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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집(梅月堂集) 김시습(金時習)생년1435년(세종 17)몰년1493년(성종 24)자열경(悅卿)호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峯), 청한자(淸寒子)본관강릉(江陵)법명설잠(雪岑)시호청간(淸簡)특기사항남효온(南孝溫)ㆍ안응세(安應世)ㆍ홍유손(洪裕孫) 등과 교유
梅月堂詩集卷之七 / 詩○山居集句
山居集句 百首
其六十三
山屐經過滿逕蹤。薛能 掉頭歸去又乘風。韓▦ 白雲可是無拘束。▦龍▦ 一片西飛一片東。王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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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봉집(大峯集) 양희지(楊熙止)생년1439년(세종 21)몰년1504년(연산군 10)자가행(可行), 정보(楨父)호대봉(大峯)본관중화(中和)
大峯先生文集卷之一 / 詩
次漾碧堂韻 堂在聞慶
小堂開絶勝。太守有英稱。地勢東南坼。天光上下澄。鄕愁聞細雨。世事對孤燈。欲和楣間句。提毫愧薛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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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집(順菴集) 안정복(安鼎福)생년1712년(숙종 38)몰년1791년(정조 15)자백순(百順)호순암(順菴), 한산병은(漢山病隱), 우이자(虞夷子), 상헌(橡軒)본관광주(廣州)봉호광성군(廣成君)시호문숙(文肅)특기사항이익(李瀷)의 문인. 실학자(實學者)
順菴先生文集卷之一 / 詩
讀薛能詩有感 並序
能詩曰。當時諸葛成何事。只合終身作卧龍。譏諸葛不能成功而死也。王安石晩來常誦此句。盖安石行新法時。斥排君子。引用小人。卒爲小人所陷。退居金陵。故引此詩。以自况而喜誦之也。然其言實非也。諸葛之不能恢復。亦必自知明矣。然國賊不可以不討。一縷未絶。此心不已。其言曰鞠躬盡瘁。死而後已。君臣大義。固可爲萬世人臣之柯則也。能也一詩人。烏知此義哉。感而爲一絶。以破世人之主此議者。
成敗論人失正平。要看大節施譏評。莫言諸葛成何事。直揭彛倫萬古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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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집 별집 제7권 / 연보(年譜)
우복(愚伏) 정 선생(鄭先生) 연보
갑인(1614) 만력 42년 광해 6년
○ 선생의 나이 52세였다.
○ 향교의 사자(士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 그 편지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새벽에 일어나 병이 조금 나았기에 시권(詩卷)을 펼쳐 보니, ‘남양에서 늙어 죽는 것 그르지는 않았으리.〔老死南陽未必非〕’라는 시구(詩句)를 시제(詩題)로 삼았는데, 이것이 누구의 시구인지 모르겠네. 설능(薛能)의 시에 ‘당시에 제갈이 무슨 일을 이루었나, 와룡으로 일생 마쳤으면 좋았을 것을.〔當時諸葛成何事 只合終身作臥龍〕’이라는 시구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시인이 경박하여 의리의 시비는 돌아보지 않고 신기한 말만을 쓰기 좋아하여 함부로 전인(前人)을 논한 죄에 빠진 것이네. 그러므로 선유들 대부분이 이를 비평하여 명교(名敎)에 죄를 얻었다고까지 하였네.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출처가 이윤(伊尹)과 비슷하였으나, 그가 한실(漢室)을 부흥시키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니, 공명은 미리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었네. 그러므로 그는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라를 위해 마음과 힘을 다해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고,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유리하냐 불리하냐에 대해서는 신의 지혜로 미리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공자(孔子)가 말씀하신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소득을 계산하지 않는다.〔先難後獲〕’라는 것과, 동중서(董仲舒)가 말한 ‘그 의만을 바르게 행하고 그 이익은 꾀하지 않는다.〔正其誼不謀其利〕’라는 것을 안 고견이었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노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이어 눈물을 흘리게 하네.
