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제목을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로 했다고 하자, 아내가 묻는다. “당신, 진짜로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해?” 나는 약간 주저하다 대답했다. “응, 가끔….” 아내는 잠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바로 몸을 내 쪽으로 향하며 이렇게 말했다. “난, 만족하는데….” 내가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쭈뼛거리는데, 아내의 나지막한 한마디가 내 가슴을 깔끔하고도 깊숙하게 찌른다. “아주, 가끔….” - 8쪽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니 일견 부부관계에 대한 책 혹은 무모한 남자들의 로망에 대한 책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이 책은 ‘재미는 창조다’라는 키워드로 SERI CEO, 월간조선, 신동아 등에 절찬리에 연재되었던 김정운 교수의 칼럼을 새롭게 재구성한 책이다. 그는 동독 등 사회주의가 몰락한 것도 재미와 행복이라는 21세기의 시대정신에 저항했기 때문이며 개인이 재미있어야 관용적이 되어 전쟁, 폭력이 사라지고 아름다운 수컷의 원형질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올랐다고 자부하는 특정 연령층의 남자,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여자들을 떠올리면 특유의 아우라가 떠오른다. 정치에 관심이 많고 사회시스템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입 꽁지가 살짝 아래로 쳐져 있고 틈만 나면 왜 내 밑에는 나만한 놈이 없느냐며 분노한다. 시대의 내일을 걱정하면서도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 없다. 술잔을 기울이며 이 땅의 정치행태부터 부도덕한 연예인의 스캔들에 이르기까지, 나와 상관없는 구라에 핏대를 세운다. 이 모습이 지금 당신 자신, 혹은 주변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이다.
우리 사회의 중년남성들은 재미있으면 불안해하고 행복하면 죄의식을 느낀다. 무엇보다 사회에서는 재미가 너무 천대받는다. 사회에 만연한 근거 없는 엄숙주의, 불필요한 진지함이 남성들에게 수시로 웃지 마라, 진지해라를 강요하며 행복까지 앗아간다. 재미있어야 한다는 주제의 강의를 자주 하니까 사람들이 나를 어설픈 교수, 웃기는 교수로 폄훼한다. 실력 없이 말재주만 갖고 버티는 허접한 교수 취급을 한다. 난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전임강사로 독일학생들에게 비고츠키, 피아제, 프로이트를 독일말로 가르쳤다. 제대로 공부한 문화심리학자다. 그런데 잘 놀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서 나를 3류 취급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그렇게 진지함 과잉주의에 빠져 살다보니 한국남성은 모두 독수리 5형제 증후군에 시달린다. 한국남자는 술 한 잔 마시면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5형제가 된다. 국내정치는 물론 경제정책, 지구온난화에 이르기까지 세상 고민을 혼자 다 껴안고 해결하려 한다. 그런데 이 용감한 지구방위대가 정작 자신의 행복을 챙기라고 하면 하염없이 비겁해진다. 일주일 내내 그토록 열심히 일해 놓고도 스테이크는커녕 순대국 한 그릇도 혼자 식당에 들어가 못 먹는다. 남들이 사회적 부적응자로 볼까 두려운 까닭이다. 일상에서 사는 재미가 없으니 세상이 뒤집어지길 원한다. 그런데 세상이 그리 쉽게 안 뒤집히니 폭탄주를 마시고 자기 위장만 뒤집어 버린다.
요즘 중년남성들은 김혜수 같은 큰 가슴, 폭탄주에 탐닉한다. 숱한 얘기를 해도 정작 자신의 얘기를 터놓고 하거나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아 가장 자신이 소통을 잘하던 어머니의 가슴을 찾듯 큰 가슴에 심취한다. 세상과 더이상 소통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존재확인 방식은 자학이다. 온몸으로 느끼는 고통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데 것 가운데 하나가 폭탄주다. 재미있게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살을 맞닿는 스킨십의 자연스러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한 포르노에 탐닉하기도 한다. 그래서 퇴폐마사지, 성매매 등의 불법 유흥업이 판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재미있니?'란 문장이 일상적 용어가 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이다. 재미란 단어는 그 이전에도 있었으나 지금 사용하는 의미의 재미가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삶의 가장 중요한 차원으로 얘기하는 재미의 사회적 구성을 가능케 한 조건은 주체의 성립이다. 신분, 계급이란 봉건적 아이덴티티로부터 자유로워진 독립적 개인으로서의 주체가 근대에 들어 등장하면서 재미는 비로소 개념적으로 구성됐다. 개인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재미의 기본이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면 우선순위를 재정비해야 한다. 지금 술 마시는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이 늙어서까지 내 곁에 있어줄까. 술로 친해진 이들은 술이 끊기면 인연도 끊긴다. 사회생활을 위해 술 마신다는 것도 핑계다. 사장, 장군, 고위공직자들이 늙으면 자폐증이나 우울증에 걸리는 것도 이유가 있다. 자신에게 아부하던 이들이 직위가 끝나면서 아부도 대접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근사한 직함을 가져도 폼 잡으면서 지내는 시간은 고작 10여년이지만 은퇴 후엔 30~40년의 삶이 남아있으므로 그 시간을 위해 인생의 가치를 재정비해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한 재미, 가족과의 스킨십 등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한국남성들이 술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네 시간 이상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는 골프밖에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이야기라는 것이다. 살면서 지금까지 이토록 많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상실한 중년들에게 골프만큼 공통의 화제를 만들어주는 일은 없다. 또 골프를 할 때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드라이버 한 번 치고 나면 터지는 "나이스샷!" "우와!" 등의 감탄사를 듣고 싶어 새벽부터 골프장을 향한다. 룸살롱을 비롯한 술집도 그렇다. 집에선 찬밥신세이지만 술집 여종업원들은 "오빠 멋있다!" "너무 잘 생겼어요" 등의 감탄사를 연발해주기 때문에 그 맛에 비싼 돈을 지불하고도 간다.
