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궁중화가, 김은호 ⓷
2025년 11월 광복 80주년을 맞아 경기도박물관(경기도 용인시)이 연 특별전 ‘오세창: 무궁화의 땅에서’ 중 유독 눈길을 끈 작품이 있었다. 두 폭 병풍 형태의 작품은 이당 김은호가 그림을 그리고 위창 오세창(1864~1953)이 붓글씨를 썼다. 눈 쌓인 겨울날 남천(南天, 상록식물의 하나)이 화면 가득한 가운데 팔가조(八哥鳥, 효의 상징인 새) 한 마리가 노닐고 있다. ‘마음은 물과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며, 세상을 대하는 기상과 너그러움이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화평하다’는 뜻의 글귀가 곁들여졌다.
오세창이 누구인가. 기미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우리 서화사와 금석학 연구의 대가였다. 그의 안목과 지도에 힘입어 간송 전형필(1906~62)이 우리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간송미술관을 설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작품의 제작연도는 1937년 12월(음력). 이에 앞서 1935년께 오세창은 김은호의 권농동 작업실 이름(당호)을 지어주기도 했다. 오세창이 직접 쓴 ‘낙청헌(絡靑軒)’ 현판은 지금도 어느 수집가의 품에 실물로 전해진다.
2025년 경기도박물관 특별전에서 공개된 이당 김은호와 위창 오세창의 합작 병풍. 제작연도가 1937년 12월(음력)로 나와 있다. 사진 경기도박물관
당시 언론공개회에서 경기도박물관의 담당학예사는 오세창의 글과 김은호의 그림이 함께했다는 점을 이채롭다는 듯 언급했다. 훗날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오세창과 달리 김은호는 미술계에서 친일파로 분류됐고, 특히 2000년대 들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면서 우리 미술사에서 사실상 터부시되는 인물이라서다. 김은호는 이와 관련해 회고록 『서화백년』에서 해방 후 자신을 친일파로 모는 미술계에 대해 불만스러운 감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타계 직전 그는 이 같은 오명을 씻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단원 김홍도 금강산 화첩 초본’이 발견된 그의 유품 창고에선 생전에 김은호가 대리인을 통해 작성한 ‘독립유공자 신청서’ 초안이 발견됐다.
초안엔 1919년 3·1운동 때 독립신문을 살포하는 등 시위 참가로 투옥돼 1년간 복역한 사실과 출소 후에도 2년간 물밑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978년 11월 27일자로 작성된 이 신청서는 그러나 끝내 제출되지 않은 듯하다.
중앙일보에 이를 단독 공개한 김은호의 아들 김성원(81)씨는 “아버지는 3·1운동으로 형을 사셨고 해방 이후에도 대한민국을 위해 공을 많이 세우신 분”이라면서 “일제강점기 때의 일부 행적으로 그분 인생 전체를 매도해서 될 일이냐”고 항변했다.
최근 이당 김은호의 유품 창고에서 발견된 ‘독립유공자 신청서’. 1919년 3·1운동 때 독립신문을 살포하는 등 시위 참가로 투옥돼 1년간 복역한 사실과 출소 후에도 2년간 물밑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978년 11월 27일자로 작성됐으며 아들 성원씨는 글씨체가 당시 부친의 수발을 들던 비서의 것이라고 밝혔다. 생의 막바지에 자신의 오명을 씻기 위해 대리인을 통해 신청서를 작성했다가 끝내 체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 이당김은호기념사업회
김은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먼저 『서화백년』 속 3·1운동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1976~77년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로 연재된『서화백년』은 1인칭 서술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그의 투옥 사실만큼은 당시 형사 판결문 등 사료로 확인된다.
1919년 1월 하순, 고종이 갑자기 승하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일본인들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도 함께 퍼졌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압박과 굴욕 속에 살아오던 조선 사람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고종의 장례를 이틀 앞둔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에 앞서 그해 2월 민족대표 33인이 선언한 독립선언서가 전국에 인쇄·배포됐다.
