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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파 교육론의 ‘근대성’ 문제 - 담헌과 연암을 중심으로
1. 서론
우리는 실학에 관한 논의를 ‘근대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전개하는 것에 익숙하다. 실학에 관한 기왕의 연구들은 18세기를 전후한 이 시기에 성리학을 해체 혹은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지적 노력이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문제는 실학적 사유 속에서 쉽게 발견되는 성리학적 세계관과의 중첩 혹은 공존현상이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공존현상을 실학 속에 남아 있는 중세적 사유의 찌꺼기 혹은 지체현상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근대와 근대적 요소의 중첩 혹은 공존 현상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음을 고려할 때, 이 부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청된다. 그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삶과 생활 속에 깊숙이 스며있는 의례, 교육, 관습 등의 비근한 요소들이다. 우리는 지금도 양복을 입은 ‘조선인’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고, 대부분의 가정은 조선의 삶을 변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에 본고에서는 북학파를 이끌었던 두 인물, 담헌과 연암의 일상을 추적하면서 그들의 사상이 성리학적 세계로부터 과연 얼마나 벗어나고 있었는가를 ‘집’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의 일상에서는 명백히 성리학적 세계에서는 결여되었던 ‘변화’와 ‘운동’의 개념이 나타난다. 또한 과도하게 심학화되었던 앞 시대의 교육을 ‘治用’과 ‘事業’의 영역으로 관심을 환기시키는 중대한 진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의 일상 속에서는 아직 강고한 형태로 전대의 삶의 방식이 온존되어 있거나, 사실상 이기론적 패러다임에 결박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것이 실학파의 교육론의 실체이자, 시대적 한계가 아닌가 한다.
2. 성리학적 의미 표상으로서의 “집‘과 교육
조선중기의 선비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의 일기에는 매우 색다른 가정사가 실려 있다. 그는 아들의 성적인 욕망에 대해 극도의 분노를 표출한다. 사춘기의 아들이 밤에 몽정을 하고, 수음(手淫)을 하는 것을 심하게 질책한다. 스스로 그 침구를 세탁하게 하여 모욕을 주거나 심지어 개에 비유하는가 하면, 마침내는 머리를 밀어 버리고 모질게 구타를 한다. 아들은 심한 정신적인 상처로 병을 얻게 되고, 마침내는 수차례 가출을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것은 선비들의 과도한 금욕적인 자세가 가족에 대한 정신적인 가학중세로 나타난 예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비들은 ‘가정’의 의미에 대하여 도대체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들은 왜 집안에서 아동들로 하여금 좀 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에 두질 않고, 언제나 검속(檢束)하고 극기(克己)하는 팽팽한 심리적 긴장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였을까? 그 이유의 하나는 그들이 ‘집(家)’을 세속적인 생활공간이 아닌, 좀 더 고양된 차원의 교육공간으로 이해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과 성욕마저도 엄격히 억누르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유자들이 집을 교육의 공간으로 포착한 것은 레비나스가 규정하고 있는 여성성의 집과는 차이가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집의 공간은 어떠한 긴장도 해체시키고 그리하여 자기에 대한 보다 큰 배려를 가능케 하는 평정의 공간이다. 반면 유자들의 시각은 철저히 가부장 중심적인 시각에서 ‘집’을 바라보고 있고, 같은 맥락에서 교육에 임하고 있다. <거가잡의>류가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이다.
부권의 권위가 강조되는 남성성으로서의 집의 성격은 긴장을 해체하기보다는 긴장의 끈을 더욱 조이는 역할을 담당한다. 조선 전기의 가훈과 정훈도 이러한 도덕적 긴장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퇴계의 고제였던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의 경우, 그의 <가잠 家箴>에는 부부, 형제, 부자 사이의 엄격한 분별의식을 강조하고 집안의 공간구성도 거기에 따라야 할 것임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 가문의 정훈(庭訓)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정훈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당시의 사대부 가문은 이미 의례의 세계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존비의 구분이나 장유(長幼)의 구분이 일상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관철되도록 구상되어, 호칭․ 언어․ 복식․ 좌석․ 년치․ 진퇴의 자잘한 부분까지 정해진 의례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러한 법식을 따라가다 보면, 각 개인은 필히 관계와 관계의 미로 속에 갇히게 되고 주체로서의 개인은 자연적으로 소멸될 수 있다. 정훈에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 즉 교육의 초점은 물론 가족내의 자손들에게 모여 있지만, 그 시선의 또 다른 방향은 언제나 ‘집’ 너머의 향인, 객, 사림, 혹은 여성 등 외부인에게로 향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정훈을 읽으면, 그 속에는 개인의 각성이나 수양과 같은 윤리적이고 향내(向內)적인 주제를 다루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 속에서의 처세나 몸가짐과 같은 다분히 장식적이고 향외(向外)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가정에서는 유학 이외의 이단적인 요소가 틈입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집’이 단순한 생활 공간이 아닌 매우 절제되고 통제된 의례공간으로 만들어 가고자 하였다. 즉 집에서 가능한 한 속(俗)의 요소를 제거하면서 성(聖)의 요소로 구성하고자 하였다. 예로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1607-1684)의 정훈(庭訓)에서는 “스스로 수양을 쌓고 두문불출하여 비록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는 매우 강한 부탁을 남기고 있다. 그는 집안에서 생활하면서도 “집안의 크고 작은 일에 대해서도 일체 알지 못하도록”하고, 향리에 살면서도“향리의 비루한 말들은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하면서 그가 기대한 것은 ‘집’을 일종의 종교적 성소(聖所)와 같은 공간으로 탈바꿈하기를 기대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의 <거가의절 居家儀節>에서는 집의 구성을 안채(屋)․아래채(旁舍)․헛간채(中屋)․사랑채(廳事)․마굿간․서실(書室) 등으로 구분한 후, 각각의 공간을 담과 문으로 격절하고, 각 공간에 대한 용처와 건축 방법에 대한 자세한 지침을 내리고 있다. 말하자면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인문학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따라서 건물마다 대들보의 길이와 상도리의 길이가 달라지고, 칸 수가 달라지며 그 의미가 구별된다. 예로 대들보 길이 9자의 안채의 건넌방에 살게 되는 처녀의 삶은 이렇게 규정된다. 중세 수녀원의 일상과 방불하다
처녀가 건넌방을 쓰며, 매일 새벽이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용모를 단정히 한 다음,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서는 바느질과 베 짜는 일을 하되, 잠시라도 태만하게 해서는 안 된다. 《언해소학 諺解小學》을 가르친다. 남자들은 비록 친형제간이라 해도 그 방에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된다. 만약 처녀가 없으면 신부가 여기에 거처하면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부모를 살핀다.
