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 밖 순교자들의 행적. 이간난 아가타 [강석진 신부]
2. 이간난(아가타)
이간난(아가타)은 1813년,서울의 양민 집안,비신자인 아버지와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44 태어났다.45 그리고 그녀는 신앙 안에서 열성적인 삶을 살다가 1846년,34세(만 3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 다. 그녀의 생애를 보면,18세(1830)가 되자 부모는 그녀를 비신자에게 시집을 보냈지만, 20세(1832)때 과부가 되었고, 그 후 친가(親家)로 돌아와서 생활하였다.
이 간난의 천주교 입교 경위는 시복 재판의 증인으로 나온 한 바울라의 증언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증언에 의하면, 이 간난은 1837년50 25세 때, 천주교 신자였던 그녀의 외조모가 임종하면서 자신에게 ‘예수,마리아를 불러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 간난은 천주교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으나, 주변에는 천주교 신자가 없어서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그녀는 어머니에게 천주교 신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고, 천주교 신자였던 그녀의 모친은 시복재판 증언자인 한 바울라의 집을 가리켜 주었던 것이다. 그 후 이간난은 한 바울라의 집에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고, 마침내 입교 하였다.
성품이 순수하고 정직했던 이간난(아가타)은 여항덕(余恒德,파 치피코,1795〜1854)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세례를 받은 후 동생인 이 이사벨라에게 천주교를 전교하였다. 신자가 된 이 간난은 진실하고 우직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신앙의 가르침을 생활에서 실 천해 나가고자 노력하였다. 그녀는 천주교 서적을 부지런히 읽었고, 희생과 극기의 생활을 자주 하였으며, 금식과 금육의 재(齋)를 꾸준히 지켰다. 또한 그녀는 시댁 식구들에게도 천주교를 전했으며, 그들 중에 몇몇은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시복재판의 증인인 이 글라라는 이간난(아가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이간난 아가타는 자주 만나던 사람인데,열심히 천주교 신앙을 지켰으며, 우리 집에 축일을 지키게 해 주려고 다녀갔다.
그러나 비신자인 이간난(아가타)의 아버지는 식구들이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크게 화를 냈고,급기야 집안 식구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금지 시켰다. 하지만 이 간난을 비롯하여 그 가족들은 더욱 열심히 천주교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러자 더 화가 난 아버지는 이 간난의 어머니와 오빠를 경상도로 이사 보냈고, 이 간난은 다시금 시집으로 보내 버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시집으로 돌아온 이간난은 시집에서 천주교 신앙을 지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삯바느질로 돈을 모아 새로 집을 장만한 다음, 땅문서도 얻어 따로 나가서 살았다.55 그 후 이간난의 아버지는 이간난에게 어느 정도 양식을 도와주었고, 그녀 역시 자신이 가진 손재주인 삯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과부로 혼자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불편을 느낀 이간난(아가타)은 동료 우술임(수산나)을 만나서 함께 살았고, 서로 도우면서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지켜 나갔다. 그래서 주변의 천주교 신자들은 그들에 대해 평가하기를,‘함께 살면서도,남을 도와주는 선행은 꾸준히 행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이간난의 주변 친척들은 과부로 혼자 살고 있는 그녀에게 재혼을 권했지만, 그녀는 수절(守節)할 원의(願意)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혼인 자체를 마다 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삶과 신앙을 보고 동료 신자들은 그녀의 행실이 깨끗하다고 칭찬하여,‘빙청옥결(水淸玉潔)’ 즉,‘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846년 봄에 김대건 신부가 황해도 옹진에서 체포되고, 서울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집 위치가 탄로 났다. 그래서 포교들은 김대건 신부의 집을 중심으로 현석문과 동료 신자들을 체포하고자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현석문은 동료 신자들을 피신시키면서, 여자 신자들은 장동(혹은 잣골)에 있는 이간난의 집으로 보냈고, 현석문 자신은 김임이가 사포서동에 새로 매입해 놓은 집으로 갔다.
그 후 포교들은 서울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집을 덮쳤지만,신자들은 이미 피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포교들은 여자 교우들이 피신할 때에 가마를 태워 준 가마꾼들을 찾아 그들을 붙잡았다. 그리고 가마꾼들을 통해 여자 교우들이 이간난의 집으로 간 사실을 확인하였다. 포교들은 이간난의 집에 들이닥쳤으며, 이때 이간난의 집에 피신했던 여자 신자들은 현석문이 사포서동에 새롭게 장만한 집을 보러 갔고, 우술임 혼자만 그 집을 지키고 있었다.
