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래중위 전적기념물 건립위원회 기획팀장 63차 최승원이 보내는 이메일입니다.
해군OCS장교중앙회 홈페이지는 www.navyocs.kr 입니다.
글이 조금 길며 임병래선배님의 공식적인 자료와 국방일보 인터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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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병래 중위 공적 사항
제목 : 진짜 군인이며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임병래 중위
1) 임병래 중위는 누구인가?
임병래중위는 1922년1월27일 평안남도 평강군 다미면에서 임세근어른의 아들로 태어났다. 6.25전란중에 부산에서 자리는 잡는 바람에 본적은 경남 부산시 중앙동4가 28번지로 되어 있다. 평남 숭일상업고등학교를 거쳐 학도병으로 필리핀전선에 투입되어 작전 중 미군에 투항 귀순하여 첩보 임무를 수행하였다.
8.15해방 후 미 해군 첩보부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하다가 6.25전란 발발하기 전인 1950년 초 OCS 9기로 입교하여 혹독한 훈련을 거친 후 1950년4월20일 군번 80750 해군소위로 임관하였으며 해군 정보국 특수공작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던 중 6.25를 맞았다.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첩보활동을 인천 서울 수원 부천 지역에서 수행하였으며 최일선에서 작전한 임병래 중위의 첩보 수집 능력과 상황 판단은 탁월하였다.
1950.9.14 임병래 중위는 영흥도에서 동료와 부하 대원들을 먼저 탈출시키고 마지막까지 북한군과 싸우다가 중과부족으로 전사하였는데 보안을 위해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임병래 중위의 고귀한 희생으로 맥아더사령관조차도 성공확률 1/5.000 이라고 한 인천상륙작전이 사망 21명 부상 174명 실종 1명이라는 적은 희생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2) 영흥도 첩보작전 : 일명 x-ray 작전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을 준비하면서 필요한 정보 수집을 위해 미군 첩보부대를 투입할 것을 고려했으나 언어 장벽과 지리에 밝지 못한 점 등을 감안, 우리 해군 정보국에 이 임무를 일임했다.
미군의 요청을 받은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당시 해군 정보국장인 함명수 소령을 불러 극비리에 인천 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 수집 임무를 지시했다.
함명수 소령은 책임의 막중함을 절감하면서 비밀리에 자신을 포함, 김순기·장정택·임병래 등 정보장교와 김남규·정성원·박원풍·차성환·한유만·홍시욱 등 사병 6명, 민간인 7명을 첩보공작요원으로 선발했다.
이들이 부산항을 출발한 것은 8월18일 오전 1시. 미리 준비된 백구함에 승함, 보조선 수양산호와 함께 인천으로부터 남서쪽 12마일에 위치한 영흥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대원들 누구도 무엇을 위해 선발됐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아는 이는 없었다.
6일 뒤 목적지 근해에 이르러서야 함명수 소령은 임병래 소위를 포함한 대원들을 불러 임무와 활동 내용을 설명했다. 모두 긴장했으나 기필코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의지 또한 결연해 보였다.
이윽고 24일 오전 1시30분. 어둠 속에 백구함은 영흥도 북쪽 해안 십리포에 첩보대원들을 내려놓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영흥도는 해군 702함(함장 이희정 중령)을 비롯한 8척의 승조원으로 구성된 육전대가 20일 상륙작전을 감행, 탈환한 해군의 최전방기지였다.
함소령은 효과적인 임무 수행을 위해 대원들을 3개 조로 편성했고 정보분석조 외 김순기 중위조,·임병래 소위조에게 인천 등지로 잠입, 첩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인천은 당시 북한군 사단급 정규 병력이 주둔해 있었으며 각종 정보기관의 활동과 함께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었지만 임병래 소위 등 첩보요원들은 자신의 안위보다 국가의 안위 걱정하는 사명감으로 충만했다 .
인천 시내로 잠입한 대원들은 6·25전쟁 전 해군 정보국의 지하조직요원으로 활동했던 성명 미상의 김모·권모씨와 접선, 이들을 정보원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 중 김모씨는 북한군 보안서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적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일 뿐 실은 반공정신이 투철한 애국자였다. 임병래소위는 김씨 집에 유숙하면서 김씨를 통해 서울·수원 등지로 왕래할 수 있는 통행증까지 발급받아 폭 넓게 활동하였다.
