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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강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라
26.04.18(토)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6절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오늘은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은사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오늘 함께 할 포인트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은사 문제를 다루는 이유를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은사가 무엇인지를 확인해 볼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성령의 은사를 구별할 방법이 있겠는가 많은 이들이 어떤 신령한 또는 신비적인 일이 일어날 때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보고 성령의 은사라고 말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과연 모두 다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진짜 은사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라고 하는 부분에 오늘 강의가 초점이 되겠습니다. 은사 문제 중에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의 은사 문제를 다루는가 하는 문제인데요. 은사는 신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고린도전서 12장 1절 말씀에 나오는데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해서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는 은사라고 말하지 않고 신령한 것에 대하여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령의 은사를 보는데 왜 신령한 것이라 이야기했느냐 하면 인간의 이성으로 쉽게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신령한 것이라고 말했던 겁니다.
자 그러면 은사의 문제를 다룬 이유 두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바울은 이 은사를 다루면서 은사에 대해서 바르게 알기를 원했던 겁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다양했습니다.
은사가 다양했다는 말은 이 교회가 뭔가 영적인 문제에 예민했고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문제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이 신령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하다 보니까 무분별한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이 은사를 다루면서 은사가 무엇인지 신령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 본문은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 라고 하는 겁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은사를 이들이 알기를 원했다는 것 이게 무슨 일인지 만일 은사를 바르게 그럼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바울의 생각은 은사를 알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특징 중에 하나가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사실 당시에 주술을 하는 사람들이나 마술하는 사람이나 의사나 다른 어떤 이교도에서 하는 어떤 행위나 이런 것을 통해서 병을 고치는 것은 똑같았어요. 병자가 일어났거든요
문제는 무엇이 다르냐면 예수님의 질병의 치유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가 때가 가까웠고 하나님 나라 가까워 왔으니 곧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 내용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모든 관심은 병자 고치는 것에 관심이 있지 않았어요. 병자 고침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선취 미리 맛보였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싶었던 거거든요. 기적이나 어떤 것도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역사하실 때는 그 역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거예요.
근데 잘못하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마치 내가 은사를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고 그것이 당파를 모으는 데도 사용되더라는 거예요.
또한 자기 자신이 신령한 것처럼 그러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신령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하고 나는 신령한 사람인 것처럼 해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성령 하나님을 마치 자기가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왜곡시켜 나갈 가능성이 상당히 많았던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령한 것에 대해서 이들이 알기를 원했던 겁니다. 또 하나는 은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휘둘리게 돼요.
오늘날에도 보면 소위 교회 안에 뭔가 신비롭고 신기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은 그 사람 말에 현혹되는 경우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 라고 말하면서도 은연 중에는 그 사람 말을 의지할 때가 많아요. 이유가 뭐냐하면 그가 우리 앞에 보여주는 뭔가가 있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까 그 사람의 말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보다 그에게 의지할 가능성이 높더라는 거예요.
이것이 실제 이교도에 있을 때 이들은 그렇게 해왔거든요. 뭔가 신비롭고 주술적인 것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 가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이게 무슨 뜻이냐 라고 계시가 어떤 것이냐고 신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냐고 자꾸 물어보면서 그 사람 말에 휘둘렸던 것이 당시 이교도들이 하는 모습이었는데. 이것이 교회 안에도 일어날 가능성이 많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잘못 이해하면 은사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이렇게 이끄는 대로 끌려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실제로 끌려가는 사람들도 않고요.
그러면 이제 은사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하는 문제를 다뤄야 합니다. 은사라고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때 중요한 말인데요. 성령 하나님께서 여기 함께 하실 때 나타나는 특별한 능력이나 힘입니다.
이걸 잘 기억해야 되는데 일반적으로 보면 제자가 스승에게 배우러 갑니다. 배우러 가면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스승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제자가 소유하게 됩니다.
스승이 하던 행동들을 자신이 할 수 있게 돼요.
