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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055. [역경의 열매] 이종석 (1-13) 초등학생 시절 여순반란사건의 기억 생생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살아온 이야기를 지면을 통해 하는 것도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이제 고희를 넘겼으니 잘했건 못했건 지나온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패한 부분이 있으면 실패한 것으로, 성공한 부분이 있으면 성공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믿음의 삶을 뒤이어 살아갈 사람들에게 반면교사가 되겠기 때문이다.
나는 1939년 4월 전남 보성군 벌교읍 옥정리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내 위로 누나만 네 분이 있다. 부모님께서는 딸만 내리 넷을 낳다 보니 나와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집안에 큰 경사가 난 듯했다. 지금처럼 출산율이 낮은 때였다면 나는 이 세상에 결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난산 끝에 나를 나으셨다. 온 식구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지금 생각하면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이렇게 생존해 있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누나들은 그런 나를 끔찍이 아끼고 돌봤다. 벌교 갯벌에 나가 꼬막을 캐면서 놀았다. 누나들이 여름철 나를 데리고 놀다가 꼬막 껍질 쌓인 곳에 떨어뜨려 지금도 내 이마엔 흉터가 뚜렷하다. 마치 대한민국 지도를 그려놓은 것 같다.
내가 태어난 옥정리엔 조그만 교회가 하나 있었다. 큰누나(이삼순)가 그 교회를 다니며 예수를 영접했다. 그 뒤 누나는 순천 매산여중으로 유학을 가서 비교적 빨리 신교육을 받았다. 큰누나 때문에 우리 온 가족은 복음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옥정리에서 걸어서 8㎞쯤 되는 칠동국민학교를 다녔다. 학교는 조그마했지만 주변 산세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봄철 벚꽃이 필 무렵이면 온갖 꽃이 지천에 피어나 에덴동산 같은 교정을 이뤘다. 국민학교 때 담임이 이왕로 선생이었는데 운동을 아주 좋아하셨다. 나를 너무나 귀여워해주시고 공부를 잘 지도해주시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기억도 5학년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이 전투에서 죽거나 상처를 입었다. 어떤 이들은 죽어서 내동댕이친 채로 길에 버려진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이인찬)는 그걸 보고 집의 머슴을 시켜 산기슭 양지 바른 곳에 시체를 묻게 하셨다. 어린 심정에도 부친의 인자한 모습과 동정심이 가슴 뭉클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박남순)도 끼니를 굶는 거지를 보면 결코 그냥 돌려보내시는 법이 없었다. 반드시 푸짐하게 상을 차려 대접한 뒤에 보내셨다.
내가 의학을 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런 부모님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긍휼히 여기는 부모님의 마음이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흘러 쌓였던 것이다. 당시 옥정리 1, 2구는 산골이어서 공비 출몰이 잦았다. 하룻저녁에도 한 동네에서 여러 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수시로 들려왔다. 6학년이 되어서는 옥정리에서 벌교까지 약 7.5㎞를 걸어서 피난을 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여순반란사건은 지나간 과거의 사건에 불과하지만 난 아직도 지금의 남북 분단을 생각하면 그때의 끔찍한 장면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오른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종석 (1) 초등학생 시절 여순반란사건의 기억 생생
* [역경의 열매] 이종석 (2) 내 삶을 깨운 기숙사 벽의 ‘Boys Be Ambitious!’
* [역경의 열매] 이종석 (3) ‘작은 슈바이처’ 꿈꾸며 전남대 의대에 입학
* [역경의 열매] 이종석 (4) ‘불어’ 까막눈인 나를 프랑스로 이끄신 힘은?
* [역경의 열매] 이종석 (5) 3차례 시험끝에 드디어 ‘내분비 전문의’ 획득
* [역경의 열매] 이종석 (6) 아내와 사별 3년… 방황·시련끝에 주신 새 만남
* [역경의 열매] 이종석 (7) 장로 피택후 6개월 교육… 그럼에도 교만이 ‘불쑥’
* [역경의 열매] 이종석 (8) 700여 찬양대원과 美 카네기홀서 감동 무대
* [역경의 열매] 이종석 (9) 장로 은퇴후 청천벽력 같은 ‘전립선암’ 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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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이종석 (12) ‘존 스토트’ ‘주기도문 강해’ 읽고 용서키로 결단
* [역경의 열매] 이종석 (13·끝) 몰도바의 눈물… 내 평생의 의료선교 원천돼
◇약력=전남대 의대, 서울대 의대 대학원(박사) 졸업. 군복무 중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해 야전병원 근무. 제대 전엔 한일병원 내과 레지던트 근무. 프랑스 피티에 살페트리에의대 유학. 국립의료원 내과 및 핵의학과장을 거친 후 1984년 전문 갑상선 클리닉인 광혜내과의원 개원. ‘임상 갑상선학’ 저자. 충현교회 은퇴장로.
***[역경의 열매] 이종석 (2) 내 삶을 깨운 기숙사 벽의 ‘Boys Be Ambitious!’
그때, 그 순간이 영화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다. 어린 인민군들이 기다란 총을 어깨에 멘 채 힘겹게 남쪽으로 행군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처럼 내 어린 시절은 일제와 여순반란사건, 6·25전쟁 같은 불행한 사건들로 오버랩돼 있다.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 나오는 동안 부모님은 내게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만약 조금 일찍 태어났다면 일제시대에 징용으로 끌려가서 전쟁터에서 전사했던지, 6·25 때 학병으로 소집돼 전쟁터에서 산화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주 적당한 시기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현 광주광역시)로 유학을 오게 되었다. 광주 양림동의 미션스쿨인 숭일중학교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부모님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했다. 기숙사 방은 바닥이 시멘트로 되어 있었다. 바닥 중간엔 허술한 판자로 만든 책상 겸 식탁이 놓여 있었다. 오전 6시가 되면 잘생긴 총각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아침 경건회를 인도하기 위해서다. 수요일 저녁이 되면 교목 선생님이 시무하는 교회에 가서 선배들과 같이 수요예배를 드렸다.