나는 항상 한(漢)을 부흥시키지 못한 것을 가지고 공명을 비난하는 자는 잔인한 사람이 아니면 남을 질투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네. 소열(昭烈 유비(劉備))이 정성을 다해 공명의 집을 세 번씩이나 찾아갔는데도 공명이 나오지 않았다면, 이 역시 하나의 양주(楊朱)일 뿐이니 어찌 공명이 될 수 있었겠는가. 한번 나와서 한(漢)과 적(賊 조조(曹操)의 위(魏)를 이름)은 양립할 수 없다는 대의(大義)를 밝혀 만고의 강상(綱常)을 붙잡아 세웠으니, 그 수립한 공이 어떠하였는가. 그런데도 성패를 가지고 영웅을 논하는 자들이 다투어 일어나서 공명을 논하니, 고루하기 그지없네. 근세에 어떤 사람이 경연에서 진언하기를, ‘융중(隆中 제갈량이 은거했던 곳)에서 늙어 죽어 천하의 후세 사람들에게 제갈공명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게 하는 것이 옳았다고 하는 것은 단지 크게 떠벌리는 처사의 말과 자신만을 생각하는 노장(老莊)의 견해일 뿐이니 정론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지금 여러 편의 시를 보건대 ‘가볍게 나왔다.’라고도 하고, ‘부질없이 죽었다.’라고도 하고, ‘융중에서 늙어 죽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라고도 하였으니, 제군 역시 너무 잔인한 사람들이네.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니, 말을 아름답게 꾸민다는 핑계로 이렇게 입론(立論 견해나 주장을 세움)해서는 안 되네.” -
先生年五十二歲。○春。訪喚仙亭。有一絶云。松間畫閣出雲衢。蓬島飛仙定可呼。酒醒夜深揮燭退。坐看晴月滿平湖。 ○遊金剛山。有遊山諸作 ○冬。與方伯尹 缺 書。論荒政。○與庠中士子書。書略曰。晨起病少蘇。爲劈詩卷。則詩以老死南陽未必非爲題。未知此是何人詩句。薛能詩曰。當時諸葛成何事。只合終身作臥龍。此是詩人輕薄。不顧義理是非。但喜語意新奇。自陷於妄論之罪。故先儒多評之。至以爲得罪名敎。夫孔明出處。略與伊尹相似。其不能興隆漢室。天也。非孔明之所可逆料。是以其自言曰。鞠躬盡瘁。死而後已。成敗利鈍。非臣之明所能逆覩。此是先難後獲。正誼不謀利之見。讀之令人不覺擊節。而繼之以隕淚。愚常以爲凡以此疵議孔明者。非忍人則媢嫉人也。昭烈三顧之勤。而孔明不出。則是亦一楊朱而已。何足爲孔明耶。一出而明漢賊之大義。扶萬古之綱常。其所樹立爲如何。而以成敗論英雄者。爭起而論之。陋哉陋哉。近世有進言於經席曰。老死隆中。使天下後世。不知有諸葛孔明可也。是特處士夸大之言。老莊自私之見。非正論也。今見諸作。或曰輕出。或曰徒死。或曰恨不老死。諸君亦太忍矣。詩。言志。不可諉之詞華而如此立論也。 ○草文巖書院上樑文。院在春川府。享退溪先生。爲府伯申公湜作。 ○與諸生講家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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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莊館全書卷之六十三 完山李德懋懋官著男光葵奉杲編輯德水李畹秀蕙隣校訂 / [天涯知己書]
天涯知己書
蘭公曰。武侯。陳壽譏其不知兵法。八陳圖。何益于事。細思之。武侯實未敵魏武一鋒。祭風之說。後人好事爲之。馬謖之敗。由于武侯。正不得以爲三代下第一大人物。而遂人云亦云也。
