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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곡 임공 묘지명병서○병오년〔下谷任公墓誌銘幷序○丙午〕
서재(西齋) 임공(任公)에게 시구(時九)라는 훌륭한 아드님이 있었으니, 자는 성보(成甫)에 서하(西河) 사람으로, 스스로 ‘하곡 거사(下谷居士)’라 하였다. 서재공이 원릉(元陵영조(英祖)의 능호) 병오년(1726)에 장령(掌令)으로 항거하는 상소를 올려서신임의리(辛壬義理)를 통렬히 아뢰었는데, 여러 소인배에게 모함을 받고서 평안도 순안(順安)으로 유배 갔다가 정미년(1727)에 제주목(濟州牧)의 대정현(大靜縣)으로 위리안치되었다. 그러자 공은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억울함을 신원(伸冤)하였으나, 흉도(兇徒)들이 복계(覆啓)하지 않았다.
무신년(1728)에 서재공이 체포를 당했는데, 이때 감형관(監刑官)을 곧바로 내려 보내 처형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공은 울부짖으며 빨리 달려가서 3일 만에 해상(海上)에 도착하여 배를 세내어 급히 건너갔는데, 태풍을 만나 익사할 뻔하였다. 9월에 또 임금이 행차할 때 하소연하자, 상(上)은 더욱 노하여 평안도 철산(鐵山)으로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길을 떠날 적에 공은 〈공무도하사(公無渡河辭)〉와 〈사축시(四祝詩)〉를 지어서 슬픔을 폈다. 기유년(1729) 2월에 사면을 받았다.
경술년(1730) 7월에 서재공이 항양(桁楊옥중)에서 별세하자, 공은 아산(牙山)의 옛 집으로 반장(返葬)하고 마침내 죄를 지은 폐인처럼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처음 공이 적소(謫所)에 있을 적에 서재공이 편지를 보내어 지식이 이미 정립되었다고 인정하고 이어서 스스로 몸을 천금처럼 보존해서 문호(門戶)를 유지하라고 권면하였다. 그리고 아들들을 영결하는 편지에 이르기를 “아무개는 성질이 구차히 영합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또 세부(世父백부(伯父))에게 올린 편지에는 “이 아이의 타고난 성품이 나약하지 않고 또 일찍 환난을 겪어서 담력이 더욱 크고 뜻이 더욱 웅장합니다.”라고 하니, 사람들은 모두 “부자간의 지기(知己)이다.”라고 하였다.
정조(正祖) 병신년(1776)에 서재공의 관작이 회복되었고, 순묘(純廟) 때에 특별히 이조 참판에 추증되어 가슴속의 억울함이 모두 펴졌으나, 구원(九原)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으니, 슬프다.
고조(高祖) 휘 환(㬇)은 생원으로 참찬에 추증되었으니,우재(尤齋) 송 선생(宋先生)이 그 무덤에 묘표(墓表)를 지었다.증조 휘 홍망(弘望)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니, 송 선생이 철석간장(鐵石肝腸)이라고 허여하였고,미호(渼湖) 김 문경공(金文敬公)이 그 묘의 명문(銘文)을 지었다.조고 휘 호(澔)는 호가 수죽(瘦竹)이며, 선고는 휘가 창하(昌夏)이고, 선비(先妣)인 장수 황씨(長水黃氏)는 정랑(正郞)으로 판서에 추증된 처신(處信)의 따님이다.
수죽공(瘦竹公)의 아우 휘 형(泂)은 집의(執義)를 지냈는데, 경종 때에 기탄없이 말씀을 다하여‘어머니가 아들 때문에 귀해진다.’는 말을 논척하였다.휘 징하(徵夏)를 낳으니 이분이 서재(西齋)이고,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배위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판서 진귀(鎭龜)의 따님이니 바로 공의 본생조(本生祖)와 부모이시다. 공은 숙종 30년 갑신년(1704) 9월 30일에 출생해서 임오년(1762) 12월 25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59세이다. 계미년(1763) 2월 아산현 남쪽 가장곡(可藏谷) 오좌(午坐)에 장례하였다.
