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9일 [2003년]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 ‘황선홍’ 공식은퇴 발표
2003년 2월 09일, ‘아시아의 골잡이’ 황선홍(黃善洪)(35)이 끝내 날개를 접고 지도자의 길을 택했다. 한·일 월드컵 이후 부상으로 은퇴의 기로에서 고심하던 황선홍은 9일 서울 타워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은퇴를 공식발표했다. 회견장엔 팬들이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영원히’라고 적힌 대형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작별을 아쉬워했다.
1988년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팬들에게 이름을 알린 황선홍의 축구여정은 20세기 말 한국 축구의 역사와 동의어였다. 그는 A매치에 103회 출전, 50골을 뽑아낸 발군의 스트라이커였으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부터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본선에 4회 연속 출전하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좌절의 순간도 많았다. 황선홍은 94미국월드컵 때 많은 찬스를 날려 팬들의 비난에 직면했고 98프랑스월드컵 때는 대회 직전 무릎 부상을 당해 벤치 신세를 지는 등 고비마다 부상의 악몽에 시달렸다. 그러나 황선홍은 2002월드컵 조별예선 첫 경기 폴란드전에서 한국의 월드컵 본선 48년 사상 첫 승리이자 4강 진출의 주춧돌이 되는 통쾌한 선제 결승골을 꽂아 해묵은 한을 단번에 씻어냈다. 국내 프로무대에서는 1993년 포항제철에서 데뷔, 통산 64경기 31골 16도움을 기록했고 일본 J리그 시절인 1999년엔 24골로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조선
[2001년] 미국 핵잠수함과 일본의 수산고교 실습선, 하와이 앞바다에서 충돌
일본의 수산고교 실습선과 미 핵잠수함이 2001년 2월 9일 하와이 앞바다에서 충돌, 9명이 실종되고 12명이 부상했다. 이날 오후 하와이 오아후섬 남쪽 앞바다 18km지점에서 작전 중이던 미 해군 소속 핵잠수함 ‘그린빌’호(6090t급)가 부상하면서 일본 우와지마(우화도) 수산고교 소속 조업 실습선 ‘에히메마루’(499t급)를 들이받았다. 에히메마루는 충돌 10분 만에 침몰했다. 에히메마루에 타고 있던 고교실습생과 선원 등 35명 중 26명이 구조됐으나, 실습생 4명을 포함 9명이 실종됐다. 그린빌호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이날 사고의 책임을 물어 그린빌호의 함장을 직위해제, 미 태평양 함대 잠수함대 사령부 참모로 전보했다. 미국 핵잠수함과 일본 선박 간의 충돌사고는 이번이 두번째로, 지난 1981년 일본 화물선과 미 핵잠수함 조지 워싱턴호가 가고시마현 근해에서 충돌해 2명이 사망한 바 있다. /조선
[1990년] 3당 통합으로 민주자유당 창당 ← 노태우 전 대통령
1990년 2월 9일 집권당이던 민주정의당이 야당인 신민주공화당·통일민주당과 합당해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제5공화국 집권당으로 출발한 민주정의당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총 276석 중 148석을 얻음으로써 여소야대 정국이라는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이는 민주정의당이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합당해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여당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정국은 국회의원 2/3를 넘어선 216석의 민주자유당과 평화민주당 간의 양당구도로 굳어졌다. 그러나 1992년 3월 24일 제14대 총선에서는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다. 김영삼 대통령 집권 이후 노태우와 전두환 두 전 대통령이 구속되면서 1995년 12월 6일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브리태니커
[1996년] 윤치영 前공화당 당의장 별세 ← 윤치영 前공화당 당의장
민주공화당 당의장을 지낸 윤치영씨(98)가 1996년 2월 9일 서울 중앙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윤씨는 두세기에 걸쳐 살아오면서 독립운동과 학자, 정치가로서 갖은 풍상을 겪어온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1898년 2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24세 때인 1922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이어 미국 컬럼비아대와 조지 워싱턴대를 거쳐 1934년 아메리칸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일제시절 한때 독립운동 관계로 9개월간 영어(囹圄)생활을 하기도 했던 윤씨는 해방직후 한국민주당 창당발기인 및 중앙집행위원으로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이승만 박사의 비서실장과 제헌 및 2, 3, 6, 7대 국회의원, 초대 내무장관, 국회부의장, 대한국민당 당수, 공화당의장 등을 지냈다.
