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배 ,요한복음 4장 20-24절 서 론
‘예배’라는 주제는 성경을 장악하고 있다.
천지창조를 묘사한 부분이 31절밖에 되지 않음에 비하여 성막을 묘사한 레위기가 243절이나 되는 것을 대비해 보면 성막은 오직 ‘예배’를 위해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막에서 드리는 번제는 가장 중요한 예배의 실례였다.
요한복음 4장 20-24절 예배라는 주제를 다룬 가장 중요한 성구(聖句)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의 진리를 이해해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간의 대화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니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0-24).
본문에서 "예배"란 단어가 아홉 번 나타난다.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요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
만일 당신이 음악으로부터 얻을 수있는 무엇을 찾아 교회에 나간다면,
또는 설교에서 무엇을 받으려고,
또는 축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음악이나 설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음악은 예배를 위한 훌륭한 매체이다.
그러나 영혼을 뒤흔드는 절정에 이르는 찬양이라고 해도 그것이 예배의 본질은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당신이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하는 자극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교회에 가는데,
예배는 드림으로써 이뤄지는 것이지 받는 것으로 되는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리러 가는 것이지 그분께로 부터 무엇을 받으러 나가는것이 아니다. 교회에 갈 때에 당신은 예배를 드리는가?
예배를 드린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예배를 드릴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가?
당신이 옷을 입을 때나 교회로 가는 차 안에서 당신의 마음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는가?
당신이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하고,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당신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부인하는 처신을 하는것이 된다.
예배에 대한 정의예배란 과연 무엇인가?
잘 알려질 정의(定義)는 "예배는 자기보다 높은 존재에게 돌리는 존경심"이다.
그것은 "더 높은 존재에게 경의(敬意), 존경, 숭배, 존중, 찬양, 찬사, 또는 영광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신29:2)”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고, 기뻐하며, 영광 돌리고, 즐거워하는 것은 영원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임무다.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예배하라는 부름이다.
근본적으로 구별된 성도의 삶을 향한 부름이며,
주일뿐 아니라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부름이다.
예배는 한 장소나 시간 또는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고립되거나 밀려나서는 안 된다.
진정한 예배의 행위는 끊임없이 예배하는 삶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의와 사랑으로 마음을 뜨겁게 해주실 때 찬양이 끓어 넘치는 삶이, 가장 참된 예배의 표현인 것이다. 모든 삶이 예배다
바울은 모든 삶이 예배라는 개념을 강력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성경에서 "예배"란 단어는 자기보다 높은 존재에게 드려진 경의(敬意)를 나타낼 뿐이다.
신약성경(헬라어)에서 "예배"란 말을 표기할 때 "...을 향하여 입맞추다, 손에 입맞추다,절하여 숙이다, 엎드리다" 등을 의미하는 「프로스큐네오」(proskuneo)를 자주 사용한다.
예배의 개념은 상전 앞에서 존경과 경의, 경배, 숭앙의 뜻으로 엎드린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절하며 존경과 숭앙의 뜻으로 그분 앞에 엎드려 그분의 절대적 속성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
그렇다면 예배는 본질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일에 함께 모이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모인 것이다.
설교와 성가는 다만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켜 주는 자극일 뿐이다.
우리가 주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면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에 맞추어져야 한다.
이를테면 기도, 헌금, 감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려는 타는 듯한 열망이며,
그것은 우리 자신과 마음의 태도와 우리의 소유를 드리는 것까지 포함한다.
진정한 예배는 주일 오전예배로 국한된 활동이 아니고, 예배는 어느 시간이나 장소에 제한된 것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찬미하는 영혼이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의 본질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진정한 예배는 모든 성도의 끊임없는 활동이어야 하며, 그 행위의 목적은 단순히 예배자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서의 예배의 개념에 대한 실례를 들어 보겠다.
성막에서의 향의 향기
출애굽기 30장 34-38절은 예배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막에서 어떻게 예배가 드려져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지시를 하신다.
출애굽기 30장 34-38절에 묘사된 그런 교육 수단으로 사용된 것들 중의 한 가지가 예배에 있어서 놀라운 통찰력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 하게 하고(즉, 독특하게 구별되어 다른 어떤 요소로도 영향받지 않게)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출 30:34-36). 실제로 향긋한 냄새가 나는 이 향은 성막 안에서만 사용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룩해야 했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37-38절은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말한다.
당신은 성경에 향의 제조법이 제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는가?
아마도 그 향은 가장 좋은 향기를 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해서 그 향을 만들면 목숨을 잃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질문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위하여 만들어진 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향이 하나님의 코로 올라갔을 때그것은 하나님께로만 올라가는 독특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배란 개인의 마음에서부터 바로 하나님의 코로 올라가는 독특하고도 성별(聖別)된 거룩한 행위임을 보여 주는 훌륭한 예배의 모습이다.
마리아의 향유의 향기성막에서 향의 향기가 하나님의 코로 올라갈 때 그것은 예배를 의미했다.
요한복음 12장에 또 하나의 향기로운 예물이 예배로서 드려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간의 형태로 살아계신 하나님,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 그것이 드려졌다."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1-3).
마리아는 더럽고 먼지가 묻어 있는 예수의 발을 씻기 위해 그녀의 영광인 머리털(고전 11:15 참조)을 사용했다. 또 마리아는 물을 사용하지 않고 약 1년간의 임금에 해당되는 금액의 값비싼 향유를 사용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본질이다.
예배는 곧 자기를 낮추는 것이며, 드림에 있어서 아낌이 없는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달랐다.
마르다는 늘 봉사했었고, 마리아는 항상 예수의 발 밑에 앉아 있었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전에 마리아가 선택한 것이 마르다의 섬기는 것보다 좋다고 말씀하셨다(눅 10:38-42 참조).
마리아의 행동은 참된 예배의 행위였다.
구별된 예배나는 봉사와 예배를 서로 비교하는 것이 참된 예배가 정말로 무엇인지를 구별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봉사는 성부(聖父)께로부터 나와서 성자(聖子)를 통하여 성령(聖靈)의 능력으로써
영적인은사의 형태로 각 개인에게 내려온 것이다.
반면에 예배는 우리에게서 성령(聖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자(聖子)를 통하여 성부(聖父)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따라서 봉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로 내려온 것인
반면에, 예배는 우리에게서부터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봉사와 예배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마르다처럼 너무 봉사 지향적이지만,
충분한 만큼의 예배 지향적이지는 않다.
나의 신앙 생활에서 예배가 으뜸이 되고 있는가?
나는 성실하게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 나의 전심(全心)을 담은 예배를 드리는가?
나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하는 갈급한 열망으로 불붙어 있어서,
예배를 드리려고 모인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 속으로 서둘러서 들어가는가?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찾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