스물일곱 살 김은호도 거리로 뛰쳐나갔다. 마침 한 친구가 귀띔해 줬다. 취운정(就雲亭)에서 천도교인 윤익선이 등사판으로 ‘조선독립신문’을 찍어내고 있으니 함께 돌리자고 했다. 취운정은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러 드나들며 익히 알던 곳이었다. 친구와 함께 달려가 신문 뭉치를 품속에 감추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담 너머로, 행인 손에, 군중 속으로 닥치는 대로 던지고 뿌렸다. 일본 헌병의 눈을 피해 가며 그렇게 보름을 보냈다.
3월 27일, 그날도 종로 재동 거리로 뛰어나왔다. 네거리에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는 군중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김은호도 조선독립신문을 뿌리면서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일제의 발포 명령이 내려졌다. 총소리가 울렸고 사람들이 쓰러졌다. 간신히 빠져나온 김은호가 운니동 집으로 달아나려는 찰나, 경찰의 방망이가 오른쪽 이마를 정통으로 내리쳤다. 눈앞에 불꽃이 번쩍했다. 김은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3·1운동 당시 만세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서 있는 일본군. 사진 국가기록원
3·1운동 당시 서울 남대문로의 만세 시위. 사진 국가기록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재동파출소로 끌려가는 중이었다. 종로경찰서로 넘겨지는 중에도 머리에선 피가 계속 흘렀다. 대기하고 있는데 한 순사가 형사부장에게 말했다.
“지금 여기 장소가 좁아서 머리가 깨진 이 사람은 유치장으로 보냈으면 합니다.”
형사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순사는 퉁명스럽게 김은호를 일으켜 세우며 명령했다.
“이 자식아, 일어섯!”
허리를 끌다시피 하며 유치장으로 걸어가는데, 순사가 복도에서 나직이 말했다.
“이 사람아, 어쩌다 이렇게 됐나? 나를 모르겠나?”
조선 사람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전에 계동 이기용 대감의 초상화를 그리러 다닐 때 그 집에서 만났던 순사였다. 그림을 좋아해 김은호를 보면 늘 반가워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유치장으로 보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유치장으로 들어가기 전 먼저 죽도록 매질을 당하는 터라, 빨리 들여보내는 것이 오히려 덜 다치는 방법이었다.
“어젯밤에도 그 방에서 세 사람이 맞아 죽었네.”
소름이 끼쳤다. 잠시 후 그 순사가 와서 터진 머리를 소독해 줬다.
다음날부터 정식 취조가 시작됐다. 일본인 순사가 통역을 대동하고 인적사항을 묻기 시작했다. 김은호는 주소와 직업을 밝혔다. 그런데 이어진 질문에 마음이 서글펐다.
“너는 관리나 의원은 아니지?”
“아닙니다.”
“그러면 작위나 훈공, 종군 기장 등을 갖고 있느냐?”
“아니오, 없습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김은호에 대한 경성지방법원의 판결 원본. 총 20장 분량으로 이 페이지엔 김은호의 직업(화공)과 나이 등과 함께 최명이 왕래방해(往來妨害), 소요(騷擾), 물건손괴(物件毀壞) 등으로 나와 있다. 이는 김은호가 서화백년에서 서술했듯, 자신의 죄과를 축소 자백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전체 원문엔 판결 선고일이 1919년(대정 8년) 9월 25일로, 확정일이 9월 30일로 기록돼 있다. 사진 이당김은호기념사업회
일본이 인정하는 사회적 지위가 있다면 죄가 경감되거나 무죄로 처리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질문이었다. 명색이 왕의 어진을 그린 어용화사인데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한다니…. 화가가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사는 범죄 사실을 구체적으로 캐묻기 시작했다. 김은호는 최대한 축소해 답했다.
“저는 이완용 백작의 집에 인사하러 가는 도중에 재동파출소와 덕제병원 사이에서 군중이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고 가담하다가 순사에게 잡힌 것입니다.”
