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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66
11월6일[연중 제3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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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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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YKpPuAtp5I
[예수회 황대기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서대문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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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희망이 없어도 희망합시다!>
저 같은 경우 계절을 좀 앞당겨 사는 편입니다. 벌써 제 마음이 대림 시기로 건너가 있습니다. 부탁받은 특강 주제는 어떻게 할 것이며, 한 시간 남짓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머리가 복잡합니다. 여러모로 어렵고 힘든 순간임을 감안해서 희망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를 통해 성조 아브라함의 삶을 소개하면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자!’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저희 집에 꽤 광활한 농지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과태료가 부과되기에, 몇 가지 과일 묘목을 심었습니다.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며 식재를 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지요. 사는 게 바빠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했더니, 묘목들의 성장 속도가 너무 뎌뎠습니다. 시들시들 말라 죽은 친구들도 생겨났습니다.
괜히 심었나, 후회하면서, 아예 포기하다시피 했습니다. 별로 희망할 것이 없겠구나, 하는 마음에 덜 자란 묘목들에게도 많이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산책을 하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성장이 유난히 더딘 작고 말라 비틀어진 감나무 묘목에서 그럴듯한 감이 딱 두 개 열려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포기했었는데, 또 다른 희망이 생겼습니다. 올해는 거름도 더 챙겨주고, 가지치기도 잘 해주면, 내년에는 네 개가 열리겠지, 하는 마음에 새로운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참 묘하십니다. 우리는 포기했는데, 하느님은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내 인생은 실패야, 여기서 끝이야, 하고 좌절하지만, 하느님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말라비틀어진 인생이라고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네 삶이 아무리 비참하고 굴욕적이라 할지라도, 실망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인 로마서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게 들려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하느님의 생각과 우리 인간의 생각을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느님의 계획과 인간의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살레시오 협력자 회원 가운데 알렉산드리나 마리아 다 코스타(1904~1955)라는 복녀가 계십니다. 포르투갈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기쁘게 살아가던 한 작은 소녀였습니다.
14살되던 해, 안타깝게도 알렉산드리나는 결코 겪지 말아야 할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불순한 의도를 지닌 사악한 악한들의 공격을 피해 창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로 인해 그녀의 신체는 점점 마비가 심해졌고, 마침내 21살되던 무렵부터는 병상에 누워 꼼짝 못하게 되었는데, 그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창 꽃 피어나야 할 21살 나이에 알렉산드리나는 하루 온종일 자신의 방에 누워있어야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 운운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화가 치미는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알렉산드리나는 자신의 그런 비참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그야말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한 것입니다. 그 결과 놀라운 결실을 맺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했습니다. ‘고통당하고, 사랑하며, 보속하는 것!’ 더 놀라운 사실 한 가지. 그녀는 자신의 병고를 낫게 해달라는 기도, 치유의 기적을 청할 마음을 접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세상의 모든 감실 속에 갇혀계신 수인(囚人) 예수님과의 신비적인 일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알렉산드리나는 하루 온종일 자신의 방에 갇혀 지냈지만, 전 세계 수많은 경당을 순례하며 성체를 조배했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조언을 듣고, 그녀에게 기도를 청하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1955년 10월 13일에 선종했고,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녀를 시복했습니다. “저는 기도를 하는 동안, 세상의 모든 감실 속에 계신 성체 예수님 앞에 머문다는 지향을 가지고, 또한 제 영혼 안에 현존하시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를 흠숭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늘 기도하곤 했습니다. 오, 나의 예수님,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지요!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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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3CO-HqTp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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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랑을 알아보는 유일한 법>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나에게 보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지 말고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보답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내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는 일은 그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보상을 바라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보상을 요구한다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을 위해 사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닙니다. 제일 나쁜 일은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뱀을 위해 살면 나는 뱀의 소굴에 갇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내 안의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만을 사랑한다면 그건 사랑일 수 없습니다. 반드시 보답을 바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호텔과 부동산 재벌 레오나 헬름슬리는 2007년 사망하면서 자신의 말티즈 강아지 ‘트러블’에게 1,200만 달러를 상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두 조카에게는 한 푼도 상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트러블에 대한 사랑은 진짜였을까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며 개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개가 자신에게 무언가 주었기에 자신도 사랑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이 많은 사람임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면 그것은 형제만을 바라봐서일까요? 