배위인 함안 조씨(咸安趙氏)는 승지(承旨) 영세(榮世)의 따님이니,사덕(四德)이 모두 드러나육친(六親)들이 다 칭송하였다. 공보다 2년 먼저 출생하고 6년 뒤에 별세하여 공의 묘에 부장하였다. 6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효백(孝白), 제백(悌白), 충백(忠白)과 음직으로 동추(同樞)인 신백(信白)과 형백(珩白), 후백(後白)인데, 충백과 형백은 모두 양자로 나갔고, 딸은 진사(進士) 이희경(李羲敬)에게 출가하였다.
태증(泰增), 태흥(泰興), 태승(泰昇)은 장방(長房)의 소생인데, 태흥은 차방(次房)에 양자로 갔다. 태동(泰東)과 태송(泰松)은 삼방(三房)의 소생이고, 태춘(泰春), 태문(泰文), 태민(泰民), 태린(泰隣)과 수사(水使) 태순(泰淳)은 사방(四房)의 소생이고, 태악(泰岳)과 현령(縣令)인 태로(泰魯)는 오방(五房)의 소생이고, 태귀(泰龜), 태룡(泰龍), 태봉(泰鳳)은 계방(季房)의 소생이며, 외손은 이문재(李文在)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수순한 덕과 독실한 행실, 큰 도량과 해박한 지식이 있고 또 용모가 풍염(豐艶)하여 풍채에 광채가 나니, 사람들이 발돋움하여 보지 않는 이가 없었고 일찍부터공보(公輔)의 명망을 받았다. 젊었을 때충정공(忠定公) 이홍술(李弘述)을 방문하자, 이공은 좌우의 측근을 물리치고 특별히 공을 존경하고 예우하였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이공이 말씀하기를 “후일에 우리 자손들이 이 사람에게 훈도(薰陶)를 입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공을 본 여러 소인들은 모두 말하기를 “만약 임아무개가 요직을 담당하면 우리들은 틀림없이 살아남을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꺼림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지은 문장이 부섬(富贍)하고 청신(淸新)해서 예원(藝苑문단)의 여러 공에게 칭찬과 장려를 받았다.회헌(悔軒) 조 문간공(趙文簡公) 관빈(觀彬)은 공에게 지음(知音)으로 의탁하였고, 동시대의 선비들이 글을 지어성상(聖上)의 모함을 변론하고 난신적자(亂臣賊子)를 토벌할 경우그 글이 대부분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이때 공의 나이가 겨우 약관이었다고 한다. 유고(遺稿)가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의 선대는 명분과 의리, 풍절(風節)을 지키며 대대로 가문을 이어왔고, 공이 또 걸출하여 능히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었으니, 만약 조정에서 모범이 되고 왕의 교화를 보좌할 수 있었다면,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이 공업(功業)을 계승한 것에 뒤지지 않았을 터인데, 일찍 세상의 화(禍)를 당해 일생동안 불우하여 천지(天地)를 포괄할 수 있는 뜻을 조금도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지사(志士)들이 한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아버지가 없었으면 이런 아들이 없었을 것이요, 이 아들이 없었으면 이런 아버지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충성하고 아들은 효도해서 임금과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고 부자간의 분수를 다한 경우는 공의 부자에게 해당되니, 어찌 곤궁함과 통달함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 뛰어난 충성과 순수한 효도가 장차 백세(百世)에 전해져 불후할 것이니, 여기에서 밝은 하늘이 반드시 회복될 것임을 징험할 수 있다.
공의 현손(玄孫)인 헌회(憲晦)가 공의3대의 글을 청하기에 불초가 염치를 무릅쓰고 부응했었는데,또다시 공의 묘소에 쓸 지문(誌文)을 청하니, 감히 늙었다고 사양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붓을 잡고 명문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충의의 가문에 / 忠義之門
훌륭한 아들 됨이 쉽지 않은데 / 爲子未易
아, 공이 우뚝이 태어나서 / 繄公挺生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났네 / 拔出倫類
살든 죽든 간에 / 庶幾生死
힘과 사려를 다하였네 / 盡力盡思
거둥하는 임금님께 피눈물을 흘리며 / 瀝血叩蹕
억울함을 하소연하여도 풀지 못하였네 / 籲冤莫遂
백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아니하여 / 百死不悔
아버지의 뜻을 밝히려 하였네 / 用明父志
푸른 하늘은 아득히 멀고 / 玄天幽遠
귀신의 이치 망연히 어둡네 / 鬼神茫昧
여묘하면서 측백나무를 부여잡았고 / 廬墓攀柏
육아편을 폐하였네/ 蓼莪爲廢
몸은 궁색하여도 도는 형통하였으니 / 身否道亨
이것이 바로 대인이라오 / 是爲大人
천도가 매우 밝아서 / 乾道孔昭
가는 곳마다 모두 펴지니 / 無往不伸
공의 양 대가 / 成公兩世
효자와 충신이 되었네 / 孝子忠臣
이에 아름다움을 / 于以揭美
우뚝한 영인산에 게시하네 / 有屹靈仁
내가 그 대강을 모아서 / 我撮其大
신명에게 질정하노라 / 用質明神
[주-D001] 병오년:
1846년(헌종12)으로, 매산의 나이 71세 되던 해이다.
