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민대학 단기특강
11월 특강 대전 현충원 보훈둘레길
2022년 11월 19일, 셋째주 토요일.(맑음, 기온 5˚~19˚)
[특강] 대전 현충원 보훈둘레길
트레킹 출발 : 현충원 주차장 매점옆
트레킹 도착 : 원잠회기
거리및 시간 : 4.22km / 2시간 / 난이도(下)
날씨 : 구름이 약간끼고, 파란 하늘색으로 아주 좋았슴
트레킹 안내(해설) 강사 : 이주진
사진 청마(靑馬)
국립대전현충원(國立大田顯忠院)
호국영령 및 순국선열들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에 있는 국가보훈처 산하 국립묘지.
국립대전현충원은 서울 동작동에 설립되었던 국립묘지의 안장능력이 한계에 이르게 되자,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추진되기 시작했고, 1976년 4월 14일 현재의 위치로 결정되었다.
1976년 5월 11일 지방 국립묘지 설치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1979년부터 공사가 시작됐다. 1985년 11월 13일 준공했다. 2006년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소관부처가 국방부에서 국가보훈처로 변경되었다. 총면적 330만 150㎡ 규모의 국립묘지로, 준공되기 전인 1982년부터 사병·장교·경찰관 등에 대한 안장이 시작되었다. 국립대전현충원의 묘역은 국가원수묘역, 사병묘역, 경찰묘역, 애국지사묘역, 국가사회공헌자묘역, 장군묘역, 의사상자 및 순직공무원 묘역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현충시설로는 현충탑, 현충문, 호국분수탑, 홍살문 등이 있고, 임시 안치실인 봉안관, 안장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가 열리는 현충관, 군의 각종 전투장비를 전시하고 있는 야외전시장인 보훈장비전시장 등이 있다. 또한 1,667㎡ 면적의 2층 건물로 나라사랑 교육 중심의 전시가 이루어지는 보훈미래관을 현충시설로 두고 있다. 또한 방문객들의 편의를 위해 보훈가족쉼터, 유족대기실, 야생화공원, 보훈산책로 등을 갖추고 있다.
국립대전현충원 보훈둘레길
대전광역시 유성구 계룡로 1558번지(구 갑동)에 위치했으며, 부지 면적은 322만 2001㎡, 안장 능력은 6만 3250기이다. 한국의 전통미와 현대감각의 조화, 자연경관의 최대 보존, 기존 국립묘지의 미비점 보완, 전 묘역의 호국공원화를 기본 방향으로 잡아 조성하였다.
이곳은 조국수호와 국가번영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나라에 바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고이 잠들어 계시는 민족의 성지로서, 1979년에 착공하여 1985년에 완공하였다. 100만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 위에 묘역은 애국지사, 국가유공자, 장병, 경찰관 및 일반묘역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주요 시설물로는 참배를 드리는 현충탑과 현충문이 있고, 영결식과 호국영화 상영을 위한 현충관, 각종 호국사진과 유품을 전시한 호국관 그리고 군 전투장비를 전시한 야외전시장이 있다.
그 밖에 호국분수탑, 홍살문, 천마웅비상, 23개의 호국경구비 등 조형물이 있으며, 한반도 지도모양을 본 떠 만든 자연석 인공연못인 현충지, 정자 그리고 각 묘역 주변에 잘 가꾸어진 휴게시설 등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또한 보훈 둘레길도 있어 많은 분들이 사색을 하거나 둘레길을 따라 도보여행도 할 수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로도 이용되고 있는 곳이다.
보훈둘레길은 현충원 주위를 둘러싼 트레킹길로 산책하기 좋고 총 7가지의 코스를 즐길 수 있어 언택트 여행을 원하는 분들께는 안성맞춤입니다. 둘레길을 걸으면서 호국철도기념관, 소나무숲, 대나무숲, 전망대 등 다양한 볼거리도 즐길 수 있다. * 국립대전현충원 조성 이유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銅雀洞)에 있는 국립현충원의 안장 능력이 한계에 이름에 따라, 1979년 4월 1일 착공해 같은 해 8월 29일 국립묘지관리소 대전분소로 출범하였다. 1985년 국립묘지를 준공한 뒤, 1991년 국립묘지대전관리소 승격을 거쳐 1996년 6월 1일 지금의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등록문화재 제414호로 지정된 미카3-304호에 대해서는 미카형 증기기관차 304호 문서를 참조.
등록문화재 제415호로 지정된 미카3-129호는 1940년 일본에서 제작되고 조선총독부 철도국 경성공장에서 조립한 텐더식 증기 기관차로 경부선 등 주요 간선에서 운행되다 1967년 8월 디젤 기관차의 등장으로 운행이 중단되었다. 1981년 10월부터 2년간 동해남부선(부산~경주) 관광열차로 운행되었다. 이 기관차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7월 19일 북한군에 포위된 미 제24사단장 윌리엄 F.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하여 적진에 돌진하였던 기관차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그 기관차는 미카3-219호이다
당시 이원 이북은 인민군이 점령한 상태였으며, 이원역에는 승무원과 미군 포병 십여 명, 그리고 기관차 두 대만 남아 있었다.[8] 오후 4시, 대전의 충청남도청에서 윌리엄 F. 딘 소장은 대전역에 남아 있던 보급품을 실은 화차 10량을 영동역으로 운송할 기관차를 보내라고 명령하였다.[9] 영동역에 있던 대전운전사무소 소속 김재현(金裁鉉), 조사(助士) 견습 현재영(玄在英), 조사 황남호(黃南湖)는 명령을 받고 이원역에 도착하였다. 이원에 주재(駐在)하던 미군 장교는 이들에게 윌리엄 F. 딘 등 미군을 구하러 대전역으로 갈 것을 청하였고, 김재현은 대전행 작전을 수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무장한 미군 결사대 삼십 명과, 운전취급을 위한 옥천역장을 태운 기관차는 오후 6시 정각에 이원역을 발차하였다. 기관차는 아무도 없는 옥천역에서 일 분 간 정차하여 역장을 내린 뒤 다시 출발하였는데, 세천역을 지나 터널을 지나자 적군이 사격을 가하였다. 세 명은 필사적으로 운전을 계속하였고, 미군은 분전하였으나 대전역에 도착하였을 때 살아남은 군인은 세 명에 불과하였다. 이들은 화차에 시신을 안치한 뒤 곧바로 영동으로 복귀하는 길을 떠났으나, 앞서 적군의 총격이 있었던 부근에서 김재현과 미군 군인 두 명이 전사하고, 현재영은 팔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황남호는 물과 증기가 모자라 세천과 옥천 사이에서 멈추려는 기관차를 겨우 옥천역에 정차시켰고, 옥천에 있던 야전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뒤, 한 시간 뒤 도착한 병원열차로 영동으로 복귀하였다. 전신에 여덟 발의 관통상을 입고 전사한 김재현은 영동에서 장례를 치렀으며, 현재영은 부산 후방에 있는 병원으로 보내졌다. 기관차는 김천운전사무소로 보내 수선한 뒤 다시 전선으로 출격하였다. 기관차의 번호가 잘못 알려진 이유는 신문 기사의 오기(誤記)가 원인으로 추측된다
ㅎ
보시느라 수고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