기숙사 벽엔 ‘Boys, Be Ambitious!’란 문구가 붙어 있었다. 영어 ABC를 막 공부하기 시작한 때라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한 선배가 ‘소년들이여, 대망을 품으라’라는 뜻이라고 해석해 주었다. 어린 가슴에도 그 말이 얼마나 감동이 되었던지 ‘대망을 품어야지’라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 숭일중학교 3년을 마치고 숭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숭일고도 미션스쿨이기 때문에 매주 금요일이면 채플(경건회)이 있었다. 그 당시 교장선생님이 CCC 설립자인 고 김준곤 목사였다. 김 목사님의 설교는 조용하면서도 감동을 주고 믿음의 확신을 주고, 생활의 원동력을 주었다. 생각해보면 내 평생 신앙의 뿌리는 그때 자라고 뻗어간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김 목사님 같은 신령한 분을 만나 감명을 받고 도전을 받게 된 일은 내 인생에 주신 하나님의 복이었다. 2년 전 김 목사님이 별세하셨을 때 매스컴이 너무나 초라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섭섭했지만 도리어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큰 상급이 있겠구나’ 확신하게 됐다.
고교 시절 또 하나 기억나는 분은 영어선생님이다. 그분은 키는 짤막했지만 늘 당당하셨다. 말씀에 확신이 있고 씩씩하셨다. 가끔 수업 시간에 암송해주시던 롱펠로의 ‘인생의 송가(Psalm of Life)’를 지금도 외우고 있다. ‘넓디넓은 인생의 싸움터에서 말없이 끌려가는 우마가 되지 말고 전쟁의 영웅이 되어다오.’ 목소리에 힘을 주어 해석해 가시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지금도 영어선생님의 음성이 귓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다.
특히 요즘처럼 패배의식과 이기적인 마음에 젖어 있는 젊은이들은 반드시 롱펠로의 시를 꼭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생의 패배자가 되지 말고 인생이라고 하는 전쟁터에서 영웅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영어선생님은 정규과목 외에도 부교재로 ‘인생의 선용(The Use of Life)’이란 책으로 강의를 하셨다. 그 책의 첫 페이지엔 이렇게 되어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적 명언의 서문에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고, 기회는 날아가기 쉽고 실천은 어렵다.’ 구구절절이 젊은이의 심금을 울리는 문장이 많았다. 그 말들이 빈 가슴에 감동을 심고 꿈을 채워주었다.
***[역경의 열매] 이종석 (3) ‘작은 슈바이처’ 꿈꾸며 전남대 의대에 입학
1957년 전남대 의과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예과에서 본과로 진학할 때 학점 부족으로 낙제하는 예가 많았다. 그때 본과생 칼라에 달린 십자가 모양의 ‘醫’(의)자를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예과 철학시간. 정종 교수님은 ‘인간의 존재감이란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간존재란 피투적 투기(被投的 投機)다.” 즉 ‘인간이란 던져지면서 던지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유명한 등산가 말로리에 관한 이야기도 하셨다. 말로리는 등산하다 조난으로 죽기 전에 친구들이 “너는 왜 그 힘겨운 등산을 계속하느냐?”고 물으니까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Because it is there)”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참으로 등산가다운 답변이었다. 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다. 인생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앞에 도전해야 할 일들이 많다. 그것이 그 시간 그곳에 있기 때문에 도전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죽음이 우리 앞에 있다고 할지라도.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의과대학을 지망한 대부분 학생은 아프리카의 람바르네에서 흑인 등을 위해서 평생 의술을 펼쳤던 의학박사이자 신학박사, 파이프 오르가니스트였던 슈바이처 박사를 한번쯤은 머릿속에 떠올린다. 요즈음 매스컴에서 ‘의술이 상술로 변했다’면서 비판하는 말들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숨어 있는 작은 슈바이처 박사들이 곳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의학계의 많은 선배들이 언급한 말이지만 우리 인체는 소우주 같다. 참으로 우리 인체는 신묘막측하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이라도 해도 가히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나는 최근 제럴드 슈뢰더 박사가 쓴 ‘신의 숨겨진 얼굴(The Hidden face of God)’이란 책을 읽었다. 그는 유대인으로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물리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히브리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신 분이다. 그는 모든 물질의 근본 요소를 이루는 아원자(亞原子)가 입자이자 파동인 동시에 그 근원이 정보 또는 지혜인 것처럼 생명체를 이루는 세포도 지혜의 표현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의 본질이 지혜-단일체로 귀결된다는 그의 이야기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로마서 1:20)는 말씀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물리적 실체라기보다는 지혜의 현현(懸懸)임을 강조하면서 유물론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우주와 만물이 하나 되게 하는 단일체의 지혜를 독자들이 경험하기를 권하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이 책은 자신의 영적 뿌리를 찾아보고자 하는 일종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의 삶을 성실히 영위할 때 발견되는 것이지, 수도사의 삶을 살아야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매일매일 삶 가운데 존재의 경이로움을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이 의도한 바여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나는 평소 인간의 질환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내분비질환, 또 그중에서도 갑상선질환을 연구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다. 내분비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호르몬 측정이 우선되어야 했다. 프랑스 파리의 피티에-살페트리에대 의과대 유학을 선택하게 된 이유다.
