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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의 생애(2)
전기
서주로 가다
이후 도겸과 조조가
맞붙던 도중 조조의 부친인 조숭이 도겸의 경내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다음 해 가을에
(193년 가을) 조조는 서주를 공격하여 도겸을 공격하였으며
10여 개 성을 점령하고 사방에서 도륙질을 했으며,
다음 해
(194년) 2월까지 이어서 학살을 벌인다.
(서주 대학살 참고)
팽성에서 패하고
담성에서 버티고 있던 도겸은 이에 동맹
관계였던 공손찬 휘하의
청주 자사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194년 2월,
전해는 이에 응하여 서주로 내려온다.
이때
함께 내려온 유비는 거기서 백성들과
군사를 모았다.
선주전에
따르면 유비는 서주에서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을 얻었다.
이는 서주 대학살 당시
다른 주로 도망치지 못하고 낙오된 난민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데,
사실 이건
신야성 탈출 당시 10만 명과 비슷한
일에 더 가깝다.
당시 유비 군도
상황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굶주린 수천 명을
거두어서 먹여살리고
전쟁터에서
그들의 보호까지 한다는 것은 오히려
짐짝이 늘어나는 격이다.
스케일만 다를 뿐
유비가 신야 탈출 당시에 보였던 그 담력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보였던 것이었다.
유비는
전해와 함께 그를 따르는 병사 천여 명과 잡다한
오환의 기병들을 데리고 내려왔다.(선주전)
향후
풀 한 포기들도 없는 북방의 진흙탕이
될 청주를 떠난 것이다.
이후 전해가
돌아간 후에도 유비는 계속 서주에
남게 된다.
이때
유비는 북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소패에 그대로 머문다.
도겸은
유비를 대단히 마음에 들어 했는지 그에게 4천 병력을
떼어주고 표를 올려 그를 예주 자사로 삼는다.(선주전)
조조의 군대 역시
전해가 와서 도겸을 구하려고 하기도 했고 마침
식량도 떨어져 귀환한다.
훗날 위의
구품관인 법을 제정한 진군은 예주 영천군(穎川郡) 출신의
호족으로 예주 자사 시절 출사해서 유비의 부하로 있었다.
이때 유비는
서주를 아우를 생각이 있었는데 진군은 그것을 꿰뚫어보고
"원술과 여포 때문에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디
서주로 가지 마십시오."라고
반대를 표했다.
후일 진군은
유비가 여포에게 패해 달아날 때 피란민이 되어 야인으로
지내다 여포 사후 조조에게 등용되어 위의 관료가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여름(무제기), 조조는 순욱과 정욱에게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도겸을 공격하여 다섯 성을 함락시켰고
낭야국,
동해군까지 공략하면서 가는 곳곳마다
다 부시고 없애면서 학살을 벌인다.
유비는
담현 동쪽에서 조표와 함께 조조와 맞서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한다.(무제기)
그 뒤
여포가 조조의 배후를 급습하여 조조가
회군한다.
이때쯤 유비의 부하였던
전예가 고향에 있는 모친의 연로함을 이유로
유비를 떠나게 되었는데
유비는 본인이
공손찬 휘하에 들어올 때부터 스스로 유비를
섬긴 전예를 보내면서 눈물을 흘렸고,
그대와
큰일을 같이 할 수 없게 되었다며 매우
아쉬워했다.(전 예전)
이후 전예는 위나라에서 대활약을 펼치게 된다.
서주 군벌이 되다
같은 해(194년) 도겸이
유비가 아니면 이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으니 유비에게
서주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여기서 만약
도겸이 병력을 더해주고 예주 자사로 추천해 서주 중앙에서
떨어진 국경 지대에 주둔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면
유비는
서주를 얻는 데 시간을 좀 더 쓰고
민심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여기서
병력을 더해준 건 도겸이 유비에게 해의가
없다는 명확한 의사표시고
서주 중앙에서
떨어짐으로써 서주의 정치 상황에 손쓸 틈도 없이
휘말려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안심하고
도겸의 진의를 탐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서주 사람들은
유비를 지지했고, 서주 대학살로 많은 호족들이
강동이나 강북으로 도망치는 와중에도
끝까지
서주에 남은 호족들 또한 유비를
서주의 지배자로 추대했다.
서주가
막장인 상태에서 조조 같은 거대 군벌이 언제
또다시 서주에 쳐들어와
헬게이트를
오픈시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지켜줄 능력자가 필요했다.
서주 호족들이
외부인인 유비를 추대한 것은 유비가 검증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겸이 죽자
그의 유언을 들은 서주 최고의 대부호 별가 미축은
서주의 백성들을 이끌고 유비를 영접했다.
유비는
백성들과 호족들의 추대에도 불구하고
거절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는
명분을 쌓기 위한 겸양과 자신을 서주 호족들이 받아들여줄지에
대한 반응을 확인해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유비는
임시 배속된 용병대장 같은 위치에 불과했고 서주
내부에 기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도겸이 죽을 때
무슨 의도로 그런 얘기를 꺼냈는지조차 알 수 없고 그걸 받아들였을 때
어떤 처지가 될지 확신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공융 같은
유명인사의 추천과 서주 호족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서주 대호족 중
하나인 진등이 "한실은 쇠하고 천하가 위태로운 데 반해
서주는 호구가 백만이라 풍요롭습니다.
대사를
이룰 수 있으니, 부디 사군께서 받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진등의 말은
거짓말로 서주 대학살이 일어나기 전에는 정말로 그랬지만 서주 대학살로
조조가 서주를 헬게이트로 만들어 당시 서주는 인 외 마경이었다.
그러자 유비는
사 세 오공의 명문 출신인 원술이 다스리면 어떻겠냐며
짐짓 겸양의 뜻을 보였다.