그럼 그 능력을 자기가 가지거든요. 그런데 기독교는 어떤 것도 인간이 내적인 능력을 가질 수 있다라고 생각하질 않아요.
우리가 예수님에게 배우고 말씀을 배우면 어떤 일이냐 하면 그 말씀대로 따라 살 때마다 그 능력을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그때마다 함께 한다는 거예요.
함께 하면서 나타나는 것이 뭐냐하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기적도 나타나기도 하고 치유가 되기도 하고 역사가 나타나기도 하더라는 거예요.
성령 하나님은 내가 소유할 수 있다는 게 아니여요.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지요
그래서 은사라고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나타나는 어떤 힘이나 능력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보면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 말씀 보니까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성령께서 나눠주시는 것이지 내가 그것을 소유해서 나누어주는 것이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또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뜻대로 움직일 때마다 성령하는 하나님이 거기에서 역사를 하는 그러니까 인간은 나의 행위로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로서 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지. 내가 행했더니, 봐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느냐 라고 말하지 않더라는 거예요.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함으로써 나타나는 다양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 힘과 능력이 있는데 요셉 같은 경우 우리 꿈 해몽 하지 않습니까?
그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나에게 해몽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이렇게 이야기 하나님이 함께 할 때 전부 그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꿈 해몽 또는 초자연적인 어떤 지혜나 명철 그리고 지도력 예를 들면 솔로몬 같은 사람들이 지혜를 발휘할 때 명철을 발휘할 때 하나님이 그에게 함께 할 때 나타나는 거죠.
근데 어느 날부터는 솔로몬이 또 한 문제를 일으키거든요. 그걸 떠나버린단 말이죠. 그러니까 아무런 능력이 없이 오히려 나라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도 되지 않습니까?
그래 하나님이 함께 할 때 나타나더라는 거예요.
또 거기에 보면 삼손 같은 경우 힘 삼손도 보면 머리카락에 우리가 힘이 있었던 게 아니고 사실 하나님이 함께 했을 때에 그는 힘을 발휘했던 거야.
마지막 삼손이 내게 마지막 함께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그 응답을 하시는데 그가 힘을 발휘하지 않습니까? 그러듯이 하나님께서 함께 했을 때만 그 힘이 나오더라는 거예요.
구약의 꿈 해몽이나 어떤 초자연적인 역사나 기적이나 또는 힘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모든 일반화시키는 것은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보면 성서에 나오는 사람들 외에도 다양한 지혜를 행하는 사람도 있었고 힘 있는 사람도 있었고 또 이상한 능력을 행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금도 보면 기독교 안에서만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병 고치는 것 보면 이방인들 특히 이교도에서도 또는 다른 종교에서도 많은 기적과 이적이 나타나요? 그런 것을 보고 성령이 함께해서 나타난다 라고 말은 할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특별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하는 일들을 통해서 이런 역사가 있었던 것이지. 모든 것이 꿈 해몽하면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이렇게 해석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신약에 보면 신약의 용례는 구약보다는 조금 더 다양합니다.
거기에는 지혜 지식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분별 방언 방언 통역 로마서의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 이런 게 나와요.
근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면 구제도 은사예요. 위로도 은사예요. 왜 성령의 은사라고 하느냐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돕고 사랑하는 것 왜 할까 라고 할 때 기독교 성경은 성경은 인간을 보고 인간을 죄인이라고 규정을 했습니다.
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선한 행위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미 완전 타락했다는 거잖아요.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구제를 굉장히 선한 행위로 생각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과연 인간이 구제할 때 왜 하느냐 이 말이에요.
정말 그 사람을 위해서 아니면 자기를 위해서 내가 구제하는 사람이 내 가족과 내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나의 삶을 앞을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버린다면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을 구제할 수 있을까? 못할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구제라는 것 속에도 이미 인간은 자기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인이 구제할 때는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나는 어떤 사람도 구제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다 나를 위해서 살고 나를 위해서 행동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선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인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진짜 구제하고 그가 나를 해친다 할지라도 그가 나를 오늘 죽인다 할지라도 나는 그를 돕겠노라 하는 이 구제는 사실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거예요. .
