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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전부 / 빌 3:1-9 여러분도 잘 아는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수도사가 있다. 신학과 철학을 접목시킨 훌륭한 신학자이며, 동시에 경건한 수도사이다. 그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천사 같은 박사’라고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한 번은 그가 수도원에서 기도하던 중에 환상을 보았다. 예수님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물으셨다. “네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때 그의 대답은 이랬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전부입니다.” MBC 앵커 출신의 조정민 목사님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님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전부입니다. 예수님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모든 것)입니다.” 오래 전 미국 LA의 어느 한인 안경점에서 텔레비전 광고를 했다. 그 광고의 멘트는 안경점 주인이 나와서 어눌한 말투로, “내가 아는 것은 안경 밖에 없습니다” 였다. 그런데 이 광고가 당시 큰 히트를 했다. 그 안경점은 엄청난 매상을 올렸고, 그 광고는 그 해의 광고상까지 받았다. 안경 사업을 하는 사람이 안경 밖에 모른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안경 밖에 모른다는 것은, 한 눈 팔지 않았다는 말이니, 오히려 자랑거리다. 이 말은 믿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전부입니다”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전부입니다.”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라는 말은, “나는 예수 밖에 모릅니다”와 같은 의미다. 예수쟁이인 우리가 예수 밖에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랑거리다.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1절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향해 보낸 편지에서 말한다.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바울이 석방이 결정돼서가 아니다. 이제 감옥 생활을 벗어나게 되어서가 아니다. 그에게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전히 매여 있다. 여전히 자유로운 몸이 아니다. 그의 환경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도 그는 소리친다.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이걸 어떻게 설명할까? 딱히 설명할 수 없다. 사실 신앙은 다 설명할 수 없다. 복음성가에 이런 노래가 있다. “너는 왜 항상 웃니? 슬퍼도 눈물 나도. 남들은 모를 거야. 왠지 좋아 항상 좋아. 무엇이 그리 좋은지 나도 알게 해다오. 너와 나 만나려고 주 예수님 오셨단다. 참 기뻐 왠지 기뻐서 항상 웃고 항상 찬송. 정말 좋아 왠지 좋아 또 기뻐서 찬송하네.” 이 찬양을 설명할 수 있는가? 본래 신앙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믿는 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의 믿는 바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다. 바울이 그랬다. 비록 감옥에 있지만 기뻐했다. 그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다. 그나마 이유를 하나 대자면 이것이다. “주안에서...” 주 안에서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감옥에서 기뻐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을 향해, 이미 “기뻐하라”고 한 적이 있다. 빌 2:18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그런데 또 기뻐하라고 같은 말을 썼다. 사실 같은 이야기를 쓰는 것은 성가신 일이다. 그럼에도 그가 그렇게 한 이유가 있다. 그건 그들의 안전을 생각해서 였다. 목회자로서 깊이 공감이 되는 말씀이다. 목회자는 성도가 주일에 안 보이면 걱정이 된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예배 내내 마음이 졸여진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생겨 예배에 빠지게 됐을 때, 미리 연락을 해줘야 한다. 2절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바울이 조심시킨 빌립보교회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여기 나오는 “개들”, “행악하는 자들”, “몸을 상해하는 일”은,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표현을 좀 거칠게 했다.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더 주의를 줄 심산이었던 것이다. 유대주의자들이 이미 교회 안에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방인 개종자들은 유대주의자들에게 취약할 수 있다. 복음의 시작이 유대 예루살렘이었고,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도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떠난지 오래 됐다. 그 이후 유대주의자들이 지속적으로 방문하여, 복음의 의미를 왜곡시켰다. 처음에 들을 때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지만, 같은 말을 여러 사람에게 반복하여 듣다보면 미혹되게 된다. 이미 빌립보교회 안에 그런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소문이 들렸던 것이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민감하다. 그들은 복음을 왜곡 변질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로 인해, 바울의 심기는 무척 불편해졌다. 바울은 재판을 앞두고 있는지라, 자기 코가 석자인데, 오직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안전을 신경쓰고 있다. 사실 몸이 멀어져 있으면, 서서히 마음도 멀어지게 돼 있다. 바울은 자극적이고 거친 단어를 써가면서, 그들에게 유대주의자들을 경계시키고 있다.