炯菴曰。徐世溥作武侯無成論。譏斥太甚。薛能詩曰。當年諸葛成何事。只合終身作卧龍。徐晩年死於盜。薛及於周岌之難。人以爲皆口業之報。蘭公盍少商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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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莊館全書卷之五十六 完山李德懋懋官著男光葵奉杲編輯德水李畹秀蕙隣校訂 / 盎葉記[三]
諸葛武侯
抱朴子曰。魏武帝嚴刑峻法。果於殺戮。乃心欲用乎諸葛孔明。孔明自陳不樂出身。武帝謝遣之曰。義不使高世之士。辱於汚君之朝也。案此雖不出於史傳。而葛稚川。距諸葛不遠。其言可信。孔明之出處。千古一人。操亦能知孔明心事。 張南軒曰。卽侯行事而觀之。絶姑息之私意。本常理之大公。聽言猶恐不及。見善若出諸己。侯於斯世。所欲不存。身都將相三十年間。一國之柄。擧出其手。而人不知其有權。或謂侯勸照烈取荊州。爲不義。不知劉琮旣已迎降於操。則荊州固魏之荊州矣。于以取之。豈不正乎。榕村李光地曰。或疑武侯規取荊益。爲兼幷之謀。非王佐之道。短於用兵。淹歷年歲。非王佐之才。曰此鄙儒之論。非識經權之體者也。璋表以枝葉之親。上無周公定國之規。下無晉文勤王之擧。而攘據巴西。觀望江表。僭擬擅專。坐自貴大。此爲輔亂之徒。宜伏管蔡鄭衛之誅者矣。先主時方寄食衰樊。衆不盈旅。名義威力。兩有未便。然因琮瑁之亂。將擧國附賦。聲而討之。未負於信。旣得荊州。結兵拒魏。正名西征。兼弱攻昧。未損於權。及乎先主托孫之盟已堅。而棄荊土於前。法正,張松之謀旣行。而覆西州於後。遂使江東求地。有所執言。成都攻圍。未免遺議。此則時事之變。非武候之本啚也。奇謀爲短。此陳壽之言也。夫興大業者。無近功。志王道者。絶小利。若襲韓彭之餘策。事攻取之急謀。以暴易暴而助亂畧。多殺不辜而得天下。事雖成。其本蹶矣。○案榕村之言。發揮孔明正大處。令人快絶。 楊升菴曰。昭烈於十六年冬。從劉璋之迎。而擊張魯。是時。孔明留守荊州。至明年。乃至葭萌據涪。出正之計。昭烈亦強忍從之。若使孔明在。擧措當不如此。今以取劉璋。爲孔明病。葢亦未知考也。升菴又云老泉謂孔明棄荊州而就巴蜀。吾知其無能爲也。然不考孔明艸廬見先主之言。已云。則荊州用武之地。棄而不取。乃先主之失。以此病孔明。不亦誤乎。○案升菴所謂若使孔明在。擧措。當不如此云云。此太回護。反不如南軒榕村說之爲公正。 又曰。兪豹論孔明忠于玄德而非忠於漢献。以漢献尙在而玄德之立。爲不當也。此說謬矣。習鑿齒曰。惠公朝秦。而子圉以立。更始猶存。而光武擧號。先主合議討賊。是宜速尊。以奉大統。民欣反正。出覩舊物。可謂識時之卓見。豹葢亦未嘗見此論也。王阮亭曰。新建
徐世溥作武侯無成論云。諸葛之出師。卽周公居東之志也。其盡瘁而無成功。則昭烈如其不才。卿可自取一言。酖之也。斯言也。昭烈之疑忌盡見。生平深險畢露。非惟昭烈不知孔明。孔明亦不知昭烈甚矣。被以飛。羽旣歿。老宿無人。嗣子冲愚。而亮以良平之才。據伊周之地。一朝之後。
有蜀者。未知爲劉民否也。故若示以開心。見誠而宲。豫防逆折。予讀之該然。世溥何人。而敢汚衊先賢如此。
薛能詩。當年諸葛成何事。只合終身作臥龍。及周岌之難。人以爲口業之報。
該聞錄云。薛能從事西川。每短諸葛功業厚誣之。見于詩。不一而足。竟不免許州之禍。世溥晩死於盜。安知非口業報之哉。 袁孝若曰。攝一國之政事。凡庸之君。專權而不失禮。行君事而國人不疑。行法嚴而國人悅服。用民盡其力而下不㤪。及其兵出入如賓。行者不冠。芻蕘者不獵。如在國中。其用兵也。止如山。進退如風雨。天下震動而人心不憂。亮死至今數十年。國人歌思。如周人之思召公也。法令明。賞罰信。士卒用命。赴險不顧。帥數萬之衆。其所興造。若數十萬之功。所至。營壘井竈圊溷藩籬障塞。皆應繩墨。一月之行。去之如始。至蜀人輕銳。故堅用之。治實而不治名。志大而所欲遠。好治官府次舍橋梁道路。小國賢才小。故欲其尊嚴。田疇辟。倉廩宲。器械利。蓄積饒。朝會不華。路無醉人。本立故末治。有餘力而及小事。此所以勸其功也。亮持本者也。其於應變。則非所長。故不敢用其短。安可以備體責也。張南軒曰。予每恨陳壽私且陋。凡矦經畧次第與夫燭幽消患。治國用人馭軍行師之要。悉闇而不彰。幸雜見於宅傳及裴松之所注。因裒而集之。不敢餙辭以忘其宲。○楊升菴曰。宋儒論孔明爲後主。寫申韓管子六鞱曰。孔明不以經子。輔導少主。乃以刑名兵法可耶。吾子西云。人君不問撥亂守文。要以制畧爲貴。後主寬厚。襟量有餘。權畧智謀不足。