특히 그는 1963년 5월과 1968년 6월 2차례에 걸쳐 민주공화당의 당의장을 역임하면서 격동기 한국정치의 한가운데에 서왔다. 그는 공화당 창당이 한창인 1963년, 혁명주체간의 불화로 공화당의 해체론마저 대두되는 와중에서 공화당을 맡아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 민정에 참여토록 했다.
제헌의회에서 국회부의장(1949∼50년)을 지낸 그는 2대 민의원을 충남 공주, 3대 민의원을 서울 중구(국민당)에서 당선됐다. 6대와 7대의원은 공화당의 전국구 2번을 받았었다. 이후 그는 공화당 총재상임고문(1970∼73년), 국토통일원고문(1972∼84년), 안중근이사 숭모회이사장, 국회의원 동우회장 등을 거쳤다./조선
[1909년] 국악인 김천흥(金千興) 출생 ← '조선시대 마지막 무동' 김천흥
1909. 2. 9 서울~2007. 8. 18 서울.
호는 심소(心韶). 1916년 정동보통학교 입학, 1920년 균명학당에 다녔다. 1922년 가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제2기생으로 들어갔다. 박영복·이병성·이병호·김선득 등과 함께 김영제·함화진·이수경 등으로부터 일반악·궁중악·궁중춤 기본 등을 배웠다. 전공으로는 해금을, 부전공으로는 아쟁과 양금을 수업했다.
1923년 창덕궁 인정전에서 열린 순종황제 탄신 51주년 잔치에서 무동으로 봉래의·처용무·춘앵전 등 10여 종의 궁중춤에 출연하여 첫발을 내디뎠다. 1926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졸업한 후 여러 궁중행사의 악사로 활약했다. 1932년경 민속춤의 대가인 한성준이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열자 그곳에서 민속춤을 배우며 본격적으로 무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31년 같은 아악부원인 박덕인의 누이 박준주와 결혼하였고, 1940년 아악수장직을 사임하고 잠시 권번(券番)과 무악계 악인생활을 했다. 1943년 함화진·현철·박헌봉 등이 관계했던 조선음악가협회의 조선악부회원으로 '산업전사위문 전국각지 순회공연'을 하며 해금을 연주하였다. 한편, 민속춤과 민속악에도 대단한 열성을 쏟았다. 1945년 조선음악협회가 대한국악원으로 바뀌면서 국악원 이사를, 1951년 국악원예술사를 지냈다. 1·4후퇴로 부산에서 구왕궁아악부가 국립국악원으로 정식 발족되었을 때 그곳에서 활동하며 정종술을 중심으로 2회에 걸친 발표회를 가졌다. 서울로 돌아온 후 1958년부터는 한국가면극연구회 이사직을 맡으며 탈춤 연구를 하였다. 1955년 김천흥고전무용연구소를 열고, 이듬해 궁중춤을 재현한 제1회 한국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75년까지 7회의 개인무용발표공연을 갖게 되는데 특히 1959년 처용의 설화를 극화한 〈처용랑〉과 1969년 대금에 얽힌 아름다운 전설을 극화한 〈만파식적〉으로 서울시문화상과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1968년 종묘제례악 중 일무(佾舞)로 중요무형문화재 1호, 1971년 처용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1940년대초 이화여자전문학교, 1956년 이화여자대학교 체육과에서 강의한 것을 시작으로 1988년까지 한국 고유의 전통음악과 춤을 지도하며 후배양성에 힘썼다. 1962년부터 시작된 미주·유럽·동남아 지역으로의 여러 차례 해외공연에서는 한국 전통예술의 진수(眞髓)를 세계 속에 알리는 데 큰 몫을 했다. 1973년 사단법인 대악회 이사장, 1977년 정농악회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예술단을 창단하여 중요무형문화재의 올바른 전수·보존·보급을 위해 주력했다. 이밖에도 무용학회장·민요연구회장 등을 지냈으며, 궁중춤을 출 수 있는 마지막 생존자로 국립국악원에 남아 연주와 무용지도에 힘쓰는 한편 〈한국무용의 기본무보〉·〈정악 양금보〉·〈정악 해금보〉 등의 저서를 남겨 국악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1989년] ‘우주소년 아톰’의 제작자,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 사망 ← 아들 마코토와 함께 한 데즈카 오사무(手塚治史).
