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의 형식을 파괴하는 한유주 작가, 그녀의 소설 『얼음의 책』(문학과 지성사, 2009)에서 몇 가지 텍스트를 찾아봤습니다.
참고로 한유주 작가는 1982년 서울 출생, 2003년 『문학과 사회』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소설집 『달로』(2006), 『얼음의 책』(2009),『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2011)가 있고,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2009)했으며, 텍스트 실험 집단 루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서사를 해체하는 그녀의 소설적 실험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脫이야기’성의 극한을 실험하는 그녀의 단편에서 무작위로 발췌하였는데, 이 작품들의 수록 지면은 『자음과 모음』『문학과 사회』『작가세계』『현대문학』『세계의문학』『문학수첩』등 국내 유수의 문예지라는 것도 아울러 밝혀둡니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한 첫 문장을 생각한다. 이 글자들은 표지가 붉은, 스프링 제본 방식의 23줄 노트에, 장난감 만년필로, 적히고 있다. 높은 식탁에 오른쪽 팔꿈치를 괴고, 펜을 움켜쥐고―나는 필기도구를 다소 이상한 방식으로 움켜쥐고 사용하며, 젓가락질을 서투르게 한다―이 글을 쓰고 있다. 식탁 위에는 카메라, 교통카드, 맥주 캔, 맥주잔, 물잔, 인형, 촛불(혹은 불을 붙인 양초), 시계, 담뱃갑 두 개, 라이터, 가죽 팔찌, 지폐 서너 장, 열쇠 뭉치, 고체 향수, 요요, 머리빗, 속옷, 우산이 각각의 자리에, 그러나 일정하지 않은 형태로 널려 있다.
물건이 널려 있다는 표현에 대해 생각한다. 혹은, 물건이 널려 있다는 표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
7월 6일 일요일, 오전 9시 30분. 지미 헨드릭스를 들었다. 이 글은 어제의 노트에 어제의 펜으로 어제의 오른손을 사용해 쓰고 있다. (미래의 노트에, 미래의 펜으로, 미래의 오른손을 사용하여) 식탁 위에는 립스틱, 술을 산 영수증, 알약 상자, 열쇠고리와 열쇠뭉치, 충전기, 수첩, 모자, 단추, 요요, 술병, 담뱃값, 양초가 있다. 어제의 물건들이다. 고무줄. 뉴욕매거진. 펜. 자리를 옮기겠다. 창가로 간다. 오전 9시 35분, 262 Taaffe Place 405호, 주차장으로 면한 창가에 오른쪽 다리를 올려놓고 걸터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뭇잎들이(4층 높이로 자라난 저 나무들의 품종은 알 수 없다) 떨어지거나 떨어져 있다. 실패할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 초콜릿을 한 입 깨문다. 씹어 삼킨다. ego-wrapping이라는 단어가 문득 떠오른다. 불편하다고 쓰는 것과 불편한 기분이 된다고 쓰는 것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허구 0」
사람들이 꽃을 사는 것은 꽃이 곧 시들기 때문이다. 꽃은 빠르게 시들지만 그 속도는 눈에 띄지 않는다. 감각에 발각되지 않는 시각의 발목. 4월. 1999년. 꽃집에서 사람들은 허리가 잘려나간 꽃을 산다. 물기가 채 걷히지 않은 싱싱한 죽음들, 썩어가는 모든 것들은 지나치게 향긋한 냄새를 풍긴다. 꽃들은 부표처럼 희고 붉고 노랗지만 간혹 푸른 꽃들도 있다. 흰 꽃들은 백열등 아래에서 노르스름하게 보인다. 붉은 꽃들은 이곳에 없으며 흰 꽃들은 냄새와 향기를 구분하지 않는다. 꽃잎은 곧 사람들이 벗어놓은 신발짝을 닮아 흐트러지고 문드러진다. 그것은 시간이 꽃들을 견디는 방식이고, 사람들이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다. 문간에 꽃들이 서 있다. 꽃들은 당신을 배웅하기 위함일까, 마중하기 위함일까.
.............................................................................................................................
겨울에는 꽃들이 없다. 도랑도 얼어붙었다. 물이 얼어붙었다. 당신은 그것을 본다. 나는 당신의 손을 잡지 않는다. 당신도 시간의 발을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발목지뢰라고 불렀다. 사물은 이름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한 번 이름을 갖게 된 사물은 영원히 존재한다. 나는 볕이 잘 들지 않는 세 번째 방에 앉아 아동용 삼국지를 스무 번째 읽는다. 당신은 쟁반에 곶감을 담는다. 삼국지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육식을 한다. 유비가 부하의 인육을 먹는다. 나는 달걀을 토했다. 전화벨은 결코 울리지 않는다. 활자들이 번식한다. 나는 당신의 벽장으로 들어가고 싶다.