***[역경의 열매] 이종석 (4) ‘불어’ 까막눈인 나를 프랑스로 이끄신 힘은?
의과대학 졸업 후 인턴·레지던트 과정, 거기다 군대 제대까지 내 인생의 큼지막한 일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두려움과 회의, 고민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의사로서의 꿈은 더욱 선명해져 갔다. 제대 후엔 국립의료원 내과에서 근무하게 됐다. 나이를 꽤 먹은 편이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상황.
하지만 프랑스 유학의 꿈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문제는 프랑스어였다. 당시 ‘피앙세’의 뜻도 모를 만큼 내 프랑스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프랑스어도 할 줄 모르면서 프랑스 유학을 고집하다니, 내가 봐도 걱정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처럼 프랑스어 기초부터 배워야 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충무로에 가면 ‘알리앙스 프랑스’라는 프랑스어 전문학원이 있었다. 거기서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프랑스어는 보기엔 영어와 비슷하지만 발음은 완전히 다르다. 프랑스어는 문법이 그렇게 까다로울 수가 없었다. 문장을 보면 남자가 한 말인지 여자가 한 말인지 확연히 구별되고, 시제가 엄격했다. 외교문서를 작성할 때 프랑스어만큼 훌륭한 언어도 드물다고 생각했다.
‘알리앙스 프랑스’에서 약 6개월간 프랑스어 연수를 하고 나니 서툴지만 어느 정도 프랑스어 회화는 할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읽을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전철이 없었다. 아마 1호선 전철이 착공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립의료원 내과의사 시절이던 1976년 겨울, 난 프랑스 장학금을 받고 유학길에 올랐다. 날씨는 무척 쌀쌀하고 을씨년스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으리라. 그때만 해도 프랑스 직행 노선이 없었다. 김포공항에서 서북항공기(North West)편으로 일본 하네다 공항까지 가서 거기서 에어프랑스로 샤를드골 공항까지 가야 했다. 비행시간이 무려 23시간이 걸렸다.
공항에서 파리 시내까지 간 다음 거기서 다시 리용까지 가는 TGB 기차를 갈아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프랑스의 초원은 지상천국이 따로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겨울인데도 드넓은 초원에 새파란 잔디가 깔려 있고, 소들이 듬성듬성 그 잔디를 뜯고 있었다.
5∼6시간 달려 도착한 뒤 다시 봉고차를 타고 내가 도착한 곳은 비시라고 하는 인구 2만∼3만명의 자그마한 도시 하숙집이었다. 집은 혼자 살기에 알맞은 27평 정도의 2층 방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없던 비데가 화장실에 비치되어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는 커피와 우유를 섞은 카페오레, 치즈조각(카멘베), 긴 막대 빵이었다. 처음 대하는 식단이었지만 먹음직했다.
비시는 아주 조용한 온천 휴양 도시였다. 나폴레옹이 자주 찾았다는 역사적인 고증도 있고 해서 꽤 세련미가 넘치는 분위기였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프랑스어를 더 배우기 위해서였다. 내가 다니는 프랑스어학원에는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 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대부분 그 나라의 상류층 자녀들이라고 했다.
약 6개월간 그곳 프랑스어학원을 다녔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프랑스 회화는 프랑스인들과 기초적인 대화를 나눌 만큼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TV 방송을 봐도 꽤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다음 파리 제6대학인 피티에 살페트리에 의대 부속병원 내분비과 모르스 젠너 교수의 연구교수로 공부하게 되었다. 젠너 교수는 당시 내분비 분야에서는 세계적원 권위자였다.
***[역경의 열매] 이종석 (5) 3차례 시험끝에 드디어 ‘내분비 전문의’ 획득
프랑스 내분비내과 전문의가 되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3회에 걸쳐 내분비학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시상하부 뇌하수체 계통의 분야, 갑상선을 비롯한 소화기외과 호르몬 분야, 여성호르몬 분야, 이 세 분야의 수련을 거친 후 시험에 합격해야 비로소 내분비내과 전문의가 될 수 있었다. 피티에 살페트리에 의대 병원은 정신과 질환 연구와 진료에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병원은 프랑스 의사 셸리(Schally)가 세계 처음으로 시상하부호르몬을 측정해 의학 분야 노벨상을 수상할 만큼 내분비학 분야 연구가 수준급이었다.
내가 프랑스 유학을 갈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인체 호르몬 측정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아 내분비학 연구에 지장이 많았다. 당시 파리에는 파스퇴르연구소가 있었다. 샘플만 그곳에 보내면 짧은 시간 내에 인체 호르몬 등에 대한 결과가 전송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 같은 첨단 시스템은 얼마 후 한국에도 도입돼 녹십자 같은 여러 의료기관이 내분비 대사 질환 연구를 시작했다.
귀국 후 난 국립의료원 내과 의사로 있으면서 보사부(현 보건복지부) 차관을 했던 나도헌 선생님의 권유로 핵의학과를 처음 개설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이 분야를 다룰 수 있는 특수면허증을 갖고 있었다. 핵의학과가 독립되어 있긴 했지만 나 자신이 내과 전문의이기 때문에 내과와 핵의학과 환자를 병행 진료했다.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고 이문호 선생님이 핵의학과를 처음 도입하셨을 때 핵의학은 의학계에서 ‘신비스런 신학문’으로 통했다.