부모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마음이 아플까 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면 그건 분명 형제를 이용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도 있고 박수를 쳐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두고는 사랑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내가 부모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기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개는 주인이 위험에 처하면 어떻게 할까요? 자기부터 살고 봅니다. 아무리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어도 이길 자신이 없다면 도망칩니다. 이것이 그것들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가 누구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화 아바타의 줄거리입니다. 22세기, 인류는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판도라라는 위성에서 희귀한 광물 ‘언옵테이니엄’을 채굴하고자 합니다. 판도라에는 나비족(Na'vi)이라는 키가 크고 푸른 피부를 가진 원주민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자연과 깊은 연결을 하고 살아갑니다. 인간들은 판도라의 대기가 자신들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에, 아바타 프로그램을 통해 나비족의 모습을 한 유전적으로 조작된 아바타 몸을 원격으로 조종합니다. 전직 해병대원인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하반신 마비 상태로, 죽은 쌍둥이 형의 대체 인원으로 아바타 운용자로 판도라에 도착합니다.
제이크는 아바타를 통해 나비족 사이에 잠입하여 그들의 신뢰를 얻고, 광산 개발을 위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이크는 나비족 사이에서 살면서 그들의 문화와 생활 방식, 그리고 자연에 대한 신성한 존중을 배워 갑니다. 특히, 나비족 여성 네티리와의 관계를 통해 그는 나비족의 삶과 가치에 깊이 매료됩니다. 나비족은 제이크가 자신들을 이용하기 위해 자신들 속으로 잠입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믿어줍니다. 결국, 그는 나비족을 돕기로 결심하고 인간과의 전투에 나서게 됩니다.
제이크의 이러한 행동은 인간의 육체를 넘어 나비족의 아바타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이크는 신적 존재인 나무 에이와와 나비족의 도움으로 불구의 인간 몸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진정한 나비족이 됩니다. 제이크는 왜 인간을 배신하고 나비족이 되었을까요? 인간 사회에서는 사랑 받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도 있었고 자기에게 보상을 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믿는 어떤 신을 사랑해서 나비족만큼 자기를 위해주는 이들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이것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진짜 사랑입니다. 나에게 칭찬하거나 감탄만 하는 존재는 위험합니다. 창조자를 먼저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저 나만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다가오는 이는 가짜입니다. 우리에겐 우리 발을 씻어주신 하느님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 우리 존재 상승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 세상은 나를 칭찬하고 감탄할 수는 있어도 나에게 영광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영광을 주는 이는 아버지의 뜻 때문에 나의 발을 씻어주는 이고 그런 존재를 선택해서 사랑해야 이용 당하다 버려지는 삶이 아닌 참 존재의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존재를 잘 분별해서 그를 위해 살며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 우리 존재를 완성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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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영화 대사 중에 ‘무엇이 중헌디!’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한국에서 휴가 중에 우선순위로 정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의 묘소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연도를 바쳤습니다.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만나서 식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모두 모여 함께 미사를 하면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가족들 모두 기쁜 마음으로 절두산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동창신부님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바쁜 중에도 신부님들은 시간을 내 주었고,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82년에 만났으니 40년이 넘었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추억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미국에서 함께 지내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신부님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대구에서, 울산에서 반가운 얼굴을 보았습니다. 팬데믹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매일 새벽 기도하고, 복음묵상을 나누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꼭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새벽에 주님을 만나는 것이 소중한 시간이고, 기쁨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일 수 있습니다. 가치와 이념이 확고하지 않으면 쉽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공산 전체주의’와의 대결과 싸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분단된 나라에서 ‘정전(停戰)’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인에 대한 ‘압수수색과 수사’일 수 있습니다. 부패한 정치인, 부정한 정치인, 불법한 정치인은 우리 정치의 격과 수준을 떨어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민생’입니다. 민생을 외면한 이념, 민생을 외면한 대결과 투쟁, 민생을 외면한 압수수색과 수사는 ‘빛 좋은 개살구’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강력한 군사력과 월등한 경제력으로 팔레스타인들이 사는 가자지구에 분리장벽을 쌓았습니다. 삶을 위해 가장 필요한 ‘물과 전기’를 통제하였습니다. 정당한 절차와 조사를 거치지 않고 팔레스타인들을 체포하고, 구금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압도적인 힘에 의한 평화와 질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리장벽과 물과 전기의 통제 그리고 체포와 구금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난 80년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정말 더 중요한 것은 ‘자비와 사랑’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없는 통제와 억압 그리고 분리장벽은 ‘빛 좋은 개살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무엇이 중헌디!’에 대한 방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갑니다.” 