當時識者。咸以爲憂。六鞱述兵權多奇計。管子責輕重愼權衡。申子覈名宲。韓子攻事情。施之後主。正中其病。藥無高下。要在對病。此言當矣。予又觀古文苑。載先主臨終。勅後主曰。申韓之書。益人意智。可觀諱之。三國志。戰孟孝裕問卻正太子情尙。正以處恭仁恕答之。孝裕曰。如君所道。皆家門所有耳。吾今所問。欲知其權畧知調何如耳。然則孝裕之見與孔明合。而後主之觀申韓書。亦先主遺命也。獨以是病孔明。不惟不成人之美。亦不識時務矣。○案治亂國。不得不用峻法。袁子之論。去孔明不遠。故其所道井井規度。宛如昨日。而其曰應變非所長。葢亦拾陳壽之餘論。而不識孔明者也。升菴之論。明白可感。
[주-D001] 華 : 華似譁[주-D002] 吾 : 吾似唐[주-D003] 戰 : 載[주-D004] 調 : 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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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知爲劉民민否也。故若示以開心。見誠而宲。豫防逆折。-> 未知爲劉氏씨否也。故若示以開心見誠。而宲豫防逆折。
*번역과 원문구두는 맞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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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전서 제56권 / 앙엽기 3(盎葉記三)
제갈 무후(諸葛武侯)
《포박자(抱朴子)》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위 무제(魏武帝)가 엄한 형벌과 가혹한 법으로 과감하게 살육(殺戮)을 자행했으나, 마음속으로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명이 스스로 출신(出身)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고 진술하니 무제가 사례하고 보내면서 ‘의리상 고세(高世)의 선비로 하여금 오군(汚君)의 조정에서 욕보게 할 수 없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이것이 비록 사전(史傳)에 나온 것은 아니지만 갈치천(葛稚川 치천은 갈 홍(葛洪)의 자)과 제갈 무후와의 세대가 멀지 않으니 그 말이 믿을 만하다. 그리고 공명(孔明)의 출처(出處)는 천고(千古)에 단 한 사람일 뿐이니, 조조(曹操)도 공명(孔明)의 심사(心事)를 알고 있었다.
장남헌(張南軒 남헌은 장식(張栻)의 호)은 이렇게 말하였다.
“무후(武侯)의 행적으로 관찰해보면 그는 고식적(姑息的)인 사의(私意)를 끊고 상리적(常理的)인 대공(大公)을 근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말은 미처 못다 들을 것처럼 두려워하였고 착한 일을 보면 자기가 한 것처럼 여겼다. 무후는 이 세상을 살면서 마음속에 일신을 위한 욕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30년 동안 장상(將相) 지위에 있으면서 일국의 권병(權柄)을 모두 수중에 쥐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권세가 있는지를 몰랐다.
어떤 사람은 ‘무후가 소열황제(昭烈皇帝)를 권하여 형주(荊州)를 탈취하게 한 것은 의(義)롭지 못하다.’ 한다. 그러나 이는 유종(劉琮)이 이미 조조에게 항복하였으니 형주는 으레 위(魏) 나라의 땅이라는 것을 모르는 말이다. 취한 것이 정당하지 않을 게 뭔가?”