인천에 거점을 확보한 임병래소위와 대원들은 인천 해안포대의 위치, 병력 배치 상황, 주둔병력의 규모 ·화력 등을 파악하기 시작했으며 바다에서는 인천 협수로에 설치된 기뢰의 위치와 수량도 파악했다. 특히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월미도와 해안방어태세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작업인부로 위장 현장에 침투하였으며, 월미도에 접근해 북한군 군관 2명을 납치, 상세한 정보를 획득했으며 그 정보를 직접 탐색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첩보대원들은 활동을 개시한 후 1주일이 지나면서 미처 철수하지 못한 상당수의 해군 정보국 지하조직을 찾아내고 새로운 공작원을 포섭하기도 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9월1일 영흥도에 은밀히 상륙한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국 소속 클라크 해군대위 팀을 통해 직접 맥아더사령관에게 송신됐다. 여기에는 해군 의용대를 조직하는 등 자치적으로 섬의 경비를 수행한 영흥도민들의 헌신적인 협조와 희생이 뒷받침됐다.
임병래 소위에 대한 일화로는 연락이 두절된 미국 정보원을 접촉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잠입하여 생존확인과 함께 광화문 연희동 일대를 첩보하기도 했다.
9월14일, 인천 상륙작전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낸 극동군사령부는 D-데이가 박두함에 따라 영흥도 첩보기지에 모든 임무를 끝내고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새벽 2시 철수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첩보대에 이웃 섬인 대부도로부터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로 기습 공격해 오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우선적으로 일부 대원이 영흥도를 빠져나갔고 임병래소위를 비롯한 해군 첩보대원 9명은 의용대원 30여 명과 함께 임소위의 지휘 아래 상륙하는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중과부적. 임병래소위와 홍시욱 3조는 십리포에 정박해 놓은 보트에 나머지 대원들을 태워 탈출시켰으나 본인들은 탈출하지 못하고 적에게 포위됐다.
홍시욱 3조는 계속 접근해 오는 적을 M1 소총으로 사살한 후 마지막 남은 한 발의 총탄으로 자결했다. 이어 임병래소위 역시 45구경 권총으로 침착하게 적 3명을 쓰러뜨린 후 자신의 이마에 권총을 쏴 자진하는 전사의 길을 택했다. 군사기밀은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므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던 것이다.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3조의 장렬한 자결로 산화로 인천상륙작전은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이였다.
미 정부는 53년 7월6일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3조 두 영웅에게 은성훈장을 수여했으며 한국 정부는 전사 후 3년이 지난 54년 1월4일 인천상륙작전에서의 공로로 을지무공훈장 추서와 함께 각각 중위와 2등병조로 1계급씩 특진됐다.
3) 사후의 평가 및 임병래 중위 희생의 가치는?
6.25전란의 전환을 위해 맥아도사령과 조차도 성공확율 1/5,000 이라고 한 모험적인 인천상륙작전에서 전사 21명, 부상 174명, 실종 1명이라는 미미한 희생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임병래 중위의 살신성인과 희생정신이 바탕이 되였다.
임병래 중위는 전쟁기념사업회과 인천보훈지청에서 선정한 이달의 호국인물로 2회 선정되었으며, 미국 은성훈장(53.7.6), 한국 을지무공훈장(54.1.4) 충무무공훈장(51.2.5)을 수훈했다.
2. 김동건회장 인터뷰 기사
제목 ; 숨은 영웅을 살려낸 또 다른 영웅
1) 인사말
유호상팀장 : 해군 예비역들이 성금을 모아 인천상륙작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고임병래중위(이하 임중위 라 칭함)의 동상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하고 꼭 취재하고 싶었습니다. 해군OCS장교중앙회 김동건회장님과 조장현부회장님께서 함께 인터뷰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동건회장 : 임병래중위의 전적기념물 건립 사업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국호위원장은 회사에 출근하여 조장현부회장과 함께 임중위에 대해 존경과 애도의 마음을 올립니다. 특히 이번 사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시는 김성찬 해군참모창이하 현직 해군 지휘부 와 제7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하신 함명수총장님 등 여러분의 총장님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조장현부회장 : 취재를 기획하여 임중위를 알리는 홍보하는 계기가 되어 기쁩니다.