[주-D002] 서재(西齋) 임공(任公):
서재는 임징하(任徵夏, 1687~1730)로,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성능(聖能), 호는 서재,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1713년(숙종39) 진사가 되고 1721년(경종1)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등을 지내다가 신임사화로 삭직을 당하였다. 1725년 노론이 다시 집권하자 장령으로 기용되었고, 1727년 소론이 집권하면서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729년 사헌부의 요청으로 다시 친국(親鞫)을 받을 적에 끝까지 왕의 각성을 촉구하며 항거하다가, 언관을 벌주면 안 된다는 전통에도 불구하고 왕권의 확립과 국가기강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여덟 차례의 고문을 받은 끝에 옥사하였다. 정조 때 관직이 복구되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매산집》 권46에 임징하의 행장이 실려 있다.
[주-D003] 신임의리(辛壬義理):
신축년(1721, 경종1)과 임인년(1722) 두 해에 걸쳐 노론(老論), 소론(少論) 간에 뒷날 영조(英祖)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의 세제(世弟) 책봉과 대리청정(代理聽政)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다 신임옥사(辛壬獄事)가 일어났는데, 이때 노론이 내세운 명분을 말한다. 남인(南人) 역관의 딸인 희빈(禧嬪) 장씨(張氏) 소생인 경종은 남인에 동정적이던 소론의 보호를 받아 왔는데, 경종이 즉위하자 과거 그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노론은 위기를 느껴 그가 병약하고 후사(後嗣)가 없다는 사실을 구실로 연잉군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추진하였다. 그러자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등이 목호룡(睦虎龍)을 사주하여 노론 사대신(老論四大臣)인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를 역모로 무고하게 함으로써 사대신 이하 노론 일파를 극형에 처하게 하였다. 《承政院日記 景宗 1年 8月 20日ㆍ23日, 10月 17日, 12月 6日ㆍ9日ㆍ14日, 2年 3月 27日》
[주-D004] 우재(尤齋) …… 지었다:
우재는 송시열(宋時烈)의 또 다른 호로, 송시열이 지은 임환의 묘표는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97 〈생원임군묘표(生員任君墓表)〉이다.
[주-D005] 미호(渼湖) …… 지었다:
미호는 김원행(金元行)의 호이고, 문경공(文敬公)은 그의 시호인바, 김원행이 지은 임홍망의 묘갈명은 《미호집(渼湖集)》 권17 〈지중추부사임공묘갈명(知中樞府事任公墓碣銘)〉이다.
[주-D006] 어머니가 …… 논척하였다:
‘어머니가 자식 때문에 귀해진다’는 말은 서자가 지위를 계승한 경우 그 생모 또한 아들로 인하여 지위가 높아진다는 뜻으로, 당시 소론 일파가 경종의 생모인 장희빈(張禧嬪)을 추존하기 위해 근거로 내세운 말인데, 임형(任泂)이 이를 논척한 것이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은공(隱公) 원년의 “어머니는 자식 덕분에 귀해지는 것이다.”라는 내용에 근거하여, 후궁의 자식이라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 그 생모의 지위가 높아져 사후에 존호를 추상할 수 있게 되었으나, 경종의 생모인 장 희빈은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하다가 처형되었으므로 존호(尊號)를 올리지 못한다고 논척한 것이다. 관련 내용은 본권의 〈사헌부집의임공묘지명(司憲府執義任公墓誌銘)〉에 보인다.