용촌(榕村) 이광지(李光地)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무후가 형주ㆍ익주(益州)를 엿보아 탈취하였으니, 겸병(兼幷)의 모책은 될지언정 왕좌(王佐)의 도는 아니다. 또 용병술(用兵術)이 모자라 세월만 허비했으니 왕좌의 재능이 아니다.’라고 의심하는데, 이는 비루한 선비의 의논으로 경법(經法)과 권도(權道)의 체(體)를 모르는 자의 말이다. 그때 유장(劉璋)과 유표(劉表)는 한(漢) 나라의 지엽(枝葉)의 친족으로, 위로는 주공(周公)처럼 나라를 안정시킬 방법도 없고 아래로는 진 문공(晉文公)처럼 근왕(勤王)하는 거조도 없었다. 단지 파서(巴西)에 웅거하여 강좌(江左)의 사태만 관망하며 참람하게 멋대로 권세를 부리면서 부질없이 스스로 귀대(貴大)한 체하였으니, 이들은 난(亂)을 돕는 무리였을 뿐이다. 따라서 관숙(管叔)ㆍ채숙(蔡叔)과 정(鄭) 나라의 공숙단(公叔段), 위(衛)의 주우(州吁)처럼 복주(伏誅)되어야 마땅한 자들이다.
선주(先主 소열제(昭烈帝)는 그때 양양(襄陽)과 번성(樊城)에 기식(寄食)하고 있던 형편으로 거느린 군사는 1여(旅 5백명)도 되지 않았으니, 명의(名義)와 위력(威力)이 모두 편치 못한 처지였다. 그러나 유종(劉琮)과 채모(蔡瑁)가 나라를 들어서 도적에게 항복하려 하자 그 무도함을 천하에 공포하고 토벌하였느니, 신의(信義)에도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이미 형주(荊州)를 얻고 나서는 군사를 결속하여 위(魏)를 막고 명분을 바루어 서촉(西蜀)을 정벌하여 약(弱)한 자를 겸병하고 흔암한 자를 쳤으니. 권도(權道)에도 손상되지 않았다.
그리고 앞서는, 선주가 손권(孫權)과 결탁하여 굳게 맹세할 적에 이르러서는 형주 땅을 포기하겠다고 한 일이 있었고, 뒤에는 법정(法正)ㆍ장송(張松)의 꾀가 이미 실행됨에 이르자 서주(西州)를 복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강동(江東)으로 하여금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꼬투리를 만들어 주었으며, 성도(成都)를 친 것은 후세의 의논을 면할 수 없는 처사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 사세의 변화가 그랬던 것이지 무후(武侯)가 본래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기모(奇謀)로 단점을 삼는 것은 바로 진수(陳壽)의 말이다.
대저 대업(大業)을 일으키는 자는 공(功)을 힘쓰지 않는 것이며 왕도(王道)에 뜻을 둔 자는 작은 이(利)를 끊는 것이다. 만약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의 여책(餘策)을 인습하여 공취(攻取)하기에 급급한 꾀를 일삼아서 포악으로 포악을 바꾸고 어지러운 모략을 조장하여 죄없는 백성을 많이 죽여가며 천하를 얻는 것은, 일이 비록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근본은 어그러진 것이다.” 하였다.
○ 상고하건대, 용촌(榕村)의 말이 공명(孔明)의 정대(正大)한 점을 발휘(發揮)해 주어 사람으로 하여금 상쾌하게 해주었다.
양승암(楊升菴 승암은 양신(楊愼)의 호)은 이렇게 말하였다.
“한(漢) 나라 소열황제(昭烈皇帝)가 후한(後漢) 헌제(獻帝) 16년(211) 겨울 유장(劉璋)의 영접에 따라 장노(張魯)를 쳤는데, 이때 공명(孔明)은 형주(荊州)를 유수(留守)하고 있었다. 그 다음해에 이르러 가맹(葭萌)에 가서 부(涪)에 웅거하여 정벌할 계책을 세우고 소열이 그 계책을 힘써 따랐으니, 만약 공명이 있었다면 거조(擧措)가 마땅히 이와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유장을 취한 것을 공명의 잘못으로 여기고 있으니, 대개 상고할 줄 모른 탓이다.”
