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27.부활7주 수요일 묵상글>
<요한17,11-12>
11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12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의 전이현상이란
어떤 대상에 대한 감정이 그와 관련되는 다른 것에까지 옮겨지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 좋으면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긍정적으로 느껴지고 반대로 어떤 사람이 싫으면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다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항상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게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동안 다양한 관계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어떤 감정이 전이되어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추측해왔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인간을 불합리하게 만드는 감정의 힘을 의식하고 지금부터라도 그것을 잘 다루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인성의 차원에서 어떠한 결정을 할 때 감정이 개입되면 제대로된 결정을 못하게 됩니다.
신성의 차원은 어떠할까요?
전이현상이 있을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11,44)”. 성부의 거룩함이 예수님의 거룩함, 그리고 제자들의 거룩함의 바탕이 됩니다.(레위11,44; 19,2; 1베드1,16참조). 성부의 이름을 드러내시는 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제자들 자신이 이 세상의 어떠한 힘도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성부와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들이 서로 사랑 속에 하나가 됨은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가 되시는 일치의 결과입니다(요한17,21-23참조).
그렇습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거룩함을 얻게 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요. 성령께서는 세례 때에 그것을 이루어 주셨고, 화해의 성사를 통해 죄에 다시 물든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십니다. 신성차원의 거룩함의 전이현상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할 수 있지요. 인성 차원의 감정전이 현상은 우리를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지만, 신성 차원의 거룩함의 영적인 전이현상은 이성과 경험을 뛰어넘어 직관의 경지에 이르게 하니 우리가 더 명료하게 주님 뜻에 맞는 결정을 하도록 인도해 줍니다. 성사로 거룩해진다 함은 우리의 구원이 행위로가 아닌 본성의 변화로 거룩함을 얻었다는 의미 입니다. 거룩함을 얻은 상태에서의 행위는 거룩함의 행위가 되고 복이 되겠지요. 이제 우리가 그 거룩함을 얻는 것은 그분 안에 머물러 있다는 의식만으로도 충분한 상태가 되도록 평소 때 기도와 정화로 수련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행복할 겁니다.
용서라 함은 다 잊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시편41,10)” 라는 말씀처럼 유다와 같이 주님의 뜻을 거역했던 자기 자신을 대면하기 어렵기에 외면하고 보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성화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자신을 성화함 곧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함은 한 사람의 존재와 삶 전체를 포괄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죽음을 통하여 자신을 바치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 실제로 봉헌을 반복하다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게 되는 현상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이러한 희생 제사적인 면이 여기에서는, 앞으로 곧 십자가가 등장하는 문맥과 또 “이들을 위하여”라는 표현으로 강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으로, 제자들의 성화와 봉헌을 위하여(요한6,51; 마르14,24; 루카22,20; 1고린11,24; 15,3; 히브2,9; 5,1; 9,7; 10,12 참조)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놓으신다는 의지를 표현하십니다(요한10,18; 15,13). 제자들의 이 성화와 봉헌은 결국,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성화란 먼저 죄에서 정화됨이며(요한15,3), 제자들이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영성적 은혜를 받게 됨을 의미합니다(요한17,18.20)
감사합니다.
<John17,11-12>
11 And now I will no longer be in the world, but they are in the world, while I am coming to you. Holy Father, keep them in your name that you have given me, so that they may be one just as we are.
12 When I was with them I protected them in your name that you gave me, and I guarded them, and none of them was lost except the son of destruction, in order that the scripture might be fulfil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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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장 나를 움직이는 감정의 힘
1.감정이 전이되는 순간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삶 속에서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은 마침내 감정까지도 이성으로 통제하려는 경향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를테면 누가 봐도 감정에 대한 공감이 필요한 상황인데 이성으로(옳고 그름으로) 반응을 보이려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종종 관계 속에서 갈등의 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예를들어 아들이 “아빠, 날씨가 너무 좋아요. 나 오늘 공부하기 싫어요. 우리 공 차러 학교운동장에 가요”라고 말하면. 아빠는 일단 그 감정을 알아주기보다는 “아들아! 이렇게 좋은 날 부족함이 없는 환경에서 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 공부해야지. 아빠는 너만 할 때 책상이 다 뭐야? 밥상에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게 감사했지’라는 식으로 이성(생각)의 언어로 반응을 보내기 일쑤입니다.
물론 아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아들의 마음에 앙금을 남길 수 밖에 없는데, 감정은 그 본질상 이성(생각)이 아니라 오로지 공감을 받을 때만 풀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에 답을 해봅시다.