2) 사업 배경
(유) : 모금을 한다는 힘든 일인데 전적기념물 건립 동기 즉 왜 이런 훌륭한 사업을 벌이게 되었습니까?
(김) : 한마디로 애국심과 사회 책임 즉 노블리스 오브리제의 발로라고 보시면 됩니다. 처음에 임중위에 대한 말만 듣고 자료를 조금 보니 가슴이 뜨거워 졌습니다. 숨겨진 알려지지 않은 임중위를 세상에 널리 알리어 후배들과 일반들의 정신적 지주로 맨토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6.26북침과 천안함 좌초설 등 말도 안되는 유언비어를 믿고 입에 올리는 종북주의적 세태를 보면서, 민족정기를 확립하고 애국 애족을 몸으로 실천하며 옥고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현충원에 묻힌 많은 의사와 열사들의 충혼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에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장렬히 산화한 임중위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오늘을 사는 한 지성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오브리제라고 생각했습니다.
** 노블리스 오브리제 : 서양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귀족이 제일 먼저 전쟁의 선두에 선다는 뜻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현재의 국가적 환경적 보호에 감사하며 자기 자리에서 누리는 혜택에 대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말임.
(유) : 말씀 중에 종북주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종북주의에 대한 정의랄까 현 세태와 비교해서 한마디 해주시겠습니까?
김 : 단어 그대로 맹목적으로 북한을 동경하고 지지하며 대한민국을 위해하려는 세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더 나아가 북한은 현대사에서는 볼 수 없는 3대째 정권 세습을 하려고 하는데 북한에 대해 잘한다고 박수치는 무리를 박수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제 이름이 “민주” 즉 “김민주”라고 합시다. 내 이름이 민주라고 제가 민주주의자입니까? 법조인으로서 이야기 하면 민주주의는 법에 맞는 절차를 따르고 법에 정해진 데로 책임과 권리를 누리는 것입니다. 북한은 자칭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영어 약자로 DPRK라고 쓰는데 여기서 D는 democracy 즉 민주주의를 나타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 세습이란 없습니다. 세습을 하려면 D를 쓰지말고 kingdom의 K를 써야지요. 종복에서 조금 벗어나 옆길로 빠졌지만 북한의 인권 등 비윤리적인 면은 말도 못하면서 북한을 이용해 북한을 팔아 자기 이익을 꾀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해하려는 세력을 종복주의로 지칭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유) : 임중위 전적기념물 건립의 원칙이랄까 건립의 방법론 같은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 : 큰 원칙은 개인적인 후원금을 근거로 하고 싶습니다. 즉 정부나 해군 예산이 참여한다 해도 많은 참여자들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이지요. 저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를 바라며 그 것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참여의 넓히고자 1구좌를 5만원으로 했으며 자유와 민주를 지향하며 발전하는 대한민국을 원하는 국민들이라면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임중위의 후배인 해군장교후보생(OCS : Officer candidate School) 출신 현역과 예비역 장교들은 반드시 1구좌 이상 참여하여 선배에 대한 추모와 예를 다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 참여를 의무감 즉 오브리제로 생각하여 본인은 물론 수직적 수평적으로 선후배와 동료 등에게 권유하여 참여의 미덕이 만개했으면 좋겠습니다.
조 : 제가 부연해서 말씀드리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 민주주의를 사랑하시는 분들이라면 아무나 후원에 참여하셔도 상관없습니다.
3) 발의
(유) : 말씀을 듣다가 보니 제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좋은 전적기념물이 건립되리라 믿습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하게 되셨습니까?
(조) : 그 것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2009년5월28일 손원일제독 아록비 제막식 후 진해 속천의 한 식당에서 저녁 식사 중 김동건회장님께서 임중위를 소개하시면서 기념물의 필요성을 강조 하셨습니다. 이에 많은 참석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하여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2009년정기총회에서 임병래중위기념비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48차 김국호동문이 위원장을 맡아 수고해주시고 있습니다.
4) 장소에 대한 의견
(유) : 그렇다면 임중위 전적기념물을 어디다 설치하려고 합니까?
