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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답사
고교 입시에 떨어진 뒤로 도오루는 차츰 명랑해졌다. 그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다하 못해 요코에 대한 남 모르는 마음의 사과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부모의 과거에 대해 이렇게나마 요코에게 사과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게이조와 나쓰에가 낙심하는 것을 보자, 도오루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것으로 일단 벌을 받은 셈이라고 도오루는 생각했다. 이런 사실을 요코가 알면 반드시 용서해 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단 입실을 금함>
이렇게 써 붙인 종이 쪽지도 떼어 버렸다.
도오루는 요코를 데리고 어디나 자주 다니게 되었다. 전에는 별로 가지 않던 다쓰코의 집에도 얼굴을 비쳤다.
도오루의 눈이 무서워 나쓰에는 요코에게 부드럽게 대했다. 그래도 역시 요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나쓰에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요코가 루리코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요코의 아버지가 루리코를 죽였다는 사실 때문에 나쓰에의 본능적인 모성애가 요코를 미워하게 했다. 특히 도오루가 요코를 귀여워하면,
“저 요코와 결혼할 거예요.”
하던 도오루의 말이 생각나서 나쓰에는 더럭 겁이 났다.
‘언젠가는 반드시 요코에게 사실을 말해야지.’
나쓰에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아무리 그래도 도오루와 결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원수의 피를 쓰지구치 집안에 흐르게 할 수는 없었다. 사이시의 손자가 자기들의 손자가 되는 일이 현실로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 이듬해 도오루는 별로 수험 공부를 하지 않고도 도립 아사히가와 니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나쓰에에게도 차츰 부드러워져 어머니날에는 브로치를 선물하기도 하고, 가끔 영화를 보러 가자고 졸라대기도 했다.
도오루는 이렇게 말하면서 나쓰에를 기어이 꾀어냈다. 나쓰에는 자기보다 키가 큰 도오루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아버지, 저도 의사가 되겠어요.”
과학자가 되겠다던 도오루가 마음이 변해 홋카이도 대학에 입학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요코가 고등학생이 된 3월의 일이었다.
“다녀왔어요.”
요코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키가 나쓰에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성장한 요코는 넘실거리는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클레오파트라처럼 앞머리를 귀엽게 자른 요코의 칠흑 같은 머리가 그녀의 얼굴을 흰 꽃송이처럼 청초하고 아름답게 돋보이게 했다.
“엄마, 졸업식이 20일이에요.”
“어머, 그래?”
“그런데 금년 졸업식에는 답사를 여학생이 하기로 결정했대요. 그걸 저더러 하라는 거예요.”
“그래, 잘됐구나.”
나쓰에는 웃는 얼굴을 해보였으나 마음속은 편안하지 못했다.
세일러복 차림의 요코가 복도로 사라지자 나쓰에는 입술을 깨물었다.
‘요코가 답사를 하다니!’
나쓰에는 도오루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도오루도 졸업생 대표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도오루가 학기말 시험에 백지를 내는 바람에 대표는커녕 원하는 고등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건 요코가 루리코를 죽인 범인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충격 때문이었어.’
사실 도오루가 받은 충격은 부모에 대한 신뢰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 것에 더욱 큰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과연 나쓰에는 자기답게 제멋대로 해석을 하여 그것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의 판단에 의하면 도오루는 요코 때문에 졸업생 대표라는 영예로운 기회를 잃게 되었는데, 정작 그 가해자인 요코가 답사를 읽는다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기들이 사이시의 딸에게 패배한 것 같아 원통하기 짝이 없었다.
“여보, 요코가 졸업식에 답사를 읽는대요.”
저녁 식사 때 나쓰에는 기뿐 듯이 게이조에게 말했다.
“허! 그래? 거 참. 하긴 요코로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
게이조는 맞장구를 치며 좋아했다.
“엄마, 오실 거죠?”
“물론이야. 우리 요코의 멋진 모습을 당연히 보러 가야지. 참 며칠이더라, 졸업식이?”
“20일이에요.”
요코는 기쁜 듯이 대답했다.
“치가사키에 가 있는 도오루에게도 알리는 게 좋겠군.”
대학 1학년을 마친 도오루는 지금 치가사키에 있는 외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 있었다.
“그럼요, 도오루도 기뻐할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서 나쓰에는 게이조의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한 태도에 화를 내고 있었다. 도오루가 졸업 시험에 백지를 내고 중학교를 마쳤을 때의 일을 남편은 벌써 잊어버린 걸까 하고 생각하며 나쓰에는 게이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빠도 오실 거예요?”
요코의 말에 게이조가 대답했다.
“20일이라고 했지? 꼭 가고 싶은데 20일엔 회의가 있어서 말이야. 좀 무리일지도 몰라.”