승암(升菴)이 또 “노천(老泉 소 순(蘇洵)의 호)이 ‘공명(孔明)이 형주를 버리고 파촉(巴蜀)으로 나아갔으니 나는 그가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였다. 그러나 이는 공명이 초려(草廬)에서 선주(先主)를 뵙고 말한 것을 상고하지 않고 한 말이다. 공명이 이미 ‘형주는 용무(用武)할 땅입니다.’ 하였으니, 버리고 취하지 않는 것은 곧 선주의 실수이다. 그런데 이것을 공명의 흠으로 여겼으니 또한 잘못이 아닌가?” 하였다.
○ 상고하건대, 승암이 이른바 “만약 공명이 있었더라면 거조가 마땅히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 ” 한 것은 너무나 공명을 회호(回護)한 것이다. 도리어 장남헌(張南軒)과 이용촌(李榕村)의 말보다 공정(公正)하지 못하다.
양승암은 또 말하였다.
“유표(兪豹)가 논하기를 ‘공명이 현덕(玄德)에게는 충성을 하였으나, 한(漢) 나라 헌제(獻帝)에게는 충성이 아니었다. 헌제가 아직 존재하고 있는데 현덕이 즉위(卽位)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은 잘못이다. 습착치(習鑿齒)가 ‘혜공(惠公)이 진(秦) 나라에 조회하자 자어(子圉)가 즉위했고, 경시(更始)가 아직 살아 있는데 광무(光武)가 황제의 호칭을 거행하였다. 그렇다면 선주는 의논에 맞추어 도적을 토벌했으니, 이는 마땅히 속히 존위에 올라 대통(大統)을 이음이 당연하다. 따라서 백성들이 반정(反正)을 기쁘게 여겨 모두 나와서 다시 한 나라의 문물을 보게 하였으니, 시세를 안 탁월한 견해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유표는 대체로 일찍이 이 의논을 못보고 한 말이다.”
왕완정(王阮亭)이 말하기를 “신건(新建) 사람 서세부(徐世溥)가 무후무성론(武侯無成論)을 짓기를 ‘제갈량의 출사(出師)는 바로 주공(周公)이 동산(東山)에 거했던 때의 뜻과 같은 것으로 그가 몸이 지치도록 싸웠으나 공(功)을 이루지 못했다. 소열이 말한 「만약 후주가 재주가 없으면 경(卿)이 스스로 임금 노릇을 해도 괜찮다.」는 한 마디가 공명에게는 짐독(鴆毒)이었다. 이 한 마디에서 소열의 의심하고 꺼리는 속마음이 다 드러난 것이며 평소의 음험하던 마음이 죄다 폭로된 것이다. 따라서 소열만이 제갈공명의 뜻을 모른 것이 아니라 공명도 소열의 뜻을 모른 것이다. 소열에게는 장비(張飛)와 관우(關羽)가 이미 죽었으므로 노숙(老宿)한 사람이 없는 데다가 사자(嗣子)는 어리고 미련하였다. 그런데 제갈량은 장량(張良)과 진평(陳平) 같은 재능으로 이윤(伊尹)과 주공 같은 지위에 올라 있었으니, 선주가 세상을 버린 뒤에는 촉(蜀)을 소유할 자는 유씨(劉氏)가 아닐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어 정성을 나타낸 것같이 하였으나 사실은 역성의 변(變)을 미리 끊어 놓은 것이다.’ 하였다. 나는 이 무후무성론을 읽고 놀랍기 그지없었다. 대체로 세부(世溥)란 어떤 사람이기에 선현(先賢)을 이 같이 능멸할 수 있단 말인가. 설능(薛能)의 시(詩)에,
그 당시 제갈량이 이룬 일이 무엇인가 / 當時諸葛成何事
다만 종신토록 와룡이나 되는 게 합당했을 걸 / 只合終身作臥龍
하였다가 주급(周岌)의 난(難)에 죽었는데,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한 업보(業報)이다.’ 하였다. 《해문록(該聞錄)》에 ‘설능이 서천(西川)에 종사(從事)할 때 매양 제갈량의 공업을 헐뜯고 턱없이 무고하였으며 시(詩)에 나타낸 것만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마침내 허주(許州)의 화(禍)를 면치 못한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세부는 만년에 도적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이것이 어찌 말을 함부로 한 업보가 아니겠는가.’ 했다.” 하였다.