권불십년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민족을 차별하고, 억압하고, 쫓아내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길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천 년을 나라 없는 서러움 속에 살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스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음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과 에사오가 화해하고, 평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도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콩과 콩깍지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듯이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도 같은 하느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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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4,12-14: 선을 베풀어야 할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사랑과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바로 당신이 공생활 중에 가난하고 억압받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가까이하셨듯이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하신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팔을 벌려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에 대한 보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모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정에서도 부모가 자녀들을 볼 때, 모든 자녀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모두 한 형제자매인 우리 중 어떤 자녀도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원치 않으신다. 진정한 형제애로 서로 나누며 살아가라 하신다. 나눔을 통하여 그 사람은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하여 더 큰 것을 얻게 되고, 영적으로 더 성숙하게 되며, 하느님께서는 더욱 풍성히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도 말했지만, 이 세상에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이 있는가? 거의 없다. 이 지상의 삶에서 쌓아두고 감추어 둔 것은, 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시에 인연을 마감하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따라, 그분이 그것을 나에게 맡겨주신 뜻에 따라서 올바로 관리하고 주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잘 사용하게 되면, 그래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나눈 것은 나의 죽음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모든 것이 나를 반기며 영원한 행복으로 초대할 것이다. 이러한 삶은 어떤 커다란 일이나 사건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매 순간 깨어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것은 아주 작은 사건이나, 별로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일에서조차 우리는 그것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나의 것을, 나의 시간을 그들과 나눔으로써 더 큰 성숙을, 기쁨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사랑과 봉사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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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창세 1,26-27 참조) 그리고 자유 의지를 주시어 모든 피조물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한과 그들을 다스릴 권한까지 허락하셨습니다.(창세 2,19-20 참조) 그런데 이러한 자유에는 반드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불순종할 자유까지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발견합니다. 인간의 불 순종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 의지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그분께서는 인간의 불 순종마저 당신 자비를 베푸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고백합니다. 한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누군가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 자신이 베푼 자선이나 선행에 보답할 수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은 인정받고 싶어 하고, 보상 받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인내심은 부족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현세적 보상을 바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오는 보상은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책임 있게 사용하는 그리스도인, 사람에게서 오는 위로와 인정으로 자신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먼저 추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 고통받는 ‘변두리 이웃’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때에, 당신께서 바라시는 방법으로 모두 갚아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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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ㄴ-14)
이 말씀은, “친한 사람들‘만’ 초대하지 말고 친하지 않은 사람들‘도’ 초대하여라.”, 즉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여라.”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에는 보답을 받기를 바라지 말고 무조건 실천하여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들은 너에게 보답할 수 없겠지만 주님께서 보답하실 것이기 때문에 너는 복된 사람이 될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행복’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구원’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행복할 것이다.’는 ‘복될 것이다.’, 즉 ‘구원받을 것이다.’입니다.> 그들이 보답할 수 없는 것이 ‘복’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이 ‘복’의 원인이 됩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는 ‘최후의 심판 때’입니다. 그래서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심판 때에 너는 의인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47) 울타리를 쳐 놓고서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주님과 함께 사랑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야고 2,1-4.8-9)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에서 ‘이웃’은 ‘모든 사람’입니다. 따라서 안 친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멀리하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죄가 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라는 말은, ‘날마다 큰 잔치를 열었다.’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부자가 그 잔치에 라자로를 불러서 자기 옆자리에 앉히고, 음식을 함께 먹었다면? 그랬다면 그것은 라자로에게 사랑을 베풀어 준 일이 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의 구원을 미리 준비한 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일에 부자가 라자로를 부르긴 했는데, 야고보서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 눈에 뜨이지도 않는 구석 자리에 앉혀 놓고서 손님들이 먹고 남긴 음식이나 주었다면? <춘향전에서 변 사또의 생일잔치에 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암행어사 이몽룡이 그런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걸인이 암행어사라는 것을 눈치챘다면 변 사또는 절대로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답’에 초점을 맞춰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3-35) ‘착한 사마리아인’은 순전히 ‘가엾은 마음’으로(사랑의 마음으로) 자기의 시간과 돈을 모두 들여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 비유는 바로 그런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사마리아인이 대가나 보상을 바라고 그런 일을 했다면? 