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신농장 방문
2021년 5월 25일
우리 문중에는 3분의 ‘성표’가 계서서 내 휴대전화에는 원로 전성표, 동신소방 전성표, 명고 전성표이라고 저장되어있다.
그중에서 내가 직장생활을 할 때 교류가 있은 동신소방 전성표 아저씨가 오늘 본인의 강릉시 연곡면에 있는 ‘동신농장’을 구경시켜 주기로 한 날이다.
처음 가는 곳이라서 음료수를 사서 적십자회관 앞에서 차를 타고 가면서 ‘동신소방’ 창업에 얽힌 이야기와 사업할 때의 에피소드(episode) 등을 듣게 되었다.
‘동신소방’은 1963년 본인이 36세 되는 해에 강원도에서는 3번째이고 강릉에서는 첫 번째로 소방설비업과 과학 기교재 공급사업을 시작하였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은행 강릉지점, 강릉고등학교, 강릉문화원 소방설비를 했던 것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하였다.
관공서 일을 수주할 때 예정가격을 몰라서 애를 태웠을 때가 많았다며 입찰의 어려움에 대하여 회상하였다. 일단 공사를 수주하면 최선을 다해 최고의 품질로 시공하도록 노력하였음을 이야기하면서 대인관계도 중요함을 설명하였다. 사람들의 취미를 파악한 뒤 신의(信義) 성실(誠實)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 사업의 비법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젊었을 때는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면 그만큼의 돈이 들어옴을 경험했으며, 본인의 돈에 대한 지론은 “서천(西天)의 구름과 같다.”라는 것이다. 서천(西天)의 구름에 비가 들어있어도 지금 이곳은 비가 안 오므로 대지가 목말라 있게 된다. 이 장소에 도착하여 비가 실제로 내려야 가뭄이 해결된다. 이처럼 공상(空想)만으로는 돈을 벌지 못하므로 실제로 땀을 흘려 노력하여 비가 땅에 닿는 것 같이 돈이 내 손에 들어와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또한 시간이 지나서 서천(西天)의 구름이 이 땅 위에서 비를 내려주기도 하고 비가 내리지 않고 지나가도 한다. 그러므로 잘 풀릴 때는 자연히 비가 내리듯 돈을 벌 기회가 생긴다는 뜻도 된다.
홍제동에 있는 ‘위밍수영장’을 짓는 것도 서천(西天)의 구름이 도와서 된 경우와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 땅을 팔라는 사람이 있어 팔려고 마음먹었다가, 아들이 ‘강릉은 인구 대비하여 수영장 시설이 부족하므로 수영장을 신설하면 강릉 인프라 확장에 일조하고 사업 측면으로도 수익을 볼 수 있으니, 매도하지 말고 수영장을 건축합시다.’라고 건의하여 수영장 건축으로 선회(旋回)하였다고 하였다.
국제 경기에 맞는 수영장의 길이는 50m와 25m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50m 길이의 수영장에서 펼쳐지는 경기를 정규코스, 25m를 쇼트코스 대회라 부른다. ‘위밍수영장’ 길이는 얼마인지 궁금하였다.
수영장 위층에 있는 커피점에 가 보니, 시내 전경과 교동 전경이 거의 360도 볼 수 있어 좋았다. ‘위밍수영장’을 지은 것은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주문진 가는 도로에서 오대산 쪽으로 올라가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소금강으로 가는 분기점에서 송천약수 쪽으로 약 1,000m쯤 올라가면 성원사라는 절의 입구가 표시되어있다.
성원사를 창건하신 주경스님의 일화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강릉 철갑산 중턱에 자리 잡은 성원사(聖源寺, 주지 주경)는 수많은 불자의 갈앙(渴仰)이 모여 일군 도량이다. 1994년 8월 입재(入齋)한 종무소 불사가 창건 불사의 시작이었으니 성원사는 불과 13년 만에 강원을 대표할만한 전법 도량으로 거듭난 셈이다. 결제(結制)철이나 산철이나 구분할 것 없이 항상 새벽 2시 30분 일어나 예불하고 참선하고 염불 정진하는 주지 주경 스님과 스님이 전국을 순례하면서 파종한 ‘갈앙 법문’을 실천하려는 재가 불자들이 있었기에 매우 어려웠던 창건 불사도 가능했다.
20안거 이상 성만(盛滿)한 수좌 스님들조차 “예가 정말 좋은 절터냐, 현몽한 절터가 맞느냐”고 물을 정도로 성원사는 강원도 산골 중에서도 두메에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 터를 잡게 된 스님의 현몽 이야기는 고찰의 창건 설화와 같이 신기(神奇)하고 기이(奇異)하기만 하다.