그는 정훈에서는 신알(晨謁), 사당(祠堂) 참배, 각종 의절(儀節), 각종 민속명절과 시제(時祭)와 기제(忌祭)에 극도의 종교적 경건성을 지닐 것을 부탁한다. 여자의 경우에는 성적인 욕망으로부터 “미리 방비하기 위해(預爲之防)” 격절된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인팍의 우물을 함께 쓰지 않으며 변소도 함께 사용하지 않는” 내외의 분별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유자들의 발상은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의례적인 공간으로 바꿔서 그 속에서 유학적 덕성을 갖춘 인간을 길러 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집’의 공부론이라고 할 수 있다.
3. 담헌과 연암에 있어서의 ‘집’과 생활, 새로운 교육적 담론
가) 변화된 세계와 새로운 교육적 환경
18세기의 조선사회가 커다란 변화에 물결 속에 있었다는 것은 여기에서 새삼스럽게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변화가 각각의 가문이나 문중, 혹은 개인에 대한 교육에 어떤 영향과 변화를 주었는가 하는 점은 계속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다. 담헌과 연암은 이미 그 변화를 뚜렷하게 감지하고 있었고, 새로운 교육적 담론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담헌은 이미 역외춘추론을 주장할 정도로 교조적인 중화주의로부터 이탈하고 있었고, 둘 다 禮制의 상대성을 강조할 정도의 시대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진보적인 견해는 이미 변화하고 있는 대내외적 상황으로 볼 때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문제였다. 교육적인 환경이 변화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이미 내부에서부터 표출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조 지배층으로서의 양반은 최상의 교육의 혜택을 누리면서 관직과 제반특권을 독점하였다. 이들 지배계급은 良人과 賤人 신분에 대한 교육적인 우위성이 요구되었고, 지배계급 간에도 일정한 교육수준의 등차가 필요하였다. 양반계급이 그들의 이익을 지속적으로 보장받기 위해서는 중인신분을 포함한 次下階級에 대한 일정한 견제가 필요한 것이었다. 서얼금고법이나 중인들만의 기술교육 및 雜科試는 일종의 교육적인 신분 억제정책이라고 하겠다.
신분제가 비교적 안정되었던 조선중기까지는 신분에 따른 교육수준의 구별이 비교적 엄격하게 지켜진 것으로 보인다. 양반층은 그들의 경제적 배경과 사제관계를 통하여 자신 및 자제교육에 충실할 수 있었고, 이는 안정된 지배체제를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교육과 신분의 相應關係가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신분적,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층이 다수 증가하였고, 非士族 중에서도 상거래와 각종 상품경제적 농업경영 등을 통한 부의 축적이 가능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지배층의 교육독점은 점차 퇴조하고, 각 계층은 독자적 교육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교육에서는 이념과 도덕 대신 생생한 생활이 묻어난다.
특히 도시의 상공인들과 중인층들의 교육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對淸 무역을 통하여, 혹은 시장권이 전국적으로 광역화하던 시대적 배경 하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이를 그들 스스로의 교육시설 확보와 교육기회 획득의 토대로 삼았다. 柳壽垣이 “富民과 大商들이 이미 의식이 유족하게 되는 즉, 그 자손의 입신양명을 위하여 學塾을 村中에 세우고 좋은 선생을 모시고 아이들을 가르치게 됨은 필연의 이치다.”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기실 도회지에서는 이들 상공인들의 자제를 전문적으로 교육시키는 사례가 이미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 서당에서는 일정한 月料를 책정하고, 이를 학생 개개인에게 배분하여 현금으로 받는 특이한 양식을 취하였다. 熙朝軼事에서 “여항의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한 달의 비용을 계산하여 아이들에게 분배하였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당시 서울의 도회적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이들 서당은 “수업을 받는 자가 항상 오륙십 명이 되었고, 조를 나누어 講學”할 정도로 번성하여, 마치 오늘날의 학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도시 상공인을 대상으로 한 서당교육은 교재의 성격도 평민중심으로 구성함으로써 그 계층적 성격을 뚜렷이 하였다. 필자가 이미 자세히 분석하였던 “兒戱原覽”은 그 대표적 예라고 생각한다. 兒戱原覽은 사대부 중심의 ‘小學’류의 교재형식을 과감히 허물어 버리고 민간 유희, 민속, 민담, 國俗 및 조선의 역실인식 및 교육관에 기인하는 것이라 파악된다. 또한 당시 상품화 추세를 보여주던 세책(貰冊), 출판업은 도시의 시정인 및 소농민층을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었고, 이는 교육 수혜층의 분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본다.
한편 향촌사회에서도 각 계층의 개별적 교육행위들이 점차 나타나고 있었다. 中人身分으로서 문도 100여인을 양성하였던 姜鳳文의 경우나 학도 50여명이 모두 吏族만의 자제로 구성된 19세기 慈仁縣의 사례는 사족중심의 봉건적 교육구조가 점차 약화되고 있었던 한 징표로 파악된다. 특히 소농민층의 서당교육에의 참여는 기존의 契組織을 원용한 書堂契의 활용으로 본격화되었다고 판단된다. 學田의 설치는 사실상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지주층에 대부분 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소농층으로서는 이러한 경제적 난제를 극복하는 방안이 契組織이었다고 생각된다. 書堂契는 소농민들의 자립적 경제기반을 토대로 하여 그들 나름의 독자적 교육경제를 실현시켜 주는 것이었다고 이해된다. 1755년 춘천 복중면에서 조직되었던 敎英契는 농민들이 중심으로 만든 書堂契로서, 자신들이 글을 모르기 때문에 學長을 모셔오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作契하였음을 볼 수 있다. 노비가에서 賣文資生하였던 訓長 郭處雄이나 英祖 乙亥年(1755)에 발생한 괘서사건의 訓長 朴天遇의 경우와 같이 도서벽지를 유랑하면서 농민층을 대상으로 직업적인 訓長을 하면서 민란의 주모자로 참가하는 경우도 다수 나타난다. 당시의 몰락양반층은 유랑지식인이 되어 부유한 常民層의 교육을 담당하였음을 자주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상업성을 목적으로 하는 坊刻本 敎材가 경제적 부를 축적한 농촌지방에서 주로 매매되었음은 小農民의 교육주체로서의 등장을 증좌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변화가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양반신분으로서 천인가의 訓長이 되는 사태로까지 진전된다고 파악된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기존의 양반 중심의 교육이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변모하고 해체되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집(가문)- 문중- 사림-국가라는 일원적 체계에 의하여 그 성격이 결정되던 교육이 실로 다양한 사회문화적 변인에 의해 그 의미 표출이 달라지기 시작하였음을 말한다. 