(김) : 대한민국의 정통성 유지에 대한 희생과 6.25의 실상 및 참상을 알려 후세들에게 반공 교육과 북한에서 이야기 하는 선군 정치의 허상을 알리기 위해 광화문 한복판에 세우고 싶지만 그것은 대한민국 정부에 맡기고, 이번 임중위 전적기념물 사업은 해군장교의 산실인 진해 해군사관학교 안에 설치하려고 합니다. 시대가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교육도 시설 위주에서 정신과 지식적인 면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즉 hardware에서 software 위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해군입장에서 본다면 해군의 아버지라 지칭되는 손원일제독과 함께 존경받을 만한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군인의 덕목 중에 한부분인 희생정신과 책임감, 애국심 등을 감안할 때 임중위는 해군의 간성을 육성하는데 귀감이 될 것입니다. 임중위의 가치는 미국의 은성훈장(silver star)과 한국의 을지무공훈장이 증명하지요. 따라서 정훈적 차원에서 대한민국의 건강한 군인을 길러낸다는 차원에서 해군장교 후배들의 교육장인 해군사관학교가 적합한 장소라 생각됩니다.
(조) : 장소는 중요합니다. 현대적 교육의 방향이 귀로 듣는 교육에서 시각적 감성적인 터치(touch)를 통하여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므로 접근성이 좋은 곳이 좋겠지요.
5) 공적의 평가
(유) : 임중위의 공적을 평가하시면서 교훈이 될만한 점을 말씀해주기겠습니까?
(김) : 임중위의 공적은 미국 은성훈장과 을지무공훈장에서 볼 수 있듯이 첩보의 질과 군인정신 면에서 탁월했습니다.
해군에서 이인호소령 지덕칠중사와 비교해서 본다면 앞에서 언급한 두 분과 같이 희생정신 책임감 솔선수범 용맹성 등에서 탁월한 군인이었습니다.
제가 앞에서 언급한 두 분보다 높게 평가하고 싶은 것은 영흥도에서 북한군의 대규모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아 동료들을 먼저 피신시키면서 방어적 전투를 하다가 중과부족으로 마지막에 임중위 본인은 보안을 위해 권총으로 자결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보안성에 대한 점수를 따로 주고 싶습니다. 맥아더장군 조차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을 1/5,000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어려운 상륙작전에서 전사 21명, 부상 174녕, 실종 1명이라는 미미한 희생으로 성공한 것은 임중위 수행한 첩보의 질이 정확하고 탁월했으며 그 위에 철통같은 보안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포로가 되어 모진 고문 끝에 인천상룩작전을 토설이라도 하여 북한군이 증원과 부대 재편 등의 작전을 보완했다면 아군의 희생은 10배 100배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인천상룩작전의 훌륭한 성공은 임중위와 같은 영웅들의 희생이라 생각합니다. 인천상륙작전 60주년을 맞아 잘 알려지지 않은 임중위와 같은 영웅들을 들추어내 교육의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합니다.
6) 천안함 사태 때 OCS가 한 일은 무엇이며 향후 해군을 위해 할 일은?
(유) : 회장의 애국심과 오브리제의 충정을 들으니 가슴이 뭉클해지며 온 몸에 전율이 오는 감동이 생깁니다. 천안함 사태 때 OCS가 한 일은 무엇이며 향후 해군을 위해 할 일은 무었입니까?
(김) : 각 계 각 층 다양한 분야에서 해군을 대변하는 일을 했지요. 말도 안되는 좌초설, 미국 잠수함 충동설 등등 인터넷에 유포되며 그것을 믿는 국민들을 겨냥해 정확한 바다의 경영, 해상사고의 역사성 등을 열거하며 논리로서 해괴한 망언에 대항했지요. 예를 든다면 미해군잔수함과 천안함 충돌해 침몰했다는 인터넷 괴기사 때도 “바다에서는 예인하는데 8노트이상이면 안전사고 위험이 있어 저속으로 가는데 화와이까지 가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얼마인데 벌써 도크에서 수리하느냐?” 하면서 해군을 옹호했습니다.