진등은
"공로는 교만하여 난을 다스릴 만한
주인이 아닙니다.
지금 사군을 위해
보기 10만을 모으려 하니, 가히 위로는 군주를 도와 백성을
구제하여 춘추오패의 업을 이루고,
아래로는 땅을 나누어
차지하여 변경을 지키며 그 공(功)을 죽백(竹帛, 당시 기록은 대나무를
쪼갠 것과 비단에 적었기에 나온 말이다)에 남길 만합니다.
만약 사군이
제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사군의 뜻에
따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외부인이기는
하지만 공융도 원술이 어찌 나라를 걱정할
사람이겠느냐고 하며
하늘이 유능한
그대에게 서주를 주는 것이니 받으라고
권하며 지지를 표했다.
그렇게 내외적인
지지를 확인한 유비는 서주 군벌이 되어 여포가 서주를
빼앗는 196년까지 다스렸다.
순욱전에 따르면
이 시기 조조가 연주를 여포에게 빼앗기고 서주를
다시 치려했는데 순욱이 반대하며
도겸이 비록
죽는다고 해도 서주는 망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패배를
거울삼아 결의를 맺고 단결하고 있다고 했으며
보리를 거두면서
성을 굳건히 하고 들을 비워 열흘도 안 되어 10만 병사들이
궁핍해질 것이라면서 서주 정벌을 반대했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서주는 외부의 적에 맞서 유비의 통치하에
일치단결 된 것으로 보인다.
서주 지배를 인정받다
진등을 비롯한
서주 사람들은 유비를 새로운 서주의 주인으로
삼는다며 원소에게 사자를 파견했는데,
"하늘의 재앙이 서주에 내려
도겸이 죽은 후 남은 백성들은 주인이 없어
간웅(조조)이 틈을 타
원소에게 해를 끼쳐
근심이 될까 두려워 옛 평원상 유비 부군(府君)을 함께 받들어
종주(宗主)로 삼아, 백성들이 귀의하고 있다,
지금 도적이 창궐해
갑옷을 풀지 못하니 삼가 하급 관리를 파견해 고합니다"
라고 표를 보냈다.
그러자 원소는
"유비는 고아하고 신의가 있어 서주 사람들이 그를
기꺼이 추대하니 실로 내 뜻에 부합하오."라며
하남에서
유비가 서주 군벌이 된 것을 받아들인다.
(선주전 헌제 춘추)
원소는 유비가
공손찬 용병 시절에 원소 군과 싸운 적이 있지만, 한창 싸우는
와중에 하등 상관도 없는 하남의 일을 해결한답시고
하북에서 멀리
하남까지 내려간 시점에서 유비가 더 이상 공손찬을
돕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것 같다.
원소 입장에선
마침 자기 휘하지만 서주 사람들이 적대하는 조조는
여포와 연주 쟁탈전에 정신없기도 했고
여차하면 경우에 따라
조조가 연주를 완전히 잃으면 조조는 완전히 자신의 휘하로
두고 유비와 손잡는 수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전에 자기의 적이었다는
이유로 계속 적대한다면 자칫 북쪽의 공손찬,
남쪽의 유비가 전처럼 힘을 합쳐
양쪽에서 압박할
가능성이 높아지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던 이유도 작용했을 거다.
사실 공손찬 문서에도
나오지만 193년 12월 유우 살해 이후 공손찬은
하북에서 급격히 민심을 잃고
유우 주변의
인재들을 숙청하고 사대부를 탄압하는 등 몰락의
시초를 끊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194년에 벌어진 서주 구원전 이후 유비가 도겸과 서주 사람들을 돕는 겸, 서주로 아주 이주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공손찬 입장에선 동문이 등을 돌렸으니 배신감이 들 만도 한 일이지만 정황상 유우가 처형당하는 장면을 보거나 가까이에서 소식을 접했을 유비 입장에서는 공손찬이 자기한테도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고 여겼을 테니 아예 서주에서 자기가 있어주기 원한다는 좋은 구실도 있겠다 자신만의 살길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서주 지배자가 된 유비는 할 일이 많았다. 서주 대학살로 인한 피해를 수복해야 했고, 회하의 원술이 서주를 노리고 있었으며, 서주는 방어적으로 불리한 땅이었다. 하지만 외부에서 유비를 하나둘씩 인정해주고 있었고 유비의 뛰어난 능력 때문에 내정도 금방 안정되어 외부적 요인을 제외하면 걱정할 것이 없었다.
한편 유비는 저명한 학자인 진기, 정현과 교류하면서 매번 그들이 가르침을 주어 치란의 도를 모두 언급했지만 사면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기 손건을 추천한 인물이 바로 정현이다.
노식/유비/원소 등과 연이 있는 정현이고, 정계에 별 관심 없었다는 정현이, 유달리 유비에게는 세상 다스리는 이치도 가르쳐주고 쓸 인재도 천거해주고 했던 데서 뭔가 형주의 사마휘 프로토타입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겠다. 유비는 이렇게 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천하를 다스리는 통치술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여포 등장
195년 여름 여포가 유비에게 의탁한다.
유비는 여포가 온 천하에 유명한 배신의 명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조라는 공공의 적이 있다는 점, 땅을 잃고 원술과 원소에게 거부당한 상황에서 유비까지 거부하면 여포가 서주를 공격할 수 있다는 점, 군웅할거 객장 문화에서 유비가 마땅히 거절할 만한 명분이 없다는 점 때문에 유비는 여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유비는 여포를 삼국지연의에서 소패(小沛)로 유명한[28] 예주 패국 패현으로 보낸다.
