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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월한수정에 봄빛은 무성한데 임은 없구나
계상서당 산배알서 두견새 구슬피 울어대고
웃토계 도타운 개울물도 한시름에 젖어 있네
성황당 솔낭구 쑤에는 적막 소리 깊어만 가고
봄비 내리는 도산골 퇴계구곡 우수 가득하다
조복을 짓던 맑은 성정을 청산도 그리워 하네
동취병산 언덕에 핀 진달래 들매화 벗 삼으며
문순공의 고매한 얼 기리며 애를 떨쳐 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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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필 선생님(1932~2024)ㆍ퇴계 이황 16대 종손ㆍ향년 93세ㆍ2024.3.7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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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과 그림은 위 시상에 나타나 있는 지명의 실제 전경과 이에 대한 설명이다. 선생님과 일생을 함께 했던 아름다운 벗이었다.
♤사진1.3은 도산 땅의 얼이 깃든 퇴계 이황(退溪 李滉ㆍ1501~1570) 종택의 전경이다(경상북도 기념물 제42호). 현재 가옥은 퇴계의 13대 후손인 하정공(霞汀公) 이충호 선생이 새로 건립(1926~1929)한 34칸 규모의 ㅁ자형 건축물이다.
사진2는 종택 오른편에 있는 별채 건물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다. 퇴계 선생의 고매한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선생의 지고한 성정만큼이나 서린 뜻이 명징하다. 주변 전경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 "가을 맑은 달빛 아래 차가운 토계천이 흘러가는 개울가에 있는 정자"를 뜻함일 것이다. 가을의 달빛은 맑고 깨끗하다. 그리고 차가운 물은 그윽하고 곧고 고요하다. 이는 곧 퇴계 선생의 성정을 비유한 표현이다. 중국 남송시대의 유학자인 주자朱子(주희朱熹)의 시 "재거감흥齋居感興" 가운데 한 구절인 "추월조한수秋月照寒水" 즉, "가을 달빛이 차가운 물에 비치네"에서 유래했다. 추월한수정은 봉화 달실(닭실·酉谷) 마을에 터전을 잡은 조선 전기 문신인 충정공 권벌의 5세손인 창설재 권두경 선생이 문순공 이황의 숭고한 도학을 기리기 위해 1715년에 지은 건물이다. 달실마을에 있는 "한수정"에다가 "추월"을 더한 명칭이다. 추월한수정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위에는 "퇴계선생구택"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일제 때 방화로 소실되었으나 1920년대 후반에 재건했다.
이근필 교장 선생님께서는 평생동안 이 종택에서 선대의 고귀한 얼과 아름다운 문화를 받들고 위하며 살아오셨다. 우리 도산골의 영원한 스승이었다.
[사진출처: 퇴계退溪 종택宗宅 POST CARD]
♤위 그림1은 예안의 권우선 선생(화가ㆍ2023作
)이 그린 퇴계종택 왼편 맞은편 언덕 위에 자리한 계상서당溪上書堂과 한서암寒栖菴 그리고 둔덕 아래로 도타이 흘러가는 개울가(토계천兎溪川) 풍경이다. 그림 아래 사진1은 그림의 실제 전경이다. 사진 오른편 상단에 있는 소각은 계재溪齋 이다. 계상서당은 1551년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고향 웃토계로 돌아와서 계천(토계천) 위에 한서암을 짓고 기거하며 제자들을 가르친 정자이다. "퇴계退溪"라는 한자어의 훈을 보면 "물러나서 토계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선생은 "토계"를 "퇴계"로 고쳐서 부르며 자호自號로 삼았다. 이후에 후대들이 '토(兎)'자를 음이 같은 '토(土)'자로 다시 고쳐서 부르면서 지금의 토계(土溪)가 되었다. "웃토계"인 상계上溪는 "아래 토계"인 하계下溪에 대립되는 지명이다. "웃"은 "위"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이다. "위"는 "아래"의 대립이 되는 명사 앞에 "윗"을 쓴다. 다시말해 토계의 "윗 지대(웃토계)"는 상계라고 불렀으며 "아랫 토계 지역"은 하계라고 했다. 그래서 옛날에 "토兎"자가 "토土"자로 바뀌기 전에는 한자의 훈을 따서 웃토계를 "웃토끼", 아래 토계를 "아래 토끼"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수몰 전인 1970년대 토계를 활보한 우리 시대 사람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아래 토계인 하계를 그냥 "토계"라고 불렀다. 그 시절 토계는 도산면의 번화가였다. 그림3.4는 겸재 정선 선생이 그린 "계상정거도"이다. 겸재 선생의 "계상정거도"와 계상정거도 그림 속에 들어 있는 퇴계 선생의 "계상서당"을 연관지어 그 내력을 소개한다.
