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녁 무렵 - 고은
절하고 싶다
저녁 연기
자욱한 먼 마을 *
2. 하늘을 깨물었더니 - 정현종
하늘을 깨물었더니 비가 내리더라
비를 깨물었더니 내가 젖더라
3. 섬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4. 호수(湖水) -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
5.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6. 오동도 - 이시영
이 바람 지나면 동백꽃 핀다
바다여 하늘이여 한 사나흘 꽝꽝 추워라
7. 봄논 - 이시영
마른논에 우쭐우쭐 찬 봇물 들어가는 소리
앗 뜨거라! 시린 논이 진저리치며 제 은빛 등 타닥타닥 뒤집는 소리
8. 사이 - 이시영
가로수들이 촉촉이 비에 젖는다
지우산을 쓰고 옛날처럼 길을 건너는 한 노인이 있었다
적막하다
9. 화살 - 이시영
새끼 새 한 마리가 우듬지 끝에서 재주를 넘다가
그만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먼 길을 가던 엄마 새가 온 하늘을 가르며
쏜살같이 급강하한다
세계가 적요하다
10. 애련哀憐 - 이시영
이 밤 깊은 산 어느 골짜구니에선 어둑한 곰이 앞발을 공순히 모두고 앉아 제 새끼의 어리고 부산스런 등을
이윽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겠다
11. 빛 - 이시영
내 마음의 초록 숲이 굽이치며 달려가는 곳
거기에 아슬히 바다는 있어라
뜀뛰는 가슴의 너는 있어라 *
12. 모닥불 - 이시영
영하의 추위
검푸른 하늘을 향해 가지를 툭툭 뻗고 있는 고목을 보면
내 가슴은 이상하게 뜨거워오니
저 강인한 자연 속에 순명을 다하고 있는 것들의 아름다운 침묵이
내 안에서도 무지개처럼 조금씩 조금씩 달아오르기 때문일까
13. 목수의 손 - 정일근
태풍에 무너진 담을 세우려 목수를 불렀다. 나이가 많은 목수였다. 일이 굼떴다. 답답해서 일은 어떻게 하나 지켜보는데 그는
손으로 오래도록 나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못 하나를 박았다. 늙은 목수는 자신의 온기가 나무에게 따뜻하게 전해진 다음 그 자리에 차가운 쇠못을 박았다. 그 때 목수의 손이 경전처럼 읽혔다. 아하, 그래서 木手구나. 생각해보니 나사렛의 그 사내도 목수였다. 나무는 가장 편안한 소리로 제 몸에 긴 쇠못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14. 우는 손 - 유홍준
오동나무 밑을 지나가는데 아이 하나가 다가온다
동그랗게 말아 쥔 아이의 손아귀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얘야 그 손
풀어
매미 놓아주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 평생 우는 손으로 살아야 한단다
15. 봄소식 - 용혜원
봄이 온다하기에
봄소식 전하려했더니
그대마음은
아직도
한겨울이었습니다
16. 사랑 - 한용운
봄 물보다 깊으니라
가을 산보다 높으니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 말하리
17. 춘서(春書) - 한용운
따슨 빛 등에 지고
유마경을 읽노라니
가볍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
구태여 꽃밑 글자
읽어 무삼하리오
18. 봄꽃을 보니 - 김시천
봄꽃을 보니
그리운 사람 더욱 그립습니다
이 봄엔 나도 내 마음 무거운 빗장을 풀고
봄꽃처럼 그리운 가슴 맑게 씻어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고 싶습니다
조금은 수줍은 듯 어색한 미소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피었다 지고 싶습니다
19. 어쩌죠 - 원태연
까맣게 잊었더니
하얗게 떠오르는 건
20. 사랑한다는 것은 - 원태연
이렇게 속으로는 조용히 울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게 하는 일 *
21. 序時 - 나희덕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
22. 봄이 올 때까지는 - 안도현
보고 싶어도
꾹 참기로 한다
저 얼음장 위에 던져놓은 돌이
강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는
23. 겨울사랑 - 유안진
나 혼자서 정리하고
나 혼자서
얼었다가 풀렸다가
한 겨울도 깊어갑니다
비바람이건 눈보라이건
나 혼자의 미친 짓입니다
24. 날마다 내마음 바람 부네 - 이정하
내 사는 곳에서 바람 불어 오거든
그대가 그리워 흔들리는 내 마음인 줄 알라
내 사는 곳에서 유난히 별빛 반짝이거든
이 밤도 그대가 보고 싶어
애태우는 내 마음인 줄 알라
내 사는 곳에서 행여 안개가 밀려 오거든
그대여, 그대를 잊고자 몸부림치는
내 마음인 줄 알라
내 아픈 마음인 줄 알라
25. 이름 부르는 일 - 박남준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네
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
문밖은 이내 적막강산
가만이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26. 가을편지 - 이해인
바람이 붑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내 고뇌의 분량만큼
보이지 않게 보이지 않게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27.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 황지우
긴 외다리로 서 있는 물새가 졸리운 옆눈으로
맹하게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 빛나는 바다를
28. 자화상 - 신현림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
29. 벌레 - 이성선
한 마리 자벌레
산이었다가 들판이었다가
구부렸다 폈다
대지의 끝에서 끝으로
이 우주 안 작은 파도
30. 그리운 시냇가 - 장석남
내가 반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돌멩이 같은 아기 낳으면
그 돌멩이 꽃처럼 피어
깊고 아득한 골짜기로 올라가리라
아무도 그곳까지 이르진 못하리라
가끔 시냇물에 붉은 꽃이 섞여내려
마을을 환히 적시리라
사람들, 한잠도 자지 못하리 *
31. 구혼 - 함민복
불알이 멈춰 있어도 시간이 가는 괘종시계처럼
하체에 봄이 오지 않고 지난한 세월로 출근하는 얼굴
장미꽃이 그 사내를 비웃었다
너는 만개하지 못할 거야
그후, 시든 장미꽃이 다시 그 사내를 비웃었다
그래도 나는 만개했었어 *
32. 입적 - 윤석산
'이만 내려 놓겠네'
해인사 경내 어느 숲 속
큰 소나무 하나
이승으로 뻗은 가지 '뚝'하고 부러지는 소리
지상으론 지천인 단풍
문득
누더기 한 벌 뿐인 세상을 벗어 놓는다
33. 그리움 - 나태주
때로 내 눈에서도
소금물이 나온다
아마도 내 눈속에는
바다가 한 채씩 살고 있나 보오
34. 새벽밥 - 김승희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 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 무르익고 있습니다 *
35. 서시 -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36. 세차 - 윤효
비를 맞으며 세차를 하였습니다
오가는 이마다 한마디씩 하였습니다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이등병 아들이 귀대하는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