조조가 인정하다
이후 헌제를 맞이한 조조는 그를 진동장군, 의성정후로 높여준다. 협천자를 막 한 당시의 조조는 내외적으로 수습해야 할 게 많아서 신흥 군벌인 유비까지 적대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진동장군은 조조가 헌제를 받아들이면서 196년 6월에 받은 직책으로 이후 9월에 조조는 대장군이 된다. 따라서 이 일은 196년 9월 이후의 일이다.
서주를 잃다
196년 가을경 유비는 서주를 노리던 원술과 싸운다. 원술은 "내가 여태껏 유비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없는데 뭐하는 놈이냐."라고 무시하지만 유비를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해서 여포를 부추긴다. 이를 보아 유비는 원술을 상당히 밀어붙이던 것으로 보인다.
유비와 원술은 둘 다 동탁 토벌전에 참가했지만 당시 총사령관에 준하는 위치였던 원술과는 격의 차가 심하게나 정말 몰랐었을 수도 있고[29], 이후 공손찬 휘하에서 명성을 키웠어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허세를 부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하비상이자 성문 교위를 맡은 조표는 유비의 서주 지배를 반대했다. 여포를 따라 망명하던 연주 호족인 진궁은 조표와 결탁해서 여포를 앞세워 서주를 침공한다. 당시 서주는 장비가 지키고 있었는데 장비는 조표와 마찰이 커서 조표가 통수친 원인 중 하나였다. 조표의 모반을 안 장비는 즉시 조표를 죽인다.
하지만 조표로 인해 여포군들은 이미 성에 들어오고 있었고 여포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단 양병들만이 저항하고 있었다. 결국 만인 지적인 장비조차 어쩌지 못하고 패배하고 유비는 서주로 돌아왔지만 병사들이 곧바로 궤 주하는 바람에 해서(선주전), 서주 광릉 군(廣陵郡)(영웅기)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수습해 원술과 싸웠지만 패배한다. 결국 유비는 서주 광릉군 해서 현(海西縣)으로 군대를 돌리게 된다.
유비에게 이 사건은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표는 도겸의 구장으로 그가 도겸의 출신 지역 병사들이자 정예들인 단 약병을 이끌고 있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서주 호족이라기보다는 구 도겸 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즉 이 사건은 서주 호족이 벌인 사건이 아니라 유비 이전에 서주 군벌이었던 도겸 세력이 자신들이 아닌 먼 하북에서 온 유비가 서주를 장악한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서주 호족들은 유비 편이었는데 서주 대호족 미축은 자신의 여동생(미부인)을 유비의 부인으로 들이고, 노객 2천 명과 금과 은 및 재물로 사재를 털어 군자금을 보탰다. 이때 유비는 곤란하고 궁핍했으나 미축의 도움에 힘입어 다시 떨칠 수 있게 되었다. (미축전)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는데 영웅기에 의하면 광릉에서 원술에게 패한 후 보급이 어려워지자 유비의 대소 관료들과 군사들이 서로를 잡아먹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음력으로 9월경에 진동 장군 직을 받고 곧바로 서주를 여포에게 강탈당했으니 바로 겨울이 닥쳐온 것도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 와중에도 젊은 시절의 협객 기질은 여전했는지 197년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서 헌제를 잃은 후 막장이 되어 떠돌아다니며 노략질 중이던 양봉과 한섬을 살해한다. 영웅기의 기록에 따르면 유비의 땅에서 여포의 명으로 이 두 사람이 보리(麥)를 취해 군자금으로 삼았다는데 이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때 유비는 양봉과 면담하기로 하고는 그 자리에서 잡아 죽였고, 한섬은 양봉을 잃자 병주로 달아나다가 장선이라는 사람에게 살해된다. (동탁전) 물론 근처에서 알짱거리면서 거슬리게 하는 도적떼 따위를 살려둘 이유는 없지만 말이다.
예주에서 내몰리다
유비는 서주 광릉군에서 식량 사정이 곤궁해지자 서주 군벌이 된 여포와 화목하였고, 여포가 사로잡은 처자를 돌려받았다. 유비 군은 과거 여포에게 내준 곳인 예주 패국 패현, 곧 소패에 자리 잡게 된다.
유비가 패현에 머물자 1만 명의 병력이 유비 휘하에 모여들었는데 유비가 서주뿐만 아니라 예주에서도 인망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자기 영지는 잘 다스리는 유비의 특성상 서주뿐만 아니라 소패도 잘 관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여포에게 예상 밖의 일이었을 것이며, 유비의 세력이 커진 것을 경계한 여포가 친히 유비를 공격해서 유비는 소패를 떠나야 했다.
전중기
조조에게 귀순하다
유비는 여포에게 밀려난 뒤 과거 동탁 토벌전에서 함께했고 하북과 서주에서 맞붙었던 조조에게 귀순한다. 유비가 조조에게 도착하자 정욱이 유비를 죽일 것을 간언하나 조조는 이를 거부하고, 유비를 예주목으로 삼아 예주 패에 머물게 한다.
(선주전) 조조는 유비가 가지고 있던 영지인 예주 패 땅이 여포에게 넘어가자 유비를 앞세워서 자신이 꿀꺽하려던 것이 아닌가 싶다. 유비는 예주 패[31]에 머물면서 흩어진 병사들을 어떻게든 모으려고 했고, 조조는 유비에게 군사와 군량을 보태 여포를 공격하게 했다.
여포는 패에 머물던 유비를 공격했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유비가 조조의 도움을 받아 예주 패 땅을 되찾는 데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여포에게 공격당하다
198년 봄 영웅기에 따르면 유비군이 여포군의 군마를 약탈했다는 이유로 여포가 먼저 선수를 쳐서 장료와 고순을 보내 패성을 공격한다.(선주전) 이에 유비는 두 번이나 곤궁한 처지에 몰렸다가 수습한 병사들로 몇 달을 넘게 버텼고, 조조 역시 원군으로 하후돈을 보내지만 고순에게 패한다.