[계상정거도와 계상서당]
위 그림3.4는 진경산수화의 걸작품으로 통하는 겸재謙齋(정선鄭敾ㆍ1676~1759) 선생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1746作ㆍ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면 산수화)"이다. 겸재는 조선 후기의 화가이며 문신이다.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인왕제색도 등 다수의 명작을 남겼다. 계상정거도는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풍광을 조망한 그림이다. 이 산수화는 서원 마당 오른편 천연대에서부터 시작하여 도산서원을 중심에 두고 왼편 상단에 산과 강이 길게 접한 분강촌 마을까지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분강촌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이며 시호는 효절공孝節公인 농암聾巖(이현보李賢輔ㆍ1467~1555) 선생의 고향이다.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농암가ㆍ어부가 등 다수의 강호시가를 남겼으며 현재 가송리 농암종택(분강서원)에 있는 숭덕사에 배향되어 있다. 농암 선생의 16대 손인 필자는 유년시절 이곳 분강촌에서 성장하며 십 리 밖에 있는 도산국민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인해 670여 년 전 고려 말엽 농암의 고조부인 이 헌 공이 처음 정착한 분강촌은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졌다. 분강촌은 이후 2000년대 초에 가송리에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 농암종택과 분강서원을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토계(하계)에 있던 도산국민학교도 함께 수몰되면서 단천에 있는 신교정으로 이전을 했다. 계상정거도 속에는 도산서원 앞 전경인 도산오곡에 해당하는 탁영담과 함께 그림 왼편 상단 분강촌 앞에 무성하게 적수되어 있는 도산사곡 지대인 분강 주변도 훤히 눈에 들어온다. 겸재는 산수화 속 중앙 상단 바로 좌측 산중턱에 고스란히 그림처럼 걸려 있는 농암 선생이 건립한 애일당(1512)과 그리고 다시 그 옆쪽 솔나무 숲에 둘러쌓인 농암종택도 잊지 않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조선 후기의 그림이지만 유년시절 우리가 뛰어놀았던 그 시절의 산천과 진배없다.
계상정거도 그림을 자세히 보면 "계상서당" 속에 앉아서 "주자서절요"를 쓰고 있는 퇴계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퇴계退溪(이황李滉ㆍ1501~1570)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이고 시호는 문순공文純公이다. 1574년에 건립한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위 사진2 참조). 농암과 퇴계는 족질간이며 서른네살이라는 나이 차이도 잊은 채 말년에 분강촌에서 학문과 문학을 담론하는 등 벗으로서 강호지락을 나누며 탈속적인 삶을 살았다.
겸재 선생은 계상정거도에서 지금의 도산서원 산너머 다시말해 현재 도산서원 주차장 고개 넘어 동취병산 뒷편 자락에 있는 퇴계종택 왼편 개울가 언덕에 위치한 계상서당을 이 그림 속에 넣어서 그렸다. 계상서당의 건립은 퇴계 선생이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내려온 이후인 1551년이고 도산서원 건립은 1574년(선조 7)이었다. 그리고 도산서원이 건립되기 전에 지은 도산서원내 최초 건물인 도산서당은 1561년에 세워졌다. 퇴계 선생 사후에 도산서당 뒷편으로 다양한 목적에 따라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서원이 만들어졌다. 도산서원 경내 제일 위에 자리한 건물은 1574년에 초창된 상덕사이다. 퇴계 선생의 신위가 봉안된 사당으로 배향 공간이다.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의 위패(신주)와 유물과 서당이 경내에 모두 공존하는 한국 유학의 본산이다.
♤퇴계종택 맞은편 길 아래로 대골 죽동 못 미쳐 고적히 자리한 성황당(서낭당)과 늙은 느티나무 모습이다. 서낭당 오른편에는 노송(솔나무ㆍ솔낭구) 쑤(수풀ㆍ숲)가 있다. 두 개의 사진은 같은 장소이다.