3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의 행위,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유대주의자들은 예배에 열심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기를 자랑했다. 그들은 육체에 할례를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을 강조하고, 예수를 강조하고,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열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닌 성령으로 예배하고, 율법을 지키는 자기 자랑이 아닌 예수를 자랑하고, 육체에 하는 할례가 아닌 심령에 하는 할례가 진짜임을 강조했다. 뭐든지 자기(내)가 들어가면 문제가 생긴다. 유대주의자들은 자기 열심, 자기 자랑, 자기 신뢰가 강했다. 열심은 남달랐지만, 자기를 위한 측면이 강했다.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유대주의자들이 있을 수 있다. 너도나도 자기를 드러 내기 시작하면, 교회는 자기 자랑의 경연장이 되고 만다. 교회엔 예수 자랑만 있어야 한다. 우리의 자랑거리는 오직 예수 뿐이다. 우리가 잘 돼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자랑하기 위해서다. 우리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예수님을 자랑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자랑해야 한다. 그걸 부단히 훈련해야 한다. 그래야 결정적일 때 예수님을 자랑할 수 있다. 사실 사람에겐 자기 자랑의 본능이 있다. 본능적으로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작은 것에 자기 자랑하는 습관이 들면, 어느 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수 있다. 그건 자기 자랑과 자기 죽음을 맞바꾸는 모험이 될 수 있다. 행 12:23절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예수 자랑이 많은 교회는 은혜롭다. 예수 자랑이 풍성한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간다. 일반적으로 전도에 있어 3가지 자랑이 필요하다고 한다. 예수 자랑, 교회 자랑, 목회자 자랑이다. 실제로 이 세 가지 자랑은 가장 쉬운 전도방법이다. 예수 자랑이 확실한 교회라면, 교회 자랑, 목회자 자랑은 효과적이고 필수적이다. 자기 교회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 목회자를 자랑하지 않고도, 전도를 잘 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자랑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자랑은 없는 교회 자랑만 있거나 목회자 자랑만 있으면 안 된다. 산돌교회가 예수 자랑이 풍성한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모든 성도들에게 예수 자랑이 넘쳐나기를 바란다. 4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바울은 자기가 예수만 자랑하는 게, 자기 육체가 부족해서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육체를 신뢰할 만하다. 여기서 육체란 외모, 건강은 물론이고 출신성분, 학벌, 경력, 신앙 등을 포괄하고 있다. 바울이 예수를 자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내세우는 것이, 자기 육체를 내세울 것이 없어서가 아니다. 자기가 육체를 자랑하면, 자신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려진다. 자기 아들조차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약화된다. 그러기에 항상 예수님 자랑하고 하나님의 은혜 강조했다. 하지만 바울을 공격하는 유대인들은, 그런 바울을 공격했다. 그는 육체적으로 부족한 사람이다. 그는 육체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들의 말도 안 되는 공격에 대꾸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울이 매인 몸이다. 무엇보다 빌립보와 멀리 떨어져 있다. 근거가 없는 말도 자꾸 듣다보면 그렇게 들린다. 5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그래서 자신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근거들을 제시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바울은 자신이 팔일 만에 할례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은 율법에 따라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는다. 반면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을 하면, 어른이 돼서 할례를 받는다. 그러니까 자기는 뼛속까지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말이다. 이방인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이스라엘 태생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또 자신이 베냐민 지파임을 밝히고 있다. 베냐민 지파는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라헬에게서 비롯됐다. 이스라엘을 모압왕 에글론으로부터 구원한 사람이 누구인가? 왼손잡이 에훗이다. 그가 베냐민 지파였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누구인가? 사울이다. 그 역시 베냐민 지파였다.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될 때, 베냐민지파는 유다지파와 함께 다윗 왕조에 속했다. 하만으로부터 유대인을 구원한 사람이 누구인가? 에스더와 모르드개이다. 그들 역시 베냐민 지파였다. 바울은 자신이 베냐민 지파임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바울은 자신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임을 밝히고 있다. 히브리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컫는 말이다. 자신의 양쪽 부모가 다 히브리인이라고 한다. 히브리어로 양육을 받았고, 히브리 관습을 지켜온 순수한 히브리인이라고 한다. 자기 혈관에 아브라함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바울은 또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임을 밝히고 있다. 바리새인은 율법에 대해 가장 엄격한 종파이다. 율법은 물론이고, 구전이나 전승까지 따르는 종파다. 그는 바리새인의 아들로 태어나 바리새파에 입문을 했다. 율법에 관한한 가장 존경받는 랍비 가말리엘에게서 수학했다. 이 정도면 완벽한 바리새인이다. 6절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또한 그는 행동파였다.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열심이었다. 문제는 그 열심이 어디서 나왔느냐이다. 그의 신앙에서 나왔다.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개인의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평소 교회가 맘에 안 들어서가 아니다. 교회 때문에 집값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열렬한 믿음에서 나왔다. 교회가 무엇인가? 행 20:28절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이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께 자기 생명 같은 것이다. 그런 교회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박해했다. 박해를 해도 보통 열심으로 박해한 것이 아니다. 몰라서 그랬다.