포교들은 우술임을 체포한 후,다른 교우들이 어디 있는지를 추궁하자 겁에 질린 우술임은 현석문이 새로 장만한 사포서동의 집을 가리켜주었다. 그러자 포교들은 우술임을 데리고 그집으로 쳐들어가 함께 있던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이 당시에 체포된 사람들은 현석문,김임이,오(吳) 바르바라 정철염,이간난,우술임이 었고, 때는 1846년 윤(聞) 5월 16일(양력 7월 9일)신시(申時,오후 3~5시)였다.
이렇게 체포된 이들은 우포도청65 에서 갇혀 지냈다 시복재판의 증인인 김 가타리나는 함께 체포되었다가 배교한 후 풀려난 오 바 르바라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인용하여 이간난의 옥중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이 간난 아가타와 우술임 수산나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서로 다투었다고 한다. 아마도 우술임 수산나가 포교를 데리고 현석 과 함께 숨어 지내고 있는 집을 가리켜 준 이유일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석문 가롤로와 다른 교우들의 권유와 노력으로 이 둘의 마음은 풀어지고, 다시금 감옥 안에서 사이좋게 지냈다고 한다.
또한 시복 재판의 증인인 이간난의 동생이 이사벨라 역시, 오 바르바라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증언하였다. 이들이 다 잡힌 후에 포청에 갇혀 7월 그믐까지 같이 지냈으며,옥중 에서 일어난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이간난 아가타와 우술임 수산 나가 말로 다투었단 말은 듣지 못하였으며,옥중에서 겪는 모든 괴로움을 서로가 달게 받았고, 인내하며 잘 지낸 줄만 아옵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던 다블뤼는 이간난이 옥중 생활을 하는동안 배교의 유 혹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몇몇 이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한순간 목숨을 보존하려는 유혹을 받았고, 그때부터 고문 중에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았으나,두 교우가 격려로서 그녀를 일깨우자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을 감수하며 고통을 받아냈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시복 재판의 증인인 이글라라도 비슷한 증언을 하였다.
이간난 아가타는 체포된 후 포청에서 고문의 형벌이 고통스러워 배교의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같이 체포된 김임이 데레사가 이간난 아가타에게 말하기를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을 잘 참아 받자’며, 알아듣게 일러 주었다. 그래서 이간난 아가타는 그 덕을 입어 형벌들을 잘 인내하며 참아 받았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순교를 잘했다.
시복 재판의 증인인 김 가타리나는 이간난과 우술임이 함께 치도곤(治盜楊)과 다른 형벌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70 그 후 포교들은 이 간난과 우 술임, 그리고 갇혀있는 다른 교우들을 같 은 날에 감옥에서 장살(杖殺)하였다.71 그 후 포졸 혹은 포청의 하인들이 옥에서 죽은 여자 신자들의 시신을 광희문 밖에다 내다 버렸다.
시복 재판의 증인인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에 의하면, 이간난의 시신은 그녀의 부친이 광희문 밖에 가서 찾아낸 후 장사를 지냈다고한다.
이간난의 동생이자, 시복재판의 증인인 이 이사벨라의 증언에 의하면 이간난의 시신을 찾았을 때,‘시신은 온전하고,얼굴이 곱고, 의복까지 멀쩡했다’는 말을 당시 장사를 지내던 사람에게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 이간난을 염습(強襲)할 때 입힐 의복을 가지고 갔지만,입고 있던 의복이 깨끗해서 도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 후에 이간난의 시신은 본가(本家)에서 찾아 노고산[老姑山1에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시복재판 증인인 이 이사벨라는 당시 이간난의 시신을 찾았던 사람들에게서 ‘이간난 아가타에게는 목을 맨 흔적이 없어서,몽둥이로 매 맞아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또한 같은 날 죽은 우술임과 정철염은 목을 맨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진술은 그것을 직접 본 목격자들의 진술로서 이들의 시신을 장사 지내준 최(崔)회장에게 직접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간난의 가족들 대부분은 비신자였고, 직계가족들이 천주교 신자들과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교한 이간난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