또 46명이라는 많은 희생에 대해 해군의 무능함을 질타하는 언론에 대해 “해상사고에 대해 모르면 가만했어라 한 밤에 어뢰에 의해 배가 두 동강이 나면 다 축는 것이다. 생존자가 있었다는 것은 해군이 훈련을 통해 상황에 잘 대처했다는 증거다. 생존자들을 죄인시 하며는 안되며 생존자들도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타이타닉호가 그렇게 서서히 침몰하면서 얼마나 많은 인원이 죽었는지 아는가? 어뢰에 배가 침몰하면서 전원 수장된 경우는 2차세계대전에서도 많이 있었다.”며 해군의 적정성을 알렸지요..
건별 대응은 즉흥적으로 많이 대응했으며 일부에서는 우리들도 사이트를 만들어 해군 옹호를 넘어 국민 계몽을 시켜보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인터넷에서 치열하게 싸웠으며 해군의 적정성과 상황의 당위성을 알리는데 한몫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7) 김회장의 리더쉽은?
(유) : 총보다는 말과 글로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국가의 존수(尊守)를 위한 노블리스 오브리제의 사명감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김회장님의 리더쉽을 말씀하신다면?
(김) : 제 입으로 말하기기가 쑥스럽네요.
조 : 노블리스 오브리제에 바탕을 둔 전형적인 외유내강 합리적인 분이라 보시면 됩니다. 전에 임중위 기념사업을 제안했을 때 후배가 쓴 글이 있는데 그 내용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 인용 글 ------------
5월28.29일 양일간의 진해행은 OCS에 대한 역사성과 자존감을 일깨우는 또 다른 전환점 이였으며 진해는 OCS 생장의 발원지임을 확인한 이틀 이였다.
5월28일 저녁에 봄도다리와 이바구를 안주로 OCS가족 60여명이 속천 동호횟집에 모여 소주잔을 기울인다. 63차 28명은 8개의 테이블에 모여 앉아 시공을 넘나드는 안주거리로 마냥 소주를 축낸다.
43차 이태성선배님과 중앙회 부회장님들의 건배사에 이어 김동건회장님께서 의미 있고 시대적, 역사적 사명을 OCS동문에게 화두로 던진다.
--중략--
두 번째는 OCS중에도 무공의 영웅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6.25전란 중 미국 은성훈장을 받은 OCS9차 임병래중위가 있는데 공적으로 볼 때 월남전의 영웅 이인호 소령에 뒤지지 않는 전과라고 말씀하시면서, “공적을 찾아내 동상이나 추모비는 세워야 되지 않겠냐?”는 말씀으로 후배들의 가슴에 OCS긍지라는 뇌관에 불 붙이신다.
나는 여기서 리더의 자질을 보았다. 본인(최승원)이 생각하는 리더는 큰 그림의 구도를 제시하면서 구성원 모두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잠재력을 계발케하여 행복감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정의하므로, 김동건회장님은 OCS자부심의 돛대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칭송과 함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김동건회장님께서 반은 이룩해놓으셨다. 나머지 몫은 이제 우리 후배들의 몫이라 생각하여, 본인은 OCS 일원으로 손원일제독의 꿈과 신사도를 계승하여 각종 행사에 적극 함여하면서 해군발전에 긍정적으로 참여하리라 다짐하면서 임병래선배님의 전적기념물 세우는데도 적극적으로 동참하리라 각인해 본다.
--하략--
8) 김국호위원장 취재
(유) : 김국호추진위원장님도 취재를 했으면 좋았을텐데...
(김) : 전화로 인터뷰 해도 되지 않습니까?
--- 김국호위원장과 전화 인터뷰 양해와 인사말을 나눈후 ----
(유) : 위원장으로서 말씀하실 것은?
김국호위원장 : 김동건회장님께서 말씀을 다하셨을 것이고 저는 현충일 현충원에서 읽은 추모사로 대신하지요. 그 글이 제 마음입니다.
---- 추모사 ----
해군OCS 9차 군번 80750 임병래 선배님!
선배님의 거룩한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면서 호국의 달 6월을 맞이하여 후배들이 모여 묵념을 올립니다.
임병래 선배님!
선배님은 민족의 아픔이자 큰 상처인 6.25동란에서 공산주의로부터 우리 국민과 나라를 지켜낸 자유의 수호자이며 민족의 등불이십니다.