예로 도회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한 위항문인이나 혹은 부를 집적한 새로운 상공인 계층들은 앞서와 같이 종법체제에 근거한 교육적인 질서에 그대로 순응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즉 일원적이며 거의 절대적인 형식으로 작동되던 주자학적 교육원리가 서서히 도전받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집’이 지닌 교육적 의미가 어쩔 수 없이 변화됨을 뜻한다. 그러한 변화는 이미 담헌보다 한 세대 앞선 柳壽垣(1694-1755)으로부터 감지된다. 그는 “하늘이 인재를 내는 데 서울과 시골의 차이가 어찌 있을 것이며, 선비와 서민의 구별이 어찌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교육에서의 신분적인 차별을 철폐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선비들도 적극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도록 독려할 것을 권하는가 하면, “강역(疆域)이 이미 구별되어 있고 풍속이 또한 다르니, 제각기 그 요속(謠俗)에 따르고 토풍(土風)에 순응하는 것이 어찌 해롭겠는가.”라고 하면서 풍속과 제도의 기준을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에 두어야 할 것을 역설한다. 교육을 주도하는 중심축이 서서히 한국사회 내부로 이동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모습은 여러 인물들 속에서 다양하게 발견된다. 특히 제도나 법, 혹은 형식과 같은 외적인 차원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삶의 방식과 철학을 보여주는 교육 행위들이 실제 생활 속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컨대 李鈺(1760-1813)의 글에서는, 먼 시골의 학동들이 배우는 所志狀의 내용이 바로 행실이 어그러진 규방 처녀의 송사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나, 代述로 먹고 살며 과거제도를 농락하는 유공억이라는 인물에 관한 기록 등 변화된 교육상을 드러내 준다. 특히 남녀를 바라보는 그의 독특한 관점은 앞서 살펴 본 주자학적 성의식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정(情)이란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모두 그 정의 진실됨을 살펴 볼 수가 없으나 유독 남녀의 情만이 인생의 본연적인 일이고, 또한 天道의 자연적인 이치”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 놓고 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 그 마음, 그 사람, 그 일, 그 풍속, 그 땅, 그 집안, 그 나라, 그 시대의 정을 남녀의 정으로부터 살펴 볼 수 있다. 천지만물에 대한 관찰도 이 남녀의 정에서 살펴보는 것보다 더 진실 된 것은 없다.”고 선언한다. 가히 양명좌파의 성정론과 흡사한 입장을 개진한다. 담헌과 연암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北學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들 두 사람은 조선의 교육 문제 해결을 유형원이나 유수원, 혹은 박제가 등이 시도하였던 제도나 형식과 같은 器的 측면에서의 보완보다는, 당대 교육의 이념과 목적에 대한 비판적 성찰 속에서 구하고자 하였다. 연암은 “옛 것에 안주하고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그 때 그때 미봉해서 해결하는(因循姑息 苟且彌縫)“의 태도가 조선 후기 사회를 병들게 하는 주범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당시 조선의 교육환경을 둘러싸고 있던 낡은 시대의 시․ 공간개념을 허물어 버리고, 새로운 질서축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반복되고 순환되는 것으로의 성리 교육의 패턴을 변화와 운동이라는 시간의 개념이 함유된 새로운 교육적 패턴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또한, 공자가 바다에 떠서 구이(九夷)로 들어와 살았다면 역외 춘추(域外春秋)가 있었을 것이다. 라는 주장을 할 만큼 이들 논의의 초점은 조선 사회에 매몰되지 않고 공간적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그럼 이제 새로운 시․ 공간관을 확보하면서 교육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만들고자 한 이들 실학파들이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는 과연 어떠한 삶의 자세를 지니고 있었는지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삶의 공간으로서의 ‘집’을 통해 그들의 교육적 의지를 읽어 보도록 하자.
나) 담헌의 삶의 공간과 ‘집’의 의미
앞에서 우리는 초려의 글을 통해 이학자들이 ‘집’을 어떻게 교육의 공간으로 구성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집의 공간구성 자체가 이미 예학적 질서관에 근거하고 있고,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그 세계에 이입 될 것을 기대한다. 이로 인해 사실상 ‘집’이 모든 교육의 가장 중심 되는 공간으로 자리한다. 이제 이 논의를 북학의 문호를 연 담헌 홍대용(1731-1783)에게로 옮겨 보자. 그의 문집에서는 자제나 제자들에게 전해주는 교육적 언술을 사실상 찾아 볼 수 없다. 아예 교육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로 비쳐 진다. 그의 절친한 친우였던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쓴 담헌의 제문에는 아예 교육적 담론으로 간주할 수 있는 문장이라고는 한 줄도 발견할 수 없다. 담헌은 과연 일상의 생활 속에서 교육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그의 평소 집안에서의 삶을 보여 주는 몇 가지 편린들을 참고해 보자. 그는 연행 길에 만났던 청나라의 학자 반정균(潘庭筠)에게 기문을 부탁하면서 그의 집안 풍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조선의 서울에 살던 이 사람이 마음에 자그마한 지상(志尙)을 품고 청주(淸州)의 수촌(壽村)에 퇴거(退居)하여 농사짓는 사람들과 더불어 놀고 있다. 여기에는 집이 몇 채 있는데, 각(閣)이 있고 누(樓)가 있고 늪이 있고 다리가 있으니, 늪에는 배가 있어 띄울 만하며 나무 그늘에는 말[馬]이 있어 반환(盤桓)하기에 좋다. 그리고 이 집의 방에 들어가면 옥형(玉衡)이라는 혼천의(渾天儀 천체를 관측하는 기구)가 있고, 시간을 측정하는 후종(候鐘)이 있고 거문고가 있으며, 또 장차 어떤 일을 하려 할 때는 시초(蓍草)가 있어 점(占)을 칠 수 있으며 밭을 갈든지 글을 읽든지 하다가 여가가 있으면 활이 있어 쏠 만하니 지극한 낙(樂)이 이 속에 있어서 다른 아무 것도 원하지 아니한다.
위의 글에서 드러나는 담헌의 삶은 크게 두 가지 세계로 요약할 수 있다. 혼천의와 후종으로 상징되는 천문학과 서학의 세계, 그리고 거문고와 점칠 때 쓰는 시초(蓍草), 활로 상징되는 담백한 탈속의 세계이다. 그의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는 앞서 본 경(敬)의 공부론이 지배하는 이학자의 ‘집’과는 그 성격이 확연히 구별된다. 딱딱한 예와 권위가 사라지고, 대신 그 공간에 혼천의와 시계라는 새로운 상징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담헌이 연출해낸 이러한 새로운 공간은 그의 우인들에서 조차 그 해석에 상당한 차이를 드러낼 정도로 생소하였다. 예로 자명종에 관한 몇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 보자.