♧아래 사진들은 도산골과 도산국민학교와 평생을 함께 하신 선생님의 발자취와 흔적을 더듬어 보았다.
♤사진 및 그림 종합 설명(caption)
사진1은 도산국민학교의 전신인 보문의숙의 졸업식 광경이다. 1909년 문을 연 진성이씨 문중 사립 초등교육기관인 보문의숙은 1918년 토계리 99번지에 지번을 정한 도산공립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아서 개편, 편입 되었다. 이후 1941년 일본의 국민학교령에 의해 도산국민학교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1975년에는 안동댐 수몰로 단천 신교정으로 이전한 후 1993년 74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때 보문의숙에서 도산공립보통학교로 편입(1918.3.3) 되기 직전인 1916년 10월 경에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2~29는 은사님과 함께 한 유년시절 국민학교 관련 사진(1971~1976)이다. 사진2~11은 도산국민학교(구교정ㆍ토계) 전경과 선생님 모습이다. 특히 사진4는 정문 바로 오른편에 있던 우물 펌프 집이다. 양철로 된 빛바랜 고동색 지붕이 옛 기억을 선연히 떠오르게 하여 가슴을 울컥하게 한다. 사시사철 매일 이 우물을 당번이 주전자로 떠오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한여름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 목이 마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펌프가로 달려가서 입을 벌리고 벌컥벌컥 물을 마시던 추억들이 그립게 떠오른다. 사진12~17은 1976년 안동댐 준공을 앞두고 1975년 단천으로 이전한 도산국민학교 신교정 모습이다. 사진15의 중앙 지점에 보이는 파란 지붕이 학교 건물이다. 사진16의 왼쪽 다리 끝에 있는 산 밑에 학교가 있다. 주변 풍광이 빼어나리 만큼 아름답다. 학교 건너편에는 한국 저항시의 걸작품인 이육사 선생의 시작詩作인 "절정"의 시상이 잉태한 갈선대(사진17이 갈선대 : 사진17은 학교 맞은편 즉, 사진15.16의 제일 높은 층암절벽)와 고려시대 홍건적의 난(1361) 때 공민왕과 왕의 어머니가 피난을 오게 되자 주민들이 축성해서 머무른 왕모산성 그리고 460여 년 전 퇴계 이황 선생이 "지금부터는 선경의 경지로 접어드는 길"이라고 말한 도산구곡 가운데 칠곡 지점인 예던길이 열리는 길목인 단사(단천ㆍ대사)와 백운지(배오지)가 차례로 자리하고 있다. 낙동강 일천삼백리 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18은 도산국민학교 마지막 졸업식 관련 신문 기사이다. 즉, 폐교를 보도한 기사이다. 독립운동가 이육사 선생이 1회 졸업생인 도산국민학교는 애석하게도 1993년3월1일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다(사진19 참조).
사진20~27은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문을 닫은 이후 48년이 지난 최근 도산국민학교 토계 구교정의 모습이다. 사진25의 밭 속에 도산국민학교 옛터(도산국민학교구기)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표지판 뒤로 세월에 바래서 피폐해진 옛 건물이 보인다. 사진26은 몇 년 전에 드론을 사용하여 옛 구교정 주변을 촬영한 전경이다(도산초 58회 카페 사진). 사진 중앙에 허물어진 교사와 빛바랜 파란색 지붕 건물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옛날 교정의 흔적이다. 파란 지붕 건물 앞에 황토색의 넓은 밭이 옛날 학교 운동장이었다. 반세기 전 그 옛날 넓디 넓던 운동장의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넓구나~. 1976년 단천 신교정으로 이전한 도산국민학교는 결국 17년 후인 1993년3월1일 폐교되었다. 사진27은 은사님과 평생을 함께 했던 수몰 전 도산골 토계 번화가 전경이다. "아~ 산천의 정령이 계신다면 선생님과 도산골 우리 모두를 굽어 살피리라~". 사진28~29는 온혜국민학교 전경이다. 1976년 안동댐 준공을 앞두고 분강촌(부내ㆍ분천동) 아이들은 단천으로 옮긴 도산국민학교 신교정에 다니는 것이 너무 멀어서 1975년 2학기부터는 온혜국민학교로 갔다. 선생님도 우리들과 함께 온혜국민학교로 옮기셨다. 그때 우리들은 너무나 외롭고 힘든 시기였다. 농암 선생의 후손들이 670여 년 동안 터전을 이뤄서 살아온 분강촌은 이렇게 한순간에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선생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온혜국민학교로 가게 되어서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선생님은 이때부터 도산국민학교와 온혜국민학교의 양쪽 교장을 맡으셨다. 사진28은 1976년 당시 온혜국민학교 전경이고 사진29는 2023년 최근 온혜국민학교(2024년 전교생 8명) 모습이다. 아~ 애증의 세월 온혜국민학교~.
