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빈 金亨彬 (1894 ~ 1943)】 " 대한독립단 최석순 부대 가입 · 고마령전투 참가 "
1894년 4월 19일 평안북도 초산(楚山)에서 태어났다. 1920년 만주에서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무장투쟁에 나섰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평북 초산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중국 펑톈성(奉天省) 지안현(輯安縣) 충화보(沖和堡)로 망명하였다. 1920년 남만주 소양도(小洋島)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15일 한말의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조맹선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무장단체이다. 이후 이 단체는 기원파와 민국파로 나누어졌는데, 기원파는 전덕원·채상덕의 구파(舊派)와 이웅해·최석순(崔碩淳) 등 청년층을 중심으로 하는 신파로 나누어졌다. 이때 대한독립단 신파인 최석순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최석순은 대한독립단 집서지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적의 밀정을 처단하는데 주력하였다.
1921년 5월 13일 최석순의 명령으로 김옥관(金玉觀) 등 6명의 동지들과 함께 친일파 봉치극(奉致極)을 붙잡아와서 처단하였으며, 또한 관톈현(寬甸縣) 하루하(下漏河)에서 청년단의 검찰직으로 복무하면서 적의 밀정을 색출하는데 앞장섰다. 이후 송신당(宋申當)의 휘하에서 백인식(白仁植)·고영태(高永泰)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5월 독립운동을 방해하던 친일파 김하룡(金河龍)을 처단하라는 최석순의 지시를 받고, 동지인 안봉선(安奉善)·백인섭(白仁涉)·박정학(朴正學) 등과 협의하여 환런현(桓仁縣) 이차구(裡岔溝) 산중에서 김하룡을 처단하였다. 또한 냉수천자(冷水泉子) 등지를 순회하면서 박병선(朴炳善) 등으로부터 군자금 10원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1922년 8월 최석순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담하여 의용군 제2중대장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그와 함께 행동을 같이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24년 육군주만참의부(참의부) 결성에 참가하여 최석순이 이끄는 제2중대에 소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25년 3월 참의부 참의장 겸 제2중대장인 최석순의 휘하로 고마령(古馬嶺)전투에 참가하였다. 고마령전투는 1925년 3월 16일 지안현 고마령에서 국내진입을 위한 작전회의를 개최하고 있을 때, 일제 경찰의 기습으로 혈전 끝에 참의장 최석순 이하 29명이 전사한 사건이다. 이 고마령전투를 고마령참변이라고 부를 정도도 참의부 전투 사상 최대의 참사였으며, 최대의 타격이 되었다.
이 참사에서 탈출한 뒤 국내로 진입하여 평북 초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9월 초산경찰서 소속 밀정의 밀고로 일제에 붙잡혀 1930년 2월 2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및 살인 강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다시 같은 해 4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은 후 옥고를 치렀다. 1943년 8월 23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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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빈 예심 종결 보도 기사(『중외일보』 1930. 2. 1)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