[주-D007] 사덕(四德):
부인이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덕목으로, 정숙한 행실과 유순한 마음씨인 부덕(婦德), 단장(端莊)하고 공손한 용모인 부용(婦容), 얌전한 말씨인 부언(婦言), 길쌈, 바느질 등의 솜씨인 부공(婦功)을 이른다. 《周禮 天官 九嬪》
[주-D008] 육친(六親):
해설이 일정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부모(父母)ㆍ형제(兄弟)ㆍ처자(妻子) 등 여섯 친척을 이른다.
[주-D009] 공보(公輔)의 명망:
대신이 될 것이 기대되는 명성과 인망을 이른다. 공보는 삼공(三公)과 사보(四輔)를 아우르는 말로, 삼공은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을 이르고, 사보는 전의(前疑)ㆍ후승(後丞)ㆍ좌보(左輔)ㆍ우필(右弼)로 군주의 측근에서 보필하는 신하들이다.
[주-D010] 충정공(忠定公) 이홍술(李弘述):
이홍술(1647~1722)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선(士善), 시호는 충정이다. 중종의 일곱째 아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후손이다. 1674년(현종15) 무과에 급제하고 총융사, 포도대장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노론의 사대신(四大臣)의 한 사람인 김창집(金昌集)과 가까운 사이였고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옥사하였다.
[주-D011] 회헌(悔軒) 조 문간공(趙文簡公) 관빈(觀彬):
조관빈(趙觀彬, 1691~1757)으로,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국보(國甫), 호는 회헌, 시호는 문간이다. 노론 사대신인 조태채(趙泰采, 1660~1722)의 아들로, 1714년(숙종4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대사헌 및 여러 조의 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일생을 아버지 조태채의 신원을 위해 보냈고 저서로 《회헌집》 등이 있다.
[주-D012] 성상(聖上)의 …… 경우:
‘성상을 모함했다’는 것은 경종(景宗)이 일찍 죽은 것에 대해 영조(英祖)가 관련이 있다고 모함함을 이른다.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나쁜 신하로, 당시 신임사화를 일으켰던 소론 계열의 과격파를 이른다.
[주-D013]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
한기(1008~1075)와 범중엄(范仲淹, 989~1052)은 북송(北宋) 초기의 명신들로, 함께 인종(仁宗) 경력(慶曆) 연간의 신정(新政)을 주도하였고 서하(西夏)의 침략을 막고 오랫동안 병사(兵事)를 맡으면서 명성을 쌓아 ‘한범(韓范)’이라 불렸으며, 조정에서 구양수(歐陽脩) 등과 함께 군자의 붕당이라고 자칭하며 경력당의(慶曆黨議)를 일으켜 내정개혁에 힘쓴 인물이다. 한기의 자는 치규(稚圭), 호는 공수(贛叟),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1027년(인종5) 진사시에 급제하고 벼슬이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렀으며, 사후에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범중엄의 자는 희문(希文),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015년(진종8)에 진사로 출사하고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주-D014] 3대의 …… 부응했었는데:
임시구(任時九)의 3대는 선고 임징하(任徵夏), 조부 임형(任泂), 증조부 임홍망(任弘望)인데, 현전하는 《매산집》의 간행본과 필사본에는 증조부에 대한 글은 보이지 않는다. 임징하의 행장은 권46의 〈사헌부장령증이조참판 임공행장(司憲府掌令贈吏曹參判任公行狀)〉이고 임형의 묘지명은 권39의 〈사헌부집의임공묘지명(司憲府執義任公墓誌銘)〉이다.