―「육식 식물」
그는 혁명 기념일에 에펠탑 아래 있었다. 탑이 빛났다. 오색의 불꽃들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 만개했고, 사라졌다. 그는 막 눈을 감은 하늘이, 지붕이 낮은 회색조의 건물들이, 장방향의 잔디밭이, 목련나무가, 대통령궁이, 이동 화장실이, 밤나무가, 플라타너스가 타버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
차가 식고 있었다. 아니었다. 차는 없었다. 그는 라이터를 찾다가 책상 위에 올려둔 촛불로 다가가 어깨를 숙인 채 담배에 불을 붙여 건넸다. 나는 그 담배를 받아 들었다. 그는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촛대를 창문에 바싹 붙였다. 그 순간 바람이 부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 말없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연기가 나지 않았다. 재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내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열지 않았을 때, 그의 등 뒤 검은 커튼에 촛불이 옮겨 붙지 않았다. 커튼은 순식간에 붉게 타오르지 않았다. 그 속도가 너무나 빠르지 않았다. 불길의 커다란 그림자가 검게 일렁이지 않았다.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재의 수요일」
어제의 신문을 펼치지 않았고, 읽지 않았다. 그래, 어제, 신문을 읽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커피에 우유를 섞지 않았고, 식빵을 자르지 않았고, 잼은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지 않았고, 혼란, 번잡한 소동, 추진력, 여세, 기세, 적수, 스피커에는 전원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 음악을 듣지 않았고,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지 않았고, 아니, 머리칼을 적시지 않았거나, 책을 한 페이지도 읽지 않았거나, 확신할 수 없는 것을 확신하지 않았고, 발견, 무엇을, 그것들을, 그러나, 낙담하여,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었는데, 나는 식물을 키우지 않았고, 모노륨의 무늬가 햇빛을 육각형으로 자르고 있었고, 아니 그렇지 않았고, 손톱을 자르지 않았고, 실달 모양으로 잘려 나간 손톱조각들을 쓸어 모으지 않았고, 그때, 누군가가 벨을 눌렀기에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고 조심했고, 집에 오르는 여덟 칸의 계단을, 그 길이의 짧음에 대해 원망하지 않았고, 방범창 밖으로, 누군가가 돌아가는 것을 보았거나, 보지 않았고, 그는 실상 돌아가지 않았다.
...........................................................................................................................
글을 쓰기 위해, 카운터 안쪽 선반에 공책을 펼쳐놓고, 그저 백지 몇 장이었던가, 모래의 입자를 닮은 글자들이 서걱거렸고, 젖은 앞치마가 무릎을 적시는 것을 느끼면서, 백지 몇 장을 반으로 접어 손에 쥐었다가, 이제는 아무것도, 더 이상 아무것도, 누군가가 노래했고, 누군가가 맥주를 주문했고, 나는 계산을 거의 틀리지 않았고, 아니, 자주 실수했던가, 주방에서 쥐가 나타나기를, 기름 냄비 속에서, 고추장 그릇에서, 양파껍질 사이에서, 쥐들이 나타나기를, 출몰하기를,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거나 바라지 않았다.
―「되살아나다」
바다에 가지 않는다. 파도가 보이지 않는다. 파도를 보지 않는다. 파도는 없다. 이 문장들을 옮겨 적을 종이가 없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적어 내려갈, 달필로, 그러나 알아볼 수 없을 글자들로, 써 내려갈 수 있는 펜은 없다. 연필이 없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물을 생각하지 않는다. 석회 조각들, 타다 남은 양초 도막들, 젖은 성냥갑들, 풍경은 없다. 없는 풍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풍경을 훔치지 않는다. 없는 풍경에는 사물들이 없다. 사물들이 풍경을 장악하지 않는다.
탁자를 보지 않는다. 탁자는 보이지 않는다. 탁자는 없다. 텔레비전은 탁자 위에 있지 않다. 텔레비전을 켜지 않는다. 화면은 없다. 부정한 사물들은 부정하지 않는다. 감각들이 융기하지 않는다. 시선이 삼각편대로 비행하는 새떼들처럼 이동하지 않는다. 시선은 없다. 창문의 블라인드를 걷지 않는다. 블라인드는 없다. 마른 햇빛이 사선으로 들이치지 않는다. 창틀의 그림자가 바닥에 마름모무늬를 새기지 않는다. 비가 오지 않는다. 해가 나지 않는다. 구름은 없다. 구름을 보지 않는다. 블라인드는 청색이 아니다. 블라인드는 없다.
............................................................................................................................