그 일은 선행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일, 이익을 얻기 위해서 하는 장사나 거래가 될 뿐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인정을 결코 받을 수 없는 일,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고, 불쌍한 사람의 처지를 자기 돈벌이에 악용하려고 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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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거부한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불순종한 것은 하느님의 계획으로, 이방인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자비가 주어지고 나면 그들에게 다시금 자비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한 번 베푸신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결코 철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인이든 유다인이든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느님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식사를 베풀 때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권하십니다.
이 말씀은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을 식탁에 앉게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이웃의 경계를 자기와 가까운 사람으로 한정하지 말고, 더욱 넓히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자신에게 보상을 가져다주는 사람만 친구나 이웃으로 삼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를 이웃으로 삼고 그들을 식탁에 초대하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우리가 아무것도 요구할 것이 없는 이들의 목소리에 먼저 귀 기울이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먼저 더 배려하고 보살피라는 말씀입니다. 약한 이들을 먼저 선택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들만이 의인들이 부활할 때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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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네가 자선을 베풀 때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초대를 베푸는 이의 태도를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14, 12-13 참조)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에 대조되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은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제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도록 요청합니다. 이들에게 행한 은밀한 자선은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 4)
이는 단순히 초대한 이들에게 보답을 바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는 단순히 자선이나 시혜를 베푸는 인간애 차원의 선행을 넘어, 그 이전에 신앙행위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마태 14, 1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고통 받는 가난한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현존하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주었다.”(마태 25, 35)
이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하늘나라의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보다 곤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 안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210항)
또, 이를 “새로운 복음화”로 제시하며,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 사회, 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이다. ~이 선택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로라는 초대입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그리고 지난 2017년에 연중 제33주일을 “제1차 세계 가난한 이들의 날”로 발표하시고,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 18)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복음의 길로 나아갈 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곧 우리는 작고 가난한 이, 가난한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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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선한 행위를 할 때,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때로는 나의 선한 행위를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내가 어떤 일을 했으니 그에 따르는 보상을 기대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또는 상대방에게 대우해 준 만큼, 상대방도 나에게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행위를 추구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 청원 기도가 아닙니까?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달라는 청원 기도는 인간 마음의 어쩔 수 없는 표현이지요. 그렇지만 기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청할 것은 청하되, 그 결과는 하느님의 뜻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수난 직전 처절하게 고뇌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코 14장 36절)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할 일을 다 하고, 모자라는 것은 주님께 청하고, 그 결과는 주님 뜻에 맡겨야 하겠습니다. 비록 지금 당장 들어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해 나갈 때, 언젠가 주님께서 당신 방법대로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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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유유상종>
“성인의 무심한 은혜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은 자기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잘 안 됩니다. 내가 베푼 것은 꼭 기억하고 남이 나에게 베푼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베푼 것은 모래 위에 새기고 받은 것은 돌판에 새기라.’ 했지만,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보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14,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보답을 받지 못하지만, 우리가 베푸는 하나하나는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좋은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려자들을 위해 무료 급식을 하는 분이셨습니다. 본당에서도 한 달에 두 번 봉사활동을 가지만 그들을 돕는다는 것보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컸습니다.
