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월암에서 나와 창원시 북면 사무소앞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신촌리(新村里)에 있는 마금산 온천이다. 수온 35~50℃ 유황천(硫黃泉)으로, 피부병·신경통 등에 효험이 있다 하여 사계절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답사 길에 온천을 만나는 것도 행운이다.
문화유산 답사의 목표는 훌륭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들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삶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발전적인 삶의 방향을 찾아보는데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21호 정열공(貞烈公) 최윤덕(崔潤德)장군의 묘를 찾아나섰다. 마금산 온천에서 창원 시내방향으로 1045호 지방도로를 따라 승용차로 10분쯤 가면 북면 월촌리다. 월촌리 교차로에서 동읍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가다 일광산업 앞에서 승산교를 건너면 노란 달맞이꽃이 길가에 점령군처럼 춤추듯 피어있는 제법 긴 시골길이 이어진다.
농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북면 대산리 갈전 마을 앞을 지나면 시리골이다. 주차장 입구에는 근래에 현대식 기술로 세운 것으로 보이는 돌 거북을 귀부로 하여 세운 비석이 1기 있다. 산등성이 쪽으로 난 숲 속 길을 약 5분쯤 오르면 조선 초기의 무장(武將) 최윤덕(崔潤德:1376∼1445) 장군의 묘역이 울창한 수림(樹林)사이에 있다.
묘역에는 같은 형태의 묘 2기가 약간의 대각선 모습으로 위치해 있다. 앞쪽의 것은 장군의 묘이고, 뒤의 묘는 오른쪽에 있는 비석에 「-貞烈公崔潤德之墓配○貞夫人○○都氏」라는 글자가 있어 부인(婦人)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은 글자가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움)
묘의 조성 방법은 조선 초기의 형태인 장방형(長方形)으로 동서 460㎝, 남북 570㎝, 지면에서 봉분 정상까지는 220㎝이다. 지표면에서 2단으로 4면은 길이 1m 내외의 장대한 화강암을 2단(二段)으로 쌓았는데 그 높이는 80㎝ 정도이고 그 위에 봉분을 올렸다. 묘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 2기가 서 있다.
최윤덕은 무신이었던 최운해(崔雲海: 1347∼1404)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외지에 나가 있어 어릴 때는 거의 남의 손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던 장군은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에 나가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며, 1410년(태종10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1419년(세종1년)에는 3군도통사(三軍都統使)가 되어 대마도 정벌에 나섰고, 이후에는 북방의 여진족을 평정(平定)하여 그 공으로 정승까지 올랐다.
묘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북면 내곡리 1096번지 일대는 장군의 생가가 있었던 곳이다. 인근 주민들이 「정승골」 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지금은 논과 과수원으로 경작되고 있다.
북면은 막걸리와 손 두부가 유명하다. 대중 교통을 이용할 때에는 도로변 노점에 앉아 두부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한잔하는 것도 답사 길에서만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남해 고속도로 북창원 나들목을 지나 이정표를 보고 왼쪽으로 가면 경남문화재자료 제166호 어사옥비(御使玉碑)가 있는 북면 지개리 한수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이정표가 없지만 안쪽으로 들어오면 고목 한 그루가 반겨준다. 고목 앞에는 「淨友堂曺先生植樹」라고 비석이 세워져있고, 옆으로 난 콘크리트 계단을 오르면 추감재(追感齋)가 있는데, 평소에는 대문에 자물쇠가 잠겨있다.
이곳에 있는 백옥비는 조선 중종때 대구 부사, 예천 군수 등을 지내면서, 청렴결백하고 선정을 베푼 정우당 조치우 선생과 숙인(淑人) 창원 박씨에게 내린 비석이다. 선생의 청옥비는 경북 영천의 묘소옆 비각에 보존되어 있고, 백옥비는 부인의 묘소가 있는 이곳 청룡산 아래 추감재 옆 비각에 있다.
창원 문화유산 답사 기행을 마무리하면서 이번 답사 기행에서 주저 없이 안내와 협조를 마다하지 않았던 많은 분들에게 따뜻한 고마움을 전한다.
★필자 주: 최윤덕의 한자 표기는 자료에 따라 崔潤德 또는 崔閏德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문화재청 자료와 비문 표기를 준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