a)이정호(李鼎祜)
톱니바퀴 뉘 굴리고 종은 뉘 치는지 / 牙輪誰轉鐘誰扣
하루 12시를 물시계로 알려 주네 / 一十二辰警刻漏
인위의 극치가 그대로 자연이니 / 人爲之極能自然
그 속에서 천리가 있음을 안다네 / 暗中須識有那天
b)손유의(孫有義)
연못 가운데 산각이 있는데 / 山閣水中央
고요히 참선하며 좌망을 배우네 / 安禪學坐忘
시간가는 것을 깜박 잊고 있는데 / 晷移渾不覺
물시계 시각소리가 똑딱거린다 / 銅漏奏鏗鏘
c)엄성(嚴誠)
똑딱 똑딱 이 무슨 소릴꼬 / 韽韽此何聲
절간 연화루(물시계) 소리와도 같네 / 或擬蓮華漏
고르게 12시로 나누어 / 平分二六時
밤낮으로 시간을 알려 주네 / 以警宵與晝
주인은 언제나 일찍 깨어 / 主人常惺惺
새벽 닭소리 기다릴 것 없네 / 不必待晨敂
이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자명종은, “인위의 극치가 그대로 자연이니 그 속에서 천리가 있음을 알려 주는 물건”이기도 하고, 坐忘을 배우는 도구로도 이해되고, 물리적인 시간을 알려 주는 기기로도 설명된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뒤에서 자세히 재론할 것이나, 이러한 혼천의와 자명종은 이 시기 실학파들의 새로운 시간관과 공간관을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상징이라는 것이다. ‘집’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단서인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명백히 달라지는 그의 세계가 과연 어떠한 철학적 바탕 속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교육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점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담헌은 그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하여 매우 난해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추호(秋毫)가 크고 태산이 작다.’ 한 것은 장주(莊周)의 과격한 이론인데 내가 지금 천지를 하나의 초집 정자로 여기니, 내가 장차 장주의 학문을 하려는 것일까? 30년을 성인의 글을 읽었는데 내가 어찌 유학(儒學)을 버리고 묵자(墨子)의 학으로 들어갈 것인가? 쇠퇴한 세상에 살면서 상실된 위신을 보자니, 눈이 찌푸려지고 마음을 상함이 극도에 달한 것이다. 아아! 만물이나 내 자신이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인 줄을 모른다면 어찌 귀천과 영욕(榮辱)을 논할 수 있을 것인가? 갑자기 생겨났다가 갑자기 죽어가 마치 하루살이가 잠시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닌 것이다. 그만 두어라, 한가로이 이 정자에서 누웠다가 자다가 하다가 앞으로 이 몸을 조물주에게 돌려보내리라.
담헌은 천지를 하나의 띠 집으로 여기는 그의 생각이 장자의 이론으로 비쳐질 것을 두려워한다. 귀천과 영욕과 같은 자잘한 인간사의 일은 여여한 생사의 흐름에서 보면 매우 하잘것없는 것으로 비친다. 그는 천지가 집이고, 집이 곧 천지인 세계를 동경한다. 그에게는 명백히 삶을 구속하고 속박하는 일체의 사상에 대한 회의가 깃들어 있다. 그가 그의 정자의 당호를 ‘乾坤一草亭’이라고 이름 한 것은 생활 속에서의 번다한 예와 권위가 삶의 生意를 구속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리라. 초정 박제가는 그의 이러한 삶의 모습을 보면서, “멀리 놀아 세속 더러운 것을 잊어버리고(遠遊忘俗隘)”, “몸에는 망령된 훼예가 없다네(身無妄毁譽)”라고 그의 탈속된 모습을 상찬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담헌의 태도에서 약간의 혼란을 느낀다. 담헌의 생활에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문명과 기기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과 청조의 선진문물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의지 등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의지가 담겨 있고, 다른 쪽에서는 세속을 벗어나고 물러나고자 하는 은일의 자세가 강하게 노출된다. 그의 이러한 염퇴적 자세는 그의 시문 곳곳에서 나타난다. 담헌은 그의 가장 강력한 사상적 동지인 연암에게 보낸 시에서, “자질구레하고 미천한 자도 붓을 팽개치고 밭 갈기는 부끄러워”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그 스스로 허유ㆍ무광과 같은 은자의 자취를 따라서 마침내 逸民의 이름을 차지하려 하오“라고 소회를 피력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탈속적인 자세는 종래의 딱딱하고 굳어진 예에 대한 반감으로 곧잘 나타난다. 그는 아동들이 지나치게 예나 형식에 구속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동들이 학령에 너무 구애되고, 스승의 방침이 엄해서 아이들의 자유스러움과 情誼를 구속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그는 예란 편의에 따르고 융통성이 있어야 할 것임을 말한다. 그는 “주공(周公)의 제도는 주(周) 나라의 편의(便宜)에 따른 것이고, 주자(朱子)의 예(禮)는 송(宋) 나라의 풍속에 따른 것이오. 그러므로 편의를 따르고 풍속에 맞추어서 줄이기도 하고 보태기도 하는 것이니, 정한 법이 없는 것이오. 이런 때문에 행해도 무방하고, 행하지 않더라도 무방한 것이 열에 두세 가지는 있을 것이오. 그런데 이제 그 두세 가지의 가볍고 또 작은 것을 가지고 변역(變易)할 수 없는 대전(大典)을 만든 다음 악착스럽게 조금도 어김없이 이것으로써 예(禮)를 삼는다면 그 융통성 없이 얽매인 것이 혹 임방(林放)에게 비웃음을 면하지 못할까 두렵다.”라고 말한다.
그럼 그의 이러한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의 사유의 밑바탕에는 이미 조동일 교수가 잘 지적하였듯이, 氣一元論的 이해가 자리하고 있다. 만약 그가 진정한 기일원론자라고 한다면 그의 일상에 대한 태도나 교육의 방식은 앞서 말한 敬의 공부론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그의 사상적 특질을 잘 보여 주는 이기론에 관한 한편의 글을 살펴보도록 하자.
무릇 이(理)를 말하는 자 반드시 ‘형(形)이 없고 이(理)가 있다.’ 한다. 이미 형이 없다고 하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이(理)가 있다고 하면 어찌 형이 없는데, 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대개 소리가 있으면 있다고 하고, 빛이 있으면 있다고 하고, 냄새와 맛이 있으면 있다고 하니, 이미 이 네 가지가 없으면 이는 형체가 없고 방소(方所)가 없음이니, 이른바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 또 이르되 소리가 없고 내음이 없으면서 조화(造化)의 추뉴(樞紐)가 되고 품류(品類)의 근저(根柢)가 된다고 하면 이미 작위(作爲)하는 바가 없는데, 무엇으로 그 추뉴와 근저가 되는 줄 아는가? 또 이른바 이(理)라는 것은 기(氣)가 선(善)하면 선하고 기가 악하면 악하니, 이는 이가 주재하는 바가 없고 기의 하는 데에 따를 뿐이다. 만일 이는 본래 선하고 그 악한 것은 기질(氣質)에 구애된 바요, 그 본체(本體)가 아니라고 하면 이 이(理)는 이미 만화(萬化)의 근본으로 되어 있는데, 어째서 기(氣)로 하여금 순선(純善)하게 하지 않고 이 박탁(駁濁)하고 어그러진 기(氣)를 나아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가? 이미 선의 근본이 되고 또 악의 근본도 된다면 이는 물에 따라 변천하는 것이요, 전혀 주재(主宰)함이 없는 것이니, 예부터 성현이 무엇 때문에 하나의 이(理)자를 극구(極口) 말하였겠는가?