당시에 이 성경의 당시에 보면 로마인들 로마 황제들이 죽이려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오히려 로마를 위해서 그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복음을 전한단 말이에요.
그들을 피해 도망다니면서도 그들이 무서워 숨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오늘 포기하지 않고 그들이 나를 죽인다 할지라도 다시 돕는단 말이에요.
이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를 적대하는 게 정당한 건데 그러나 성령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은 그 일을 하더라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하면 인간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행동할 수 있는 이 모든 것은 성령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구제도 위로도 성령의 은사라고 말하는 거예요.
자 그리고 은사라는 게 뭐냐 라고 했을 때 은사에 대해서 간혹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은사가 서열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려도전서 12장 14장에도 봐도 방언을 구하기보다는 예언을 더 하길 원하라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라고 하면서 사랑 이야기 나눴을 때 은사에게는 서열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여요.
사랑을 더 구하라고 하는 것은 이 모든 은사 위에 사랑이 있다는 것보다 이 모든 것을 모아주고 함께 할 수 있는 곳 이 모든 은사가 살아있도록 할 수 있는 연결해 줄 수 있는 게 사랑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보면 성경에 보면 고린도전서 12장 4절의 6절을 보면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가지나 다 주놈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서열이 없다는 거예요.
위로하는 사람 또 누군가 가르치는 사람 또는 누군가 잘 섬기는 사람 이게 다 은사거든요.
사실 종교 개혁을 했다는 사람은 우리가 흔히 머릿속에는 루터 칼빈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루터도 편지를 쓸 때 보면 그 편지 속에는 그 편지를 쓸 수 있도록 먹물을 갈아준 사람도 있고 또 종이를 갖다 준 사람도 있어요.
우리에게는 이름이 기억되지도 않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한 사람도 기억한다는 거예요. 루터가 특별하게 기억되는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새롭게 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는 다 기억되는 거예요.
우리가 볼 때는 루터가 더 위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질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손에서 쓰임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고귀하다는 거예요. 은사라고 하는 것은 서열이 없다.
고린도전서 12~2장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라
우리가 이런 많은 은사를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은사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진짜 그것이 성령 하나님의 은사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라고 하는 문제가 벌어집니다.
이때 성령의 은사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어떤 일이냐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특징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나오는데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한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기에서 이 내용이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나옵니다. 12장 3절은 초반이에요. 은사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이 문제를 다루고 이야기합니다.
신령한 것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노라 해놓고는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죠.
이유는 무엇이냐 왜냐하면, 성령이 함께 할 때 나타나는 것이 그의 입을 통해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누구를 고백하느냐 하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한다는 거예요.
많은 사람이 은사를 받거나 은사를 가지거나 또는 신령한 일을 하게 되면 이상하게도 자기가 드러나요? 내가 마치 할 수 있는 것처럼 아니에요.
바울읕 보면 나는 오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모두 다 자기는 항상 뒤로 감추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하지 않습니까? 그 성령이 임했을 때 바울이 일어나서 설교한 내용이 사도행전 2장 내용입니다.
2장 초반에는 성령이 임하는 사건이고 그 설교한 내용의 핵심이 뭐냐하면 사도행전 2장 36절 내용입니다.
36절 내용이 무엇이냐 바로 그런 적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 고백이에요.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그 제자들이 고백했던 게 뭐냐하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구나 이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아 고난으로 고백하게 돼요.
그게 누구로 인해서 일어나면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나타나더라는 것이어요 성령 하나님 임했을 때 이 문제가 가장 먼저 정리가 되게 됩니다.
그 다음 성령의 은사를 구별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하면 성령에 임했을 때 공동체의 덕을 세우더라는 거예요.
