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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가 항상 해야 할 일 / 시 97:1-12, 살전 5:12-22
이번 주 대학입학을 위한 수능시험을 본다. 수능수험생을 위해 장사 속이 발달되어 잘보고 잘풀고 잘쓰고 잘찍으라고 여러 가지 것들을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잘 보라고 거울을, 잘 풀으라고 화장지를, 잘 쓰라고 연필을, 잘 찍으라고 포크를 수험생들이 많은 학교나 학원 부근의 문방구나 팬시점에서 팔고 있다. 여기에 합격보장이라는 합격 복떡과 합격 엿과 합격 초콜릿까지 잘 팔린다고 한다. 불안한 심정을 가진 학생들을 향한 얄팍한 상술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입시제도나 취업상황을 빗대어 나돌아 다니는 이야기가 있다. ‘자장면 배달부가 된 아인슈타인’이라는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아인슈타인, 에디슨, 퀴리 부인, 뉴턴 등 이런 불세출의 천재들이 우리나라에 태어났다면 과연 커서 무엇이 됐을까? 아인슈타인은 중국집 배달부가 돼 있더라고 했다. 아시다시피 아인슈타인은 어려서 수학이나 물리에는 천재성을 발휘했지만, 다른 과목들의 점수는 신통하지 못했다. 그러니 내신이나 수능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3수를 했는데도 대학진학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니 별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다. 그래서 중국집 배달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발명왕 에디슨도 신통하지 못했다. 발명특허를 출원했다가 번번이 딱지를 맞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담당자 이해불가’가 아니라 ‘구비서류 미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받은 에디슨은 결국 특허관련 법률공부로 세월을 보냈다는 이야기다. 뉴턴은 어땠느냐 하면 대학원 진학에 실패하고 말았다. 대학시절부터 ‘눈치’도 없이 스승의 이론을 뒤엎는 논문을 마구 발표해 지도교수에게 ‘찍혔기’ 때문이다. 이 대학, 저 대학 기웃거려 보았지만 이미 ‘실력과 소신’이 소문이 나버려서 아무도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퀴리 부인은 결국 봉제공장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분야에서건간에 여성이라면 외모가 ‘어지간히 생기지 않고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입시제도와 관료주의와 대학 풍토, 실력이 아니라 얼굴과 몸매가 평가기준이 되는 여성에 대한 편협한 태도를 꼬집는 우스갯소리지만 이런 말들이 그냥 우습게만 들리지 않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들을 얼마든지 ‘실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사람만 더 이야기해 본다면, 우리나라에도 왔다 간 적이 있는 스티븐 호킹이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어찌 되었을까? ‘우주의 비밀에 가장 근접한 과학자’ ‘시공간의 마술사’라는 평가와 함께 아인슈타인 이래 최고의 물리학자로 꼽히고 있는 호킹이다. 하지만 ‘근위축성 축색경화증’으로 휠채어에 앉아 컴퓨터 음성합성기의 도움을 받아야만 간신히 말이 통할 수 있는 그의 상황이 절망적일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학교는 커녕 집 밖에도 한번 나오지 못하고 골방에서 지내다 말 것이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칭찬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데살로니가교회는 모범적인 교회라 할 수 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지닌 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과 그가 심판 주로 오실 분으로 확실히 고백하는 믿음이 투철한 교회였다. 사도 바울이 처음 보낸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인 5장 끝부분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했다.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항상 해야 할 일이 있다.
1. 그리스도인은 항상 선을 따라야 한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선하게 살기가 어렵다. 어떤 때는 선을 행하며 살 수가 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악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항상 선을 따르라’라고 하였다. 공동번역에는 ‘언제나 서로 힘써 선을 행하십시오’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러분, 언제나 선을 행한다고 하는 이 사실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내게 손해가 되고 불리한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이 선이기 때문에 추구하는 그런 진실한 성품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항상 선을 따라가는 삶이란 결단코 쉽지 않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다. 언제나 우리들은 ‘내가 선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들이 항상 선을 추구하는 것을 원하신다. 우리들이 선을 항상 추구하려면 매일 매일 우리 자신의 삶의 내용을 반성해야 하겠다.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불교의 경전인 팔만대장경에는 ‘선이란 뉘우침이 연속되는 가운데 있는 법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항상 선을 따르라는 말씀은 ‘항상 반성하라, 항상 회개하라’라는 말과도 통하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나는 매일 죽는다’라고 했다. 이것이 선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본받을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항상 선을 따라야 하겠다.
2.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뻐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본능적으로 기쁨을 추구하는 법이다. ‘기쁨이 없는 인생은 기름이 없는 램프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는데 의미가 있는 말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기쁨이 있다면 그 생은 풍요로울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라고 하였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항상) 기뻐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사도 바울은 옥 중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항상 기뻐할 근거를 말했다. 빌 4: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곧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 받은 이 엄청난 체험과 감격이 기뻐할 근거인 것이다. 예수 그는 기쁨의 근거요 기쁨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찬송가 작가인 조셉 스웨인은 2백년 전에 이렇게 표현했다.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우리들의 마음에 감격을 주고 있다.
1.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일세
2. 나의 사모하는 선한 목자는 어느 꽃다운 동산에
양의 무리와 늘 함께 가셔서 기쁨을 함께 하실까
5. 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님 음성조차도 반갑고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뿐일세 아멘.