“10여 년 전 안거를 마친 뒤 산철에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을 거쳐 오대산으로 해서 전국 명산의 제일봉(第一峰)을 순례하면서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철갑산 중턱 너른 바위에 앉아 수행하거니 잠을 자거니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마에 뿔이 난 코끼리가 나타나더니 ‘오랜 세월 기다렸으니 이곳에 절을 짓고 중생을 제도하라’라는 겁니다. 법력(法力)도 없고 정재(淨財)도 없으니 못한다고 했더니 코끼리 하는 말이 ‘그래도 스님이 도량을 일으키셔야 한다’라고 한 뒤 사라지더라고요.”
스님이 오대산 줄기인 강릉시 연곡면 철갑산 중턱에 터를 정한 연유이다. 목탁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목탁골’이라고도 하고 그 옛날 수도암이란 절이 있었다는 구전이 전해 내려오는 것이 성원사 터가 간직한 불연이라면 불연일 뿐, 이생에 스님과 목탁골의 인연은 없었다. 반듯하게 깎아 다듬은 3,300여㎡의 평지에 대웅전과 국제선원, 갈앙굴, 정중전, 요사채 등 총면적만도 2,000여㎡에 달하는 전각 10여 개를 갖춘 도량으로 거듭난 성원사는 이제 목탁골 자락 소유 토지만도 4만 9,500여㎡에 이를 정도로 드넓고 전법(傳法) 면에서도 대찰(大刹)로서의 사격을 구족(具足)한 것으로 평가된다.
2003년 3월 강릉시 회산동에 개원한 성원유치원과 성원사 포교원 성정사는 강릉 제일로 손꼽히는 유치원이자, 교육 도량이다. 현대식 3층 건물 2개 동으로 이루어진 유치원과 성정사는 330㎡에 달하는 교육관과 전법 공간, 수련관, 공양간 등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성원유치원을 생태 교육기관으로 이름나게 한 3,300여㎡의 대규모 텃밭도 있다.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
성원사 입구에서 반대편 쪽으로 개울을 건너서 600m쯤 가니 ’동신농장‘이 나왔다. 농장 규모는 임야 5,000평 밭 2,000평이었으며 매실나무 50주 심었고 임야에는 더덕을 재배하고 있었다.
조립식 집과 별채로 목욕탕과 창고 등이 있었다. 텃밭도 약 2,000㎡ 정도였다. 빈 밭인데 고추나 상추 등을 심으면 좋을 것 같았다.
방에 들어가 보니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집보다 좋아 보였다. 전기도 들어오고 냉장고와 전기난로, 침대와 전기장판 등이 비치되어 있고, 샤워실도 별채로 있어서 생활함에 불편이 없어 보였다. 매일 아침에 출근하여 텃밭을 가꾸고 저녁에 퇴근하고, 가끔 자고 간다고 하였다. 나도 이런 별장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지금은 은퇴하였으므로 직장생활 할 때 공통분모가 있었으므로 커피와 빵을 대접받으면서 지난날을 회상하게 되었다.
경포중학교 다닐 때 백규범선생님이 계셨는데, 하루는 백규범선생님의 은사가 학교를 방문하였을 때 선생님이 본인의 실내화를 황급히 벗어서 은사에게 내어 주시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로 산교육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 기관장이 새로 오실 때, 사무용품인 볼펜, 지우개, 사인펜, 인주 등을 모두 새것으로 교체하여 책상에 놓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연히 나도 모르게 배우게 된 적이 있습니다. 어른이 행동으로 모범 보이는 것이 산교육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세대에는 집안 어른들을 공경하는 모범을 보고 자랐으나, 다음 세대는 장유유서(長幼有序)는 낡은 사상이라고 생각한다니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갔다.
백규범 선생님이 정선교육청 학무과장 재직 시 정선관사에서 하루씩 묵으면서 업무를 처리했던 추억도 앨범에서 꺼내듯 이야기하였다.
‘지금은 말할 수 있다.’ 와 같이 지나간 일화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K모고 행정실장 ◯◯◯, N모고 행정실장 ◯◯◯, K여중 교장 ◯◯◯의 에피소드(episode)도 들을 수 있었다. 같은 문중인 원로 전세표님의 신영초등학교 교장 재직할 때 일화도 들을 수 있었다.
문중에서 시행하는 원로수당에 대해 알고 싶어 하였으나, 문중 업무에 관여하지 않고 있어서 답변하지 못하였다.
최근에는 어느 스님이 이 ‘동신농장’ 터에 암자를 지으려고 매입 의사를 밝혔으나 거절하였다고 하였다.
여러 일화를 듣고 나서 주문진 대동면옥으로 이동하여 회냉면을 먹었다. 돌아오는 중에 오래전에 축구 유망선수인 강릉중학교 김〇〇선수의 등록금을 3년 동안 후원한 적이 있다는 회고를 하였다. 이후 강릉농공고와 프로축구 선수로 활동한 적이 있어 적은 후원이지만 보람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좀 더 일찍 사회공헌 활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고 말씀하셨다.
다음에 문중회장님과 한 번 함께 식사하자는 약속 하면서 일과를 마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