고린도전도 12장 7절과 나오는 말씀인데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이 나타나면 유익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 고린도전서 14장 3절 4절 보면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고.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 덕을 본다 했을 때 다 덕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덕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 덕이라고 하는 이 말이 헬라어로 오이코도맨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 합성되어 있는데, 집이라고 하는 말과 세우다라는 말이 합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보면 은사라고 하는 것이 뭐냐라고 했을 때 집을 세운다는 겁니다. 이 덕이라고 하는 것이 집을 세우는 것을 말했을 때 은사를 가진 사람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들은 뭘 하느냐하면 이 집을 세워가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집을 허물어뜨리거나 집이 문제가 생기게 만들거나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받게 하거나 상처받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거예요.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 것은 그 모임이 될 때마다 함께 만들어지게 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되고 교회가 열매가 있도록 만들어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그럼 우린 구분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서 신비한 능력을 행한다 해도 그를 통해서 교회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면 안다는 가정을 보면 알아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신비롭고 놀라운 일을 행하면서도 가정이 파괴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거든요.
그건 성령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은사를 통해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함께 하셔서 은사를 주는 경우는 다 덕을 위해서 한다는 거예요.
그 예를 든 것이 무엇이냐하면 바로 두 가지인데 방언과 예언입니다. 방언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평가를 하냐하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하는 것이니까. 사람에게 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돈하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장 보면 실제 방언을 했을 때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알아듣거든요.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방언은 바벨탑 사건에서 하나님이 말을 언어를 혼잡하게 다 흩어져 버렸잖아요. 생각이 하나가 되고 말이 하나가 됐을 때 어떤 일도 하나님 없이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 흩어버렸던 거거든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하나님의 생각을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는데 다 알아듣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이 알아듣게 되는 이 방언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이었고 지금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이 방언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방언이었어요
하나님 앞에 서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하던 그런 방언을 보고 바울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말만 하면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지 않느냐 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사실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유익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면 당연히 방언도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 유익을 하기 위해서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왜 자기의 덕이 되도록 하느냐 라고 했을 때 이 신앙이 조금 전에 다른 사람이 알아듣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전서의 방언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덕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나에게 신앙에는 덕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의 은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나의 신앙에 큰 도움이 됐던 것이 방언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방언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루어진 거다 보니까 다른 사람에겐 덕이 되지 않는다. 라고 봤던 것이죠. 있죠.
다음은 방언은 유익이 없다라고 봤어요.
사실 방언이 굉장히 유익할 텐데 왜 유익이 없느냐 방언이 유익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4장 11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라고 하는 말씀합니다.
가만히 보면 사실 내가 말하게 됐을 때 하나님에게 말하는데 듣는 사람들이 보면 그 말이 뭔지를 모르니까 그건 외국말로 들려오는 거예요.
또한 마찬가지 누군가 방언을 하게 되면 나는 알아듣지 못하니까 그 말이 또 내게 외국인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이게 유익한 길이 아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유익함이 없다 라고 말했던 거예요. 덕을 세운다 할 때 공동체의 집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덕이 되지 않고 내가 유익하다는 것에만 초점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공동체의 유익함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던 거죠.
또 하나는 14장 14절 말씀인데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라고 하는 말이에요.
이 말은 또 무슨 이야기냐하면 방언을 하면 사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하는데 방언 통역을 하지 않게 되면 나도 어떤 기도를 했는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결단하고 기도해 보면 그 결단한 기도가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알아요. 하나님 나는 이렇게 되길 원합니다. 이렇게 살 겁니다 라고 기도해보면 그게 진짜 그 길로 가보면 열매가 나와요.