위의 인용문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리라는 것은 기가 선하면 선하고 기가 악하면 악하니, 이는 이가 주재하는 바가 없고 기의 하는 데에 따를 뿐이다.”라는 문장이다. 담헌이 주기론자임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다. 그는 또한 “천지의 가득 찬 것은 다만 氣일 따름이고, 리는 그 가운데 있고, 기의 근본을 논하면, 고요하며 하나이고, 조화롭고 비어 있으며, 맑고 흐린 것은 없다.”고 한다. 그의 철학에는 이렇게 화담 서경덕이나 녹문 임성주와 같은 주기론적 태도가 매우 강렬하게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담헌의 사상적 특질은 이들 화담이나 녹문과 같은 주기론자들의 사유와 비교해 보는 가운데에서 좀 더 구체성을 띄게 될 것이다.
우선, 기일원론자로서의 화담은 이 세계의 본질을 불생불멸하며 시공을 떠나 무한히 반복 순환하는 기의 흐름 속에서 찾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만물은 모두 이 일기(一氣)의 가운데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잠시 깃들어 있는 존재”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죽음조차도 “제집으로 돌아가듯 본원의 세계인 선천(先天)으로 돌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피상적인 모습에서는 아까 보았던 담헌의 <乾坤一草亭題詠>에서의 자세와 흡사하다 기실 이러한 자연관 속에서는 인륜적 가치나 질서를 존중하고자 하는 인간학이 형성되기 어렵다. 다만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소요(逍遙)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으면 행복한 삶이다. 따라서 이학자들에서 보이는 인성론이나 공부론이 자리할 공간이 거의 없다.
화담과 같은 주기론자에게서는 기의 항상성과 근원성을 이해하는 것이 곧 공부인 것이다. 그에게는 개별적인 物속에서 객관적인 법칙성(理)을 찾고자 하는 格物 공부가 그다지 요구되지 않는다. 다만 마음을 무사무위(無事無爲)의 상태에 둘 수 있는 無心의 공부를 하여야 하는 것이다. 화담의 자연철학에서는 선천기와 후천기가 체용의 관계망 속에서 통일성을 확보한다. 후천기로서의 자연은 선천기로서의 태허와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인 관계를 형성한다. 화담에 따르면 텅 비고 고요한 것은 기의 체(體)이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기의 용(用)이다. 만물이 만들어지기 이전을 이름 하여 체(體)로서의 태허라 하고, 만물이 각각의 고유한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후를 용(用)으로서의 기로 파악한다. 구체적인 삶과 역사가 펼쳐지는 이 현상의 세계도 기의 작용과 취산(聚散) 작용의 결과일 뿐, 인간의 주체적 의지나 윤리서의 소산은 아닌 것이다.
이 세계의 본질을 기의 흐름으로 파악하는 것은 녹문 임성주(1711-1788)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담헌과 같은 洛論 계열에 속하면서 주기론적 관점에서 人物性同論의 타당성을 주장하였던 녹문의 견해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 있어서도 우주의 본질은 기고, 이는 기의 한 속성이자 조리(條理)일 뿐이다. 즉,
우주 사이에서 직상과 직하로, 안도 없이 밖도 없이, 처음도 없고 마지막도 없이, 가득차서 넘치고 허다한 조화를 만들어 내며, 허다한 인과 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다만 한 개의 氣일 뿐이다. 조그만 빈 구석도 없으니 어찌 理자를 따로 안배하겠는가? 오직 기가 이렇게 성대하게 작용하는 것은 누가 시켰겠는가? 自然而然한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자연인 것을 두고 성인은 이름하여 도라고도 하고, 이라고도 한다. 또 한 그 기는 원래 텅 빈 그 무엇이 아니다. 전체가 昭融하며 안팎으로 洞徹할 것이 오직 生意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때에 알맞게 물러 앉아 스스로를 길러 본성을 회복”하는 사람에 다름 아니다. 마음을 비우는 행위란 다름이 아니라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만물의 머무를 바를 아는 것(知止)이다. 화담에 따르면, “무릇 우주에 있는 만물과 만사는 각각 그 머물음이 있지 않음이 없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고로 경의 상태에서는 이치를 궁구하는 것(窮理)이 아니라, 이치를 본다(觀理)고 한 점에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화담이나 녹문에게 있어 이(理)는 기의 한 속성이자 조리(條理)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기가 지닌 일정한 규칙성과 법칙성을 의미할 뿐이다. 아는 결코 기를 초월한 선험적 질서나 규칙도 아니요, 인륜적 질서의 당위성을 보장해 주는 궁극적 실체도 될 수 없다. 따라서 화담이 경의 상태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것은 기의 모이고 흩어짐에 의해 실현되는 우주적 존재질서의 여여한 흐름과 그 규칙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녹문에게 있어서는 기의 생명력(生意)를 체득하는 것이 공부의 요체인 것이다. 집에서의 공부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특히 율곡의 정신을 계승하는 이들의 주기론은 그들의 공부론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기호학파의 심즉기설은 율곡의 心是氣설에 근거한 것으로, 우암과 이간, 남당 한원진 등을 거치면서 퇴계학설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학설로 등장하였다. 마음이 기라는 이들의 주장은 주자학의 근본 명제인 ‘心統性情’의 근본 교설을 위협하는 것이었고, 본성의 도덕적 우위를 강조하는 퇴계학파에게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이론적 간극을 남겨 주었다.
