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입니다. 멧돼지 한 마리가 우주입니다. 그 속에 풀밭도 들었고, 산기슭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풀밭과 산기슭에 기대 사는 모든 생물들도 그 안에 다 있겠지요.
노루발, 뻐꾹채,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벌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 자연의 모든 것들입니다. 시인은 이런 것도 그냥 적지는 않지요. 순서를 그냥 정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산속 깊은 곳에 자라는 것에서부터 흔히 보이는 것까지. 그리고 마지막엔 '쇠별꽃'이라는 서정적 소리로 불리는 시어들을 가져옵니다.
멀리 가고 싶은 풀씨들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면 된다
제 몸에 눈 녹은 묵은 봄이 가려워 멧돼지는 부르르 온몸을 털어댈 터 씨앗들은 직파방식으로 파종될 것이다
멧돼지가 우주가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멧돼지 등에 올라탄 것들은 멧돼지를 매개로 해서 파종됩니다. 그것도 '직파 방식'으로 말이죠. 구체적입니다. 선명하고요.
북극의 스피츠베르겐섬에는 국제종자보관창고가 있다 먼 훗날의 구호(救護)를 위해 멧돼지 한마리 그 쉭쉭거리는 씨앗창고를 기르고 싶다
세부적인 정보까지도 시가 됩니다. 거기에 멧돼지를 기를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정말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이 산과 저 산 이쪽 풀밭과 저쪽 풀밭이라는 말 다 멧돼지의 등짝에서 떨어진 말일 것이다 그러니 너나들이로 섞이는 산 번지는 초록들은 멧돼지의 숨결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다
이 부분이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놓은 연입니다.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지 말고 소통하자는 말이지요. 굳이 좌와 우를 혹은 흑백으로 갈라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통합의 호소입니다. 이런 부분이 신춘문예에서 요구하는 요소가 아닐까요?
멧돼지 꼬리에서 반딧불이 날아오르고 꺼칠한 오해 속에서도 극지에서도 풀씨들은 움튼다
멧돼지 꼬리에서 희망이 싹틉니다. 화해와 소통도 다 이루어집니다.
시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시입니다. 사실 멧돼지는 골칫덩어리죠. 농민들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그런데 그런 멧돼지를 희망의 우주로 표현하는 시인이니, 시인의 역할은 이래야 한다고 일갈합니다. 사실 멧돼지는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원래 자기가 주인이었던 땅을 인간이 다 가져갔으니까요. 오늘 그로 인해 한없이 푸른 봄이 우주가 탄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