결국 9월에 유비는 격파되어 홀몸으로 달아났고 고순 등은 그의 처자식을 사로잡았다. 이때 선주전 영웅기 주석 원문에 '九月,遂破沛城,備單身走,獲其妻息'라고 쓰여 유비가 처자도, 군대도 챙기지 못하고 대패하여 단신으로 도망갔음을 알 수 있다.
관우와 장비 등은 이후 유비를 따라간 흔적이 보이기에 유비는 혼자 도망치고 나중에 관우, 장비, 간옹, 손건, 미축 등이 합류했다거나 했을 가능성이 높다.[32]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조가 직접 출병한다. 10월, 예주 경계에서 도망친 유비를 만난 후 곧 여포를 공격한다. 유비는 조조군을 따라 서주 하비국(下邳國)을 공격한다. 무제기에서는 여포 정벌의 주체를 일관되게 조조로 서술하고, 선주전에서는 조조가 몸소 동쪽으로 가 유비를 도와 여포를 하비에서 포위하고, 그를 생포했다고만 나온다.
서황이 별도로 군을 이끌고 여포의 장수 조서, 이추 등을 항복시키고, 진등과 진규 부자가 광릉의 군사를 이끌고 조조에게 합류하는 와중에 유비의 구체적인 행적은 단신으로 도망쳤다 예주 양국에서 조조와 만난 후 그를 따라가 최종 목적지인 하비국에서의 행적만 나오는 걸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이 당시 패성에서 유비가 얻은 병사 상당수는 원래 조조가 보태준 병사들이었고 유비가 단신으로 도망하여 간신히 조조군에 들붙어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병력없이 소수 측근과 함께 조조군 진영에서만 머물렀을 가능성도 높고, 실제 수습했다고 해도 유비 휘하의 직속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여포를 죽이다
여포가 붙잡히고 유비는 처자를 되찾았다. 여포의 처우를 결정할 때 여포가 비굴한 태도를 보이며 유비를 현덕이라고 부르며 살려달라고 빌자 조조가 처음에는 웃으며 왜 명사 군(유비)에게 애원하냐며 맥인 후 이번엔 여포가 조조에게 자기를 기병대장으로 삼으면 도움이 된다며 애원하자 잠깐 고민한다.
그러자 유비는 조조에게 "명공께서는 여포가 정 건양과 동 태사를 섬길 때 모습을 못 보셨습니까?"라면서 여포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죽일 것을 암시했다. 그러자 조조는 여포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후한서 여포 열전에서 여포는 유비를 노려보며 "귀 큰 놈이 제일 못 믿을 놈이다!"라고 말하며 목이 매달린다.
한때 여포빠들과 촉까들이 이 부분을 들먹이며 유비를 음흉한 위선자라고 비난했는데, 연의나 정사나 갈 곳 없던 걸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받아줬더니만 빈집털이라는 빅엿으로 보답했으며, 이후에도 트집을 잡아서 재건을 시도하는 유비를 박살 내서 유비는 서주 대학살 시절 적이던 조조에게 의탁하고 말았다.
따라서 유비가 여포를 용서하는 것은 그야말로 호구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만큼 여포에게 쌓인 감정이 결코 적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단순히 감정 때문에 여포를 죽였다고 할 수 없는데, 여포는 그 인성과 돌머리와는 별개로 기마술이 뛰어난 맹장이라서 조조라는 먼치킨 휘하에서 통제받으며 활동할 경우 두고두고 유비를 괴롭힐 가능성이 높아서 후환을 없앴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유비는 조조와 함께 허도로 되돌아온다. 조조는 유비에 대한 예우를 매우 두텁게 하였는데, 심지어 나갈 땐 유비와 같은 수레에 타고 앉을 때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화양 국지에 따르면 유비는 허창으로 돌아와 좌장군이 되었고 조조는 유비에게 경의를 표하고, 대단히 중히 여겼다.
또한 관우, 장비 두 사람도 중랑장이 되었다. 조조의 모신 정욱과 곽가는 유비를 살해하자고 권하였으나, 조조는 뛰어난 인물들의 신용을 잃는 것을 우려하여 허락지 않았다.
좌장군이 되다
조조는 조정에 표를 올려 좌장군으로 삼는다. 조조에게 얻은 '좌장군 영 사례교위 예/형/익 삼주목 의성정후'(한중왕 즉위 표문)라는 유비의 직함 중 처음 오는 좌장군 직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좌장군직은 장합과 우금의 커리어 하이[33]로 조위 최고의 무장인 오자양장 모두 사방 장군에서 더 올라가지 못했다. 대장군, 거기장군, 표기장군, 위 장군이라는 사대 장군과 사정 장군/사진 장군이 품계상 위다.
하지만 사대 장군으로 가면 무관이라고 볼 수 없는 권력 중추로 1인자와 국정 운영을 면밀히 논의해야 하는 위치다. 국경을 책임지는 전선 사령관 급인 사정 장군과 사진 장군은 군벌이 난립하는 후한 말부턴 서량의 마등 같은 지방 군벌을 달래는 용도로 전락한 상태였다.
원소가 중국 최강의 세력으로 건재하여, 코앞의 하북에도 지배권이 닿지 않았던 조조 정권의 사정을 고려하면 좌장군이라는 직책은 조조가 유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높은 직책을 준 것이다. 당시 유비의 나이는 삼십 대였고, 유비가 조조에게 귀순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조조군 내에서 눈에 띄는 공적을 올린 적도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특이한 부분이다.