율곡은 ‘본성이란 이와 기의 결합(性者理氣之合也)’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은 純善한 것이며 사단이며 곧 理일 뿐이며, 情은 선악을 겸하고 氣라고 하는 퇴계학파의 견해를 사실상 부정하는 것이다. 퇴계학파에서는 사단은 理發로 칠정은 氣發이라는 互發의 입장을 지니고 있었으나 율곡의 문도들은 사단도 칠정에 포함된 기발로 이해한다. 그들의 이러한 견해는 공부론에서도 엄청난 차이를 나타나게 된다. 퇴계의 문도들은 정이 아직 드러나기 전의 순선한 상태인 未發의 공부를 강조한다. 그들은 이 미발의 상태에서 성의 본체를 체인함으로써 마음에서 발출되는 정을 주재할 수 잇는 능력을 가질 있는 함양공부를 강조한다. 그것이 곧 居敬공부이다. 따라서 그들의 공부론은 분수(分殊)로서의 현실 세계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理一로서의 본원의 세계에 더욱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율곡 학파의 경우, 인간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외부 사물과의 접촉에 의해 발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분수의 세계에 더욱 있다. 그들은 본성이던 혹은 선한 정의로서의 四端이던 모두 외부 사물의 자각에 의해 발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미발의 상태보다는 이발 상태에서의 공부를 중시하였고, 지각설에 근거한 공부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퇴계 계열은 이러한 울곡학파의 공부론에 대하여 지나치게 分殊의 세계에 매몰되어 이 세계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정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순암은, “대저 道가 한결같으면 專一해지고, 전일하면 고요하고, 고요하면, 밝음이 생기고, 밝음이 생기면 물건이 비친다. 그친 물 밝은 거울(止水明鑑)은 체(體)의 섬(立)이요, 물을 깨우치고 업무를 이룸(開物成務)은 용(用)의 달통함이다. ‘체’에만 전념하는 것은 佛氏의 空寂에 달아나는 일이요, ‘용’에만 전념하는 것은 (俗儒)의 명리를 뒤따르는 일이다.”라고 하여 절충적인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주기론자로서의 담헌의 공부론에서는 사실상 본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復其性’의 여지가 사라진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는 ”氣가 선하면 理 역시 선하고, 기가 악하면 이 역시 惡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이원적인 나눔을 부정하고, 선과 악의 근거를 모두 기에 두고 있다는 특이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담헌에 이르러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공부의 태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한다. 조선후기 유학에서 공부의 초점은 언제나 마음으로 모아졌다. 변화하는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하면 마음의 고요한 본체를 회복하는가 하는 점이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이다. 마음공부의 최종 목적은 개인의 사욕과 사정(私情)이 개입된 인심(人心)의 세계로부터 하늘로부터 품부된 온전한 본성을 회복한 도심(道心)의 세계로 옮겨 가는 것이다. 사욕을 걷어 내고 마음속에 내재한 도덕적 본체, 즉 리(理)를 찾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은 곧 마음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에 아이반호(Philip Ivanhoe)는 성리학의 마음공부란 본래적으로 있는 인간의 자연성을 ‘정화’ 혹은 ‘회복’해 간다는 의미에서 이를 ‘회복의 모델’(recovery model)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담헌은 인물성동론의 입장을 취하면서, 본연지성이니 인의예지니 하는 것은 삶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억압하는 구속일 뿐임을 내세운다. 그는 인의예지는 物에서도 널리 인정되는 삶의 의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심지어, “사람으로써 物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물이 천하다. 물로써 사람을 보면 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하늘에서 보면 사람과 물이 한 가지이다.”라고 하여 도덕도 상대적인 것일 뿐임을 내세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종래 조선 사회를 지배하여 왔던 예에 대한 생각도 바꿔놓는다. 그에게는 常經으로서의 예란 의미가 없다. 그에 따르면, “주공(周公)의 제도는 주(周) 나라의 편의(便宜)에 따른 것이고, 주자(朱子)의 예(禮)는 송(宋) 나라의 풍속에 따른 것이오. 그러므로 편의를 따르고 풍속에 맞추어서 줄이기도 하고 보태기도 하는 것이니, 정한 법이 없는 것이오. 이런 때문에 행해도 무방하고, 행하지 않더라도 무방한 것이 열에 두세 가지는 있을 것이오. 그런데 이제 그 두세 가지의 가볍고 또 작은 것을 가지고 변역(變易)할 수 없는 대전(大典)을 만든 다음 악착스럽게 조금도 어김없이 이것으로써 예(禮)를 삼는다면 그 융통성 없이 얽매인 것이 혹 임방(林放)에게 비웃음을 면하지 못할까 두렵다.”라고 주장한다.
자, 그러면 다시 주기론자로서의 담헌을 염두에 두면서 처음 제기한 담헌에 있어서의 ‘집’의 의미를 환기해 보자. 앞서 우리는 담헌의 생활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가 겹쳐져 있음을 이야기 한 바 있다. 혼천의와 후종으로 상징되는 천문 역법의 세계와, 거문고와 시초(蓍草), 활로 상징 되는 탈속의 세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환경은 엄숙한 도덕률이 지배하는 聖所的 성격의 ‘집’과는 그 성격이 확연히 구별됨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담헌의 주기론적 성격이 화담이나 녹문의 그곳으로부터 이탈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의 주기론적 관심은 학문적인 차원에서는 방대한 「籌解需用」의 저술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점차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차원으로 발전하고, 생활 속에서는 화담류의 逸民的 삶을 지향하고, 공부론은 내성적인 경 공부보다는 울곡 이래의 지각설에 근거한 공부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서 실제 생활에서 표출되는 그의 교육론은 그렇게 급진적이거나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 준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역외춘추론>을 주장할 정도로 예의 상대성을 강하게 주장한 담헌이지만, 실제 생활에서 그가 보여 주는 예와 가정에 대한 관념은 오히려 보수적이라고 할 정도로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여 준다. <건정동필담>에서 드러나는 그의 예법은 매우 고답적이고 신중해서 청국의 지식인들로부터 ‘時中之人“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또한 그가 쓴 <自警說>에서는 ”도(道)로써 욕(慾)을 잊으면 즐기되 미혹하지 않고, 욕으로써 도를 잊으면 미혹하되 즐겁지 않다.”라는 다분히 도학자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는 물론 종래의 마치 수도원 같은 분위기의 가정교육을 좀 더 實事的이고 실용적인 차원으로 옮겨 가기는 하였으나 아직 전체적인 대안을 제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는 소학이 실제적인 六藝를 중심으로 읽어져야 할 것을 주문한다.
나는 생각건대, 마음의 엄음[得]으로써 말하면 덕(德)이라 하고, 일의 이룸[成]으로써 말하면 업(業)이라 하지만 그 실은 한 가지다. 반드시 안배(安排)하고 분석(分析)하여 도리어 병폐(病弊)를 이루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옛 가르침은 그 어릴 때에 이미 육예(六藝)로써 가르쳤으므로 그 자람에 이르러 위로 비록 도(道)를 아는 데까지 미치지 못했더라도 아래로 적용함에 어긋나지 않았다. 지금 사람은 오로지 장구(章句)만을 힘써 그 근본은 얻었으나 그 말예(末藝)에는 맞지 않아 전폐(專廢)해 버린다. 이러므로 도(道)를 아는 사람을 이미 얻기 어려울 것인즉, 장구 송설(誦說)만은 비록 그 어긋남이 없다 하더라도 일용(日用)의 궐(闕)할 수 없는 것에 도리어 어두워 살피지 못하여, 왕왕 사정을 소탈(疎脫)함으로써 높은 운치(韻致)로 삼고, 서무(庶務)를 종핵(綜核)함으로써 비속(鄙俗)한 것으로 여긴다. 옛 군자는 비록 불기(不器)라 하지만, 일재 일예(一才一藝)에 어찌 일찍 무능한 군자가 있었던가? 이것이 세(世)에 도움이 없고, 속배(俗輩)에게 웃음거리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육예(六藝)의 가르침은 진실로 마땅히 쇄소(灑掃)의 절(節)과 병행해야 하며 잠시라도 폐해서는 안 된다.