근데 문제는 방언기도를 하게 되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기도는 이루어졌는데 나한테는 유익해요. 뭐냐 하면 놀라운 일을 경험하니까 그러나 문제가 뭐냐 했을 때 내가 어떤 기도를 했는지를 모르니까 그게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방언기도는 유익함이 없다라고 한 거라는 거예요. 방언기도 자체가 문제 있다는 것이 아니고 방언기도를 했을 때 이런 유익함이 없다라고 말을 하려고 했던 거라는 이야기죠
그걸 방언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또 하나 하나가 방언을 모르거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미쳤다고 생각하게 된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3절에 보면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한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 말씀을 해요.
초신자들이 와서 들어보면 저분이 뭐가 잘못됐나 혹시 저 사람이 미친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들이 간혹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뭔가를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더라는 거예요. 다른 그 사람 처음 보는 초신자들이나 처음 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할 가능성도 있더라는 거예요. 방언으로 말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이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래서 바울은 모든 것을 할 때는 사랑을 추구하며 라고 했는데 추구하며는 사랑을 구하라고 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도
더 큰 은사를 너희들이 사모하라고 했는 것처럼
고린도전서 14장 1절을 은사에 대한 이야기하면서 제일 먼저 나왔던 것이 사랑을 구하라 라고 하는 이야기로 시작을 해요.
그리고 구하되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고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했던 거죠. 이유가 뭐냐하면 사랑 없는 예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바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랑이 없는 은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기독교의 가장 중요했던 이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 모든 은사를 행할 때만 덕이 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은사를 사모하는 자들은 반드시 사랑을 추구하라는 것을 이야기를 합니다.
이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미리 예자라고 하는 것과 맡길 예자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근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은 이 맡길 예 자예요. 이게 주된 개념입니다.
그래서 예언은 사전적으로 미리 말하는 것의 의미 하나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맡긴다는 것이 주요 의미입니다. 이게 핵심이에요.
그게 사실 무엇을 맡기느냐 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인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을 때 이 말씀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약속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현실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직은 안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반드시 현실이 된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속에서 전해주고 바르게 해주는 것이 그게 예언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바르게 외쳐주는 사람들을 보고 예언자라고 했던 겁니다.
한 개인의 미래 네가 학교에 갈 거 어느 학교에 갈 거다 또는 네가 앞으로 이런 사람과 결혼할 거다 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시대에 매개시켜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게 해주는 바르게 알려주는 것이 예언이고 그것을 해주는 사람을 보고 예언자라고 했던겁니다.
이게 잘못되다 보니까 예언을 마치 미래를 맞추는 것처럼 이것에 대해서 한국 교회안에서도 그런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지요 근데 문제는 뭐냐하면 안 맞는 경우들이 훨씬 많다는 거예요.
자 그러면 세 번째 성령의 은사 바른은사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 세 번째는 공동체가 하나가 되도록 한다는 거예요.
은사라고 하는 하나님이 함께한다. 했을 때 그 하나님이 함께하는 뜻이 있다는 거죠. 그 뜻은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봤지만 모두 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움직인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이 하나의 나라를 움직일 때 어떤 사람은 생각이 다를 수 있어요. 생각이 다를 수도 있고 그 다음에 마음이 다를 수도 있고 성격도 다를 수 있고 그다음에 살아온 어떤 환경도 다를 수 있어요.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냐하면 자기 성격 마음 생각 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게 돼 있더라는 거예요. 자기 뜻대로 구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성령의 은사가 함께한다. 성령이 함께한다. 했을 때 은사로 나타나는 경우를 보면 모두 다 교회가 하나 되도록 하고 사람들이 하나 되도록 하고 그리고 모든 일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도록 만들어가더라는 그것이 성령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라는 거예요.
이것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다시 한번 봐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오늘 적용을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적용은 세 가지를 생각하는데
하나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도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를 갇구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죄인이거든요. 죄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또 뜻을 이루고 싶어도 쉽게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하는 이 간구는 반드시 해야 될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할 때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니까. 언제나 기독교인은 성령 하나님이 함께하기를 간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신비롭고 놀라운 일에 마음을 안 뺏겼으면 좋겠어 여기에 마음 뺏기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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