물론 장군직은 항상 능력/커리어로 주는 건 아니고, 이런저런 정치적 고려가 따른다. 유비는 대 원가 견제 라인이었던 공손찬의 휘하 이력이 있고, 도겸이 예주목으로 올린 바 있으며, 한때나마 서주라는 하나의 주를 다스렸던 인물이다. 그런 부분들을 '예우'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공손찬은 원소에게 줄곧 밀리며 패망 직전이었고 군벌로서의 근거지였던 서주는 2년 만에 여포에게 빼앗겨 빈털터리 신세로 맨몸으로 조조에게 의탁한 비참한 신세였다.
유비가 가진 거라고는 양질의 장교단 정도인데 그래봐야 수가 너무 적어 장패나 이통 같은 독자세력화한 군벌들과 비길 정도가 아니었다. 유비 밑의 막료라고 해봐야 관우, 장비, 미축, 미방, 진도 정도. (조운별전에 딱히 모순된 내용이 없으므로) 조운조차 없었다. 이들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리 적어서야 좌장군이라는 벼슬 값이 나오기 힘들다.
더군다나 이게 단순한 예우성 관직이 아님은 바로 드러나는데, 조조는 전날의 공손찬이나 뒷날의 원소, 유표처럼 유비를 적극적으로 써먹으려고 했다. 황제를 참칭한 한 황실의 '에네미 오브 더 스테이트' 0순위였던 원술 토벌을 위해 조조는 유비에게 군대와 부장까지 딸려 파견했다.
나중에 곽가와 정욱이 왜 그랬냐고 조조를 들볶는데 이는 곧 유비에 대한 우대가 조조 본인의 의지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조조는 허도로 되돌아 와 표를 올려 유비를 좌장군으로 삼고 그에 대한 예우가 더욱 중해졌는데 평소 출행할 때 같은 마차에 타고 같은 자리에 앉았을 정도로 유비를 중히 대했다.
보통 조조에 대해선 관우에 대한 극진한 예우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시초는 유비였던 것이다. 심지어 논영회에선 조조는 유비를 '사군(使君)'으로 높여주는 한편, 반대로 자신은 '이 조조(操)'라고 본명을 불러 스스로를 낮추고 있다. 조조가 유비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유비가 이 얘길 듣고 얼마나 당황했을지 알 법하다.
결국 조조는 '좌장군' 유비를 군부의 2인자까진 아니더라도, 여하튼 일군의 사령관으로 (유비와의 연회에서 스스로가 영웅은 자신과 유비 둘뿐이라고 인정했듯이) 그 능력을 인정하고 유용하게 써먹을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까놓고 말해 이것만으로도 이미 유비는 난세에나 가능한 벼락출세를 한 거고, 이대로 그냥 눌러앉아 적당히 활약했어도 명장으로 열전에 남았을 것이며 여기서 만족하기만 했어도 조조의 부하로서 안락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선주는 포부가 크고 굳세고, 너그럽고 후하고 사람을 알아보고, 선비를 잘 대우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임금과 신하 관계의 지극히 공정함은 고금의 아름다운 본보기다.
기지와 임기응변, 재능과 모략은 위무제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진수
그러나 유비의 야심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고 때마침 천자인 헌제가 기획한 의대조 사건이 터지면서 유비는 조조와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된다.[34]
하지만 조조의 그릇이 유비를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는 평판을 생각할 때, 이들의 결별은 피할 수 없던 걸지도 모른다. 당장에 진수부터 "유비는 항상 조조와 반대로 행동하였다. 조조와 하는 행동의 반대의 행동을 하여 세력을 구축하여 대항하였다. 이러한 유비의 행동은 그가 조조에게 대항하여 이득을 챙기기 위한 것보다는 조조가 자신을 받아들일 그릇이 아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이때 조조가 유비를 실질적으로 중용하려고 통 크게 내려준 좌장군 자리는 결국 조조에게 등을 돌린 유비에게 한나라 중앙 조정의 권위를 업혀준 꼴이 되어 유비가 조조와 대항할 때 잘 써먹었다.
이것이 잘 증명된 것이 적벽대전 때다. 원가를 멸족시킨 후, 조조는 황제 놀음을 하던 유표를 협천자를 위시한 한실의 권위로 반신불수로 만들었는데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유표가 꺼내든 카드가 유비였지만 유표는 유비가 세력을 키우는 것을 두려워하여 크게 쓰지 못했다. 정작 지방 토후에 지나지 않는 손권을 상대로 적벽대전을 치렀을 때 손권은 유비와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게 안 먹혔다. 협천자에 하북과 오환을 평정하여 형주를 거저 집어삼킬 정도로 조조의 권위는 어마어마했지만, 한실 종친 + 중앙에서 정식으로 제수한 좌장군 + 헌제에게 조조를 치라는 밀명을 받아 관직인 좌장군이 중앙정부가 내린 작위 같은 권위가 된[35] 유비를 상대로는 통하지 않았다.
본래라면 '중앙 정부의 지역 토후 진압' 정도로 정의될 간단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좌장군이라는 굵직한 직함을 달고 있고 의대조 사건으로 한층 권위를 부여받아 황제의 인가를 받은 한실의 수호자이자 반 조조의 상징이 된 유비가 손권과 손잡자 상황이 달라진다.