여러분, 항상 기뻐하는 삶은 긍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표현을 빌리면 ‘해(태양)을 등져 보십시오. 그림자가 우리의 앞에 놓입니다. 그러나 해를 향해 서십시오. 검은 그림자는 어느새 내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십자가를 향할 때 재난과 죄는 물러가고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우리의 인생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구원받은 감격과 감사에 근거하여 항상 기뻐해야 하겠다. 기뻐하는 사람에겐 미소가 있다. 상냥함이 있다. 우리 갈보리교회 모든 성도들의 모습 속에서 상냥하고 부드럽고 기쁨이 넘치는 그런 안정된 모습들이 좀더 충만하게 보여지기를 바란다. 그러니 여러분, 어떤 경우에서든지 주 안에서 기뻐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3.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했다. 항상 기도하는 생활은 곧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기도하는 습성,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가? 기도는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이는 열쇠인 것이다. 여러분, 솔직하게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주님을 생각하나? 자기 일터, 자기 자녀, 자기 가정, 자기 친구나 친척, 자기 이익과 체면 등 여러가지 생각을 하면서도 진실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의 시간이 얼마나 되나? 생각할수록 부끄러울 뿐이다. ‘항상 기도하라’ 하신 이 교훈의 말씀을 명심해야 하겠다. 교회 뒤 벽보에 보면 전국여신도회에서 나온 ‘나라를 위한 평화 기도잇기 운동 당번표’가 붙어 있다. 한달에 하루씩이다. 이 표를 보고 매달 빠지지 않고 기도한 여신도 회원이 있나? 그러면 한번이라도 기도해 본 회원 있나? 몇 년 전에 붙여놓은 것인데 지금은 필요없나? 아직도 남북이 갈라진 상태이기에 통일이 되기까지 계속 기도해야한다. 우리 교회 여신도가 며칠에 기도하는지 알고 있나? 바로 오늘 16일이다. 여신도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이 기도해야 하겠다. 기도하는 사람이 밤죄할 수 없다. 헌신의 열도가 식을 수 없다. 예배드리는 태도가 엉망일 수 없다. 기도는 성도의 호흡이다. 호흡이 있는 이상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4. 그리스도인은 항상 감사해야 한다.
공동번역에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여러분, 가난하든지, 부유하든지, 하고자 하는 일이 자꾸 꼬여서 잘 안된다든지, 잘 된다든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은헤에 감사해야 하겠다. 신앙인으로서 가장 성숙한 사람은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인 것이다. 감사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첫째가 ‘만일의 감사’이다. 신앙 안에서 소원할 때 누구나 ‘만일(if) 당신께서 이 소원을 들어준다면 이렇게 하겠다’라고 서원하는 것이다. 둘째는 ‘때문에 감사’이다. 과거를 곰곰이 생각하여 드리는 것이다. 감사(thank)와 생각(think)은 어원이 같다고 한다. 기억해 내는 감사, 기억해 두는 감사는 귀한 것이다. 웬만한 훈련으로는 ‘때문에 감사’도 어려운 것이다. 마지막 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이다. 주님은 내게 병을 주셨으나, 주님은 내게 고통과 실패를 주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사한다는 성숙한 감사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감사이다. 감사란 막연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것이다.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 감사이다. 그렇다면 감사하는 삶은 나와 다른 대상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감사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감사할 일도 없고 대상도 없다면 그런 생은 무척 피곤한 삶일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용담댐 수몰로 인해 물건조사 대문에 데모도 두달 넘게 했지요, 논밭이 심은 것도 없는데 무슨 감사를 한데요? 이렇게 말할 분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를 해야 하는 것은 꼭 이렇게 추수할 것이 있어야만 감사를 하는 것인가? 농사를 짓지 못해도 꽃을 심었기 때문에 앞으로 보상 받을 때 이익이 있을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할 수 있다. 또 올 한해 이렇게 보살펴 주시고 인도해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릴 수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다. 어떤 사람은 거동도 못하는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감사하다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 말을 빌리면 ‘감사드릴 수 있는 어른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하여 늘 흐뭇하게 생각합니다. 감사하는 대상이 있을 때에 행복을 느끼게 되며 스스로가 감사의 대상이 될 때에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감사의 대상이 없음은 불행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기독교의 감사절은 역시 추수와 관련된 유래를 가지고 있다. 1620년 청교도들이 150톤 밖에 안되는 작은 배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을 때 항해 중에 죽은 자를 제하고 겨우 102명이었다. 1년간 그들은 추위와 배고픔과 무서움에 떨었다. 첫 추수는 약간의 옥수수와 들판에 뛰어다니는 야생의 칠면조였다. 이 빈약한 추수들을 가지고 동료들의 무덤 앞에서 첫 번 감사절을 지켰는데, 살아남은 자는 남자 21명, 소년 6명, 나머지는 부인들과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렇다면 청교도 선조들이 개발한 감사의 개념은 옛날 유럽에서 살았던 때의 감사와 차이가 있다. 세속적인 감사를 막연한 감사, 요행감, 풍성한 것에서 오는 유쾌한 정서라고 한다면, 청교도들이 발견한 감사의 개념은 어떤 것의 소유에서 오는 감정이 아니라 어떤 것에 의하여 사로잡힌 정서에서 오는 것이다. 일반적인 감사는 많이 획득하는데서 오는데, 청교도들의 감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모든 것을 상실한 후에 오는 정서이다. 일반적인 감사가 현재 앞에 놓여 있는 것 때문에 오는 정서라면, 청교도들의 감사는 ‘미래의 약속’ 때문에 오는 기쁨이었던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들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유지 보존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언제나 감사해야 하겠다. 신앙인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감사하는 데에 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도 감사의 표현이다. 이 결실의 계절에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본받을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항상 선을 따라야 한다. 항상 기뻐해야 한다. 항상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감사해야 한다. 이것을 꼭 기억하여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7-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