그러나 순사는 단순 가담인지 조직적 개입인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때부터 고문이 시작됐다. 여덟 번을 기절했다가 깨어나면서도 김은호는 끝까지 버텼다. 이때 뜨거운 인두로 허벅지를 지지는 고문의 자국이 남았고, 평생 한쪽 다리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됐다.
서대문 감옥에 들어온 지 6개월 만에 1년형을 선고받고 푸른 옷의 기결수가 됐다. 그곳에서 뜻밖의 인연도 만났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신석구(1875∼1950) 목사와 같은 방을 쓰게 된 것이다. 33인은 모두 독방에 갇히는 게 원칙이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신 목사만은 김은호와 함께하게 됐다. 감방 안에서 신 목사에게 성서와 한문을 배웠다.
바로 옆방에는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이 있었고, 불과 1년 전 함께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 육당(六堂) 최남선(1890~1957)도 갇혀 있었다. 조선독립신문을 만들던 윤익선도 잡혀 와 있었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모인 셈이었다.
옥중에서 심한 독감에 걸렸다. 열병 증세가 심하고 목에서는 고름이 나왔다. 몸은 허약할 대로 허약해졌다. 어머니와 누나가 노끈 주머니에 사식통을 넣어 날마다 들여보냈지만 그 밥도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을 앓다가 만기 출옥 한 달 전, 가출옥 허가가 내려졌다.
집에 돌아오니 초췌해진 어머니가 있었다. 손을 붙잡고 “불효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울었다. 어머니는 아들 손목을 쥔 채 눈물만 흘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난 것은 다 네 큰누이의 덕으로 알거라. 네가 옥에 갇혀 있는 동안 너의 큰누이가 너를 살리려고 서대문 감옥 앞의 사식집에서 일하고 그 대가로 사식을 넣어 준 것이야. 네 작은누이는 겨울에 아이들에게 ‘외삼촌이 감옥에 갇혀서 떨고 있는데 너희들이 이불을 덮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이불을 내주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그 둘이 너의 석방을 매일 매일 간절히 빌었단다.”
1929년 김은호가 신만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 관훈동의 새 화실에서 그린 작품 '시집가는 날'.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 사진 이당김은호기념사업회
민족대표 33인 중엔 서회미술회 사랑방에 자주 나오던 위창 오세창과 우당(憂堂) 권동진(1861∼1947)도 있었다. 이들은 거사 다음 날인 3월 2일 아무 일 없다는 듯 김은호의 스승 심전 안중식의 집에서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결국 일제에 체포돼 둘 다 3년형을 살고 나왔다. 안중식도 경찰에 끌려가 혹독한 문초를 당했다. 그는 이를 회복하지 못하고 끝내 그해 가을 숨을 거뒀다. 이듬해 소림 조석진도 세상을 떠났다. 서회미술회를 만들고 이끌어 온 한국화의 두 거목이 그렇게 연이어 갔다.
서화미술회의 존재감을 대신한 곳이 1918년 5월 19일 발족한 서화협회다. 1921년 4월 1일부터 나흘간 열린 제1회 서화협회전은 조선 최초의 서양식 단체전시회였다. 이후 ‘협전’이라는 약칭으로 불리게 된 이 전시회에 김은호는 정회원 자격으로 초창기부터 열심히 참여했다. 1회 협전에 ‘애련미인도(愛蓮美人圖)’와 ‘접미인도(蝶美人圖, 또는 축접미인도)’를 출품해 호평을 받은 사실을 지난 회차에서 전한 바 있다.
협전이 조선 화단의 기둥으로 자리잡자 일제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단체전을 출범시켰다. 당시 일본 동경(도쿄)에선 ‘제국미술전람회’(약칭 ‘제전’)가 화가들의 등용문 구실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본떠 1922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를 열었다. 서화협회의 동참 없이 ‘선전’의 흥행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총독부는 출범 때부터 서화협회원들의 작품을 출품시키는 데 공을 들였다고 한다. 심지어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른 오세창도 1회 선전에 서예 전서(篆書)를 출품해 서(書) 부문 2등상을 받았다.