손권과 노숙, 주유는 유비를 앞세워 원소가 처음 만든 프레임을 재활용한 '황제를 쥐고 한실을 농단하는 역적 조조에게 맞서는 정당한 싸움'으로 만들었다. 제갈량이 오나라의 손권에게 유세할 때 유비는 한 왕실의 후예인 만큼 조조에게 항복할 수 없고 손권이 유비가 아니면 조조에게 대적할 수 있는 자는 없다고 한 것도 이런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이용해서 손권은 조조의 프레임에 맞설 수 없다는 이유로 항복을 주장한 양주 호족과 서주 호족의 의견을 묵살시키고 조조와 적벽에서 싸우게 된다. 적벽대전 당시 유비도 적극적으로 싸웠지만 무제기에서 조조가 상대한 적을 '유비'로 기록하고 정작 쳐들어간 손권, 주유는 거론도 안 하는 건 이 때문이다. 다만 싸움 당시 양주 호족이 손권을 안 도와줘서 유비 병력과 주유 병력이 2만으로 동일했기 때문에 양주 군벌에 지나지 않는 주유보다 전국구 명성을 가지고 있는 유비가 우선시된 측면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반평생 잘 써먹은 좌장군 인수는 '한중왕 즉위표문' 올리는 김에 첨부로 딸려보내 반납해서 유비의 조조 상대 트롤링의 절정을 찍는다.
여담으로 이후 조조가 원상의 목을 보낸 공손강을 좌장군에 임명했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인사 정보가 전산망으로 컨트롤되는 시대도 아니고 도장 주웠다고 황제까지 하는 사람이 있는 시대니, 정식으로 자리를 반납한 것도 아닌 유비 입장에서는 응 무효~ 하면서 그러든지 말든지 무시하고 계속 좌장군 관인을 쾅쾅 찍어댔을 것이다.
실제로 유비의 좌장군부는 이후에도 쭉 계속 운영되었고, 애초에 요동 공손씨 정권도 일족 자체가 황하 이남 사람들은 들어볼 일도 없는 북녘 땅 반 독립 세력에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들이다. 어차피 유비랑 손 잡는 사람들 모두 반 조조인 이상 나 믿을 거야 유좌장군 믿을 거야 식이었으니 역시 의미가 없었다.
실제로 원상이 잡혀 죽은 뒤인 유비의 형주목 취임 때도 '유비는 좌장군의 신분으로 형주목을 겸임하고 공안에 주둔했다'(주 유전)이라고 쓰고 있고 입촉 때도 '성도가 평정되자 제갈량을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삼고 좌장군부(左將軍府)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서좌장군부사 署左將軍府事)'(제갈량전) 한중왕표에도 '(한중왕에 올랐으니) 좌장군과 의성정후의 인수를 반환합니다'(선주전)라고 썼다. 진수조차 주변 군벌이나 부하들, 유력인사들이 유비를 실제 좌장군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비의 가치
조조가 유비에게 이렇게 잘 대해준 이유는 별거 없다. 당시 조조가 유비에게 가진 감정은 논영회를 보면 알 수 있다. 조조가 유비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수하에 넣어 대업의 한 축으로 잘 써먹으려다가 유비에게 속은 것. 정욱과 곽가가 유비의 뭘 믿냐면서 유비 기용을 반대하고 오히려 죽이자고 하 할 때도 밀어붙일 정도였다.
물론 유비가 처신을 잘 해서 조조가 껌뻑 속아넘어간 것도 있기는 하지만. 후일 조조가 이통이나 장패 등의 반독립 군벌을 중용하면서 이들을 유용하게 썼는데 유비의 용도는 그것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저들보다 넓은 서주의 영토를 한동안 호족들과 백성들의 인심까지 한 몸에 얻어 가며 지배할 정도로 강력한 정치, 군사 지도자로서 성장한 유비를 일종의 유니크 레어 카드로 보았다 할 수 있다.
유비의 군사적 능력은 당대 제일은 아닐지언정 분명 우수한 지휘관이자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군인이었다. 군웅할거 시대 유비가 의탁한 사람 내지는 힘을 빌리려던 자들인 공손찬, 도겸, 조조, 원소, 유표, 유장 모두 유비 세력을 최전방에 보내서 적을 방어하는 일을 맡기거나 맡기려고 했다.
유비는 열악한 시절에도 관우와 장비, 진도와 미축같은 양질의 장교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특히 관우와 장비는 이때부터 이미 군웅들 사이에 명성이 자자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 유비 하나를 관리해 이들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은 꽤 매력적인 미끼였다. 유비에게 강경한 입장이었던 주유도 부귀영화로 유비의 눈을 멀게 하고, 자신이 관우와 장비를 다루면 패업을 이룰 수 있다고 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즉 유비는 요즘 말로 하면 '우수한 용병단 두목'이었고, 유비 세력은 '당대 제일 가는 신용도의 용병단'이며, 유비를 받아들인 군벌들은 '용병 고용주'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유비는 당대 제일 가는 신용도에 걸맞게 최전방 용병으로 활동하며 조조와 유장을 배신한 사례를 제외하고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나머지도 싸움이 끝난 다음 도망친 경우는 있어도 싸우는 중에 배신하진 않았다.
당시 원소가 아직 잘 나가던 시절로 원소와의 싸움을 준비하던 조조에게 있어 어디로 보내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유비 세력을 우대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서주로 보낸다.
원소와 조조가 붙은 주 전선은 (황하를 사이에 둔) 기주와 연주로, 관도대전도 두 곳의 경계지역에서 발발했다. 하지만 여포를 죽이고 손에 넣은 서주 또한 원소가 원담을 보내 다스리던 청주와 맞닿은 전선 지대라서 중요도가 덜할 뿐 신경을 써야 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서주 대학살이 벌어진 지 겨우 5~6년 정도밖에 안 된 상황에서 서주 호족과 백성들이 조조를 지지할 리가 만무하다.
반면 유비는 2년간의 서주 군벌 시절 서주 호족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청주와의 경계에 주둔시켜 원가의 좌익을 견제하게 만들 수 있다. 실제로는, 차주의 죽음과 유비의 배신 이후 이런 역할은 장패가 맡게 되고 그 역시 맡은 바 일을 잘 해낸다만, 유비 쪽이 장패보다 더 잘 수행했으면 수행했지 못할 이유는 없다.