일본 최초이자 동양 최초로 만화영화를 만들어 동양적 캐릭터를 개발한 데즈카! 그의 주인공들은 일본과 동남아를 휩쓸고 미국·유럽에까지 진출해 활약했다.
7백여 종의 만화책과 60여 종의 만화영화를 제작했으며 로봇 소년 아톰은 일본 어린이들에게 과학기술에의 열정을 심어줌으로써 오늘의 전자산업 왕국 일본이 있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데즈카는 만화 만이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인간 세계의 진면목을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일본만화史에서 그의 만화는 단순 희극이 아니라 진지한 줄거리를 담은 스토리 만화의 효시로 꼽힌다.
데즈카는 오사카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 1953년 의사고시를 합격하지만 의사로 활동하지 못한다. 뛰어난 스토리 구성과 박진감 있는 화면전개로 일약 데즈카붐을 일으킬 때 `의사가 그린 만화`라는 사실이 부모들에게도 보증수표로 통하게 되면서 만화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1961년 ‘무시프로덕션’을 만들어 만화영화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1963년 1월 ‘철완 아톰’을 방영해 40.3%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미국에 수출했다. 1966년 직접 COM이라는 만화잡지를 창간했으나 과도한 투자로 1973년 4억 엔의 부도를 내고 도산했다. 출판사들이 그의 원고를 거절하기도 했고 은행문도 굳게 닫혔다.
그러나 높은 완성도와 리얼리티로 그의 만화는 다시 인기를 얻어 죽기 직전에는 일본 전체에서 소득이 7위를 기록했다. 1989년 2월 9일 그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왕’ ‘황제’ ‘일본의 디즈니’등의 수사 외에 ‘쇼와 시대 최고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칭호가 붙었으며 1994년 4월 25일 데즈카의 고향인 다카라즈카市에는 일본 사상 처음으로 만화가를 기념하는 데즈카 기념관이 세워졌다. /조선
[1950년] 미국 ‘매카시 선풍’ 개시 ← ‘매카시 선풍’으로 미국을 공산주의자 색출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뜨렸던 매카시 상원의원.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열린 공화당 여성당원 대회 초청 연사 매카시 상원의원은 보수파 중에서도 특히 우편향으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정부의 가장 중요한 부처인 국무성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린되고 있다. 나는 그 205명의 명단을 갖고 있다." 후에 ‘매카시즘’이라 불리게 된, 사상 희유의 빨갱이 사냥 집단 히스테리가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온 매스컴이 대서특필했다. 여론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트루먼 대통령은 즉각 조사위원회를 소집했다.
애초에 매카시가 말한 ‘명부’란 없었다. 석달 후에 그의 발언이 ‘근거 없음’으로 결론나긴 했지만 적색 사냥 선풍은 이미 손댈 수 없는 기세로 확산된 뒤였다. 매카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저명한 중국학자 라티모어를 필두로 애치슨, 마샬 등 민주당 정부요인들까지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했다. 비단 매카시 뿐은 아니었다. 초선의 공화당 의원이었던 리처드 닉슨도 이에 가세했다. 정부와 의회, 학계, 문화계, 노동계, 헐리우드 배우들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에서 공산주의자 색출 소동이 벌어졌다.
