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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혜거 스님께서 강의하셨던 원각경 강의 녹음파일을 마치고 지금은 열반하신 청화 스님께서 1992년 태안사 금강선원에서 동안거를 끝내고 7일간 특별 법회를 열어 스님들을 대상으로 법문하신 내용을 녹취하여 “원통 불법의 요체”라 상재하였습니다.
청화 스님 법문의 중심은 청화 스님의 스승이신 금타 대화상께서 집필하신 “금강심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며 금강심론은 금타 대화상께서 소승, 대승, 밀교 경전을 각자(覺者)의 안목으로 정리한 것이며 한국불교의 자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화 스님의 행장>
스님께서는 1923년 계해(癸亥) 음력 11월 6일 전라남도 무안군 운남면 연리 697번지에서 탄생하셨다.
본향은 진주(晉州)이며, 부친 강대봉씨(姜大奉氏)와 모친 밀양 박씨 박양녀(朴良女)의 차남으로 속명은 호성(虎成)이다.
스님의 집안 살림은 농토가 많아 부유하셨고, 효성이 지극하셨으며, 글과 글씨, 그림 솜씨가 뛰어나셨고, 아코디언 • 피리 • 풍금 • 달리기 • 유도 등 예체능에 뛰어난 자질이 있으셨다.
또한 시험성적은 거의 수석을 차지하셨고, 성격은 극히 인정 많고 후덕하며, 지혜로워 따르는 사람이 많아 자연히 주위 사람들의 구심점(求心點)이 되셨다.
스님께서는 일제 강점기(强占期)에 고향에서 망운소학교(望雲小學校)를 마치셨다.
1937년, 15세의 어린 나이에 지인(知人)의 권유로 청운의 꿈을 품고 일본에 유학하여 신문팔이, 분뇨수거 등 피나는 고학(苦學)으로 동경대성중학(東京大成中學)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무안 일로농업실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한 뒤 무안 망운소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942년, 부모님의 뜻에 의해 성삼녀(成三女) 청신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으로 인해 강제로 징병되어 일본군 해군훈련소가 있던 진해에서 4~5개월의 가혹한 훈련도중 8.15해방을 맞아 징병에서 벗어났다.
스님의 출가(出家) 인연은 친형이신 범룡(凡龍, 1943년)께서 당시 24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절감하게 되었고, 해방 후 좌우익(左右翼)의 이념대립(理念對立)으로 인한 인간적 고뇌를 느끼시던 차에 육촌 동생의 소개로 백양사운문암(白羊寺雲門庵)에 머물게 된 것이 계기가 되셨다.
운문암에서 순치황제(順治皇帝)의 출가시(出家詩), 부설거사(浮雪居士)의 사부시(四浮詩)와 금타존사(金陀尊師)의 수능엄삼매도(首楞嚴三昧圖)를 열람하시고서, 속세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오직 진리탐구를 위한 발보리심(發菩提心)을 하게 되었다.
1947년 정해(丁亥) 음력 1월 16일(25세)에 '사상의 거처'를 찾아 출가하신 후에 발보리심(發菩提心)하여 송만암대종사(宋曼庵大宗師)의 상좌(上佐)인 금타존사를 은법사(恩法師)로, 법련당(法蓮堂) 정수선사(定修禪師)를 계사(戒師)로 수계득도(受戒得度)하시니 법호는 무주(無住)요, 법명은 청화(淸華)이다.
운문암 생활은 순수하게 참선을 위주하여 불공도 사절하고 식생활은 아침 죽 공양, 점심 때 공양하고는 철저한 오후불식(午後不食)이었고, 일체 경비는 대중 전원이 탁발(托鉢)로 충당하였으며,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원칙으로 하였다.
1950년 여름, 대종사께서는 금강경(金剛經)을 영어로 번역하고자 광주에 나왔을 때 6·25사변을 만났다.
그리하여 갑자기 밀어닥친 난리 때문에 백양사 운문암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고향 향리(鄕里)를 찾았다.
그러나 인민군이 진입한 이후, 고향도 예외 없이 동족상잔의 유혈사태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1952년, 대종사께서는 무안군 운남면 연리에 사재(私財)를 털어 청운고등공민학교(靑雲高等公民學校, 현재 望雲中學校)를 설립하시어 후진양성을 위해 잠시 헌신하셨다.