매번 정성껏 마련한 150명분의 음식이 모자람이 없다는 것도 하느님의 안배였습니다. 행려자들 앞에서 목사님은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저는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구애 없이 말씀을 선포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을 생각했습니다.
그저 음식을 전해주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신 체면에 매여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화려한 잔칫상을 뒤로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분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가끔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왕래하며 사귄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만 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리고 요구도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모두를 품어주기를 주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소외된 이를 먼저 챙김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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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부터 제 바로 위의 형님과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얼굴도 비슷하고 키도 비슷했습니다.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다른 모습도 닮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형님처럼 공부도 잘하고, 악기도 잘 다루고, 또 각종 능력도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외모 외에는 닮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형님과 저는 네 살 차이가 납니다. 어렸을 때의 네 살 차이는 능력과 재주에서는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 차이로 어렸을 때 열등감이 생겼고, 소심해졌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뒤에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다르게 만드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일이 아닌 각자 다른 역할을 주신 것입니다. 서로 다르게 태어났으므로 우리 각자는 고유한 천직과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찾지 못할 때, 그리고 남처럼만 되려고 할 때 자기 삶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함은 참으로 큰 은총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은 공동체 일부가 되어 전체를 형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르게 만드신 하느님의 손길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나를 다르게 만드셨을까를 묵상해야 했습니다. 묵상 안에서 ‘나’ 같이 사는 자기 존재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면서, 하느님 뜻에 맞게 이 세상을 ‘나’답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보답을 바라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거저 주는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에 보답해 주십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업신여김과 천대를 받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참사랑을 베푸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다고 하시지요.
거저 주는 사랑을 베풀라는 주님의 말씀에 우리는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합니다. 주는 사랑이 아닌 받는 사랑에만 더 큰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받을 것만을 생각합니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왜 나는 남들처럼 능력과 재주가 부족하고, 남들처럼 가진 것이 없냐고 불평합니다. 그 ‘남’이 ‘나’가 될 수 없음에도 ‘남’이 되려고만 생각하면서 행복의 주인공이 아닌 불행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우리 각자는 다양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양함은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데 써야 했습니다. ‘나’답게 살아갈 때,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얼마나 기쁨 속에 살 수 있는 곳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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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초대>
루카 14,12-14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초대>
누군가를
당신 곁에
초대하려거든
그 사람의 재물이나
그 사람의 권력을
초대하지 않는 거랍니다
그 사람의 지위든
그 사람의 학벌이든
그 사람의 인맥이든
그 사람의 생김새나
그 사람의 그 무엇도
마찬가지랍니다
누군가를
당신 곁에
초대하려거든
그저
그 사람만을
초대하는 거랍니다
그리하면
오직 그러할 때에
그 사람을
당신 닮게 빚으신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기쁘게 오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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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사랑을 보답으로 받는>
줬다가 뺏는 것처럼 치사하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은 없을 것입니다. 어린이에게 돈을 줬다가 뺏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것은 숫제 주지 않은 것보다 나쁜 짓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은 것이고, 미성숙한 아이들이나 가끔 하는 짓입니다. 아이들은 친할 때 줬다가 삐지면 도로 달라고 하지요.
연인 간에도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지요. 좋아서 사랑할 때 패물을 선물했는데 싫어 헤어지면서 도로 달라고 한다지요. 아무튼 선물을 도로 달라고 하는 것은 사랑을 거둔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런 분이 아니라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은 사랑을 포기할 줄 모르는 분이시라는 말과 같은 말이고, 실로 포기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나 성숙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런데 보답을 바라는 사랑도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성숙한 사랑이 아니지요.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보답할 수 없는 가난한 이를 잔치에 초대하라고 하시며 더 나아가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실로 성숙한 사랑은 엄마가 아이에게 무조건 사랑하듯 보답을 바라고 사랑하지 않고 그저 넘쳐서 사랑하지요.