집안교육은 소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소학이 공리공담의 도덕론보다는 실생활에서 필요한 일제일예(一才一藝)를 가르치는 과정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 구체적인 것이 바로 六藝이다. 그는 당시의 풍조가 실사적인 것을 유치하게 생각하고, ‘군자불기’라는 이름으로 일용의 사무를 대수롭게 생각하는 통폐가 있음을 비판하고, 「소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그가 청조의 문물을 보고 귀국하면서 산해관에서 약속했던 “다만 실심으로 실사를 행하면서, 도의의 안에서 한평생 지내야지.(但將實心做實事 道義門中度此身)”라는 결심을 현실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소학」에 대한 해석이 바뀐 만큼 담헌의 ‘집’에 대한 의미 해석도 차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다) 연암 박지원에 있어서의 ‘일상’과 ‘집’
연암과 평생을 함께 생활하였던 그의 처남 李在誠 은 연암의 제문 중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연암의 일상을 기리고 있다.
아하! 우리 박공이시어! 嗚呼我公
학문은 구차히 기이하지 않으시고 學不苟奇
문장은 구차히 새롭지 않으셨네 文不苟新
사실에 절실히 들어맞아서 기이하고 切事故奇
실제의 정경에 나아가서 새로웠네 造境故新
집안의 일상과 다반사들이 家常茶飯
모두 지극한 문(文)을 이루셨고 皆爲至文
기쁘고 웃고 성내고 꾸짖는 것이 嬉笑怒罵
또한 천진(天眞)을 드러내었습니다. 亦見天眞
위의 글은 연암의 생평을 잘 드러내고 있다. 즉 연암의 글과 행동이 기이하고 새로운 것으로 비쳐지는 이유는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춰진 사실의 실체적 진실을 찾고자 하고 또 항상 사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것에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집안 일상생활의 소소한 부분도 흘려버리지 않고 그 의미의 곡진한 부분을 밝히고 드러내는데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주목되는 점은 그가 기쁘고 웃고 성내고 꾸짖는 등의 情을 드러낼 때에도 언제나 ‘天眞’의 상태를 보여 주었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이 부분만을 떼어서 보면 양명의 성정론과 유사하다. 양명학에 있어서는. 마음의 본래면목이자 率性之道로서의 도심은 다양한 의미내용을 함축한다. 즉 사단만이 아니라 희로애락 등 칠정의 자연스런 발로, 나아가서는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형기의 자연스런 욕구까지도 모두 率性之道이자 良知의 발용인 道心으로 간주된다. 양명은 七情도 자연의 유행에 순응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良知의 용이라고 주장한다. 희로애락의 情에서 본성의 가장 밑바탕인 ‘天眞’을 찾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는 “진실로 문장의 이치를 터득하면 집안 식구끼리의 일상적인 이야기도 학교 교과 과정에 끼일 수도 있고, 아이들 노래와 속담도 「爾雅」에 들 수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이것은 진솔한 생활의 모습이 교육 속으로 들어오고, 여항의 노래와 속담이 교재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됨을 의미한다. 그의 이러한 발언은 한국의 교육사에서 주목할 만한 논의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문장의 이치란 무엇일까? 그가 말하는 문장론은 단순히 문장에 관한 견해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의 독특한 세계관이 녹아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는 “문장이란 古文과 今文이 없다. 오로지 스스로 자기 자신의 문장을 쓰면 그만이다. 눈과 귀가 듣는 바를 잘 드러내어서 그 형태며 그 소리를 곡진하게 그려내고 그 내용이며 그 상황을 남김없이 모두 따져서 드러나지 못함이 없다면 문장을 짓는 법도는 극진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장은 이 세계에 대한 자기 진술이라 할 때, 연암이 “오로지 스스로 자기의 문장을 쓸 것”을 주문하는 것은 ‘因循姑息’을 배격하는 연암의 주체적 사고와 맞물려 있다. 그는 인습적인 예법과 격식에 얽매이는 생활태도를 배격한다. 그에게 있어 ”천지는 비록 오래된 것이나 끊임없이 무한한 창조력(生生之理)을 보여 주고, 해와 달은 비록 오래 되었으나 그 빛을 발함은 날로 새로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연암 사유의 가장 큰 특징이 ‘사물을 항상 운동․변화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라고 한 임형택 교수의 지적은 탁견이다. 동시에 이 변화하는 세계는 無目的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생명력으로서의 生生之理를 발현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시간과 역사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창조적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에 그는,
만물은 다 같이 氣化 속에 있으니 어느 것인들 천명이 아니겠느냐? 무릇 性이란 心자와 生자의 뜻을 따른 것이니, 심에 갖추어진 것이요 生과 같은 족속이지. 氣가 없으면 생명이 끊어지는데 性이 어찌 生을 따르겠으며, 生이 아니면 성이 그치는데 善이 어디에 붙겠는가? 진실로 천명이 본연을 궁구하면 어찌 性만이 善하리오? 氣 역시 선하며, 어찌 氣만이 善하리오? 生이 아니면 성이 그치는데 善이 어디에 붙겠는가? 만물 중에 생을 누리는 것은 선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니 그 천명을 즐거이 여기고 그 천명을 순순히 따르면 物과 내가 같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하늘이 명한 性이라네.
라고 말한다. 연암에 따르면 “만물의 삶은 氣 아님이 없는 것이다. 천지는 큰 器이고 가득 찬 것은 氣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득 찬 기 속에 마치 복숭아의 씨처럼 안이 들어 있는 理란 다름이 아니라 生 과 같은 族이라고 하였다. 理란 생명인 것이다. 그는 性이 善한 것도 생이 있으므로 가능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마침내, “만물 중에 생을 누리는 것은 선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는 득의의 생명 철학을 드러낸다. 그는 “참다운 理란 보존된 씨와 같고, 씨를 일러 仁이라 子라 하는 건 바로 生生之理이기 때문” 그는 하늘의 듯을 즐기고 모든 생명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때 물아일체의 경지가 열린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실제 생활 속에서도 이러한 삶을 그리워하였다. 「과정록」에는 이러한 대목이 나온다.
못가에서 노닐 때마다 불초와 지산으로 하여금 각건에 團扇을 들고 배를 띄워 떠돌게 하고 책상위에 硯具 ․香鼎․茶具를 갖추어 두고 선군께서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시고는, “나는 그림 속에서 바라본다.”하셨다.