혈액학의 권위자이셨던 이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갑상선에 대한 관심이 점점 깊어갔다. 무엇보다 호르몬의 변동으로 인해 병이 생기고 낫기도 하는 형이상학적인 특성 때문에 흥미가 있었다. 갑상선 질환은 전염병과 같이 정확히 진단만 되면 치료가 가능한 질환이기 때문에 더 매력이 있었다. 1974년부터 10년간 국립의료원 내과 스태프로, 핵의학과장을 거친 후 지금의 서울광혜내과의원을 서울 역삼동에 개설해 지금까지 진료를 해오고 있다. 요즘 갑상선 전문클리닉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을 대표하는 갑상선 전문클리닉이 없다는 것은 이 분야 의사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일본만 해도 여러 곳에 세계적인 갑상선클리닉이 있다. 벳푸, 도쿄, 구마나 등에 있는 갑상선클리닉이 내놓은 논문은 세계적인 잡지에 수록될 만큼 명성이 자자하다.
요즘 흥미로운 하나의 현상은 각종 암전문병원이 진료하는 환자 대부분이 갑상선암 환자라는 것이다. 물론 첨단기기의 개발로 비교적 조기에 갑상선암을 쉽게 발견하기 때문에 수술하는 예가 예전보다 훨씬 많아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 병원의 경우 3500여 환자의 통계 분석을 보면 갑상선암으로 진단된 예는 10% 내외였다. 이 결과는 종합병원의 통계와는 다르겠지만 갑상선암 환자가 늘고 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1984년 지금의 서울광혜내과 병원을 지어놓고 얼마 안돼 내게는 끔찍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당시 종암동에 살 때 큰딸이 겨울에 연탄가스에 중독돼 응급실에 실려가 간신히 살아났다. 얼마 뒤 80대 노모도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 직전까지 갔다. 한숨을 돌리기도 잠시, 1986년 4월 갑작스럽게 심장 통증을 호소하던 아내는 심장판막증 수술을 하던 중 의료 사고로 나보다 먼저 천국으로 떠났다.
***[역경의 열매] 이종석 (6) 아내와 사별 3년… 방황·시련끝에 주신 새 만남
1984년 지금의 서울광혜내과의원을 개원하고 나서 무척 바빴다. 병원 일과 함께 갑상선학회 일을 병행했기에 해외 출장이 잦았다. 아내는 가끔 기침을 했지만 건강에 이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주일엔가 내가 다니던 서울 충현교회를 올라가는데 아내가 숨이 차서 제대로 올라가지 못하는 거였다. 그때 번득 ‘혹시 심장에 이상이 있나’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하지만 학회 일정 때문에 곧바로 검사를 하지는 못했다. 학회에 다녀온 뒤에야 심전도 검사를 했는데 심장판막증이라는 충격적인 진단이 나왔다. 피를 제대로 공급해주기 위해서는 심장의 문짝(판막) 작용이 활발해야 하는데 그게 항상 열려 있는 것이었다. 피는 뇌뿐만 아니라 신장으로도 잘 공급되지 않아 아내는 신부전까지 앓았다.
한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잘 된 것같은데 아내가 깨어나질 않았다. 수술할 때 인공심장을 끼워 넣었는데 원래의 심장이 수술 후에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알고 보니 수술 후 심장을 꿰매야 하는데 꿰매지 않은 것이다. 명백한 의료사고였다. 아내는 1개월간 중환자실에서 지내다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앞이 캄캄했다. 병원 지은 지는 얼마 안 되고, 빚은 산더미같이 쌓여 가는데 길이 보이지 않았다. 병원 건물 기둥을 부여잡고 간절히 울면서 기도했다. 그래도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새벽 1∼2시에 차를 몰고 경기도 광주, 이천으로 쏘다녔다. ‘이러다 망가지는구나’라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나는 홀로 있으면서 서울 가락동농수산물시장을 자주 찾았다. 그곳엔 과일가게, 야채가게, 생선가게가 즐비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생선시장에 들렀다. 아침의 생선시장은 “생선 사려”를 외치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힘찬 목소리로 활력이 넘쳤다. 서민들의 생업 현장에서 난 삶의 의욕, 목적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 실연을 당한 사람, 기쁨과 희망을 상실하고 실의에 빠진 사람이 있거든 반드시 새벽 생선시장을 둘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곳에서는 실의와 좌절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직 생동감과 즐거움이 있을 뿐이다.
나는 한곳에 마음을 두면 바꾸지 않고 우직하게 한곳만 거래하는 습관이 있다. 한 과일가게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30여년간 다니고 있다. 모 교회 집사님이고 해서 믿음이 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집사님이 추천해주는 과일은 틀림없었다.
그렇게 홀로 된 생활을 3년쯤 했을 때 교회 권사님이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아무 말 말고 몇 날 몇 시에 어디로 나오라는 얘기였다. 망설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새벽 생선가게에서 체득했던 강렬한 삶의 의지, 활력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일으켜주신 거라 생각했다. 용기를 냈다.