1953년, 스님께서는 무안군 운남면 성내리 대박산에 혜운사(慧雲寺)를 창건하셨다.
1959년, 해남군 현산면 조성리에 있는 두륜산(頭輪山) 양도암(養道庵)에서 6개월간 주석하신 후 진불암(眞佛庵)으로 옮기셨다.
진불암에서 4,5년 동안 지내시면서 대흥사에 주석하셨던 박영희 스님을 통해 초의선사(艸衣禪師) 문집을 열람하였다.
스님께서는 비구 • 대처 간의 싸움을 뒤로 하고 만행(萬行)을 자주 다니셨는데, 이 무렵에 다음과 같은 선시(禪詩)를 애송하셨다.
迷故三界城 (미고삼계성)
미혹한 까닭에 삼계가 성(城)이나
悟故十方空 (오고시방공)
깨달으니 시방이 공하네
本來無東西 (본래무동서)
본래 동서가 없으나
何處有南北 (하처유남북)
어느 곳에 남북이 있으리오
1966년, 스님께서는 화엄사 주지스님의 요청으로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주지를 맡으셨다.
당시 태안사는 폐허와도 같았지만, 고려시대에는 송광사와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렸을 정도로 규모가 큰 사찰이었는데 몽골군의 침입과 6·25 전쟁 등으로 대부분의 당우(堂宇)가 파괴돼버린 것이다.
스님께서는 계곡 건너편에 있던 봉서암(鳳棲庵) 법당을 옮겨다 대웅전 불사를 해놓으시고는 새로운 토굴을 찾아 나섰다.
1967년, 스님께서는 동안거 결제를 위해 구례 사성암(四聖庵)으로 가서 암주보살에게 방세를 주어 아랫마을로 보내고 수좌(首座) 한 사람과 더불어 삼동(三冬) 한 철을 철저하게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정진하셨다.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남기셨다.
暴雪鰲山頭 (폭설오산두)
폭설이 오산 머리에 내리고
回龍蟾津流 (회룡섬진류)
용처럼 구비 돌아 섬진강이 흐르네
天鼓幽自鳴 (천고유자명)
하늘 북 그윽하게 스스로 울리니
虛明照心月 (허명조심월)
텅 빈 밝음은 마음 달을 비추네
1968년, 스님께서는 새로운 수행처를 찾아 경남 남해에 있는 호구산 용문사 염불선원, 백련암 부소대(扶蘇台)로 향하셨다.
1968년 겨울, 가까운 권속(眷屬)이 폐사찰의 목불상(木佛像)을 옮겨온 사건으로 인하여 누명을 쓰고 광주교도소에서 3개월 동안 영어생활(囹圄生活)을 하셨다.
영어생활(囹圄生活)을 할 때 비록 자신이 저지른 일은 아니었지만 출가한 몸으로 수감자(收監者)의 신세가 되었다는 자책감에 하루 24시간을 끊임없이 관세음보살을 염하길 1주일 쯤 되었을 때, 관세음보살께서 실제로 감옥의 천정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친견하는 현전가피(現前加被)를 입으시고 곧 바로 풀려났다고 한다.
2003년 11월 12일 (음력,10•19) 오후 10시 30분 설령산 성륜사 산중에 대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시대의 큰 스승으로 많은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전해 온 무주당 청화 스님이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다.
성륜사 조선당(祖禪堂)에서 도일(성륜사 주지) 스님을 비롯한 상좌스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적(圓寂)하시니 세수(歲壽) 81세요, 법랍(法臘) 56세셨다.
청화 스님은,
此世他世間 (차세타세간)
이 세상 저 세상
去來不相關 (거래불상관)
오고 감을 상관치 않으나
蒙恩大千界 (몽은대천계)
은혜 입은 것이 대천계만큼 큰데
報恩恨細川 (보은한세천)
은혜를 갚는 것은 작은 시내 같음을 한스러워할 뿐이네
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평화스러운 미소로 한 생을 마감했다.
청화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의 중흥조인 만암스님의 상좌인 금타스님을 은사로 1947년 스물네살의 젊은 나이로 불문(佛門)에 들었다.