이당 김은호의 1940년작 '경평미인'. 사진 이당김은호기념사업회
김은호는 해마다 열리는 협전과 선전 모두에 출전하며 그림 실력을 저울질했다. 수상도 곧잘 하고 인기가 높아 내놓기만 하면 ‘붉은 딱지’(판매됐다는 뜻의 표식)가 붙었다. 그러다 보니 시샘하는 이도 늘었다. 『서화백년』엔 다음과 같은 회고가 실려 있다.
5회 ‘협전’ 때의 일로 기억된다. 전람회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나는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조계사 앞 보성학교 운동장 홰나무 아래에 몇몇 회원이 모여서 수군덕거리고 있었다.
“협회전만 열면 이당 천지야.” “다른 사람은 도무지 성명 석자도 없단 말일세.” “그놈 위해 전람회를 열 필요가 뭐 있어.” 이 사람 저 사람이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6회에 출품하지 않았다. 협회의 만류로 7회에 냈지만 다시 면전에서 모욕을 겪는 소동이 있었다. 이후 김은호는 협전에 7년간 출품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총독부가 주최하는 선전에도 작품을 내지 않았다.
1937년이 됐다. 조선총독부는 ‘선전’ 규약을 개정하고 조선인 화가에게도 이른바 ‘심사 참여’라는 형식으로 대가를 대접하겠다고 발표했다. 조선 사람을 심사위원으로 세우라는 문제 제기를 받아들인 것이다. 사상조사가 선행돼야 해서 총독부 경무국이 심사위원 후보를 추천받았다. 당시 김은호는 이미 일본의 ‘제전’에서 입선한 경력도 있어 이구동성 추천을 받았다.
김은호가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무심사 작품으로 출품한 '화기(和氣)'. 하모니카를 부는 아들 옆에서 목청껏 노래하는 딸을 어머니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습이다. 김은호에 따르면 일제가 한창 전쟁 중인 상황에서 그가 올해도 시국화를 그리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게 한 작품이다. 사진 이당김은호기념사업회
그런데 투서가 들어왔다. 내용은 “기미 만세사건으로 징역 산 사람을 심사위원으로 뽑는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는 것이었다. 김은호는 조선 사람인 그의 필체를 알아봤다. “투서한 사람은 언젠가 나에게 친일파라고 몰아세웠던 일이 있는 인사였다. 그의 이중성이 밉기도 했지만 서로 헐고 뜯는 풍토가 야속하기만 했다”고 『서화백년』에 썼다.
이뿐 아니라 일본인 화가들의 반대도 있었다. ‘조선 사람을 심사위원 시키려면 우리들도 시켜달라’는 요지였다. 총독부에선 일본인이고, 한국인이고 간에 ‘제국전’ 입선자를 뽑은 것이라고 무마했지만 반발이 거세자 ‘심사위원’ 대신 ‘심사 참여’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김은호는 “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라 없는 설움이 얼마나 뼈아픈 것인가를 실감케 하는 생생한 체험이다”고 썼다.
이렇게 해서 그는 ‘참여’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달고 동양화 심사위원이 됐다. 당시 신문 보도엔 다음과 같은 그의 소감이 인용되기도 했다.
“저 같은 사람에게 참여라는 중직은 부적당한 일인 줄 압니다만 미력하나마 조선 미술계를 위하여서라는 의미에서 처음에 사양타 강권을 이기지 못하여 받았습니다.”
그해 김은호는 추천작가 및 심사참여원의 자격으로 7년 만에 선전에 작품을 냈다. 앞서 협전은 1936년 15회를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협전과 선전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던 조선 화가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평가받을 창구는 선전만 남은 상황이었다.