사람의 일생 속엔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만남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아내인 김 권사와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권사님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많은 얘기를 주고받지는 못했지만 남은 생의 반려자가 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둘은 인간적인 여건과 확률로 따진다면 도저히 만남이 불가능한 사이였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걸 그때 새삼 느꼈다. 김 권사를 만나 상처(喪妻)의 아픔도 차츰 씻으면서 병원 일과 교회 사역에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종석 (7) 장로 피택후 6개월 교육… 그럼에도 교만이 ‘불쑥’
충현교회는 1975년부터 다녔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서울 역삼동에 있지만 당시만 해도 충현교회는 충무로에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한일병원 레지던트 교육과정에 있을 때 처가가 교회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충현교회를 다녔던 것 같다. 초창기 충현교회 하면 김창인 목사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몹시 더운 여름철이었는데 하얀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강단에서 설교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목사님의 설교는 철저히 성경 본문 중심이었다. 설교 본론에 들어가기 전엔 항상 본문의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해 말씀해 주셨다. 큰제목 1, 2, 3번이 나오고 거기에 따라 소제목 1, 2, 3번이 따라 나오는 식이었다. 본론에서는 철저히 십자가 복음으로 성도들을 무장시키셨다. 얼마나 죄를 호되게 나무라시는지 성도들 눈에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호된 질책과 권면의 설교를 계속하시다가도 결론은 대부분 위로의 말씀으로 맺으셨다. 그런 목사님의 설교는 성도들의 심금을 울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목사님의 표현력이나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 아니었다. 오직 복음을 앞세우고 강조하시는 데 있었다. 그때 느꼈던 것은 교회 부흥은 조직이나 행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가슴을 뜨겁게 적셔주는 십자가 복음에 있다는 사실이다. 충현교회가 한창 부흥할 때는 경향 각처에서 구름같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오늘의 충현교회 초석은 그 당시에 놓인 것이다. 복음을 앞세운 교회만이 진정한 영향력이 있고 부흥한다는 것을 충현교회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내 신앙생활은 주일예배 출석에 만족하는 정도였다. 국립의료원으로 가면서 봉사를 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었다. 당연히 주변 성도들과도 서먹한 사이였다. 당시 충현교회는 지금의 역삼동에 부지를 사서 기초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장로후보에 피택돼 약 6개월간의 장로교육을 받았고, 마지막 구술시험과 면접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구술시험에 가지 않았다. 당시 나는 ‘나 같은 사람은 장로가 될 자격이 없다. 만약 내가 장로가 되었을 때 사람들이 나를 흔들어대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우려하고 있었다. 또한 나를 면접하려는 장로의 모습과 행동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사람도 장로가 되는구나’라는 교만한 생각이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고 났더니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들이 닥쳐왔다. 이미 밝혔듯이 노모와 큰딸이 연거푸 연탄가스에 중독돼 겨우 살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창인 목사님이 ‘몸이 불편하시다’며 나를 찾으셨다. 목사님 댁으로 왕진을 갔더니 목사님은 각혈을 하고 계셨다. 새빨간 피를 반 컵 정도나 쏟으셨다. 직감적으로 폐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속으로 ‘내가 불순종하니까 목사님께서 저런 고난을 당하시는구나’ 생각했다.
당시 국립의료원 흉부외과 과장이신 유회성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출혈을 멈추려면 폐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김 목사님은 “수술하면 설교에는 지장이 없는가?”라고 물으셨다. ‘설교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니까 “그러면 나 수술 안 해”라고 하시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셨다. 목사님은 그 후론 두 번 다시는 흉부외과를 찾지 않으셨다. 목사님은 광혜내과의원에서 항결핵제로 치료받으시고 회복해 가셨다. 지금 93세가 될 때까지 건재하신 것을 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역경의 열매] 이종석 (8) 700여 찬양대원과 美 카네기홀서 감동 무대
나는 1987년 6월 선거를 통해 장로가 됐다. 그 후 기회 될 때마다 후배 장로들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어떤 장로들이 인간의 눈으로는 부족해 보여도 장로는 하고 싶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장로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목덜미를 잡혀야 한다.” 대부분 장로들은 나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충현교회 시무장로가 된 후에는 기획위원장, 선교위원장, 찬양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부족하기 짝이 없었고, 주님께 불순종했던 순간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지경이다. 내가 가장 오랫동안 봉사했던 곳은 찬양대였다. 2009년 장로 은퇴할 때까지 20년 가까이 찬양대장과 찬양위원장으로 섬겼다.
찬양대장의 역할은 찬양대원과 지휘자, 반주자 사이에서 불협화음이 나지 않도록 돕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조화의 힘으로 신령한 찬양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했다. 찬양대장을 하면서 느낀 건 찬양대장이 깨어 있지 않거나 시험에 들면 찬양대 전체가 시험에 든다는 것이다. 찬양대장의 가장 큰 임무는 기도였던 것이다. 찬양은 설교 전에 하는 전주곡 정도가 아니다. 찬양은 노래로 하는 설교다. 찬양은 예배의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찬양대가 깨어 있지 못할 때 박자는 잘 맞고, 화음은 아름답게 들릴지 모르지만 결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성도들의 심령에 아무런 감동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충현교회가 설립된 후 처음으로 찬양위원회에서 연합찬양대를 조직한 일이다. 찬양대원 350명과 오케스트라 대원 50명으로 구성했다. 서울 장안에서 단일 교회 치고는 아마 처음이었지 싶다. 400여명의 대원이 단상에 서서 ‘메시아’ 합창을 부를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연합찬양대장을 내가 맡았었다. 나중엔 이런 말을 듣기도 했다. ‘충현교회에 가려면 반드시 본당 2층에서 예배를 드려라. 찬양대와 솔리스트가 어우러져 부르는 노래를 눈감고 들으면 그렇게 장엄하고 은혜로울 수 없다.’
매 주일 아침, 찬양대는 총연습을 마무리하고 본당으로 올라갔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때를 성령이 임하시는 시간으로 보고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예배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찬양대를 맡으면서 나는 내심 다른 장로님들에게 미안했다. 이런 은혜를 다른 장로님들은 경험하지 못하고 나 혼자만 경험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즈음 충현교회는 놀라운 시도를 했다. 미국 카네기홀과 무디교회에서 순회 찬양을 계획한 것이다. 우려도 많았지만 도전했고, 결국 길이 열렸다. 700명에 달하는 찬양대를 지휘해 뉴욕의 카네기홀과 무디교회에서 찬양을 불렀다. 무디교회에서는 찬양집회가 끝난 뒤 차를 타고 나이아가라폭포 근처 잔디밭으로 이동해 거기서도 찬양을 불렀다. 주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감동적인 표정으로 찬양을 듣는 모습이 그렇게 감격적일 수 없었다. 순회 찬양을 계기로 찬양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분명한 확신이 자리잡게 됐다.