예전엔 우리말에 지화자, 니나노, 얼쑤 등의 감탄사가 참 많았지만 이젠 감탄사조차 "죽인다!"란 살벌한 단어로 바뀌었다. 내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의 기준은 간단하다. 하루에 대체 몇 번 감탄 하는가 이다. 사회적 지위나 부의 여부와 관계없다. 내가 아무리 출세해도, 돈이 많아도 하루 종일 어떤 감탄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인생이 아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다니에 카네만 교수는 행복은 하루 중 기분 좋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기분 좋은 시간이 길수록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의 작은 일에서 행복을 찾는 훈련이 필요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의식, 즉 리추얼(ritual)을 찾아야 한다. 매일 아침에 마시는 향긋한 커피 한 잔, 아이와의 뽀뽀 등이 리추얼이다. 리추얼이 다양한 삶이 풍요롭고, 이 리추얼을 단순한 일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수시로 감탄하고 감사해야 한다. 나는 만년필을 수집해 아침마다 어떤 만년필을 들고 갈까 고민하고, 갓 볶은 싱싱한 원두를 사와 내 손으로 직접 갈아 먹는다. 가끔 아들과 동네 약수터에도 간다. 이런 사소하지만 즐거운 리추얼이 우리 삶을 구원한다. 사람들은 죽을 때도 더 많은 돈을 못 번 게 아니라 더 재미있게 못 산 것을 후회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해야 할까? 그것은 존재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져보라는 뜻이다. 결혼, 육아, 책임, 직장, 연봉, 어느 덧 이 모든 것이 당연히 내가 추구하고 지켜야 할 가치라고 믿고 있는 나는 잠시 잊자, 아니 후회할 것이 있으면 건강하게 후회하자는 말이다. 그리고 잠시나마 배꽃나무 아래서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썬샤인 온 마이 쇼울더’를 흥얼거리고 〈쿼바디스〉의 데보라 카가 입었던 하늘거리는 주름치마에 설레어 하던, 내 안에 아직도 그득그득 살아있는 ‘재미’를 떠올려보자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로망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행동해보지 못한 남자들의 심리적 ‘여백’을 통렬하게 채워주는 책이다.
저자 김정운 교수는 1962년 서울 태생으로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를린 자유대학교 심리학과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는 명지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니, 이런 거창한 프로필 따위는 다 잊어도 좋다. ‘김정운’은 팔뚝 굵은 아내가 차려준 아침밥상에 감사하며, 아침마다 그날 가지고 나갈 만년필 고르기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고, 거리의 망사스타킹을 보면 가슴이 뛰어 낚시가게 그물만 봐도 흥분하고, 자동차 운전석에서 슈베르트의 가곡을 목 놓아 따라 부르며 주책없이 울기를 좋아하는 사십 끝줄의 대한민국 남자다.
귀가 얇다 못해 바람만 불어도 귓바퀴가 귓구멍을 덮을 정도고, 한번 폭발하면 대로변에서 삿대질도 일삼는 욱하는 성격이지만, 한번 마음에 담아두면 며칠 밤 잠 못 자며 고민하는 소심남이기도 하다. ‘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도무지 행복해지지 않는 걸까?’라는 아주 절박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수많은 문화심리학적 사례와 연구결과를 종합 수집하고, 이를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걸러내어 이 책을 집필했다. 기업들이 강연 스케줄 잡기 가장 힘든 강사이자, 방송 매체 섭외 1순위인 그는 삼성경제연구소 SERICEO ‘최고의 명강사’로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노는 만큼 성공한다>, <일본 열광>, <휴테크 성공학>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