[주-D015] 여묘하면서 …… 폐하였네:
중국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왕부(王裒)의 고사를 원용하여, 임시구가 부친의 상(喪)에 몹시 애통해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원문의 ‘반백(攀柏)’은 ‘반백비호(攀柏悲號)’의 줄임말인데, 왕부는 부친인 왕의(王儀)가 사마소(司馬昭)의 손에 억울하게 죽자, 묘소 곁에 초막을 짓고 여묘하면서 조석으로 묘소 곁에 있던 측백나무를 부여잡고 곡하니, 나무가 말라죽었다 한다. 그리고 왕부가 《시경》 〈소아(小雅) 육아(蓼莪)〉의 “슬프다 우리 부모여, 나를 낳아 얼마나 고생하셨나.[哀哀父母, 生我劬勞.]”라는 대목을 읽을 때마다 참형(斬刑)을 당한 부친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므로 수업 받는 문인들이 아예 〈육아〉를 폐하였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88 王裒列傳》 《小學 善行》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연석환 (역) | 2020
下谷任公墓誌銘幷序○丙午
西齋任公有肖子曰時九字成甫。西河人。自號下谷居士。西齋公元陵丙午。以掌令抗疏。痛陳辛壬義理。爲羣壬所構誣。謫順安。丁未栫棘大靜。公擊鼓訟冤。兇徒不爲覆啓。戊申西齋公被逮。時有直送監刑官之議。公號泣疾馳。三日到海上。賃船急渡。遇颶風幾溺。九月又籲蹕。上益怒。命竄鐵山。及行作公無渡河辭及四祝詩以敍哀。己酉二月蒙宥。庚戌七月。西齋公終于桁楊。公返櫬于牙山舊廬。遂僇廢終身。始公在謫。西齋公貽書許以知識已定。仍勉以自保千金。維持門戶。訣諸子書曰某性不苟合。又上世父書曰此兒稟賦。旣不低弱。且早閱患難。膽益廣而志益壯。咸稱父子間知己云。至正廟丙申。復西齋公爵。純廟特贈吏曹參判。幽冤畢伸。而九原不可作。悲夫。高祖諱㬇生員贈參贊。尤齋宋先生表其阡。曾祖諱弘望知中樞府事。宋先生許以鐵心石腸。渼湖金文敬公銘其墓。祖諱澔號瘦竹。考諱昌夏。妣長水黃氏。正郞贈判書處信之女。瘦竹公有弟諱泂執義。景廟朝盡言不諱。斥母以子貴之說。生諱徵夏。是爲西齋。配贈貞夫人光山金氏。判書鎭龜女。卽公本生祖及父母也。公以肅宗三十年甲申九月三十日生。壬午十二月二十五日卒。壽五十九。癸未二月。葬于縣南可藏谷午坐。配咸安趙氏。承旨榮世女。四德俱著。六親咸頌。生先公二年。歿後公六年。祔公墓。擧六男一女。男孝白,悌白,忠白蔭同樞,信白,珩白,後白。忠白,珩白皆出系。女適進士李羲敬。泰增,泰興,泰昇。長房出。泰興出后次房。泰東,泰松。三房出。泰春,泰文,泰民,泰隣,泰淳水使。四房出。泰岳,泰魯縣令。五房出。泰龜,泰龍,泰鳳。季房出。外孫李文在。曾玄以下不錄。公有醇德敦行。恢量博識。且儀容豐碩。風采暎發。人莫不聳觀。夙負公輔望。少時訪李忠定公弘述。李公屛左右。尊禮殊絶。人問其故。李公曰異日吾輩子孫。將被斯人陶鑄。羣小覿公者。咸謂若使某當路。吾輩必無噍類。其爲人敬忌如此。爲文章富贍淸警。被藝苑諸公所奬詡。悔軒趙文簡公觀彬托以賞音。幷世衿紳辨聖誣討亂賊者。其文多出公手。時年纔弱冠云。有遺稿藏于家。公之先以名義風節世家。而公又傑特。克趾先美。若可以羽儀王庭。黼黻皇猷。無愧韓范之繼業。而早嬰世禍。畢生坎壈。俾包天括地之志。不少槩見。斯爲志士之所齎恨者也。然無是父無是子。無是子無是父。父忠子孝。所以答君親之恩。盡父子之分者。公之父子實有焉。詎可以竆通論哉。孤忠純孝。將垂百世而不朽。是可驗皓天必復也。公玄孫憲晦。謁公三世之文。不佞強顔而副之。又請誌公幽堂。不敢以耄荒辭。遂援筆而爲銘。銘曰。
忠義之門。爲子未易。繄公挺生。拔出倫類。庶幾生死。盡力盡思。瀝血叩蹕。籲寃莫遂。百死不悔。用明父志。玄天幽遠。鬼神茫昧。廬墓攀柏。蓼莪爲廢。身否道亨。是爲大人。乾道孔昭。無往不伸。成公兩世。孝子忠臣。于以揭美。有屹靈仁。我撮其大。用質明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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