나는 지금도 예배 시간에 자리에 앉아 찬양대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설렌다. 비록 은퇴장로이고 나이도 들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여전하다. 그러면서 음악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부족한 나 같은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찬양대를 섬기도록 맡겨 주셨다는 점이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역경의 열매] 이종석 (9) 장로 은퇴후 청천벽력 같은 ‘전립선암’ 판정
장로 은퇴 후, 나에겐 또다시 고난이 찾아왔다. 2년 전이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소변이 잘나오지 않았다. 밤중에 자다 말고 잠을 설치는 일도 다반사였다. 문득 ‘전립선에 무슨 문제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우리 병원에 갓 들여온 특수의료장비 양전자단층촬영장치(PET)가 있었다. 당장 전립선암 진단 검사를 했다. 우려했던 대로 전립선특이항원(PSA) 수치가 굉장히 높게 나왔다. 며칠 후 다시 검사했지만 수치는 더 높게 나왔다.
방배동 대항병원에서 초음파, 직장 검사를 했다. 전립선 비대증이 있다는 진찰 결과가 나왔다. 그러면서 그 의사는 ‘PSA 수치가 계속 올라가는 만큼 종합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하는 게 낫겠다’고 조언했다. 후배가 의사로 있는 삼성병원 비뇨기과를 찾아갔다. 그 비뇨기과 앞에는 40∼50명의 환자들이 길게 줄지어 앉아 있었다. 나도 의사지만 환자의 고충을 알 것 같았다. 담당의사와 내가 얘기한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았다. 간호사가 옆에서 도와줬지만 얼마나 바쁘고 급한지 말을 걸기도 미안할 정도였다. 의사는 결국 ‘바쁘다’며 레지던트를 불렀다. 후배 의사의 행태에 분노가 일었지만 꾹 참았다. 나는 의사가 아닌 어쩔 수 없는 환자 신세였으니까.
그 레지던트는 다시 PSA검사를 했다. 수치는 더 올라가 있었다. 조직검사가 불가피했다. 하지만 어떤 목사가 조직검사를 하다가 출혈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었다. 나는 망설였다. 그리고 고심 끝에 당분간 조직검사를 미루기로 했다. 며칠 후 한 후배 장로가 자신도 전립선 수술을 했는데 담당의사가 백병원 비뇨기과 과장인 충현교회 안수집사라고 귀띔해줬다. 그 얘기를 들으니 용기가 생겼다. 그 안수집사를 찾아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놨다.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룻밤 주무시고 난 뒤 조직검사 해드리겠다. 그 결과를 보고 수술 여부를 결정하자’고 했다.
백병원에서 하룻밤 잔 뒤 조직검사를 했다. 전립선에서 12개 조직을 뗐다. 검사 결과 그중 3개 정도가 암이었다. 하지만 그 안수집사는 ‘비교적 초기이니 수술만 잘하면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약물요법도 있고 수술요법도 있지만 일단 수술하자고 했다. 그때 환자의 입장에서 내가 절실히 느낀 것은 의사와 환자 관계는 신뢰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환자들을 대하듯 하는 의사가 아니라 일대일 관계로서 환자를 대하는 의사가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가 크리스마스 전이었다. 히스기야처럼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기도했다. ‘생명의 주권은 주님께 있으니 저의 삶과 죽음을 통해 주님만이 영광 받으소서.’ 신기하게도 두려운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암진단을 받고도 마음은 굉장히 덤덤해졌다. 성경을 읽었다.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들렸다. ‘내가 너를 히스기야처럼 15년을 더 살려주면 어떻게 할 것이냐?’
나는 유언장을 썼다. 마지막으로 가족들의 화해와 형제들의 우애를 당부했다. 그리고 5시간의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은 잘 끝났다. 며칠이 지나 PSA를 쟀더니 제로(0)였다. 그 상태는 최근 검사에서도 변함이 없다. 항암제 역시 먹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내 육체적 능력에 한계가 와서 그 전보다 내가 진료하는 환자 숫자는 절반으로 줄었다.
***[역경의 열매] 이종석 (10) 28년 전념했던 ‘갑상선’… 그러나 정복의 길은
차제에 갑상선 질환에 대해 독자들에게 일러두고 싶은 게 있다. 28년간 갑상선클리닉을 운영하면서 느낀 점은 간단하게 진단할 수 있는 질환을 훨씬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과 병력을 잘 청취, 분석하면 갑상선 이상은 쉽게 포착할 수 있다. 그런데 엉뚱한 방향으로 병명을 몰아가는 경우를 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급성갑상선염의 경우 통증이 유난히 심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 증상을 간과하고 다른 질병으로 오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를 진단할 때, 특히 갑상선 환자를 대할 때는 병력 청취 분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겠다.
