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근대화의 일환으로 관리 복식과 군복의 개혁
사실 처음부터 반발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신건친군영을 설립할 때 청군 지휘관들이 주도가 되어서 이들은 청군과 친군의 군복이 상당히 유사한데, 친군 군복은 두터운 청색 모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오른쪽 앞판은 왼쪽 겨드랑이에서 매듭단추로 고정시켰거. 소매는 끝으로 갈수록 좁아져 활동이 매우 편리해졌습니다. 1884년 윤 5월에는 고종은 좌우영의 군사들이 입고 있던 간소화된 신식 군복을 전 부대로 확산시켰습니다.
이것이 갑신의제개혁의 시작이었는데, 일본과 중국의 군대 훈련 방식을 차용할 때 각각 교련병대와 신건친군영이 입었던 군복이 이미 두 차례 간소화된 것으로 변화된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실시 명령이 떨어진 처음에는 외면상으로는 신하들로부터 큰 반발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복과 사복이 개혁된 이후로는 군복 개혁에 대 한 불만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게 되죠.
1884년에 있었던 갑신의제개혁은 처음부터 고종이 의제개혁을 통해 번거로운 것을 없애고, 편리함과 간편함을 추구했으며 둘째로 시대 상황에 맞도록 무력을 강조했다는 점과, 마지막으로 사치를 억제하려는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뚝심있게 진행이 됩니다.
고종은 무, 즉 군대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고종은 문무관을 구분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소매가 좁은 옷을 입도록 명했습니다. 이 당시의 시대는 혼란스러웠고, 고종은 누차 조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불과 2년 전인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대국이라고 믿었던 청은 베트남의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와 대치하고 있었으며 결국은 패배나 다름없는 결과를 받았으며 더욱이 서양 문물·제도 도입한 이래로 일본의 군사력 은 급속도로 향상되었으니고종은 위기의식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고종은 군사력을 키우려는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냈습니다. 따라서 문무관을 가리지 않는 복식, 그간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군복 간소화 방침은 관복과 사복 개혁이 이루어진 시점부터 문무관들의 관심사가 되게 됩니다.
수 많은 일선의 당하관 무관 관료들은 고종의 뜻에 기꺼이 동참했고, 고종은 군사들이 간소화된 군복을 입고 훈련과 실전 상황에서 민첩하게 행동할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또 고종은 문관에게 무관이 주로 착용하던 전복을 입도록 지시함으로써 지금이 전시상태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자각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충청도 청풍의 유학 金商鳳은 소매가 좁은 군복을 착용할 경우 무기 사용이 편리해진다고 언급하며, 이를 곧 군사를 강하게 양성하는 방법이자 곧 부국의 방도라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이 즈음에 대신들의 관복과 군복이 흑색으로 변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특히 관복에 있어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신들은 홍색으로 염색된 옷을 입었는데 이게 심히 비쌌죠. 어느 정도냐면 대신들이 입던 홍색 옷을 하나 구매하려면 어지간한 1가구의 1달 치 식비가 들어갈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종이 요구하는 흑단복을 입게 된다면 이것은 매우 가격이 쌌는데, 먹을 갈아 만든 먹물, 숯을 갈거나 우려낸 물, 가마솥 바닥의 검댕이, 나무뿌리를 태운 재를 모아 염색했기 때문이죠.
이 와중에 군대에 대해서는 기존의 복식보다는 서구식 제복을 더욱 추구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특히 민영익의 경우는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는 동안 서양의 다양한 형태의 군대를 눈여겨보고 왔고, 특히 왕실을 돕는 민병대(militia)에 주목했던 그는 조선으로 돌아와 보부상의 도움을 받아 직접 민병대를 운영했습니다.
(“What had most impressed him in his foreign travels were the various armies he had seen. … As soon, therefore, as he reached home, he set himself to organize what he was pleased to call a militia.”)-Percival Lowell(1886) “A Korean Coup d’Etat The Atlantic Monthly, vol. 58, pp.603-604.
그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부유한 자들에게서 후원을 받았고 약 1,000명에 달하는 인원을 모집했고, 이 민병대원들은 마티니 헨리 소총(Martini-Henry rifle)을 장착하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어찌보면 정규군보다도 무장이나 제복 등에서 월등했을 수도 있을 테지요.
