 데도 졸려 또 쓰러져 잠들었다.
세철이가 또 깨웠다. 그 이상한 아이가 옷 속에 우리가 버스 타고 집에 갈 돈을 훔쳐서 달아났다고 말했다. 우린 해지는 저녁 황혼에 다시 터벅터벅 집까지 걸어왔다.
눈뜨면 마주치는 골목 친구들은 학년에 관계없이 비석 치기, 자치기, 구슬치기, 말타기를 하며 팀워크ㄹ 쌓고 놀았는데 학교 친구들은 같은 학년, 같은 반이라는 울타리가 있어 찾아가거나 찾아와야만 했다. 자기 집에 와서 놀자 했던 아이들은 외로움을 느꼈다는 뜻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