이듬해인 1938년(17회)부터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도 ‘심사 참여’하게 됐다. 청전의 경우에도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 때문에 반대가 있었지만 총독부가 무마했다고 한다.
김은호의 ‘선전’ 심사위원 참여와 출품은 1944년 제23회 대회까지 이어졌다. 이와 별개로 1936년 박광진·김복진·허백련 등과 일종의 미술단체인 조선미술원을 창립했다. 같은 해 그의 제자들도 동문 모임인 ‘후소회’를 발족시켰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았을 때 그는 경기도 안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해 10월 3대 독자인 성원을 얻었다.
1936년 조선미술원을 함께 창설한 뒤 경주의 고적을 답사하면서 석굴암에서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서양화가 박득순, 김은호(이당), (가운데 한 사람을 건너) 조각가 김복진이 서 있다. 사진 이당김은호기념사업회
광복 당시 심경을 김은호는 『서화백년』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광복의 기쁨을 만끽해 보러 올라온 서울은 나에게 쓴웃음을 안겨주었다. 미술계의 간부 자리 문제가 아니라, 하는 짓들이 모두 불쾌했다. 모든 화가와 미술학도가 이의 없이 참가한 ‘선전’에서 특선, 추천작가, 심사위원 된 것이 ‘친일파’라는 누명으로 바뀔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아직까지 반일사상의 행동 표시로 ‘선전’ 출품을 거부한 화가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기미독립만세 때 독립신문을 뿌리다가 왜경에게 붙잡혀 1년 동안 옥고까지 치른 내가 ‘선전’에 특선해서 창덕궁상, 총독상을 받고 추천작가가 되고 심사에 참여한 게 무슨 죄라고 해방이 되니 ‘친일파’로 몬단 말인가. 그러나 때가 때인 만큼 불평하거나 항변할 계제가 못 되었다. 다만 그런 풍토가 미웠을 뿐이다.
이당은 같은 책에서 자신의 선전 심사 이력을 두고 “미력이지만 조선미술가들을 위해 있는 힘을 다했다”고 돌아보기도 했다. 일본인 화가들이 ‘제전’ ‘선전’ 입선 경력을 바탕으로 화단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조선인 화가들에게 도움이 되려 했다는 항변인 셈이다. 해방 후 자신에 대한 평가가 180도 바뀐 상황에서 김은호는 이를 미술계의 권력 다툼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20여 년이 지나 회고록을 쓰면서도 ‘친일파’를 ‘누명’이라고 일축한 데서 드러난다.
그러나 2009년 발간 당시 친일인명사전이 문제 삼은 것은 선전 심사위원이나 추천작가 경력 자체만은 아니었다. 편찬진은 김은호가 1941년 총독부의 지원 아래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본화부 평의원을 맡은 점과 전쟁기 전시 동원 정책에 부응하는 활동을 함께 근거로 제시했다. 조선미술가협회는 전쟁 말기 반도총후미술전람회와 결전미술전 등 시국 미술행사를 추진하며 미술계를 국가총동원 체제에 동원하는 역할을 수행한 단체로 평가된다.
다만 당시 김은호가 조선미술가협회의 정책을 주도하거나 개별 행사를 직접 기획했다는 직접적 사료는 제시된 바 없다. 하지만 그는 당시 조선 화단을 대표하는 원로 화가로서 협회의 운영에 참여했고, 그 위치 자체가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게 편찬진의 시각이다.
그리고 그 판단의 중심에 문제의 ‘금차봉납도’가 있다. 이 작품과 관련해선 다음 기회에 집중해 들여다보기로 한다.
민족미술 중흥 꿈꾼 서화협회…이완용이 고문 맡아 출품도
1918년 5월 19일 서화협회 발족을 주도한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불리는 춘곡(春谷) 고희동(1886~1965)이다. 동경(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돌아온 그는 근대적인 미술운동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때까지 화단의 중심이던 서화미술회부터 접촉했다. 총 13명의 발기인 중에 서화미술회의 선생이던 소림 조석진, 심전 안중식, 우향 정대유, 위사 강필주, 청운 강진희, 소호 김응원, 관제 이도영 등이 포함된 배경이다. 이 밖에 당시 서화계 중진이던 해강 김규진, 수산 정학수, 성당 김돈희, 위창 오세창, 백당 현채의 날인도 받았다.