(“He therefore obtained money from wealthy people who held the same opinion, and
enlisted over 1,000 people, who were in the habit of passing their time in gambling, or
who were not occupied in any legitimate calling.”)-Anonymous(January 6, 1885) “ITEMS ABOUT COREA(Translated from the Jiji Shimpo)”. The North-China Daily News
이들이 어떤 옷을 입고 훈련에 임했는지는 고종의 반응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고종은 이 부대를 위협적으로 느꼈고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쿠데타나 혹은 임오군란과 유사한 군사반란의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Fearing the King, he ordered them to put away the uniform they had been supplied with, and to dress as usual, and he also put an end to all drilling.”)-Anonymous(January6,1885)“ITEMS ABOUT COREA(Translated from the Jiji Shimpo)”.The North-China Daily News
민병대는 단체로 제복을 입고 있었고 고종은 모두 편복을 착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어쨌거나 민영익이나 고종이나 전부 서구식 제복에 대한 도입 의사 자체는 컸고, 우선적으로 기존 군복의 간소화 작업을 이어나갑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고종은 자국에 파견된 청군 지휘관인 오장경과 논의하여 조선군 장병들이 훈련을 받기 편리하도록 간편화된 군복을 채택하는데 동의했고, 1884년 에 신식 군복을 전 부대로 확대시키기로 결정했으나 오장경이 6월에 사망하면서 어떤 식으로, 어떠한 군복이 확대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여러 사진 자료들을 보면 어느 정도 해답을 알 수 있죠. 미국 공사관에서 대리공사를 지낸 조지 클레이턴 포크가 찍은 1884년과 1885년의 사진을 보면 각각 공사관 경비대장과 조선군 총사령관으로 표기된 인물들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저 오른 쪽에 있는 인물이 공사관 경비대장인데 1881~1882년에 착용했던 교련병대의 복장과 유사한 신식 군복을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1885년 북한산에서 활쏘기 훈련을 하는 사진인데 신식 군복을 입은 이들과 전통적인 구군복을 입은 이들이 같이 보이는 것을 보면 최소한 1885년까지 구식 군복과 신식 군복이 혼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죠.
이건 1880년대 중후반에 미 공사관에서 찍은 사진인데 왼 쪽의 인물을 보면 공사관을 경비하는 조선군 병사들로 보여집니다. 이때의 군복은 1884년보다도 더욱 색이 짙어졌으며 1892년에 제2대 프랑스 영사로 온 프랑뎅의 사진과 증언은 더욱 결정적입니다.
총융청을 방문한 프랑뎅 영사가 찍은 사진인데 복장이 1884년과는 더더욱 달라집니다. 아주 잠시잠깐 청군의 복장을 따라갔다가 자체적으로 변화시킨 신식 군복을 입었으며, 비교적 구하기 쉬운 어두운 색 계열의 군복으로 바뀌어가는 것이었죠.
고종이 행차하는 것을 본 프랑뎅 영사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화려한 전통 복장 차림의 장군과 말을 탄 기병의 뒤로 포병 소대, 속사 기관총 사수, 야포, 近衛兵이 줄이어 열을 맞췄다. 또 이 행렬에는 ‘유럽풍의 군복’을 입은 군사들이 열을 지어 군중을 막았다.-
이걸 보면 사실상 1890년대로 들어오면서 과거의 구식 군복은 거의 사라지고 신식 군복으로 죄다 넘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사진들을 자세히 보시면 사람마다 입은 군복이 조금씩 다르고, 재질도 다른데 이건 계급의 차이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무슨 이유인지는 아직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1894년 8~9월 경에 찍힌 조선군 병사들이 바로 이것이죠. 확실히 어두운 색 계열의 군복과 간편화된 짧은 상의를 입고 있습니다. 이후 1897년에 육군복장규칙이 제정된 직후부터 프로이센식의 군복이 도입되면서 저러한 복장은 사라지게 되지만 1881~1897년까지 약 16년 간 변화되었던 조선의 군복은 큰 틀에서는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고종과 대신들은 군복의 간소화 및 서구화에 대해서는 큰 이견을 보이지 않았고 1882년 임오군란 직후 혼란한 상황에서 잠시 청군의 군복제를 따라했다가 자체적인 서구화를 통한 군복들을 생산하여 지급했음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군대는 값싼 흑색 염료로 만들어진 군복을 별 무리 없이 받기는 했는데 흑단령이 공포되고 나서 대신들이 반발하던 것을 보면 아이러니컬 하기는 합니다. 하여간 자체적인 노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연구할 가치가 있어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