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건식의 무예이야기 - 이중화와 '조선의 궁술'
조선학계 권위자 동예 이중화 / 출처 한글학회일제강점기의 학자였던 동예(東藝) 이중화는 1881년(고종18년) 서울(현재 종로1가)에서 태어나 민영환이 설립한 흥화학교에서 영어, 지리, 역사를 공부한 후 1910년 배재학당에서 조선어와 역사, 지리 교사로 근무했다.
1929년 '조선어사전'(한글학회의 큰사전) 편찬집행위원을 하며 조선궁술연구회와 함께 우리나라의 활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을 기록한 '조선의 궁술'을 발간했다.
조선궁술연구회가 당시 조선역사학계의 권위자였던 그에게 편찬을 부탁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활쏘기에 대해 역사문헌을 토대로 저술한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나라 활의 기원과 역사, 활과 화살의 종류, 활을 쏘는 기술 등을 망라하여 다루었다.
특히 국한문을 혼용한 문장뿐만 아니라, 한글로만 쓴 문장도 있어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하기도 했다.
또한 여기에는 활 쏘는 사람이면 꼭 알고 익혀야 할 활쏘기의 몸가짐, 활터에서 지켜야 할 예의, 활터 및 활쏘기 경기를 행하는 종류와 규율 등도 정리했고,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활 잘 쏘는 사람(善射)'들의 이야기도 함께 실었다.
그리고 그림이 들어간 도설부분을 넣어 활과 화살의 재료와 제작법, 그리고 이를 사용하는 방법도 설명하고 있다.
조선의 주체성 찾기 위한 노력 조선의 궁술(1929)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열람실책의 끝부분에는 이 책의 간행 발기인 36명의 명단을 포함했으나, 최근 연구자들에 의하면 궁사 41명과 문인 및 화가 5명, 그리고 무신 2명이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을 밝혀내 활쏘기의 지침서뿐만 아니라 학술적인 자료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큐도(弓道)가 유입됐던 시기에 우리의 전통 활쏘기를 중심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주체성을 찾으려한 노력은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오기 1년전인 1928년에 '조선궁술연구회'가 창립되어 1932년 '조선궁도회'로 명칭이 변경되기까지 우리 활쏘기 명맥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역할을 '조선의 궁술'이 했다.
책의 내용은 활과 활쏘기의 방법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역대 선사(善射)들의 이야기는 삼국시대의 동명성왕과 다루왕 등으로부터 고려와 근대 고종시대의 김학원과 정행렬 등에 이르기까지 1백여명의 선사들의 일화를 수록해 궁술계이외의 일반인들에게도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또한 2백여개의 어휘들을 주석으로 달아 해석함으로써 우리 말을 빼앗기고 있던 당시에는 중요한 자료가 됐다.
납북이후 업적 매몰 조선의 궁술(1929)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열람실저술자 이중화는 우리에게 기억에서 사라졌었다.
그는 배재학당 재직시절 3·1운동 독립선언문을 작성해 배포한 일로 일제에 체포되어 투옥됐고, 1935년까지 배화학교에서 근무한 뒤, 경성여자미술학교 교장으로 근무했었다.
1936년 4월부터는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조선어사전 편찬의 전임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조선어학회가가 추진했던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에도 참여했었다.
그리고 환갑이 넘어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류되어 체포된 뒤 함흥감옥에 수감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다시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조선말 큰 사전'을 위한 편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사전에 실린 우리나라의 역사와 제도, 그리고 음식에 대한 용어는 그가 풀이한 것이다.
그리고 1948년 한글학회가 재단법인으로 설립될 당시에는 학회를 위해 경기도 부천에 있던 1만여평의 토지를 기증하기도 했고, 1949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은 인사들이 조직한 십일회(十一會)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리고 한글학회의 후원재단인 '한글집'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으며, 1948년부터는 국학대학의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허건식 체육학 박사·WMC기획경영부 부장그러나 6·25전쟁 도중인 1950년 7월 24일 서울 종로에서 인민군에 납치되어 납북된 뒤 그의 업적은 매몰됐다.
그리고 생존여부도 알 수 없었다.
납북될 당시의 나이가 70세였다.
정부는 납북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를 역사 속에서 찾으려 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월북자의 가족으로 불릴까 두려워 가난과 침묵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한글학회의 끈질긴 노력으로 뒤늦게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