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처럼 / 김석수
요즘 낮에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내 사무실 옆 양지바른 곳에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사군자의 하나로 옛 선비들이 좋아했다. 눈 내리는 깊은 겨울 심한 추위를 이겨내고 핀 화사한 꽃과 은은한 향기가 일품이다. 홍매화를 보고 싶어 지난 주말에 아내와 함께 구례 화엄사 각황전에 갔다. 꽃구경 온 사람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이곳저곳 한참 헤맸다. 선홍빛 꽃을 가까이 가서 보니 짙은 향내를 풍기며 수줍은 듯 피어나 아름다웠다. 고즈넉한 절 풍경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매화보다 일찍 피는 꽃이 복수초다. 이른 봄눈이 쌓여 있어도 키가 작은 가지 위에 노란 꽃을 피운다. 눈 속에서 올라와 핀 것이 아니라 먼저 꽃이 핀 상태에서 눈이 내린 것이다. 행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이 꽃 이름처럼 사람들은 부유하게 오래 사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한다. 코스모스와 비슷하게 생긴 노란 꽃잎이 황금의 꽃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부유함과 행복을 뜻하게 되었으리라. 지난달 울산 들꽃학습원에서 앙증맞게 핀 복수초를 처음 보고 카톡 사진으로 올렸다.
화단에 할미꽃이 함초롬히 올라오고 있다. 점심시간에 매일 눈인사한다. 어린 시절 봄이면 우리를 할머니처럼 늘 반겨 주던 정다운 꽃이다. “뒷동산의 할미꽃 꼬부라진 할미꽃/ 젊어서도 할미꽃 늙어서도 할미꽃/ 하 하 하 하 우습다./ 졸고 있는 할미꽃/ 아지랑이 속에서 무슨 꿈을 꾸실까?”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불렀던 <할미꽃> 노래 가사다. 자세히 보면 붉은 꽃잎에 감싸인 노란 수술들이 신비롭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얀 솜털이 부드럽고 보송보송하다. 꽃이 지고 나면 실 같은 것이 자라고 열매가 여물면서 하얗게 세어 버린 할머니 머리카락 같다 하여 붙힌 이름이다. 볼 때마다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난다.
목련도 시샘하듯이 꽃을 피웠다. 성질도 급하게 잎이 나기 전에 꽃부터 핀다. 봄에 피는 꽃으로 목련보다 큰 꽃망울을 보기 쉽지 않다. 낮에 보는 목련꽃도 청순하고 아름답지만 캄캄한 밤에 보면 더욱 운치가 있다. 자주색과 흰색이 있다. 꽃차로는 자목련 꽃봉오리를 쓴다. 오염되지 않는 곳에 피어난 꽃봉오리를 따다가 꼬투리를 떼어내고 말려서 우려 마신다. 맵고 따뜻해서 몸에 찬 기운을 없애 준다. 아내는 봄이 오면 가끔 목련꽃 차를 만들어 내게 권하곤 했다. 둘이 개울가 양지바른 곳에 앉아 따뜻한 목련차 한잔 마시고 싶다.
산수유 꽃은 봄이 채 무르익기 전에 마른 가지 겨드랑이를 비집고 피어난다. 샛노란 꽃이 봄의 한중간에 새벽안개처럼 사라지도 한다. 하룻밤 자고 나면 꽃대에 희미한 자취만이 남아 있는 것이 꿈결 같다. 꽃망울은 좁쌀처럼 작다. 만개한 꽃도 밋밋하다. 거리를 두고 먼 곳에서 바라봐야 아름답다. 바람이 불면 일렁이는 노랑 물결이 파스텔 물감으로 그린 풍경화다. 지난달 말 더케이 지리산 가족호텔에 갔는데 산수유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솔봉 정상에서 묘봉 쪽으로 내려오니 산수유 꽃물결이 아름다웠다. 아내는 산수유가 매화보다 일찍 꽃망울이 터지는 것을 보고 신기하다고 했다.
밖에는 봄이 왔지만 세상은 코로나로 꽁꽁 얼어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 봄은 왔지만 봄이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방역에 심장이 차가운 겨울 같다. 온종일 마스크를 뒤집어 쓴 채 눈만 겨우 내놓고 웃음기를 잃어 가고 있다. 요즘 정치판은 모두들 너 나 할 것 없이 편 가르기에 여념이 없다. 역사의 비극은 대부분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데서 시작했다. 조선 시대엔 동인이니 서인이 따지며 죽이고 죽였다. 해방 직후엔 좌익과 우익이 극렬하게 대립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 같은 끔직한 범죄도 편 나누기 결과였다. 이제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에 조화롭게 피어나는 봄꽃처럼 모두가 내 편 네 편 없이 국민의 편에서 헤아려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