이들은 ‘전 조선의 서화가를 망라해 신구 서화의 발전을 도모하고, 동서 미술을 연구하며 후진을 양성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초대 회장은 안중식이 맡았고 춘곡은 총무를 자처했다. 그해 10월 8일에 제1회 정기총회를 열었다. 이때 고문에 이름을 올린 이들 중에 또다시 일당(一堂) 이완용이 있다. 석운(石雲) 박기양, 동농(東農) 김가진, 시남(詩南) 민병석도 함께 추대됐다. 정기총회에선 발기인 외에 추가로 정회원 16명도 받아들였다. 김은호를 비롯해 심산(心汕) 노수현(1899~1978),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 등 서화미술회 동문들이 대거 포진했다.
서화협회는 출범 3년 만인 1921년 4월 1일 제1회 서화협회전을 열었다. 창립 때부터 회원전 개최를 주요 사업으로 내세웠지만 3·1운동 여파로 차질을 빚었다. 서울 계동의 중앙고보(中央高普)의 강당 4개 교실을 빌려 나흘간 열린 전시회엔 고서화를 포함해 총 100여 점이 출품돼 성황을 이뤘다. 김은호는 미인도 2점을 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후 ‘협전’이라는 약칭으로 불리게 된, 조선 최초의 서양식 단체전시회가 이렇게 시작됐다.
협회는 1921년 10월 25일에 기관지 『서화협회보』를 발행했다. 24쪽에 불과한 얇은 간행물이었지만 한국 초유의 미술잡지였다. 회보에는 특별강좌란을 만들어 이도영의 ‘동양화의 연원’, 고희동의 ‘서양화 연원’ 등 연재물을 실었다. ‘서화실기강좌’란 것도 연재됐다. 1928년에 단행본으로 나온 오세창 편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은 『서화협회보』에 연재했던 ‘서가열전’을 모은 것이다.
『서화협회보』 창간호엔 조선총독의 축필도 실렸다. 이완용이 고문을 맡은 데서 보이듯 당시 사회적 한계를 보여준다. 이완용은 1회 협전에 고문 자격으로 행서(行書)를 내놓기도 했다. 다만 이상협·김성수·장덕수·최두선·김동성 등 민족 지도자들이 서화협회를 직간접으로 도와 ‘민족미술 중흥’이라는 기치에 동참했다.
1922년 조선총독부가 조선미술전람회(선전)를 창설하면서 협전은 중대한 전기를 맞았다. 협회 회원 대부분이 선전에도 출품하며 두 전람회를 병행했지만, 총독부가 주도하는 선전의 권위가 커질수록 협전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협전은 1920년대 후반부터 쇠퇴했고, 1936년 열린 15회가 마지막이었다. 이후 조선 화단의 중심은 해방 때까지 선전으로 옮겨갔다(이와 관련, 월간미술 1990년 1월호에 실린 이규일 기자의 ‘일제시대 미술인의 갈등- 협전과 선전의 양다리 작전’을 참고해 볼 만하다).
마지막 궁중화가, 김은호 다시 읽기
고종 “日 뭘 알아? 김은호 불러!”…20살 초짜 화가에 어진 맡겼다
“미남 화가, 하룻밤 지내고파” 교태 부린 기생에 면박 준 사연
※ 중앙일보(주)는 본 콘텐트에 대한 저작권 등 일체의 권리를 보유하며, 본 콘텐트의 무단 전재를 금합니다.
에디터
강혜란
관심
문화선임기자
theother@joongang.co.kr
사람 이야기가 쌓여 역사가 됩니다. 그 현장에 있겠습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44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