•형주로 보낸다.
유표는 한실 종친이면서 천자의 의장을 쓰고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등 황제 놀음을 하고 있었다. 조조는 유표를 원술과 같은 역적으로 규정하면서도 하북의 원소 때문에 건드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시기에, 군사적 충돌이 벌어져도 충분히 대응할 기량을 갖추고 있으면서 역시 한실 종친인 좌장군 유비는 매우 매력적인 카드였다. 하북평정 이후 같은 막강한 권위는 아직 없었던 조조지만 한실 종친인 유비를 보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같은 유씨인 좌장군님은 한실을 위해 이리도 불철주야 노력하거늘, 부끄럽지도 않느냐 이노오옴!!"하는 프레임이 자동으로 짜여진다.
•하북과의 싸움에서 선봉장으로 세운다.
유비는 현 베이징, 톈진 일대인 유주 탁군 탁현 출신으로 서주로 내려오기 전에는 유주, 기주, 청주 같은 북방에서 주로 활동했다. 또 청주 평원군에 머물던 시절에는 공손찬의 부하 노릇을 했다. 길잡이로서의 가치가 있고, 원소에게 귀순하지 않은 공손찬의 잔존 세력을 유비를 통해 포섭하는 것도 가능했다.
개중에는 조운과 전예라는 A+급 인재도 있었다. 전투에서도 믿음직했다. 관우 혼자 백마 전투를 휩쓸었는데 조조의 지원을 받는 유비가 지휘하는 만인지적 2명이다. 그 인재 많은 조조 아래도 이만 한 카드 없다.
이 주제와는 상관없지만 하북을 평정하고 고향 유주로 돌아가는 것도 유비 개인으로서는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 시절 집안 기둥뿌리 뽑아먹어가면서 한량짓 하던 말썽쟁이가 좌장군으로 금의환향해서 집안 어른들과 고향 노인들에게 효도와 보은하고, 장세평과 소쌍이 살아있으면 말값도 갚는 등.
•황실과의 커넥션에 사용한다.
이렇게 외부 전선으로 안 굴리고 조정에 놔도 쓸모 있는 게 유비인데 유비는 한 고조의 직계 후손 중 한 명으로 황실과 같은 유씨 출신이다. 천자 유협에게 유비의 존재로 안심감을 주며 조조와 황실과의 관계 개선에 사용할 수 있다.
연의에서처럼 황숙 황숙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치더라도 어쨌든 '유씨 성의 고위 장군'으로서 위축되어있던 천자 유협에게 일말의 안심감을 주며 조조와의 관계 개선을 도와줄 수도 있었고... 물론 헌제 역시 이런 유비의 중요성과 상징성을 인식한 탓에 의대조 사건을 꾸며 '고위급 장군을 역임한 황족이 역적 조조를 치고 황제를 보위하고 있다' 프로파간다로 쓰려했고 유비가 이걸 이용해 조조와 대립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냈다.
•호족과의 커넥션에 사용한다.
유비의 스승인 노식은 청류파를 자칭한 호족들에게 존경받던 당대의 명사로 노식의 제자였다는 인맥을 이용해 조조와의 연결고리를 더하는 게 가능하다. 당시 한 조정에는 각지의 호족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조조 정권도, 훗날 조씨가 세우는 위도 군벌과 문벌 귀족이 되는 호족과의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조는 생전 호족들에 대한 학살과 숙청도 곧잘 벌여서 호족들에게도 평판이 좋은 편이 아닌지라 서주 대학살 때 본거지 연주 호족들이 조조의 뒤통수를 친 전적이 있고, 조위는 5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상상 이상으로 많은 호족 반란을 겪어야 했으며 훗날 위를 배신하고 사마씨의 진을 편들면서 명불허전임을 입증했다.
물론 이런 장점들은 모두 유비가 조조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그 때문에 당시 조조는 장비와 미축을 비롯한 유비의 수하들에게도 높은 관직을 내리고, 특히 장비는 하후씨와 혼인시켜 인척으로 삼는다. 이는 조조가 유비 세력을 와해하는 것과 더불어 유비 세력들 개개인을 자신의 수하로 부리고자 했던 목적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부하들은 죄다 유비가 조조를 배신할 때 유비를 따라가서 무용지물이 된다.
아무튼 이렇게 쓸모가 많으니 조조 입장에서는 유비를 어디다 부려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런 유비를 포섭하기 위해 좌장군직까지 덥석 내주고 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고, 조조에게는 그저 희망 회로로 끝났다.
유비는 부탁받은 대로 원술을 죽이자마자 이제 볼일 끝났다면서 자신의 뒤통수를 쳐서 서주를 장악하고, 2개월 만에 유비를 서주에서 내쫓았더니 원소에게 빌붙어 관도대전 때 양동 작전을 맡아서 예주가 뒤통수를 치게 만들고, 유표에게 빌붙어 쿡쿡 찌르고, 양주 손가와 주가 군벌과 합세해서 적벽대전에서 강동 점령 실패, 형주 남부와 익주 차지, 한중 공방전에서 한중 강탈하고 한중왕 참칭 등 마지막까지 자신을 방해했다.
이랬으니 조조가 유비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을지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 유비를 서주에서 놓쳤다는 이유로 주령에게 갑질을 할 정도다. 한편 1세대 군벌 최후의 생존자들이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조조는 자신의 생애에 유비를 자신의 맞수이자 최후의 적으로 인정했다. 손권의 경우에는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아래인 2세대 출신이고 "아들을 둔다면 그만 한 인물을 둬야 한다."라고 한 점에서 알 수 있듯 좀 잘 나가는 애송이 수준으로 취급했다.