이렇게 과정록을 통해 그의 일상을 살펴보면, 예의 두터운 옷에 짓눌린 선비의 모습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웃음과 날카로운 해학이 함께 하였다. 樂天의 자세로 삶을 긍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마지막 경계, 즉 물아일체의 세계는 사실상 전대의 도학자들이 꿈꾸던 이상향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더구나 자연 속에서 生生之理를 느끼고 그것을 통해 천인합일의 경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지닌 공통된 바램이다. 기실 퇴계가 녹음이 우거진 여름철에 매미 소리를 사랑하고, 마당가의 한 포기 풀에도 경외심을 느끼는 것은 그 풀과 매미의 울음 속에서 무한한 生意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뜰 앞의 풀 한 포기가 나타내는 생명의 미묘한 움직임은 천지의 유행을 그대로 밝게 드러내 주는 것이고, 이러한 흐름은 본질적으로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관여하는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문제는 연암은 과연 어떤 인식과정과 노력을 통해 物이 지닌 生意를 감득하고, 그것의 生生之理를 확인하고자 하였는가? 성리학에서는 이러한 도의 실현이 어느 날 느닷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즉 오랜 세월의 居敬과 窮理 공부가 온축되어야 가능하다는 보았다 매 순간 불시에 찾아오는 사사로운 욕심을 털어내고, 존재의 각성을 깨우치는 경(敬)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오랜 세월 그 사물의 성격과 이치를 탐구하면서 우유함영(優遊涵泳)하면, 마침내 사물의 본질이 환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객관세계로서의 대상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고 인간과 함께 하기를 허락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마음의 수양을 통해서만 비로소 객관세계의 진정한 본질을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이 유학의 공부론이다.
이러한 성리학의 공부론과 비교할 때, 연암에게서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과연 어떻게 자연과 조응하고, 여하히 합일의 상태에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연암에게서는 매 순간 개개 사물의 생생한 본질에 다가서고, 그 속에서 생명의 의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지성의 힘은 강렬하나, 그것을 항상적으로 유지하게 하는 수양론이 허약하다. 즉 물아일체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성리학에서의 敬 사상에 비견되는, 어떤 형태로든 안정된 공부론이 요청될 것이다. 우리는 그 대안을, 이미 앞선 연구에서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진 바 있지만, 그의 ‘冥心’에 관한 독특한 사유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은가 한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도다. 명심(冥心)한 자는 귀와 눈이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혀져서 병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내 마부가 발을 말굽에 밟혀서 뒷 차에 실리었으므로, 나는 드디어 혼자 고삐를 늦추어 강에 띄우고 무릎을 구부려 발을 모으고 안장 위에 앉았으니, 한 번 떨어지면 곧 강이다. (그러나)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으며,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性情)을 삼아, 이제 내 마음은 한 번 떨어질 것을 결정하니, 내 귓속에 강물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 건너는데도 걱정이 없어 의자 위에서 좌와(坐臥)하고 기거(起居)하는 것 같았다. (중략)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니 외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잃게 하는 것이 이 같거늘, 하물며 인생이 세상을 지나는데 그 험하고 위태로운 것이 강물보다 심하고,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이 되는 것임에랴.
박희병 교수는 冥心을 노장의 坐忘과 같은 개념으로 풀이하였다. 또한 그는 명심을 도가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대상과 나를 동시에 잊음으로써 이해․득실․시비 등의 사려 분별을 초월해 물아일체에 이르는 ‘심리적 혼동상태’를 가르킨다.“고 보았다. 따라서 명심은 인간의 분별지 혹은 감각적 인식을 매개한 개념적 파악을 초월하는 마음의 경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명심이 만약 이러한 상태라고 한다면, 연암은 이미 유학의 경계를 벗어난 것이 된다. 유학에서는 객관세계의 외물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되, 이른바 <艮其背>의 태도를 견지하라는 주문한다. 물을 일부러 외면하거나 일상의 상태를 벗어나 버리면 일에 구애되어 각각의 물에 있는 그 물의 고유한 이치를 모른다는 것이다. 즉 물마다 물에는 고유한 법칙이 있어(物各付物) 그대로 따른다면 오히려 물을 부리는 일이 되지만, 그러나 물에 구애되면 물에 사역(役於物) 당하게 되는 것이다.
연암이 말하는 ‘명심’이 과연 ‘경’의 상태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하는 점은 앞의 내용만으로는 쉽게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좌망’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은, 이러한 상태가 자칫 이 우리가 사는 ‘일상’을 가볍게 생각한다거나 혹은 假有의 세계로 이해한다는 점에 있다. 강물은 변함없이 세차게 흘러가는데도 불구하고, ‘명심’의 상태가 되면 그 강물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바깥 외물에도 그 나름의 고유한 존재법, 즉 分殊之理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것이 내 마음의 리와 조응하도록 하는 것이 궁리를 통한 공부인 것이다. 흐르는 강물의 속도를 정확히 살펴보고, 그 물의 흐름을 어떻게 헤쳐 나아갈 것인가를 궁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물이 와서 응하나(物來而應) 물의 고유한 법칙을 벗어나지 않고, 물이 감에 化하나(物往而和) 결코 그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연암 사상의 특장은 ‘명심’의 상태가 객관적인 물을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리학적인 인식론의 한계를 돌파하여 객관세계의 실체적 진실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 실체적 진실에 도달하는 수단과 방법이 새로워진 것이다. 필자는 다른 자리에서 수양을 통해 도의 세계에 다다르고자 하는 성리학적 모형을 인격적 지식(Personal Knowledge)의 개념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면, 연암과 같이 감성과 직관에 의해 도의 세계에 이르고 하는 지식체계를 '미학적 지식(Aesthetic Knowledge)'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할 것을 제안하였다. 연암이 아이들의 교육에 임하는 자세도 이러한 기미가 엿 보인다. 그는 창애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마을 아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쳤더니 읽는데 싫증을 내었습니다, 그래서 꾸짖었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하늘을 보니 푸르고 푸른데 하늘 ‘천’이란 글자는 왜 푸르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글을 읽기 싫어요.
이 경우, 문자는 物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내 마음과 하늘이 직접적으로 대면할 때, 하늘은 푸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감성과 직관에 의해 도의 세계에 이르고 하는 미학적 지식처계(Aesthetic Knowledge)'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성리학에서의 ‘하늘’은 좀 더 이학적이고 도덕적인 설명 속에서 그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일종의 형이상학을 함께 포지한 개념물인 것이다. 말하자면 연암은 ‘일상’에서 성리학적 해석체계를 걷어내고, 그 대신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통로를 통하여 ‘천’의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것에서는 성공하였으나, 새로운 세계를 구성할 통합적인 원리나 질서율을 구성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 결어
전통적인 유자들에게 있어서 ‘집’은 의례공간이자 일종의 종교적 聖所와 같은 의미를 지녔다. 본고에서는 실학자로서의 담헌은 주기론에 근거하여 좀 더 실사적이고 실용적인 성격으로 옮겨 가고자 하였음을 살펴보았다. 그는 주로 울곡 이래의 지각설에 근거한 공부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는 모습을 택했으나, 실제생활에서의 그는 여전히 ‘집’에 관한 전근대적인 담론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연암에 있어서는 ‘집’은 본성의 가장 밑바탕인 ‘天眞’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그가 지향하는 ‘冥心’은 종래의 敬 철학을 대신하여 객관 세계의 실체적 진실에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감성과 직관에 의해 도의 세계에 이르고 하는 '미학적 지식(Aesthetic Knowledge)'으로는 조선후기 사회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하기에는 근본적인 제약을 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들이 제기하는 대안의 궁극적인 지향점도 기실 성리학자들의 그것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