임상에서 쉽게 접하는 갑상선기능항진증(중독증)의 경우에도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다. 갑상선 자체에서 갑상선호르몬을 많이 생산해서 발생하는 갑상선기능항진증(그레이브스병, 바제도병)과 갑상전 자체에서 갑상선호르몬 생산은 증가되지 않지만 갑상 자체의 염증으로 갑상선여포가 파괴되어 갑상선여포에 저장되지 못하고 말초혈액으로 흘러나와 갑상선호르몬이 증가하는 경우다. 후자의 경우는 진정한 의미의 갑상선기능항진증이 아니므로 치료방법은 전자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예는 너무나 많다. 요즘 많은 의사들이 갑상선을 진료하겠다고 나서고 있어서 좋은 현상이기는 하지만 갑상선질환 연구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점을 일러두고 싶다. 나 역시 갑상선을 거의 평생 연구했지만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갑상선호르몬이 인체 대사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갑상선 질환을 앓고 있다. 갑상선호르몬 부족 때문에 선천적으로 지능지수가 떨어지는 예도 많다. 우리나라는 지역적으로 갑상선질환이 많은 나라는 아니지만 특별히 여성의 경우는 갑상선염으로 인한 갑상선기능저하증이 우려되기 때문에 관심과 연구가 더 활발해야 한다고 본다. 임신 중 태아 갑상선호르몬 부족은 뇌 발달 저하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임신 중인 여성에게는 각별한 주의가 요망되고 주기적인 검사를 통해 부족한 호르몬을 잘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갑상선기능항진증이나 갑상선염으로 인한 갑상선기능저하증, 갑상선결절(종양) 등에 대해 정확한 진단과 적절한 치료만 제공한다면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다는 게 내 소견이다.
하지만 갑상선암은 다르다. 갑상선암 중에서도 갑상선유두암은 비교적 전이는 적고 생존율은 높다고 알려져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갑상선여포암은 갑상선유두암보다는 악성도가 높고 전이도 빠르므로 유의해서 관찰, 대처해야 한다. 갑상선역행성암은 비교적 드문 암이긴 하지만 이 암으로 진단되면 악성도가 가장 높기 때문에 6개월 내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비교적 드물지만 가족력과 관련돼 있으므로 병력 청취가 중요하다. 갑상에 결절이 있는 경우 비교적 조기에 이 암을 진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암 치료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은 조기 진단, 조기 수술이라 하겠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 분야에 사용할 수 있는 이렇다 할 항암제가 아직 변변한 게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의약계에서는 최근 다양한 약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런 정황을 감안한다면 가까운 미래에 좋은 항암제가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역경의 열매] 이종석 (11)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美 고교 졸업식
김 권사와 나 사이엔 ‘관우’라는 자녀가 한 명 있다. 그 아이가 벌써 지난 5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내와 나는 미국으로 건너가 ‘거버너스 아카데미’(Governer’s Academy)에서 관우의 졸업식을 지켜봤다. 이 학교는 한국의 최초 유학생으로 알려진 유길준 선생이 수학한 곳이다. 햇살이 밝게 내리쬐는 학교 잔디밭은 아름다운 신록으로 짙게 덮여 있었다. 브라스밴드의 축하 연주와 1500여명 축하객들의 박수 속에 그림 같은 졸업식이 시작됐다.
인상적인 것은 교장선생이 졸업생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불러내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졸업장을 주는 장면이었다. ‘홍길동 외 몇 명’ 하면서 한 사람에게만 졸업장을 주는 우리나라의 졸업식 풍경과는 너무나 딴판이었다. 한사람의 인격을 높여주고 인정해주는 모습에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성경말씀이 생각났다. 우리 교육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획일적 교육이라면, 그네들 교육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징과 인격을 살려주는 교육이었다.
상(賞)을 주는 것도 달랐다. 우리나라는 상을 줄 때 우등상, 개근상 등으로 해서 획일적으로 주고 나면 졸업식 행사는 끝나버린다. 나는 불행하게도 이런 상다운 상을 타본 기억이 없다. 보통 음악을 잘하면 수학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수학을 잘하면 국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분명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상에 태어나게 할 때는 균등하게 한 가지 이상의 재능을 부여했으리라고 믿는다. 그것이 공평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각 사람을 획일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성경적으로 봐서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더욱 확실하게 갖게 됐다.
그런 점에서 거버너스 아카데미 졸업식은 인상적이었다. 음악에 특출한 학생은 음악상, 운동에 특출한 사람은 운동상, 문학에 특출한 사람은 문학상을 해당 학과의 선생님이 주는 모습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었다. 관우는 사이언스(수학, 화학, 물리)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또 관우는 85명 졸업생 대표로 학부형들 앞에서 스피치를 하는 영광을 누렸다. 관우가 스피치한 주 내용은 선생님들의 노고와 부모의 헌신, 그리고 동료에 대해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관우의 유창한 스피치를 들으면서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졸업생들과 학부모들이 잔디밭 교기(校旗) 깃대 아래 둘러 모여 그 해의 일등상을 발표하는 순서였다. 금년에는 중국에서 온 학생이 뽑혔다. 그 학생은 평점이 거의 4.0에 가까웠다. 그 학생은 이외에도 여러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후문에 의하면 관우가 그 상을 못 타는 것에 대해 동료들이 매우 아쉬워들 했다고 한다. 관우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후보군에 올랐었다.
관우는 읽고 말하는 것은 물론 운동, 음악 등에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소위 전인 교육을 잘 감당해 냈던 것이다. 자기 관리를 잘했을 뿐만 아니라 후배와 동료들에게도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잘 도와주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제 졸업하고 그 학교를 떠난다는 마음에 아쉬워하는 후배와 교사들의 얘기도 들었다.