매카시선풍의 마수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군부에까지 미치자 1954년 마침내 상원 공청회가 열렸고, 전국민은 36일 동안 TV를 통해 이 공청회를 주시했다. 무책임하고 야만적이며 정략적인 매카시의 언동에 사람들은 속았음을 깨달았고, 마녀사냥 열기는 급속히 식었다. 곧이어 상원은 67대 22로 매카시가 ‘상원의 전통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다고 견책을 결의, 4년에 걸친 집단 광기에 끝을 냈다. 매카시는 그후 비서와 결혼했으나 술에 빠진 생활을 계속, 3년 후인 1957년 실의 속에 간장병으로 48세 나이에 죽었다. 한 정치신인의 야욕과 사회의 불건강한 정신구조가 함께 빚어낸 한 시대 우화였다. /조선
[1885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베르크(Alban Berg) 출생 ← Bust of Alban Berg at Schiefling, 카린티아, 오스트리아
1885. 2. 9 오스트리아 빈~1935. 12. 24 빈. "이 보체크란 인물 속에는 어느 정도 내가 들어 있다. 왜냐하면 이 전쟁 동안 나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예속되어 속박받고 병들고 옥죄이고 체념하고 모욕당했기 때문이다." - 알반 베르크
베르크는 아르놀트 쇤베르크, 안톤 베버른과 더불어 제2의 빈악파로 꼽히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흔히 '현대 음악의 고전주의자'라고 불린다. 무조성 음악을 창시한 쇤베르크의 제자였던 만큼 그 역시 12음음악을 위시한 새로운 기법들을 받아들였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조성적이고 주제적인 방식을 사용했다. 그는 20세기초 음악의 격변기에 새로움과 전통을 융합해 보려는 시도로서 일련의 오페라 <5개의 관현악적 노래 Five Orchestral Songs>(1912)·<보체크 Wozzeck>(1925)·<룰루 Lulu>(1937) 등을 발표했다. <보체크>는 무조 작품 가운데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이다. 이 작품은 또한 베르크가 오페라 형식으로 사회문제를 다룬 최초의 시도였다.
[1858년] 독립운동가 이종훈(李鍾勳) 출생
1858. 2. 9 경기 광주~1931. 5. 2.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호는 정암(正菴). 일찍이 동학에 입교하여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참여했다. 1898년 6월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경성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자, 옥리를 매수하여 시체를 빼내어 광주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후 1902년 손병희(孫秉熙)와 같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조국의 장래에 대해 논의했다. 1904년 천도교의 갑진개화운동에 가담하여 솔선단발(率先斷髮)하고 색의장려(色衣奬勵) 등으로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천도교 장로였던 그는 1919년 2월 25일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을 위해 서울에 갔다가,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을 만나 3·1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3월 1일 태화관에서 대한독립을 선포하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옥한 뒤 만주로 망명했으며, 1922년 7월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후 만주 일대에서 청년학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쟁취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다가 병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 한-중 해저광케이블 개통
우리나라 충남 태안과 중국 산동성 청도를 잇는 총길이 5백49㎞의 해저 광케이블이 1996년 2월 9일 개통됐다. 이번에 개통된 한·중 해저 광케이블은 한국통신과 데이콤이 1993년 6월부터 약4백억원을 투입, 건설한 것으로 초당 신문 8천8백 쪽 분량의 정보를 동시에 전송할 수 있는 5백60Mbps급 시스템 2개로 구성돼 있다. 또 각 시스템은 1만5천1백20개의 전화회선 용량을 갖고 있어 1만5천명 이상이 동시에 전화통화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과 중국간의 국제통신회선은 인텔샛(국제통신위성기구)이나 일본을 우회한 케이블망을 포함해 1천84회선에 불과, 양국이 심각한 통신회선 부족사태를 겪어왔다. 그러나 이번 한·중 해저 광케이블의 개통으로 모두 8천3백74회선을 확보함으로써 최근 급증하는 양국간 통신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됐다.