사랑이 넘쳐서 사랑하기에 보답이 없어도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기에 보답이 없어도 결핍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답을 바라는 것은 결핍이 있기에 사랑하는 것이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사랑하기에 보답이 없을 때는 불행하고, 사랑은 미움으로 바뀌곤 하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참된 사랑에 관하여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가 건강하여 보답해 줄 수 있을 때 그 형제를 사랑하는 만큼, 형제가 앓고 있어 보답을 받을 수 없을 때도 그만큼 형제를 사랑하는 종은 복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보답을 바라지 말아야 할 다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보답을 받지 않고 저세상에서 받을 것이고, 인간의 보답을 받지 않고 하느님의 보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저는 저를 반성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나의 사랑으로 자족하는 차원에서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느님의 보답을 그리 바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앞서 봤듯이, 보답을 기대했다가 보답이 없으면 미워하게 되고, 불행해지는, 그런 내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떻게 보면 고차원적인 이기주의이고, 사랑의 인격적 측면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무릇 신앙인이라면 이웃사랑을 사다리 삼아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고, 다른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만을 보답으로 바라는 사랑을 할 때 성숙한 신앙인이요 행복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사랑을 가르침 받고 꿈도 꾸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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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연민과 겸손의 바다같은 신비가>
-오, 자비와 지혜, 신비의 하느님이여!-
"주께서는 희생보다 자비를, 번제보다 지혜를 원하시나이다."
독서의 기도 세 번째 후렴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자비와 지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신비, 사랑의 신비, 삶의 신비, 죽음의 신비, 생명의 신비, 자연의 신비, 몸의 신비, 인간의 신비, 고난의 신비 등 끝이 없습니다. 모두가 신비이자 은총입니다. 도대체 신비 아닌 것이 없고 은총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런 신비에 대한, 은총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를 마냥 겸허하게 합니다. 신비의 원천인, 신비의 신비이신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게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끝 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교황님의 신학에 대한 언급이 참 신선했습니다.
“신학은 오늘날 세상을 위해 복음을 해석해야 한다. 신학은 추상적이고 이념적이어선 안되고 영적이어야 하는 훈련이다. 자신의 무릎을 꿇고 수행해야 하는 흠숭과 기도를 통해 잉태되는 초월적 훈련이요, 동시에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훈련이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의 신학자라면 기도의 사람, 사랑의 신비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가 신비가로 불림받았다 함이 맞습니다. 참으로 신비 감각을 키워야 할 우리입니다. 제가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 36년째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보는 하늘과 불암산이요, 제 간절한 소망이 담긴, 참 많이 인용했던 “하늘과 산”이라는 자작시입니다. 하늘은 하느님을, 산은 인간인 저를 상징합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시를 쓴 지 26년이 지난 지금도 외울 때마다 새롭습니다. 하느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소망하며 쓴 시입니다. 요즘 단풍의 곱기가 예전만은 못하지만 여전히 수도원 주위 풍경은 아름답습니다. 숙소문을 열었을 때, 집무실 문을 열었을 때 한눈 가득 들어오는 단풍 아름다운 풍경이 별세계 같습니다. 저에겐 하늘나라 체험이요 속으로 되뇌어 봅니다.
“이승의 세계가 이처럼 아름답다면 천국의 하늘문이 열렸을 때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승의 아름다움은 이런 천상세계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할 것이다. 이런 하느님의 천상고향에 궁극의 희망을 두고 살 일이다.”
아주 오래전 25년전 이맘때쯤 써놨던, 하느님이 그리울 때마다 자주 읊었던 “당신이 그리울 때”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
당신이 보고 싶을 때
눈 들어 하늘을 본다
한눈 가득 들어오는
푸른하늘, 흰구름, 빛나는 별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1998.11.22.