자기가 아는 율법신앙이 전부인줄 알았다. 그에게 예수는 이단이었다. 그에게 예수는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자였다. 그 예수의 추종자들이 만든 교회니 놔두면 안 된다, 그건 자기 신앙 양심상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다. 그가 교회를 박해할수록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는 유대교 내에서 촉망받는 젊은 지도자로 점점 부각되어 갔다. 그러다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남으로, 모든 것이 바뀌고 말았다. 생각이 바뀌고, 가치가 바뀌고, 방향이 바뀌었다. 교회 박해자에서 교회 개척자가 되었다. 예수 박해자에서 예수 증거자가 되었다. 이제 그에게는 예수가 전부가 되었다. 그 동안 자기가 그렇게 유익하게 생각했던 것이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해가 된다. 7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그걸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예수를 만난 후에 자기 안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도 획기적인 변화요 근본적인 변화이다. 이게 정상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안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 안에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예수를 오래 동안 믿어왔는데, 자기 안에 혁명적인 변화가 없었다면 이상한 것이다. 아직도 예수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잘못된 것이다. 이 고백에는 조금도 거짓이 섞여서는 안 된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이 말을 바꾸면 이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전부입니다.”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이런 사람이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이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있다. 어찌 보면 그리스도인 같고 어찌 보면 아닌 것 같고... 주일날 교회 가는 것 보면 그리스도인 같고, 평일에 사는 것 보면 아닌 것 같고.... 믿음이란 선택이다. 모든 것 중에 예수를 1번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번으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어떤 것도 선택하기 전에, 그것부터 1번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1번으로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가 없다. 처음엔 의도적으로 그걸 선택한다. 그걸 선택한 후에 다른 선택에 대한 미련이 들 때도 있다. 믿음이 들어갈수록 미련은 사라지고,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걸 1번으로 선택한다.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는 몇 번째인가? 보다 실제적으로 여러분은 주일예배를 우선순위 몇 번으로 선택하는가? 주일에 안 보이는 사람은, 예수가 2번 이후로 밀린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를 1번으로 대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2번 또는 3번으로 대한다. 그럼 서로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자기는 하나님더러 자기를 1번으로 대해달라고 하고는, 정작 자기는 하나님을 2번으로, 3번으로 대한다면 문제 있는 것이다. 이게 단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진짜를 만나야 가짜를 포기할 수 있다. 자기가 그렇게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진짜를 만나고 보니 가짜였다. 그럼 포기가 된다. 8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이게 바울의 고백이다.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의 손에 가진 것이 없다. 그 나이가 되도록 빈손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매여 있는 몸이다. 재판을 앞두고, 내일을 알 수 없는 신세다. 그런데 딱 그에게 하나가 있었다. 그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었다. 바울은 그거 하나 붙잡았다. 그것이 진짜라는 것을 깨달은 후에, 그 전에 애지중지 했던 것을 잃은 것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배설물로 여긴다.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우리는 어떤가? 여러분은 그리스도 때문에 잃어버린 게 있는가? 있다면 뭐가 있는가? 혹시 그리스도 때문에 얻은 게 더 있는 거 아닌가? 그리스도 때문에 뭘 포기한 게 있는가? 나는 이걸 포기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있는가? 솔직히 그리스도 때문에 얻은 게 더 많은 거 아닌가?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 때문에 뭘 잃어버렸다거나 뭘 포기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예수님한테 덕본 게 많았지, 손해 본 것은 거의 없다. 예수님 때문에 작은 거 포기하면, 예수님은 큰 것으로 되돌려주셨다. 여태껏 신앙 생활해 오면서 예수님한테 무엇을 얻어낼까 고민했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까를 고민해보면 어떨까? 9절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세상의 모든 것을 얻었다고 해도, 예수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천하보다 귀한 것을 얻은 자들이다. 왜? 예수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 예수는 아무나 얻을 수 없다. 내 의로 얻을 수 없다. 내 노력으로 얻을 수 없다. 내가 수양하여 얻을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일이, 예수냐 아니냐는 아니다. 그런데 예수냐 아니냐의 일이 분명히 있다. 그때 예수를 선택하되, 1번으로 선택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예수를 1번으로 선택하고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여러분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여러분이 가장 애지중지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예수님과 얼마나 상관 있는 것인가? 그것이냐 예수냐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기꺼이 예수를 선택하겠는가?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전부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임을 고백합니다. 우리 삶에 가장 귀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어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선 순위 1번에 놓게 하옵소서.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전부입니다를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산돌교회, 24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