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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혁명을 통해 본 혁명운동의 세대 단절과 연속
정병기
『미래공방』(2007년 가을호, 진보정치연구소), 156-165쪽.
68혁명의 한 활동가가 회고담을 쓰면서 인용한 작은 이야기 하나가 새롭게 다가온다. “나는 탈모의 희생자”라는 제목의 이 이야기에서 나는 혁명운동의 세대 계승은 각 세대의 이상과 자세에 달렸음을 읽는다.
<이발사는 이발비를 절반으로 할인해 주면서 나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긴 머리카락 속에 숨겨진 민머리 부분이 20년 전에 처음 거울에 비쳤다. 그리고 오늘 나는 창문, 유리문, 창구에 비쳐 번쩍이는 대머리를 보고 경악한다.
내 머리에서 생겨난 머리카락 한올한올은 모두 한 때 이름을 가졌거나 최소한 번호라도 지녔다가 투쟁 속에서 사라져간 나의 동반자들이다. 오직, 한 친구의 공감할 만한 말 한 마디가 나를 위로할 수 있다: “소중한 머리카락은 머리 위에서가 아니라 머리 속에서 자란다.” 또 나를 위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모든 세월 동안 내가 아주 많은 머리카락을 잃었지만, 단 하나의 이상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이상은 나의 기쁨의 근거이며, 지금 후회하는 사람들도 언젠가 한 번쯤은 가슴에 품었던 것이다.
Eduardo Galeano, Das Buch der Umarmungen1 >
혁명은 머리 위의 머리카락처럼 눈에 보이는 현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서 자라는 이상과 관련된다. 그 혁명적 이상은 삶의 기쁨이 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도 품어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혁명을 절실하게 요구했던 한 시대가 마감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면, 혁명의 세대간 계승은 더 이상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게 된다. 68혁명은 1960년대까지 팽배했던 권위주의의 타파를 위해 일어났지만 1970년대 중후반의 소강상태로 연결되고 다시금 1980년대 이후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로 귀결된 듯하다. 68혁명을 주도하고 그 가치관을 체화한 68혁명세대는 과연 무엇을 계승하고 또 계승시켰는가? 이 글은 68혁명세대의 투쟁과 이상을 고찰함으로써 그 혁명의 단절과 연속을 살펴보고 우리에게 주는 함의를 알아보고자 한다.
1. 세대 개념과 68혁명세대
이 글에서 사용하는 ‘세대’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동일한 생애주기 단계에서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경험하는 출생 코호트(cohort)”2라는 ‘사회 역사적’ 개념이다. 68혁명세대를 논할 때 자칫 68혁명을 주도한 활동가들에 한정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세대 개념을 사회운동 주관자(agents)의 개념으로 사용하면,3 68혁명에 대해 많은 부분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겠지만 68혁명이 당대 사회와 이후 사회에 미친 영향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68혁명세대’는 68혁명 주역들뿐 아니라 68혁명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말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로 사회적 모순에 민감한 20대에 68혁명이라는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경험한 코호트(cohort)’로 정의한다.4 그리고 이 글에서 68혁명세대 개념은 구미 국가들에 한정한다. 물론 동구권에서도 산업이 발전했던 국가들에서는 자주관리의 형태로 인간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운동이 유사한 시기에 전개되었으며, 이 일련의 운동들도 68혁명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는 함의를 함께 알아보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 동구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은 제외하고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고찰한다.5
구미 국가들의 68혁명세대들은 나치스트와 파시스트들이 일으키고 선진 산업국가들 간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발전해간 제2차대전을 경험했지만, 1950년대의 복구기간을 거쳐 1960년대에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구가하고 사회경제적으로도 경제발전과 복지국가라는 물질적 풍요를 누렸다. 이러한 성장 환경에 의해 68혁명세대들은 어린 시절에 겪은 전쟁과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을 키우게 되는 한편 성장한 후 물질주의적 한계를 실감하게 되었다.6
그러나 이 세대들이 격동적으로 살았던 시대도 자본주의로서 무엇보다 물질주의적 모순이 팽배한 시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68혁명 시기에는 물질주의적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그룹들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자본주의의 물질주의적 모순에 천착하고 계급 문제에 전념해온 전통적 그룹들도 성장해갔다.
2. 68혁명세대의 투쟁과 문제의식
1968년을 전후한 혁명 물결은 늦게 혁명대열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이후 이 혁명운동의 상징적인 국가로 알려진 프랑스에서 대학생들에 의해 촉발된 혁명운동에 노동자들이 연대하면서 운동의 열기가 고조된 반면, 서독과 이탈리아에서는 노동자들과의 연대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채 청년ㆍ학생들의 운동이 매우 격렬하게 진행되었다.7 한편 영국에서는 청년ㆍ학생들의 운동도 상대적으로 약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과의 연대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미국에서는 대학생들의 교육개혁운동이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을 중심으로 번져갔다.
