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계양산 일대의 문화유적
이희환 (박사.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1) 계양산성(桂陽山城)
인천부의 산성은 문학산성(남산성)과 부평부의 계양산성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인천도호부 고적에 “인천의 남산고성은 석축으로서 주위가 430척”이라고 하였는데 남산은 문학산의 별칭이다. 이 문학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백제 건국 초에 비류의 도읍지로 전하여 지고 있다. 『동국여지승람』부평도호부 고적에 “부평의 계양산 고성은 삼국시대 축조된 석성으로서 주위가 1,937척이나 모두 퇴락하였다”고 하고 있다. 계양산성은 계양산 주봉에 축조되어 있지 않고 동쪽 기슭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으며 성의 내부는 솟아 오른 봉우리 능선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성벽의 여러 곳이 허물어져 있으나 원래 성의 모습은 유지하고 있다. 이성(李城)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시대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에 의해 보수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이 없다는 점이 삼국시대 성으로 추단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1997년에 보고된 『계양산 지표조사 보고서』에서 계양산성의 축조 방식이 전체적으로 시기가 올라가는 성벽축조 방식을 따르고 있어 삼국시대 축조라는 기록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음을 추측하였다. 최근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되고 있고, 이곳에서 오래된 목간이 발견되었다는 보도된 바 있다.
2) 계양산의 불교 유적
계양산에는 절이 모두 12개나 있었다고 한다. 북쪽 계양면 쪽에 5개, 남쪽 부평 쪽에 2개, 서쪽 서곶 쪽에 3개, 그밖에도 산 주변에 2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서쪽에 만일사, 북쪽에는 명월사 동쪽에는 봉일사가 유명하였는데 본래의 자취는 간데 없지만 그 흔적만은 여러 지표조사에서 확연하게 확인되고 있다.
- 만일사지(萬日寺址) : 계양산 서면 경명현(景明峴) 너머에 있는 고려 초기의 사찰지인데, 현재는 초석들의 위치가 변해 가람 배치를 복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사지에서 발견되는 와편·자기편은 고려 및 조선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 명월사지(明月寺址) : 계양산 북면 약 200m 중복에 10척 이상을 석축하고, 남북 50m, 동서 100m의 사지에 아직도 초석이 원형대로 남아있으며, 동측에는 큰 우물이 있어 맑은 물이 넘쳐흐른다.
- 봉일사지(奉日寺址) : 계양산 남양산 남록 동변에 아직도 석제 잔탑(殘塔, 원래는 오층탑)과 정전(正殿)·요사지(寮舍址) 등이 확연히 남아 있고, 이 주변에서 벽돌(흑회색 또는 적갈색) 등과 고려 및 조선시대 자기 파편, 그리고 인동문(忍冬紋) 와당이 다수 검출되었다.
3) 계양산의 유교 유적
계양산의 유교유적을 대표하는 것은 역시 부평향교이다. 시 유형문화재 12호인 부평향교(富平鄕校)는 고려 인종5년(1127)에 창건되었다는 설이 전해온다. 당시 수주(樹州)의 진산인 계양산 남쪽 심일리(深逸里 : 현 부평초등학교 뒤쪽)에 건립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부평부읍지』(光武版)에 의하면 조선시대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에 향교는 완전히 불타버렸다. 그 후 숙종 14년(1688)에 현재의 위치에 새로이 재건하여 공촌동에 숨겨 보관하였던 위패들을 옮겨왔다고 한다. 고려 인종 5년에 건립한 향교는 「신증동국여지승람」 「학교조」에 기록되어 있는‘향교재부북이리(鄕校在府北二里)’에 해당 될 것이다. 부평부의 북쪽에서 이리(二里)에 해당되는 곳은 계양산 기슭에 해당된다. 이와 달리『부평부읍지』「학교조」에서‘재부 서이리’는 현재의 향교 위치를 의미한다.
고종 8년(1871)에 편찬된『경기부읍지』중「부평읍지」에 의하면 부평향교에는 대성전(大成殿) 10칸, 동무(東무) 6칸, 서무(西무) 6칸 명륜당 10칸, 동재(7칸반), 서재(7간반) 외에 전사청(典祀廳) 3칸, 공수고(公須庫) 10칸, 중문(中門) 3칸 등이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향교의 일반적인 배치인 대성전, 동·서 양무, 명륜당, 동·서 양재 이외에 전사청, 공수고 등의 건물은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1921년 명륜당을 중수하였고 1937년과 1940년에도 건물 일부를 보수하였으며 1941년에도 보수를 하였다. 1965년에 대성전에 대한 단청과 내외의 보수공사를 하였는데 바닥에 우물마루를 갈고 상부에 우물 천청을 가설하는 등의 변조가 이루어졌다. 명륜당은 맞배지붕의 골기와 형태이고, 좌우에 방풍판이 있으며 정면이 3칸, 촤측면이 4칸, 우측면은 3칸이다. 좌우의 동무와 서무는 건물의 규모와 건축 양식이 동일하여 맞배지붕 형식이고 방풍판을 달고 있으며 정면 2칸, 측면 1칸 반으로 되어 있다. 동재와 서재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민도리 집으로 지붕은 홑처마의 맞배지붕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부평향교의 교생(校生)이었던 박무영(朴茂榮)·박대충(朴大忠)·이언복(李彦馥) 등 3인이 성전(聖殿)의 위판(位版)을 계양산에 토광을 파고 보관했다고 한다. 난 후 다시 옮겨 봉안(奉安)함. 위판을 분실한 인근의 읍들이 부평향교 위판의 규제(規制)를 본받아 갔다고 한다. 인조 14년(1636)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나 화재가 일어나 동지(同知) 송윤(宋玧)이 위판을 보관하였고, 숙종 14년(1688)에 계양구 계산동, 즉 현재의 위치에 재건하였다.
4) 목상동·다남동의 문화유적
<목상동·다남동 일대의 문화유적 분포지도>
출처 : 「문화유적분포지도-인천광역시 계양구·부평구·서구·옹진군」, 인천광역시, 인하대학교박물관, 32면.
최근에 발간된 「문화유적분포지도」에 의하면, 목상동과 다남동 일대에서도 새로운 유물이 발굴되었다. 다남동과 목상동 일대에서 유물산포지가 세 곳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금륜역터도 발견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다남동 유물산포지 3’으로 명명된 지도의 6번 지역은 현재 윤인중 목사가 나무 위 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지역으로,“흥인농장을 중심으로 하는 비교적 완만한 사면 붕적토 지역에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도기편, 자기편, 기와편 등이 다수 확인되었다”고 보고된 이 문화유적의 존재는 2006년 인하대박물관에 의해서 수행된 “계양 롯데 대중골프장 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이에 대한 전면 시굴조사를 통해 부평이씨의 발상지 유적일지도 모르는 ‘유물산포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전면적으로 실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