부모와 떨어져 혼자 생활하면서도 이렇게 자랑스럽게 자라준 관우가 나무나 대견스러웠다. 상처(喪妻)의 아픔, 전립선암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크나큰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역경의 열매] 이종석 (12) ‘존 스토트’ ‘주기도문 강해’ 읽고 용서키로 결단
사람들은 ‘장로’ 하면 굉장히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장로도 연약한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 나의 고백이다. 난 2009년에 충현교회 장로를 은퇴했다. 그런데 장로를 은퇴하고 나서 곧바로 문제가 생겼다. 2009년 초였다. 사위에게서 전화가 왔다. 난데없이 ‘딸을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우울증도 있고 해서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고 했다. 너무나 괘씸해서 크게 호통을 치면서도 마음 속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사위는 소위 말해 ‘일류’의 길만 밟아왔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1등을 놓친 적이 없고 일류 의대를 다닐 때도 늘 상위권에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얼얼한 마음에 ‘사위가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봤다. 사위는 일에만 열중한 나머지 애들 교육은 물론 가정에도 신경을 못 썼다. 부인한테는 ‘집에 있으면서 왜 애들 교육도 제대로 못시키느냐’며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사위는 많이 배웠고 똑똑했지만 경쟁에 치여 마음이 황폐해 있었다. 마음속에 주님이 주인으로 앉아 계시지 않으면 만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건데 사위는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 교육을 제대로 시킬 리 만무했던 것이다. 자신은 비록 일류 학교를 졸업했을지 모르지만 자녀한테 그 전철을 똑같이 밟으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였다.
며칠 후 사위를 찾아갔다. 사위는 똑같은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한켠으로는 이해가 갔다. ‘자라온 환경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겠거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내가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안이 벙벙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테이블을 뒤엎어버리고 싶었다. 나중엔 마음속 분노가 얼마나 거세게 타오르든지 내 손에 권총이 있으면 쏴 죽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장로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 순간 내 속에 죄악이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느끼며 난 스스로에 대해 다시 한번 절망해야 했다. 장로이지만 성령이 다스리지 않으면 악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실상을 똑똑히 목격했다.
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딸 내외를 도왔다고 생각했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결국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집에 있던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 ‘용서’라는 단어를 수천 번 떠올렸다. ‘정말 용서가 가능할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성적으로야 용서가 이해되지만 감정은 따라주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주기도문 강해’의 한 구절을 보며 비로소 결단을 내렸다. ‘하나님이 인간을 무조건 용서해주셨으니까 인간의 용서는 당연한 것이다. 윤리나 도덕은 결코 용서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 아직 완전한 용서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마음속 분노와 갈등은 상당 부분 해소가 되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했다는 게 내 솔직한 고백이다.
결국 사위는 딸에게 ‘미안하다’며 이혼을 취하했다. 그리고 국내 의사생활을 접고 최근 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종석 장로, 정말 잘 나가는구나. 박사학위에 외국 유학도 갔다 오고 병원도 운영하고 있지, 거기다 자녀들까지 좋은 학교 졸업시켜 잘 키우고, 큰 교회 장로까지 했으니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겉은 화려한데 속은 곪아 터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역경의 열매] 이종석 (13·끝) 몰도바의 눈물… 내 평생의 의료선교 원천돼
고등학교 시절 의과대학을 지원할 때 하나님에 대한 외경심을 품고 아프리카 람바르네에서 흑인 나환자를 진료하며 일생을 바쳤던 슈바이처 박사의 봉사 정신이 늘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1997년 김성관 목사가 충현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한 후 선교정책이 장기·거점 선교에서 단기선교로 바뀌게 되었다. 98년 8월이었다. 일단 병원 일을 접어두고 지금은 해외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는 송요한 목사님의 지도로, 팀원 10명을 이끌고 동유럽의 작은 나라, 우리나라의 강원도만한 크기인 몰도바의 수도 키시네프로 향했다. 석양 무렵에 내린 몰도바의 수도는 에덴동산을 연상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겉모습과 달리 이 나라는 불행한 과거를 안고 있었다. 인접한 루마니아로부터 늘 시달림을 받았고, 소련 공산치하에서 벗어났지만 이념갈등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내전으로 죽어갔다. 이 도시 사람들 대부분은 옆구리에 수술자국이 있었다.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생계수단으로 신장 하나를 떼어 팔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우리 선교팀은 우선 학교 교실을 빌렸다. 동네 사람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한 줄로 길게 서 있으면 그 틈을 타서 전도를 하는 것이다. 이 나라는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전도를 할 수는 없었다. 여행객을 가장해 입국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보안도 철저해야 했다. 의료를 통한 전도사역, 심방사역, 노방전도, 찬양사역 형식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지금도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은 모든 사역을 끝마치고 귀국하려 하는 아침, 경건회 시간을 가진 자리에서다. 찬양을 부르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께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술주정꾼인 남편이 우리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감사하고 감격해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출발 예배를 다 마치고 난 다음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보안요원이 오더니 우리가 입국할 때 보안대에서 정식으로 입국허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속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팀장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묘책이 없을까’ 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네 이놈들아 이럴 수가 있느냐.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너희들의 병을 치료해주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는데 떠날 때에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 하는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책임자를 불러서 한번 배짱을 부리기로 했다.
“나는 의사다. 10일 동안 수많은 환자의 병을 고쳐 주었는데, 감사하다는 말은 못할망정 이럴 수가 있느냐.” 그간 정이 들었던 주민들이 웅성거리면서 보안요원을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보안요원은 멋쩍었는지 약식재판을 받는 형식으로 이 사건을 끝내자고 했다. 우리는 무사히 귀국길에 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보안요원 앞에서 감히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복음에는 권위와 능력과 은혜가 있는 줄을 그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도 의술을 매개로 복음 전도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 올해부터는 내가 속한 처소에서 성경을 나눠주는 일도 하고 있다. 또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전문 갑상선클리닉’이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