살아가면서 인간의 이성이 감정을 지배할까요? 아니면 감정이 이성을 지배할까요? 어려워보이지만 생각보다 쉬운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생활을 돌아보면 금세 답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굉장히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매일 가족관계나 다른 인간관계들을 잘 맺어가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좀 전에 언급했던 사례에서처럼 이 좋은 날씨에 공 차고 싶은 내 마음을 몰라주는 아빠가 너무 미울 때 “우리 아빠는 정말 훌륭한 분이셔. 그리고 나를 최고로 사랑하시지”를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이면, 과연 아빠에 대해 화나는 감정이 사라질까요?
당연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감정의 힘은 막강합니다. 다만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심리학 이론 중에 ‘감정전이 현상’이 이를 잘 설명해줍니다.
이 현상은 어떤 대상에 대한 감정이 그와 관련되는 다른 것에까지 옮겨지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 좋으면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긍정적으로 느껴지고 반대로 어떤 사람이 싫으면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다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일컬어 “눈에 콩깍지가 씌다”라고 하는데, 이 또한 감정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콩깍지가 씌면 주변에서 아무리 말려도, 또 해서는 안 될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이 감정 앞에 무릎을 꿇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는 살아가면서 ‘감정전이 현상’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예컨데 어떤 분은 전 사위가 0식품의 과장이었는데, 딸의 이혼 후 ‘0’라는 말만 들어도 심기가 몹시 불편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전에는 0식품과 관련된. 것들을 사 오고 또 맛있게 먹었지만, 지금은 마트에서 0식품이 보이기만 하면 그곳을 지나치는 것조차 하지 않으려고 저쪽으로 돌아서 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누군가가 싫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그 사람의 말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임에서 유독 특정 인물과 친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자신의 돈을 떼어먹은 사람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돈을 떼어먹은 사람과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그가 싫어졌고 그러다 보니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사람에게 살갑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아들딸을 결혼시킨 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감정이 전이된 경우와 쉽게 맞닥뜨리게 됩니다. 아들 집에 갔을 때 아들이 설거지며 청소를 하면 며느리가 해도 되는데 굳이 아들을 시키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지만 딸 집에 갔을 때 사위가 설거지나 집 안 청소를 하는 걸 보면 마음이 흐믓하다고.
이처럼 지금 아들이나 사위가 설거지나 집 안 청소를 할 상황인가를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내 아들이나 딸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식으로 자신의 감정이 전이되는 순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잘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어떤 결정을 할 때도 감정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사실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것도 어쩌면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함일 때가 많습니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들면 우리는 어떤 작가나 가수가 좋으면 그 작가의 책이나 그 가수의 앨범들을 무조건 다 사모읍니다. 그러니까 그 작가나 가수의 모든 책과 노래가 다 괜찮아서 라기보다는 그 작가나 가수가 좋으니까 그들의 책이나 앨범을 모두 소유하고 싶은 것입니다.
친구도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서 그 친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일을 계기로 혹은 첫눈에 그 친구가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친한 친구가 되고 보니 그 친구의 단점도 장점으로 보이고 혹 내가 손해를 입어도 서운한 생각이 드는 것 없이 오랜 친구 사이로 지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특별히 좋은 감정이 전이되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위로하며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항상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게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동안 다양한 관계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어떤 감정이 전이되어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추측해왔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인간을 불합리하게 만드는 감정의 힘을 의식하고 지금부터라도 그것을 잘 다루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내 마음과의 거리는 10분 입니다,강현숙, 궁리,2019,p.45-52)/
나만의 감정노트4
1)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 자신이 경험한 ‘감정전이 현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2)오늘 하루를 지내는 동안 나의 감정이 전이되었던 순간이나 사건을 한 가지씩 찾아봅시다.
예를들면 퇴근길에 빵집에 들렀는데 시폰 케이크가 세일 중이었습니다. 이 부드러운 빵을 혼자 사시는 옆집 어르신께 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에 하나를 집어들었습니다. 그 순간 “아, 우리 남편도 이 시폰 케이크를 좋아하지”라며 하나를 더 집얻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인 후 남편 것은 도로 내려놓았습니다. 왜일까요?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면서 남편과 티격태격했고 아직 그에 대한 미움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이 좋아하는 빵이지만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나의 감정이 전이된 순간을 찾아봅시다. (내 마음과의 거리는 10분 입니다,강현숙, 궁리,2019,p.53-54)
첫댓글 아멘!
"영성적 은혜"를 묵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