조조 휘하
뭔 이유가 있든 유비는 당시 조조 밑에서 잘 지냈고, 장패에게 사신으로 보내어 자신을 배신한 장수들을 인도할 것을 요구하는 임무를 주기도 하였다.(장패전)
의대조
그러던 중 유비는 헌제의 밀조를 받은 동승과 만나 황제의 밀명을 받들게 되고 이에 몰래 동승, 왕자복, 충집, 오자란 등과 조조를 죽일 것을 공모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유비는 원술 토벌에 종사하게 되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 실패할까 봐 도망 갔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엄연히 '때 마침 사명을 받아 실행하지 못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선주전), 유비가 출정한 것은 199년 6월, 동승이 처형당한 것은 200년 정월로 약간이나마 시간차가 있다.
유비의 속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유비는 그 명분을 이용할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유비 자신에게 조조를 죽일 만한 힘도 없는 데다 정말로 조조를 죽인다고 해봐야 유비 자신이 분노한 조조 일파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어찌 되던 몸 성히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테니까.
게다가 호시탐탐 헌제를 노리는 세력(원소나 유표, 손책등)까지 끼어들기라도 하면 다시 한번 난리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조조와 사냥을 나갔을 때 관우가 조조를 죽이는 게 어떻겠냐고 하는 것을 유비가 말리기도 한다.(관우전)
논영회
이후 어느 날 유비는 조조에게 불려 나오고, 역사적인 대화가 오간다.
이 무렵 조공(조조)이 선주(유비)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유비)과 나 조조뿐이요. 본초(원소) 같은 무리는 족히 여기에 낄 수 없소."
선주는 막 밥을 먹고 있다가 비저(수저)를 떨어뜨렸다.
- 선주전
이때 곧바로 천둥 벼락이 치자 유비가 조조에게 말했다.
"성인(聖人)이 말하길, '빠른 천둥과 거센 바람에는 필시 낯빛을 고친다.'[36] 하셨으니 실로 그러합니다. 한바탕 벼락의 위세가 가히 이 정도군요!"
- 선주전 주석 화양국지
공(조조)은 스스로 실언했다고 후회했다.
- 화양국지 유선주지
화양 국지에서는 유비가 동승 일행과 공모한 이후 논영회 일화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도 유비가 동승 일행과 함께 공모한 이후 조조가 부른 것으로 묘사하여 유비의 위기감을 증폭시킨다.
[25] 연의에서는 이 소식을 듣자 곽가가 "기왕 회군하는 거, 유비에게 글을 보내서 오늘은 이만 봐준다는 식으로 하시면 주공이 유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셈이 됩니다."라고 말한다.
[26] 진등의 부친 진규는 원술과 친구였고 원술보다 좀 더 나이가 많을 것으로 보이는 원소가 조조와 동갑이라고 가정한다면 진규의 나이는 이때면 30대 후반~40대 초반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당시 진등은 20대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27] 다만 삼국지 집해에서 심가본(沈家本)의 말에 따르면 '속지(續志) 에서 서주부는 호(戶)가 476054고, 구(口)는 2791683이라고 했다. 이에 백만이라 칭함은 이미 열에 여섯, 일곱이 비는구나. 대저 서주가 조조가 도륙함을 지난 후이나, 남은 무리가 오히려 이 정도 수이니, 즉 지난 날의 부유함을 알 만하다. 연후에 기주 측은 조조가 원담, 원상을 이긴 후에, 겨우 30만을 얻었으니, 그의 도륙이 계속됨은 어째서인가!'라고 했다. 즉 심가본의 말은 조조가 그 난리를 치고도 백만은 되었다는 얘기.
[28] 정사 삼국지에서도 소패로 칭하긴 한다.
[29] 연의와 달리 연합군이 한자리에 모여서 같이 행동한 게 아니라 원소는 원소대로 원술은 원술대로, 다른 제후들 역시 각지에서 따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창하게 일어난 것치곤 서로 단합이 안 되어 용두사미로 끝나고 만다. 유비는 상술했듯이 당시로서는 쩌리였던 조조와 같은 라인이었으니 원술이 모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그 이후에 알았을 확률도 있지만 원술은 자신의 유명세에 비하면 모자란 것은 사실.
[30] 정확하게 패국인지 패현인지는 알 수 없다.
[31] 영웅기에 따르면 패성(沛城)
[32] 실제로 삼국지 집 해에 인용된 (삼국지) 송본에선 "장수와 병졸의 처자식을 잡았다."라고 썼다.
[33] 우금은 관우에게 투항한 책임을 물어 조비 시기에 안원 장군으로 강등된다. 장합은 사망 직전 정서 거기 장군이라는 명예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34] 설령 유비가 황제의 밀명을 따르지 않았더라도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은 성격의 조조가 당장이야 유비가 유용해 좌장군 벼슬까지 주면서 이른바 넘버 2로 우대해 잘 써먹으려고 놔뒀다가 어느 시기에 유비에게 유용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해 이를 빌미로 제거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조조의 핵심 참모인 정욱이나 곽가부터가 유비를 경계해 죽이자고 하는 판이었고.
[35] 물론 유비가 중앙정부에서 떨어져 나가고 중앙정부와는 상관없이 마음대로 속관을 임명하는 이상 유비는 중앙정부의 실질적인 좌장군이라고 할 수 없지만 직접 부여받은 관위가 일종의 작위로서 기능해 권위를 가지게 되어 이렇게 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유비가 조조를 벗어난 시점부터는 유비의 좌장군 직함은 일종의 간판으로서 자신의 정무 조직을 마음대로 운용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게 된다.
[36]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출처] 유비의 생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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