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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선비길, 거연정~동호정 사이 청천동문 가족등반대회 / 2018.10.21. 1. 군자정. 1802년에 지은 정자다. 일두 정여창 선생을 추모한다. 이 곳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는 정여창 선생 처가 마을이다. 처가가 정선 전씨일 것이다. 2. 군자정 ; 서하면 봉전마을은 정여창(鄭汝昌)의 처가가 있는 마을로서 정여창이 처가에 들러 유할 때는 군자정이 있는 영귀대(詠歸臺)에서 유영 하였던 곳이다. 정선 전씨(旌善 全氏) 입향조(入鄕祖)인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 공의 5대손인 전세걸(全世杰), 전세택(全世澤)이,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 이곳에 정자를 짓고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君子亭)으로 칭하였으며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 3. 군자정. 정여창(鄭汝昌)은 김굉필(金宏弼, 1454~ 1504),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이언적(李彦迪, 1491~ 1553), 이황(李滉, 1501~1570)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5현 이라는 동방오현(東方五賢)에 드는 인물이다. 4. 군자정. 하천의 자연 암반위에 조성된 정자건물 5. 군자정. 전세걸 전세택이 일두 정여창 선생을 추모하여 세운 정자이다. 6. 화림동계곡 7. 거연정 일원 안내. 8. 선비문화 탐방로 안내판. 오늘 서하면의 군자정, 거연정에서 출발하여 선비길을 걷는 거리는 안의면 농월정까지 약 6km이다. 9. 거연정 주위 경관 10. 거연정 주위 경관 11. 거연정. 수직절리로 생성된 양 석벽 사이로 소沼(물웅덩이)를 이루며 개울이 흐른다. 마치 작은 운하 같다. 12. 거연정 13. 거연정앞 봉전교 14. 거연정, 암석이 마멸되어 둥글둥글하다. 바위는 화강암이다. 15. 거연정, 암석 속의 작은 생명나무 16. 거연정, 뒷쪽 17. 거연정앞 봉전교 18. 거연정, 여러 개의 현판이 있다. 그 중에 입향조 정선 전씨 화림재 전시서공의 6대손 전연수의 漢詩. 전시서공은 인조시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9. 거연정. 인조때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서가 이 마을에 <서산서원>을 세웠고, 그 옆에 간이 정자를 지었다. 그러니까 居然亭은 이미 오래전 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원은 철폐되었고(아마도 대원군 때), 그 자재로 19세기에 현재와 같이 튼튼하게 재건된 것이다. 20. 거연정의 깊은 소에 단풍이 드리웠다. 21. 거연정 뒷쪽 고사목이 멋이 있다. 22. 거연정 거연정(居然亭)은 고려말 두문동72현의 1인인 채미헌 전오륜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창건이 됐던 서산서원 바로 곁에, 화림재 전시서(全時敍)가 모옥(茅屋)을 지어 1640년경 강학을 했던 곳. 전시서는 병자호란 이후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둔하여 지냈다. 23. 거연정 ; 뒷쪽, 거연정이란 주자가 지은 무이정사의 시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 ; 자연에 거하니 나 곧 천석이로다)이란 시구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24. 거연정, 고사목 25. 거연정 26. 거연정 27. 거연정 28. 거연정을 막 지나서 동호정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29. 계곡수의 경쾌한 흐름 30. 높은 산은 단풍이 한창이고, 이 저지대 기슭은 아직 단풍이 조금 이르다. 31. 동호정이 가까웠다. 32. 동호정앞 차일암. 33. 동호정과 차일암. 동호정 앞 계류에 누운 너럭바위 차일암(遮日岩)은 100명이 앉아도 족하다. 34. 동호정과 차일암. 화림계곡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정자다.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등에 업고 의주로 피난을 했다는 조선 선조 때의 학자 동호(東湖) 장만리(章萬里)가, 관직에 오르기전 고향인 서하면 황산마을에서 낚시를 즐기며 유영遊泳(물가에서 노닐다) 하였던 곳에,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9대손으로 가선대부 오위장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0년 경에 지었다. 35. 동호정, 1890년 경 지어진 정자. 36. 동호정앞 징검다리 37. 동호정 38. 동호정을 지나간다. 39. 좋은 계절 가을 나들이객들이 양광아래 계곡의 반석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40. 화림동 계곡은 금천이라고 하고, 남덕유산에서 발원하는 남강의 상류이다. 41. 화림동 계곡의 금천. 42. 황석산 정상의 멋진 바위들 43. 동호정 장만리를 기억해야겠다. 참 충성스런 신하이다. 요즘 정치에서 배신자가 너무 많은 세상의 귀감이다. 여러분 영화 <부역자들>은 꼭 보세요. 44. 이 물은 금천이다. 45. 