원 효약(袁孝若)은 이렇게 말하였다.
“한 나라의 정치를 섭행하고 범상한 임금을 섬기면서 권병(權柄)을 오로지하였으나 예를 잃지 않았고, 임금의 일을 행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다. 법을 행함이 근엄하여 나라 사람들이 마음으로 기뻐하여 복종하였고 백성들의 힘을 쓰되 그들의 힘을 다하게 하였으나 아래에서 원망하지 않았다. 군사를 출동하여 적국에 갔을 때도 규율이 엄하여 행인이나 죄없는 사람들을 해치지 않기를 본국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용병(用兵)함에 있어서는 중지하면 산처럼 중엄했고 진퇴할 때는 풍우(風雨)와 같았으므로, 천하가 진동해도 인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갈량이 죽은 지가 지금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나라 사람들이 주(周) 나라 사람들이 소공(召公)을 그리듯 노래하며 사모하고 있다.
법령(法令)이 엄명하고 상벌(賞罰)이 미더웠으므로 사졸들이 명령에 복종하여 위험(危險)한 데에 달려가도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수만의 군대를 거느리고도 수십 만의 군대가 이룩한 공(功)을 세웠다. 가는 곳마다 영루(營壘)를 설치할 때는 우물ㆍ부엌ㆍ변소ㆍ울타리ㆍ장색(障塞)을 모두 법대로 만들었으므로 한 달 간 있다가 떠날 때도 처음과 같았다. 게다가 촉(蜀) 사람들은 용맹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부릴 수 있었다.
실(實)을 힘쓰고 명(名)을 힘쓰지 않았고, 뜻이 크고 바라는 것이 위대하여 관부(官府)ㆍ차사(次舍)ㆍ교량(橋梁)ㆍ도로(道路)를 잘 수리했으며, 소국(小國)은 어진 인재가 적기 때문에 존엄(尊嚴)하게 하고자 했다. 농지(農地)를 개간하고 창고를 가득채웠으며, 기계를 편리하게 수리하고 저축을 넉넉하게 했다. 따라서 조회(朝會)는 검소하게 하고 도로에는 술취한 사람이 없었다. 이와 같이 근본이 확립되었으므로 끝이 잘 다스려졌으며 여력(餘力)이 있은 뒤에 작은 일에 미쳤으니 이것이 바로 그의 공을 권장하게 되는 이유이다. 제갈량은 근본을 준행한 사람이었으므로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술책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감히 자신의 단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인데, 어찌 한몸에 구비하기를 요구할 수가 있겠는가?”
장남헌(張南軒 남헌은 장식(張栻)의 호)이 “나는 매양 진수(陳壽)의 삿됨과 고루함을 한스럽게 여긴다. 그는 무후(武侯)의 경략(經略)의 차제와 사전에 조짐을 알아 환란을 미연에 방지한 것,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을 등용한 것과 군대를 부리고 통제하던 요점은 모두 덮어두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다른 전기(傳記)와 배송지(裵松之)의 주(注)에 뒤섞여 나타난 사실이 있어서 주워모았는데, 감히 말을 수식함으로써 사실을 잊게 하지는 않았다.” 하였다.
○ 양승암(楊升菴)이 말하기를 “송(宋) 나라 선비들이 공명(孔明)이 후주(後主)를 위하여 《신자(申子)》ㆍ《한비자(韓非子)》ㆍ《관자(管子)》ㆍ《육도(六韜)》를 베껴서 가르친 일을 논박하기를 ‘공명이 경서(經書)로 어린 후주를 보도하여 인도하지 않고 곧 형명(刑名)과 병법(兵法)으로 후주를 인도하였으니 옳은 일인가?’ 하였다. 당자서(唐子西 자서는 당경(唐庚)의 자)는 말하기를 ‘임금은 발란(撥亂)할 때나 수문(守文)할 때를 불문하고 요컨대 제도(制度)와 경략(經略)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후주는 너그럽고 후하여 품은 도량은 유여(有餘)하였으나 권략(權略)과 지모(智謀)가 부족하였으므로 당시의 식자(識者)들은 모두 이를 우려하였다.《육도》는 병권(兵權)을 서술한 것이므로 기계(奇計)가 많고,《관자》는 경중(輕重)을 힐난한 것이므로 권형(權衡)을 삼갔고,《신자》는 명실(名實)을 규핵한 것이고,《한비자》는 사정(事情)을 다룬 것이다. 그런데 이를 후주에게 가르쳤으니 바로 후주의 병통에 알맞은 것이었다. 약(藥)이란 좋고 나쁜 것이 없는 것으로 요컨대 그 병증(病症)에 맞아야 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이 옳다.