한-중 양국은 이날 두 나라간 해저 초고속 광케이블 개통식을 기념하기 위해 이 광케이블을 이용한 이수성 국무총리와 중국의 이붕 총리간 영상 대담을 10여 분간 가졌다. /조선
[1993년] 정주영 국민당 대표, 정계은퇴 ← 3월24일 총선에서 31석을 획득 손을 들어보이는 정주영과 통일국민당 의원들
1993년 2월 9일 기업인 출신으로 첫 대통령을 꿈꾸던 현대의 정주영이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국민당사 회의실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참석, 앞으로 정치를 하지 않겠다. 대신 경제를 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정계은퇴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가 정계에 입문하게 된 것은 노태우 정권 말기였던 1991년 1천600억 원에 달하는 추징금을 맞은 데 반발해 아예 당을 만들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다. 정주영은 국민당을 창당하고 2개월 만에 치른 1991년 3·24총선에서 31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제2야당의 자리를 굳혔다. 이어 총선의 성공을 바탕으로 대권도전에 나섰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국민적 불신감을 이용, 양김시대 청산을 외치며 정주영바람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특히 반값 아파트 공약은 당시로선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정치9단 김영삼에게 패해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1915년 강원도 통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947년 현대건설을 설립하면서 시작된 현장을 강조하는 도전정신에 대한 신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현대건설 출신이면서 정주영이 가장 총애한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는 2001년 3월 21일 별세했다. /매일신문 2008.02.09
[1881년]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 Fyodor Mikhailovich) 사망
1821. 11. 11 ~ 1881. 2. 9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1881년 2월 9일 사망했다. 신과 세속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한 그의 소설들은 ‘넋의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 문학만이 아니라 사상계 전반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그의 문학세계에는 농노제적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신질서가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시대의 모순에 고민하면서, 그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적으로 작품세계에 투영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은 다양한 상황속의 다채로운 인물들이 내는 다색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총체적으로는 내면적인 통일성으로 굳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1821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공병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싫증을 느끼고 때마침 출간된 발자크의 소설에 영향받아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젊은 시절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한 서클에 가입했으나 이 서클이 관련된 이른바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좌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황제의 특사로 감형돼 시베리아로 유배된 그는 4년간의 유형생활을 통해 공상적 사회주의자에서 슬라브적인 신비주의자로 사상적 변신을 하게 된다.
‘죄와 벌’로 시작되는 그의 말년 작품들은 주로 사회적-사상적-정치적 문제를 예민하게 반영시킴과 동시에 인간존재의 근본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특색을 찾을 수 있다. /조선
그 밖에
2007년 평생 지급하는 역모기지론 나온다
2007년 올 1월 세계기온, 116년만에 최고
2007년 박찬호, 연봉 300만불에 뉴욕 메츠 선발투수로
2007년 공군 보유 F-15K 전투기 이동중 왼쪽 날개 파손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개막
2001년 우리 나라 전국 144개 모든 통화권 지역을 고속 대용량(155Mbps∼5Gbps)의 광케이블로 연결한 초고속 정보통신망이 구축
2000년 한국 뇌사 공식 인정
2000년 주한미군, 독극물 포름알데히드를 용산기지 하수도로 방류(주한미군 사령부 7월14일 공식 인정)
1999년 빈민 운동가 제정구 의원 별세
1997년 아르테아가 부통령, 에콰도르 대통령에 선출
1995년 김종필 총재, 민자당 탈당
1995년 삼성전자 제2의 반도체 신화 창조한 TFT-LCD 양산 1라인 준공식
1992년 제16회 동계올림픽 개막(프랑스 알베르빌)
1988년 삼성반도체-금성반도체-현대전자-전자통신연구소 공동으로 4MD램 개발
1984년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공산당 서기장 사망
1983년 4대문안 재개발지구 고도규제 완전철폐
1982년 JAL 여객기 가와사키 앞바다 추락
1981년 폴란드 수상에 야루젤스키 취임
1979년 알제리 새대통령에 샤들리대령 취임
1973년 영국-프랑스, 동독 공식승인
1971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1967년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발효
1962년 정부, 충주에 제4비료공장 설치계획 발표
1960년 ‘자장가 변주곡’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도흐나니 사망
1957년 미국 5천kw 원자로 발전 개시
1950년 미국-영국-캐나다, 원자력회의 개최
1946년 소련 제4차 5개년계획 발표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일에 선전포고
1943년 미국, 주48시간 근무제 실시
1943년 일본 군인 카탈가나루섬에서 철퇴
1909년 독일-프랑스, 모로코협정 조인
1890년 네덜란드 건축가 오우트 출생
1874년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 사망
1865년 독일 지리학자 드리갈스키 출생
1859년 미국 오르간 제작자 호프 존스 출생
1788년 오스트리아, 터키에 선전포고
1773년 윌리엄 헨리 해리슨 미국 제9대 대통령 출생
1614년 영창대군 사망
1404년 비잔틴 제국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