엊그제 복음의 내용은 “끝자리에 앉아라”였고, 오늘은 “불쌍한 이들을 초대하여라”입니다. 그대로 하느님 마음을 반영하는 예수님 마음입니다. 여기서 연상된 것이 가장 끝자리에서, 또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를 연상했습니다. 바다하면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 게 또 하나 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 것 같애”
어머님을 성모님으로 바꿔 산책 때마다 부르는 노래입니다. 연민과 겸손의 성모님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닮은 연민(compassion)과 겸손(humility)의 사람은 성모님처럼 바다 같은 사람입니다.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믿음은 주로 이해되어야 할 이상도, 도덕적 계명도 아니라 만나야 할 분이시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마음은 우리를 사랑으로 두드리시고, 그분의 눈은 우리의 고통을 연민으로 바라보신다. 천상으로 인도하는 겸손이다. 연민의 시선과 겸손한 마음을 청하자. 연민과 겸손의 도상에 있는 이들 위에 주님은 그의 생명을 주시며 죽음에 승리하게 하신다.”
정말 끝자리의 겸손을 선택하는 이들이, 불쌍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자비와 지혜의 바다같은 이들이 하느님을 닮은 바다 같은 사랑의 신비가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잔치를 베풀 때 친구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이 아닌 불쌍한 이들을 초대하라 하십니다. 그대로 바다같은 모습이요 이런 이들이 진정 하느님을 체험한 신비가들입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가 그 대표적인 분입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런 불쌍한 이들의 보호자는 바로 하느님입니다. 불쌍한 이들을 바다처럼 받아들이는 이들이 진정 하느님을 체험한, 하느님을 닮은 사랑의 신비가요 또 하나의 살아 있는 예수님입니다. 신비의 하느님께 경탄하는 바오로의 모습도 감동적입니다. 이방인들은 물론 궁극에는 유대인들까지 인류 모두의 구원을 내다보는, 모든 것이 결국은 잘될 것이라는 긍정적 낙관주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정말 대 신비가이자 관상가요 영성가인 바오로 사도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무상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은 우주의 창조주요 보호자요 목적이시요 우리의 시작이자 마침이 되십니다. 우리 존재의 신비, 삶의 신비도 이런 하느님을 통해서 비로소 해명됩니다. 이런 하느님을 잊을 때 무지와 허무의 늪에서 방황하다 그 인생 끝낼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께 바치는 흠숭의 찬미와 감사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은 연민과 겸손, 자비와 지혜의 신비가로 만들어 줍니다.
"실로 당신의 궐내라면, 천 날보다 더 나은 하루, 악인들의 장막 안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에 있기 소원이나이다."(시편 84,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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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14,14)
<보답!'>
오늘 복음(루카 14,12-14)은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14,12-14)
예수님께서 올바른 자선과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단식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러한 것들을 드러내지 말고 숨기라고 하시면서,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소외자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하셨고, 그래서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루카 7,34) 라는 별명을 얻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셨던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으면서 그분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가 아니라, 저세상에서 보답받으려는 사람들이고, 사람들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이들은 잠시 지나가는 여기에서 좀 손해 보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손해 보는 삶, 당신의 전부를 내어놓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로마 11,29-36)는 바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놓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자비를 입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고, 당장 이익은 눈에 보이고.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영원한 것을 향해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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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Iou7nIanIx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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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 13)
예수님의 마음을
맘껏 받는
오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가장 좋은
행복으로
오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반기는 이들은
오히려 가난한
이들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
떠나는 단풍의
아름다운
뒷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모든 것을
맞아들이시는
예수님의 초대는
그 어떤
답례도 바라지
않으시는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나오신 길은
초대의 길이며
오늘을 선물로
주시는 은총의
길입니다.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시며
사랑의 본분에
충실하신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버려진 이들의
아픔을
모르던
우리에게
당신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을
가장 밝게
가장 아름답게
바꾸어 놓으십니다.
아낌없는 사랑의
초대가 잔치가 되고
삶의 새로운
희망이 됩니다.
버려진 것은
부서진 것이
아니라
불러 모아야 할
예수님의
소중한 것이
됩니다.
보이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우리들 안에
있음을
일깨워 주시듯
버려진 이들을
초대하십니다.
아낌없는 초대
아낌없는 사랑에
응해야 할
우리들의
가난한 삶입니다.
그 초대에
함께하는
우리입니다.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오늘의 잔치
오늘의 만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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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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