내가 또《고문원(古文苑)》을 보니 ‘선주(先主)가 임종(臨終)할 때 후주에게 신칙하기를, 《신자(申子)》와 《한비자(韓非子)》같은 책은 사람의 뜻과 지혜를 보익하는 것으로 볼만한 책이기는 하나 기휘(忌諱)해야 한다고 했다.’ 하였으며, 《삼국지(三國志)》에는 ‘맹효유(孟孝裕)가 극정(郤正)에게 태자(太子)의 정상(情尙)에 대하여 물으니, 극정이「공손하고 인서(仁恕)하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효유(孝裕)가 「그대가 말한 바는 다 가문(家門)마다 있는 것이다. 내가 묻는 것은 태자의 권략(權略)과 지모(智謀)가 어떤지를 알려는 것이다.」했다.’ 하였다. 그렇다면 효유의 의견은 공명과 같았고, 후주가《신자》와 《한비자》를 보게 된 것도 선주의 유명(遺命)이었다. 그런데 유독 이것으로 공명을 헐뜯으니 이는 사람의 아름다운 일을 권장하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시무(時務)를 모른 소치이다.” 하였다.
○ 상고하건대, 난국(亂國)을 다스리는 데는 준엄한 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원자(袁子 원효약(袁孝若)을 말한다)의 의논이 공명(孔明)의 뜻과 멀지 않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바가 조리 정연하여 규도(規度)가 어제 일처럼 완연하다. 그러나 ‘임기 응변하는 것은 공명의 장기가 아니었다.’ 한 것은 대체로 진수(陳壽)의 여론(餘論)을 주워모은 것으로 공명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 따라서 승암(升菴)의 의논이 명백하여 감동할 만하다고 여겨진다.
[주-D001] 법정(法正)ㆍ장송(張松)의 꾀 : 법정과 장송은 삼국(三國) 때 촉한(蜀漢) 사람이다. 두 사람은 다 모책을 잘했는데, 처음에 유장(劉璋)을 섬길 적에 장(璋)을 달래어 선주(先主)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선주가 촉(蜀)에 들어가 결국 촉한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주-D002] 경시(更始)가 …… 거행하였다 : 경시는 한(漢) 나라 용릉 대후(舂陵戴侯)의 증손(曾孫) 현(玄)을 말하는데, 그는 평림병중(平林兵中)에 있으면서 경시 장군(更始將軍)이라 호(號)하였다. 그 후 신시(新市)ㆍ평림(平林)의 장군들에게 추대되어 황제(皇帝)의 자리에 올랐으나 위인이 용렬하여 군중의 여망(輿望)을 잃게 되었다. 그러자 유수(劉秀)가 제장들의 추대를 받아 호남(湖南)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을 이르는 말이다.[주-D003] 주공(周公)이 …… 거했던 : 주(周) 나라의 주공이 성왕(成王)을 섭정할 때 관숙(管叔)ㆍ채숙(蔡叔)의 유언(流言)에 의해 성왕에게 의심을 받아 3년 동안 동산(東山)의 정벌에 나가 있게 되었던 일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서세부(徐世溥)가, 무후(武侯)가 후주(後主)에게 오해를 받아 정벌(征伐)에 종사하게 되었다고 억측한 말이다.[주-D004] 설능(薛能) : 당(唐) 나라 분주(汾州) 사람으로 자는 대졸(大拙), 벼슬이 공부 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다. 시(詩)에 능하였다. 저서에는 《강산집(江山集)》이 있다.《唐書 卷201》
ⓒ 한국고전번역원 | 이승창 (역) |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