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고향 / 이미옥
아이들이 등교하자마자 휴대폰이 울린다. 울산에 사는 언니의 전화다. 갑자기 시고모가 돌아가셔서 못 온단다. 미안함과 아쉬움이 가득 밴 목소리가 한참이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 온다. 언니는 시가가 경북 예천이라 도로가 복잡한 명절에 내려오는 게 힘들어 연휴 전후로 들르곤 했다. 이번에는 시간이 서로 맞아 아버지 산소 벌초를 하기로 했었다.
토요일 아침, 남편은 예초기를 싣고 나는 간단한 성묘 음식을 보냉 가방에 담아 차에 올랐다. 아버지의 산소는 고향 마을 공동묘지에 있다. 마을은 내가 초등학교때 사라졌다. 화학단지가 들어서면서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다. 우리 가족은 그보다 먼저 외가 동네로 이사해 갔다. 그래서 고향은 언니와 함께 아버지의 산소를 가던 기억이 더 많이 있는 곳일 뿐이다.
아홉 살 무렵, 어느 가을 아침에 아버지는 내 작은 손에 동전을 탈탈 털어 쥐여 주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동네에 살던 고모네 일을 도우러 나갔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객사한 이는 집에 들이면 안된다고 해서 사고가 난 근처 마른 논바닥에 천막을 쳤다. 병풍 뒤로 반듯이 누워 있던 관은 며칠 동안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오고 가는 이를 바라보았다.
붉은 천에 덮힌 관은 할머니와 친척들이 살고 있던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날 이후로 우리 자매는 매해 같은 길을 걸어 성묘를 갔다. 오래전에 마을은 사라지고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공동묘지 초입에 서 있는 ‘망향의 비’만이 마을의 흔적을 기억하고 있다. 공동묘지는 마을에서 살다가 죽은 이도 이주한 이후에도 고향에 묻히고픈 이도 모두 모여 있어서 성묘를 갈 때면 가까운 친척이나 아버지의 지인을 만나곤 했다. 그런 어른들이 오며 가며 오랫동안 아버지의 묘를 돌봐 주었다.
몇 년 전에 고모가 집안 묘를 모아 납골당을 만들기로 했다며 아버지도 함께 이장하자고 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거절했다. 그때부터 벌초는 남편과 내 일이 되었다. 내가 고모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를 딱히 꼬집어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냥 아버지가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다. 내가 세 살 때 일하다 머리를 크게 다친 후 가장의 역할은 아버지의 몫이 아니었다. 동네 소일거리를 해주며 받은 푼돈까지 술값으로 썼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 아버지는 늘 취해 있었다.
남편이 뜨거운 햇살 아래 예초기를 돌린다. 무덤 위의 억센 풀들이 쓰러진다. 세월만큼 묘지를 덮고 있는 흙도 바랬다. 바랜 흙더미 위에서 초록의 생명이 자라나는 게 고마울 정도다. 예초기 모터 소리가 잠시 멈추고 남편이 물을 마신다. 나는 갈퀴로 쓰러진 풀들을 한쪽으로 긁어모았다. 남편이 잔풀 정리를 끝내자 나는 가져온 전과 과일을 펼쳤다. 한바탕 소동에 놀란 벌레들이 제 몸을 숨기느라 부산하다. 절을 하고 생전에 좋아하시던 술도 듬뿍 따라 묘 가장자리에 부었다. 내가 사는 곳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묘가 말끔해졌다. 아버지는 오늘도, 여전히 사라진 고향을 지키고 있다.
첫댓글 선생님. 글이 정말 좋네요. 딱히 설명하기 힘든 그 마음도 알 것 같고요. 잘 읽었습니다.
칭찬 감사해요. 선생님도 잘 지내시죠? 하하.
아이고, 그리운 아버지!
남편분이 훌륭하시네요. 장인 어른 묘를 정성스레 돌봐 주시니 복 받을 거예요.
복권 당첨의 행운은 안 준다고 늘 투덜댄답니다. 감사해요.
실향민이시네요. 고생 많이 했겠어요. 아버님 산소를 옮기지 못한 그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나도 비슷한 과정을 겪어서 그렇습니다.
제게 고향은 큰 의미가 없지만... 따뜻한 위로 감사합니다.
선생님 글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줍니다.
환영받지 못한 아버지도 내 아버지.
그래서 더 애잔한 정이 있겠지요.
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겠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럴까요? 그냥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인 거 같아요.
편리함만 추구하는 시대에, 효녀시네요.
마음을 울리는 글, 잘 읽었습니다.
음, 효녀는 아니예요. 흐흐. 늘 격려의 댓글 고맙습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느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숨가쁘게 읽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사랑하시죠?
효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