남덕유산에서 시작하여 화림동 계곡을 지나, 남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46. 황석산 아래 <황암사>가 있다. 47. 황암사의 역사적 유래 1) 황암사는 절이 아니고 정유재란때 왜군과 싸우다 순국한 안의 현감 곽준 일가를 추모하기 위해 2001년에 세워진 사당이다. 2) "곽준은 현감 재임시 선정을 베풀었고 청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공은 말하기를 『선조 대대로 청백함으로써 나라에 보답했거늘, 내 지금 한 고을을 맡은 바가 되어 조상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다행하지 않으랴』 하였다. 이처럼 모든 이가 고개를 숙일 정도로 청렴결백한 인품이었다. 3) 이 때 조정의 도원수 권율과 도제찰사 이원익으로부터 황석산성을 축조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토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왜적이 재침하게 되면 서부 경남쪽으로 진군하여 호남지방으로 빠져나갈 통로를 확보하리라는 예측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호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함양을 지나야 하며 이 곳에서 적의 진로를 저지하게 되면 시간적으로 연장시킬 수 있다는 계책에서였다. 4) 명령을 받은 곽준은 직접 지휘 하에 산성을 축조하였고 내부에는 병기를 두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함양군수 조종도와 함께 함양, 안의, 거창 등 세 읍의 군민이 이 성에 피신하여 왜장 가등청정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 때 김해 부사 백사림이 군사를 이끌고 이 곳 황석산성으로 지원해 옴으로서 아군의 사기는 높았다. 황석산성은 동북쪽의 산세가 험하고 경사가 급한 곳이기 때문에 백사림이 동북쪽을 맡고 공은 평평한 남서쪽을 맡고 있었다. 왜적은 동북쪽을 쳐들어 올 것이다 하는 예측을 뒤엎고 평평한 남서쪽으로 쳐 들어오므로, 공이 활 하나에 화살 3개를 함께 쏘니 모두 적중되어 세 사람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이 광경을 본 적군은 신통한 화살의 명궁이 있다하여 공격을 중지했다가 얼마 후 일제히 공격하니 전세는 아군이 불리하게 되어 갔다. 5) 이 때 겁에 질린 백사림이 북문을 열어 놓고 그의 가족을 먼저 피신시킨 후 도망을 치자 왜군들은 일제히 성문으로 몰려 왔다. 성은 하루 만에 함락되고 말았으니 1597년 8월 18일 달 밝은 밤이었다. 밀고 밀리는 전투는 밤새껏 계속되었고, 결국은 중과부적의 열세로 500여명의 아까운 목숨을 잃은 채 끝났다. 성안은 수라장이 되고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공도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이를 본 곽이상, 곽이후 두 아들이 달려와서 아버지를 보호 간호하려하자 곽공은, 『나는 직책이 있어서 이 성을 사수해야 하나 너희들은 몸을 피하라』라고 하자 두 아들은,『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죽는데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서 죽는 것이 불가한 일입니까?』 하면서 적과 육박전으로 응수, 사력을 다했지만 그들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에 공은 두 아들의 최후를 보면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으니 이때가 1597년 음력 8월 18일로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6) 이 때 공의 사위되는 유문호가 싸움터에서 전사했다는 소문을 들은 곽공의 딸은 몸종을 향하여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내가 죽지 않은 것은 나의 가장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이제 가장이 전사했으니 내가 살아서 무엇하겠느냐』고 하며 목을 매어 자진하였다. (유성룡, 징비록) 7) 공의 일생을 돌이켜 볼 때 남아 대장부의 대의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굳이 살기를 바라지 않았던 그와 그의 아들이며, 며느리 또한 남편의 뒤를 따랐으며, 딸은 아버지와 함께 남편의 뒤를 따르는 것이 남편의 영혼을 달래는 일이라 하여 자진하였으니, 일가족 모두가 비참하지만 거룩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곽준의 忠과, 두 아들의 孝와, 며느리 거창 신씨와 딸의 열(烈)로 이어지는 한 가족의 숭고한 죽음은 3강 5륜에서 3강을 한 가문에서 이루어 놓았다. 훗날 선조 대왕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1가 3강이라 하시고 정려를 세워 표 할 것을 명하였으며, 이에 따라 안의면 당본리에 황암사라는 사당을 짓고 봄가을 두 차례 제를 올려왔으나 한말 군국 일본의 강압으로 없어졌다. 8) 함양군에서는 2001년 황암사 사당을 서하면 황산리의 황석산 밑에 재건하고 제를 올리고 있다.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안의의 황암사당, 현풍의 예연서 원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