두 달 전에는 서해 백령도 인근에서 대한해군의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침몰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려 47명이 희생되는 참사로 온 국민이 가슴 아파하는 침통의 시간이 있었기에 다시 한 번 6.25의 비극을 절감하며 더더욱 선배님과 현충원에 계신 애국자들의 희생에 감사를 올립니다.
임병래 선배님! 뒤늦게나마 OCS 후배들이 선배님의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초석으로 OCS의 표상을 세우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선배님의 영웅적인 희생과 애국정신을 물려받고자 진해 해군사관학교 OCS 후배들의 교육장 옆 양지 바른 장소에 선배님의 숭고한 애국혼을 귀감으로 하는 전적기념물을 만들겠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 국권을 굳건히 지켜내 다시는 일제 강점이나 6.25동란과 같은 치욕이 없는 이 땅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늘에서나마 우리 후배들을 격려하고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임병래 선배님!
선배님의 위대한 용기와 희생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밑거름입니다.
선배님의 충혼이야말로 오천년 대한민국의 정통성입니다.
선배님과 함께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하겠습니다.
온 겨레가 우러러보며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임병래 선배님을
우리 OCS 후배들은 긍지와 자부심 속에 계승 발전시키겠습니다.
임병래 선배님! 부디 편히 쉬십시오.
2010년 6월 초
임병래중위 전적기념물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48차 김 국 호 올림
3. OCS란?
1) 김동건회장님의 프로필 : (법무법인)바른 사무실 제공
2) 해군OCS장교중앙회 연역은? : 첨부물 참조 - 그림파일
3) OCS를 빛낸 사람은?
(1) 현역국회의원
- 한나라당 : 황우려, 박상은, 안경율, 공성진, 나성린, 박진, 현경병,
권성동
- 민주당 : 홍재형, 문희상, 신학용, 주승용, 장병완
(2) 전직국회의원
신영균(한국지역민영방송협회 회장),김기춘(현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 전 제40대 법무부장관), 이해구, 유필우, 이상현, 장석화, 박종웅, 신기남, 노현송(현 강서구청장) 등등
(3) 장/차관급 현직관료
- 진동수(53차 금융감독위원장)
- 장수만(65차 방위산업청장)
- 추규호(66차 해병, 영국대사)
- 이준규(70차 외교안보연구원장)
- 최장현(70차 국토해양부 2차관)
- 정종수(71차 중앙노동위원장)
- 허경욱(71차 OECD대표부 대사)
- 안양호(71차행정안전부 2차관)
- 김병일(71차 민주평통사무처장)
- 정창수(72차 국토해양부 1차관)
- 최민호(73차 행정안전부 소청심사위원장)
(4) 전직각료
김종민(70치 문화관광부장관), 추병직(62차 건설교통부장관), 손지열(50차,중앙선관위 위원장/대법관), 조중표(63차 국무총리실장, 외교부1차관), 윤영관(66차 외교통상부장관, 현 서울대 외교학과교수), 최낙정(65차 해양수산부장관), 이규용(71차 환경부장관),
(5) 학계 인물 : 총장 급
이성우(60차 국민대학교총장), 김성진(65차 한경대학교총장, 해양수산부장관),
장시원(63차 한국방송통신대학교총장), 오거돈(63차 한국해양대학교총장, 해양수산부장관), 김현태(66차 창원대학교총장), 정기언(68차 동신대학교 총장)
(6) 경제계 인물
황창규 국가CTO(68차 전 삼성전자 사장), 현재현(57차 동양그룹 회장), 정도언(53차 일양약품 회장), 이인성(56차 STX조선 부회장), 김강수(59차 STX조선 사장), 김호영(50차 경남기업 사장), 정순원(63차 삼천리 사장, 전 현대자동차 사장), 최재신(66차 고려개발 사장), 채양기(63차 KPMG 부회장, 전 현대자동차 사장)
(7) 언론계 인물
문창극(54차 중앙일보 대기자,부사장대우), 선동규(70차 진주 MBC 사장), 김석규(63차 조선일보 이사), 양동용(63차 서울신문 상무), 한진수(59차 동아일보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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