그러나 68혁명운동을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로 확대해서 본다면 이러한 차이점은 적지 않게 사라진다. 독일에서 1970년대 초반에 68혁명의 영향을 받아 자발적 파업이 일어났으며, 이탈리아에서는 1969년 ‘뜨거운 가을(autunno caldo)’의 노동자투쟁으로 연결되었다.8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흑인인권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사회주의 경향들이 강화되었으며, 영국에서도 비틀즈 음악 같은 문화적 저항운동뿐 아니라 런던경제대학 학생들의 시위가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물론 대학생들의 저항은 교육의 개방과 개혁을 둘러싼 싸움에서 시작되었다.9 파리의 대학생들은 소르본느 대학을 점거하여, 모든 노동자들에게 개방된 자율적 대중들의 대학임을 선포하고 노동자ㆍ학생ㆍ교사들로 구성된 ‘점거 관리 위원회’를 통해 파리대학을 운영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탈리아의 대학생들도 주요 도시의 대학 건물 23개를 점거하여, 교과 과정과 신임교수 선발에 대한 통제 그리고 모든 학점에 대한 학생들의 감독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저항은 교육 부문에 국한되지 않았다. 미국 대학생들은 베트남전쟁과 미스아메리카 경연대회를 반대하는 운동을 조직했으며, 독일의 SDS(사회주의독일대학생동맹)소속 학생 루디 두취케(Rudi Dutschke)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표방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청년과 학생들은 교수와 교사(Professore) 외에 4P로 상징되는 아버지(Padre), 신부ㆍ목사(Prete), 정당(Partito), 주인ㆍ사장(Padrone)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프랑스의 대학생들은 “선거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 투쟁은 계속된다!”10라고 외치며 드골의 권위주의가 작동하는 프랑스의 대의민주주의를 비판했고, 독일의 청년과 학생들은 당시 보수진영을 대표하던 언론사 슈프링어(Springer)를 공격하였다. 또한 원자력 같은 각종 자본주의 기술에 대한 비판과 반대도 1960년대 말을 수놓은 중대한 흐름이었다.
이와 같이 68혁명세대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대의 민주주의, 거대 기업, 자본주의 기술, 관료와 전문가에 의한 지배, 전쟁, 미디어에 의한 조종, 교수ㆍ교사 중심의 학교, 가부장적 가정 및 남성 중심 사회에 걸친 총체적인 것이었다. 계급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스타일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그 삶의 스타일은 새로운 의미에서의 해방적 삶을 뜻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반권위주의를 지향했다. 곧, 68혁명세대는 대중에 대한 관료적 권위주의, 여성과 청소년에 대한 가부장적 권위주의,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권위주의, 자연에 대한 인간 문명의 권위주의,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권위주의에 문제를 제기하고 일상에서 권위주의를 탈피한 해방된 삶을 지향한 것이었다.
3. 68혁명세대의 요구와 가치관: 단절과 연속
68혁명은 물론 전통적 사회주의 운동을 고무하고 강화했다. 그러나 68혁명세대들의 문제의식은 이와 같이 자본주의의 계급모순을 더욱 강력하게 제기하는 방향으로도 작용했지만, 권위주의라는 새롭게 인식해야 할 모순도 날카롭게 지적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해 나갔다.
68혁명세대들의 ‘일상성의 민주주의’ 요구는 우선 청소년과 여성에 대한 남성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이제 복종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여성들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며 일상생활에서의 여성 차별을 사회정치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비판을 제기했다.
일상성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비판한 또 다른 문제는 전문가 권위주의를 포함한 관료적 권위주의였다. 68혁명세대는 엘리트 양성체제를 거부하고, “학생이 노동자가 되어 생산체계의 일부를 형성하는 것을, 국민적인, 나아가 보편적인 대학에 참여할 수 있기를, 교육이 무료화되는 것”을 요구했으며, “내가 참여하네, 네가 참여하네, 그가 참여하네, 우리가 참여하네, 너희가 참여하네, 이익은 그들이 챙기네”라고 비꼬며 반관료주의와 자주관리를 주장했다.11
또한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권위주의를 자각한 이 세대는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자연에 대한 인간 문명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면서 핵무기와 환경파괴에 대해 반대했다. 더 나아가 적자생존의 논리를 신봉하는 진화론적 권위주의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며 인종차별과 장애인 문제 및 소수자 차별 등을 비판했다.