개들은 없다. 바닥 위로 검은 얼룩을 탕진하지 않는다. 검게 지워지는 자국을 보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없다. 검게 물든 자리를 피해 발을 딛지 않는다. 조심스레 방 안을 걷지 않는다. 맴돌지 않는다. 배회하지 않는다. 헤매고 다닐 거리는 없다. 문을 열지 않는다. 문은 없다. 문이 있다는 걸 믿지 않는다. 햇빛이 들이치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다. 햇빛이 들어오는 장면을 설명하기에는 적당한 단어는 없다. 맹목의 밤이 지나가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지 않았다. 눈을 감지 않았다. 여전히 아침이 오지 않았다. 의식에는 아침이라는 낱말이 들어와 있지 않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
―「장면의 단면」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아니, 이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이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는 곧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운명을 믿느냐고 묻기에, 믿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가 시작되고 난 지금, 여전히 운명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개척과 개발이라는 단어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떠한 저개발 상태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이야기가 이미 시작되었으므로 이야기의 시작을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불가능했다면, 이야기의 끝은 아직 생각하지 않아도 좋았다. 처음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슬펐지만, 슬픈 까닭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고, 슬프다고 쓰는 짧은 순간 동안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저 일어난 사건들을 끝없이 지연시키고 싶었다.
..............................................................................................................................
나는 오랫동안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 지금, 나는 이 문장을 세 번, 혹은 네 번 반복해서 쓴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는, 내가 죽이게 될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어야 한다. 살아 있음은 죽어감에, 죽어가는 것은 죽음에 앞선다. 살해라는 단어가 살아 있음과 죽어감, 그리고 죽음, 그 어느 사이에 위치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살의는 치밀하다. 나는 무용한 요원이었고, 최종 명령은 결코 내게 하달되지 않았다. 내가 받았던 교육들은 이제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나는 누군가의 입을 빌려, 아니, 누군가의 입을 벌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기밀들을 거만하게 털어놓을 수도 있다. 기밀들은 비밀들과는 달리 언어로 쓰이지 않았고, 이론적으로 누구나 판독 가능한 암호로 적혀 있었다. 그러니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몸의 기억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서늘한 여름 사냥」
사람이 있다. 여기, 한 명의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그는 기차를 타고 있다. 그가 타고 있는 기차의 목적지나, 그가 기차를 타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이름이나 성별, 나이, 외모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가 어디서 기차를 탔는지, 그리고 어디서 내릴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무릎 위에 책을 펼쳐놓고 가만히 앉아 있다. 그는 책을 보지 않고 있다. 창밖을 보지 않고 있다. 그는 눈을 감지도, 귀를 막지도 않고 있다. 그는 그저 감각기관을 통과하는 것들을, 지나쳐 가도록 내버려둔다.
.............................................................................................................................
기차가 서대전역에 도착하고 있다.
아이의 아버지는 이제, 아이를 때린 사람이다. 울던 아이는 이제, 뺨을 맞은 아이다. 아이의 눈가가 개진개진 젖어 있다. 미안하다. 아이를 때린 사람이 뺨을 맞은 아이에게 말한다. 아이는 머뭇머뭇 고개를 주억거린다. 울던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오늘을 잊을 것이다. 그저 한 아이와 한 아버지로 남을 것이다. 기차는 서대전역 승강장에 정차해 있다. 여기서 내리는 승객들이 통로를 빠져나가면서 아이의 얼굴을 흘깃 내려다본다. 아이의 뺨이 붉어진다. 아이는 이제 막,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슬픔과 설움을 구분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아이는 아버지의 시선을 피한다. 아이의 아버지 역시 고개를 모로 돌린 아이를 애써 달래려고 하지 않는다. 아이가 지닌 감각들이 얼음처럼 단단히 응고되었을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오늘을 잊겠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의 뺨을 때리는 소리를 그도 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소리가 난 쪽으로 돌렸지만, 그가 본 것은 뜨개질하는 여자의 왼뺨이었다. 여자는 그 광경을, 아니, 사건이 지나가고 난 직후의 풍경을 보았다. 시간과 사건은 세 개의 자음과 하나의 모음을 공유한다. 여자는 놀라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여자가 뜨개질을 계속한다.
―「막」
독창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는 한유주 작가의 작품을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필사해봤습니다. 글이 난해하다거나, 문장이 어떻다거나, 이게 소설이냐, 도대체 뭘 쓴 것이냐, 하는 생각들은 각자의 해석에 맡기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유주 작가는 21C 새로운 소설 언어를 변주해나가는 젊은 작가임은 분명하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소설을 많은 평론가들이 새롭고 흥미 있게 읽어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첫댓글 한유주 작가의 단편 몇 편을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필사한 것입니다. 물론 스크랩이나 복사를 금지시켜 놨습니다. 이 소설을 펴낸 '문학과 지성사'는 저작권에 대해 완고한 입장을 취하는 출판사입니다. 저도 '문지'에서 펴낸 시나 소설 등의 텍스트에 대한 저작권 허락을 구하는데 여간 힘들었던 게 아닙니다. '문지'에서는 시 전문은 편당 99,000원, 3분의 2 이하는 66,000원으로 저작권 가격을 책정해 놓고 있더군요. 그래서 스크랩 등을 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즘 저작권법이 강화되어 무단 전재나 복제 등을 엄격히 금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여기에서 읽으시고, 한유주 작가가 실험하고자 하는 의도를 읽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윤작가님, 고맙습니다.
탈脫 소설,
한유주 작가의 실험 소설 잘 읽었습니다.
탈 이야기, 실험 소설 맛보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