스님은 출가이후 오로지 불법을 바르게 익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일념으로 정진을 거듭했다.
하루 한끼 공양으로 법체(法體)를 유지하면서 장좌불와, 묵언, 단식 등의 수행정진으로 불법의 향기를 대중에게 전했다.
지리산 벽송사, 백장암, 동리산 태안사, 내장사 벽련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의 끈을 놓지 않은 청화 스님은 여러 차례의 안거를 거치며 확철대오의 경지에 올랐다.
스님은 참선정진을 주로 하면서도 '공부의 방법'에 있어 후학과 재가불자들에게 염불선(念佛禪)이라는 길을 제시해 주었다.
스님이 제창한 수행방법인 염불선은 투철한 계율과 정혜쌍수를 기본정신으로 한다.
특히 염불선은 은사스님인 금타 스님이 창도(唱導)한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전수받아 이를 법계일심(法界一心)의 한 생명 사상으로 승화시킨 수행방법이다.
염불선은 우리 시대의 많은 지성과 시대사상을 아우르는 한편 새로운 세기를 선도하는 수행방법으로 부각되고 있다.
많은 스님과 불자들은 청화 스님에 대해 '자비행(慈悲行)'이 끝이 없는 어른이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스님이 광주 추강사에 주석하던 시절의 일화이다.
대중들이 먹을 쌀이 2~3일치 밖에 남지 않아, 방안을 찾기 위해 대중들이 공사(公事)를 하던 어느 날 객스님 한분이 찾아왔다.
청화 스님은 주저함이 없이 쌀독에 남아있는 쌀을 객스님 걸망에 담아주었다.
또 한 번은 두륜산 진불암에 머물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절을 찾아온 낯선 스님을 위해 손수 40리 거리인 해남까지 내려가 제물을 준비해와 제사의식 가운데 절차가 제일 복잡하다고 하는 구병시식을 베풀어 주었을 정도이다.
이처럼 보통 정성으로는 하기 힘든 자비행을 실천했던 스님이 청화 스님이다.
때문에 "청화 스님은 자비의 화신이고 보시바라밀의 산 귀감이다" 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을 아무도 없다.
스님은 교학에도 두루 밝았다.
스님이 직접 저술하거나 역주한 경전이나 저서도 여러권 남겼다.
정통선의 향훈 • 원통불법의 요체 • 마음의 고향 • 진리의 길 • 가장 행복한 공부 등은 손수 지었고, 약사경 • 정토삼부경 • 육조단경은 번역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이 밖에도 은사 금타 스님의 저술을 모아 '금강심론'을 펴내는 등 부처님 가르침을 많은 불자들이 쉽고 바르게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청화 스님은 참선, 염불선, 교학을 기반으로 대중들에게 자비심을 근간으로 불법을 폈다.
스님은 포교에도 남다른 원력을 지니고 있었다.
직접 창건한 도량만 해도 무안 혜운사, 두륜산 상원암, 월출산 상견성암, 서울 광륜사, 미국 금강선원 등 10여개에 이른다.
스님은 도량을 열면 '가장 청정한 도량' '가장 엄정한 계율' '초인적인 용맹정진' 등 세 가지의 도량신조(道場信條)를 강조했다.
이제 스님의 가르침은 법향(法香)으로 남아 후대에 '푸른 빛'으로 남을 것이다.
지위고하, 빈부, 남녀 등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고 중생을 인도한 청화 스님은 불교집안의 어른을 넘어 우리 사회의 큰 스승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첫댓글 강청화스님(큰스님)그립습니다.
스님의 온화한 미소와 조용한 음성이 들리는듯합니다.
큰스님 !
이미 속환사바 하셨는지요~~()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무주당 청화선사 법향
그 법향에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의 법명(보강) 또한 청화 선사께서 주신 법명으로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자의 삶으로 저희 곁에 머물다 가신 무주당 청화선사
한없이 그립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무주당 청화선사 수행 카페입니다.
출처: 금강(金剛) 불교입문에서 성불까지
https://m.cafe.daum.net/vajra/
금강심론강독모임- 금강강독회
(온 오프라인 수행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