♤위 사진은 몇 년 전 퇴계종택 왼편에 있는 매화나무 앞에서 봄을 맞이하고 있는 은사님의 모습이다(사진: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퇴계 이황 16대 종손 이근필 선생님 1932~2024ㆍ93세 작고(202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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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는 선생님께서 선영으로 가시기 전에 평생 동안 계셨던 퇴계종택의 바깥 마당에서 작별을 하시고 있다. 사진3은 선영에 도착하신 선생님 영전에 유가족과 유복친들과 후손들과 전국 각 문중의 유림들이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광경이다. 사진4는 선생님께서 기거하시던 종택 사랑채 전경이다. 마루 기둥에 친 여막이 처연해 보인다(사진: 매일신문).
♤"아~ 임은 떠나고 이제 아니 있네. 계상서당 개울가에 무성한 푸른 봄빛을 떨치고 임은 갔네.
한서암도 서낭당도 토계천도 말이 없네. 청산은 그저 구름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아내 앤이 연주하고 필자가 노래한 도산국민학교의 교가를 삼가 선생님께 올린다.
[도산국민학교 교가 : 이원주 작사ㆍ오동열 작곡]
영지산 푸른 꿈 가슴에 심고
낙독강 유유한 힘을 받는다
아아 도산 성스럽고 거룩한 이땅
높으신뜻 기리이어 역사 빛내리
올바르고 씩씩하게 무럭무럭 자라는
우리도산 착한어린이 나라의 꽃들
♧소회所懷
은사님이 떠나셨다. 유년시절 아름다운 추억을 함께 하며 평생 동안 가르침을 주셨던 인자한 그 모습을 이제는 뵐 수가 없다. 한국 유림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셨지만 우리에게는 그저 늘 친근한 고향 도산골 선생님이셨다. 돌아가신 양친이 생각나고 유년시절이 그리워지고 삶이 허전해질 때면 이따금씩 웃토계 종택을 불쑥 찾아가면 언제나 제자들을 반가이 맞아주시던 선생님을 이제 다시는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무척 슬퍼진다.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도산구곡의 절반이 수몰된 후 도산국민학교와 온혜국민학교에서 우리들과 함께 하며 지금까지 큰 은혜를 주셨던 은사님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니 그 허전함이 사못 가슴을 파고 든다. 이제는 도산골의 글을 절절히 써서 보내 드려도 그리운 임은 떠나시고 아니 계신다. 양친이 계시는 도산서원 서취병산 석간대 선영에 들리고는 바로 동취병산 고개를 넘어 종택에 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보였지만 이제는 들려도 고운 임은 없다. 유년시절 분강촌(부내ㆍ분천동)과 도산서원과 그리고 도산국민학교가 남겨 준 맑은 정신과 아름다운 유산은 거친 인생 길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은혜로운 자산이 되어 복된 삶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언제나 동산 같은 선생님이 자리하고 계셨다. 선생님과 우리들이 함께 했던 도산골의 흔적들을 이제 와서 다시 추억해보는 심정은 심히 아리고 못내 허전하다. 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도산골의 추억이 가득히 서린 이 헌시를 삼가 올린다. 선생님을 그리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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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상서당 개울가에 봄비 내리고
(이종구ㆍ2024.3.29)
추월한수정에 봄빛은 무성한데 임은 없구나
계상서당 산배알서 두견새 구슬피 울어대고
웃토계 도타운 개울물도 한시름에 젖어 있네
성황당 솔낭구 쑤에는 적막 소리 깊어만 가고
봄비 내리는 도산골 퇴계구곡 우수 가득하다
조복을 짓던 맑은 성정을 청산도 그리워 하네
동취병산 언덕에 핀 진달래 들매화 벗 삼으며
문순공의 고매한 얼 기리며 애를 떨쳐 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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