특히 구미 자본주의 국가에서 68혁명세대들이 제기한 요구는 물질주의적 소비사회에 대한 인식에 근거했다. 1968년을 전후한 자본주의 체제는 “억압에 의해 관리되었던 초기 자본주의와는 달리 조작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12로서 거대한 물질주의적 소비사회였던 것이다. 이제 대중들을 관리하는 것은 거대한 조작체계이며 이를 통해 후기자본주의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사회ㆍ교육ㆍ문화 영역뿐 아니라 개인 내면의 충동구조에까지 침투하게 되었다. 곧, 물질주의 소비사회의 문제는 더 이상 ‘경제적 착취’라기보다 ‘일상적 소외’였다.13
그럼에도 기성 좌파들의 해결방식은 물질주의적 사고에 머물러 있어, 사민주의자들처럼 케인즈주의적으로 나타나거나 정통맑시스트들처럼 스탈린주의적으로 나타났다. 그에 따라 사민주의자들은 케인즈주의적 동의구조를 이루어 보수우파와 합의정치를 추진했고, 정통맑스주의자들은 관료적 혁명을 고수했다. 이들은 각기 다른 형태의 관리되는 삶을 지향했고, 일상성의 권위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반면, 1930년대 말이나 1940년대에 태어나 풍요로운 시기에 성장기를 보낸 68혁명세대는 이와 같이 대안적 사고가 동결되고 봉쇄된 듯이 보이는 사회에 새로운 방식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68혁명세대는 수동적 소비와, 관리되는 일상적 삶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제 새로운 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경제적 가치 외의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는 탈물질주의 사람사회의 요건이었다.14 이러한 의미에서 68혁명세대의 저항은 기성세대가 역사의 진보라고 믿어왔던 것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의 표현이자, 부의 증대를 통해 인간 해방을 이루려고 했던 실천 방법에 대한 부정이었으며,15 이는 곧 혁명방식의 세대적 단절이었다. 그러나 초기 사회주의 운동 세대들이 당대의 모순을 해소하고 사람사회를 추구해온 이상의 핵심은 오히려 권위주의로 흘러간 1960년대 기성세대에서 계승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순을 인식하고 과감히 투쟁에 나선 68혁명세대에서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68혁명세대는 혁명의 연속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4. 68혁명의 세대 계승과 시사점
남은 문제는 68혁명의 연속성이 후세대에 어떻게 계승되었으며 또 계승할 것인가이다. 68혁 명이후 1970년대 중후반의 소강상태와 1980년대의 반동기에 68혁명의 이상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양 체제와 두 운동진영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던 모순을 함께 지적하며 총체적 탈물질주의 사람사회를 이룩한다는 이상은 문제의식의 강조점에 따라 양분되는 듯했다. 자본주의적 사회모순을 강조하는 진영은 계급환원론을 고수하는 한편, 권위주의 모순을 강조하는 진영은 몰계급적 반권위주의만을 추구하는 탈물질주의 우파로 왜곡되어 간 것이다. 전통적 좌파들은 권위주의적 조직과 혁명방식에 매몰되어 고립되어 갔으며, 이른바 합리적 우파로 간주할 수 있는 시민운동 진영은 자본주의 체제 내의 반권위주의적 삶을 주장하며 체제 모순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범세계적으로 확대되어온 신자유주의는 다시금 시장에 모든 것을 내맡겨 감으로써 사회양극화를 부추기고 있다. 자본주의의 사회모순인 계급모순이 다시 첨예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복지국가를 구가하던 구미 선진 산업국가들도 예외가 아니며, 복지국가를 경험하지 못한 채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는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에 그 폐해는 더욱 심각하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인 계급모순과 인류 공통의 유적 모순인 권위주의 모순을 함께 인식하는 탈물질주의 좌파의 노력이 다시 절실해지고 있는 때이다.
68혁명은 시대적 배경이 요구한 운동이었으나, 68혁명세대의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투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들은 인간해방의 이상을 올바로 간직했기 때문에 새로운 모순에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이다. 젊은 세대는 환경에 영향을 받지만 환경에 지배되지만은 않는다. 젊은 세대는 젊음 그 자체로도 기성세대에 비해 기존 사회의 모순을 더 잘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중요한 것은 앞선 세대건 뒤따르는 세대건 혁명세대들이 사람사회의 이상을 얼마나 간직하고 전파하느냐에 달려 있다. 모순과 양태와 혁명의 양상은 변한다. 자기 세대의 논리로 후세대의 혁명운동을 폄하하거나 폄훼하지 않아야 한다. 68혁명 이후 권위주의적 사고로 68혁명세대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던 당시 구세대들이 오히려 혁명을 등진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68혁명세대들처럼 때로는 구세대의 잘못된 이상과 단절함으로써 올바른 혁명의 이상을 계승하고 또 계승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또 한 친구의 공감할 만한 말 한 마디가 나를 위로한다. “머리 속에서 자라나는 소중한 머리카락은 새로운 세대에서 더욱 결 좋은 모습으로 자라난다.” 더욱 나를 위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앞으로 살아갈 세월 동안 더 많은 머리카락을 잃더라도 올바른 이상을 잃지 않는다면, 그 이상은 나의 기쁨의 근거가 될 것이며, 지금 이상을 잃은 세대나 아직 갖지 못한 세대도 언젠가 한 번쯤은 가슴에 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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