달력을 쳐다보던 게이조의 시선이 흰 스웨터 차림의 요코의 풍만한 가슴으로 옮아가는 것을 나쓰에는 놓치지 않고 엿보았다. 순간이기는 했지만 게이조의 눈빛은 나쓰에를 불안하게 하였다. 그것이 나쓰에로 하여금 더욱 요코를 용서할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하게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답사를 읽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했다고 해서 누가 감히 나를 욕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귀여운 자식을 죽인 원수의 딸은 아무도 키울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요코를 키운 것만으로도 충분해.’
“요즘은 답사 때 주로 무슨 말을 하지?”
식사를 마친 게이조가 요코에게 물었다.
“글쎄요, 별로 마음에 남는 답사를 보기 힘들어요.”
“요코는 무슨 말을 할 거지?”
게이조는 요코에게 부드럽게 대했다. 4년 전 도오루가,
“이 세상에서 이 집처럼 요코에게 살기 괴로운 곳은 없어요.”
하고 소리쳤을 때 게이조는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생각해 냈다. 그런데 그 말은 머리로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게이조는 도야마루에서 만난 선교사를 그리워한 적이 있었다. 차라리 교회에 가서 설교라도 들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만 생각했을 뿐 젊었을 때처럼 쉽사리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혼자 서재에 틀어박혀 성경을 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요코를 부드럽게 대하게 된 것은 성경을 읽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경을 쭉 읽는 것만으로는 게이조의 마음속엔 아직 신앙의 열매가 맺어지지 않았다. 루리코가 죽은 지도 벌써 16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 또한 요코에 대한 감정에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지만, 요코는 미워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게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잠시 위를 쳐다보고 웃을 때의 윤기 나는 흰 목덜미를 보기만 해도 게이조는 혼자 마음의 평온을 잃을 때가 있었다.
한 칸 밖에 되지 않는 비좁은 세면장에서,
“어머, 흰머리예요, 아빠.”
하고 말하면서 흰머리를 뽑아 주는 요코의 풍만한 가슴이 몸에 닿으면 게이조는 껴안고 싶은 유혹을 참아야만 했다. 자연히 게이조는 요코에게 부드럽게 대하게 되었으며, 스스로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나는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일까? 사이시의 딸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명색이나마 나는 요코의 아버지가 아닌가. 나는 끝내 요코를 진심으로 순수하게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인가?’
하고 절망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
“글쎄요, 답사는 이렇게 할 생각이에요. 중학교 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시험 얘기만 해서 정말 시시해요.”
요코는 게이조에게 이렇게 말하고 생긋 웃었다.
나쓰에도 따라 웃었다. 나쓰에는 웃으면서 어떻게 하면 요코가 답사를 읽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이리저리 궁리했다.
‘옳지.’
하고 나쓰에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 계략을 생각해냈다. 도오루가 집에 없었기 때문에 나쓰에는 대담해졌다. 도오루가 있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일을 나쓰에는 기어코 할 작정이었다.
‘설사 내가 했다는 것이 알려져 요코가 항의해 온다면 그땐 다 밝히면 돼, 요코가 누구의 딸이라는 것을.’
“요코, 졸업식에는 세일러복을 입고 가는 거지?”
나쓰에는 명랑한 목소리로 요코에게 말했다.
드디어 요코의 졸업식 날 아침이 되었다. 간밤에 종이에 정성껏 쓴 답사를 보랏빛 보자기에 소중히 싸 들고 요코는 집을 나섰다.
“뒤따라 갈 테니까 차분하게 잘 읽도록 해.”
나쓰에는 문 밖까지 요코를 배웅해 주었다.
송이가 커다란 봄 눈이 펄펄 내리는 하늘 아래서 요코는 뒤를 돌아보며 한 손을 높이 쳐들었다. 검은 코트가 약간 짧은 듯이 보였다. 나쓰에도 손을 흔들었다. 누가 보아도 정답고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오늘은 제아무리 요코라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을 거야.’
나쓰에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얼마 후 나쓰에는 하늘색 무늬가 있는 연한 크림색 상의에 금빛 니시진(교토 니시진에서 나는 비단의 총칭으로 대표적인 고급 옷감)으로 만들어진 허리띠를 두르고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을 가까이 대니 눈언저리와 입 가장자리에도 눈에 뜨일 정도는 아니지만 잔주름이 생긴 것이 보였다. 서른두세 살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남들이 듣기 좋게 말하는 소리도 마흔을 넘긴 나쓰에에게는 기분 좋게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젊어 보여도 이제는 20대로 잘못 볼 수는 없게 되었다.’
요즘 들어 거울을 들여다볼 적마다 나쓰에가 의식하게 되는 것은 요코의 젊음과 아름다움이었다. 그녀는 열여섯 살의 요코에게 마흔두 살인 자신을 비교하는 우스꽝스러움을 의식하지 못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하고 가끔 거울에게 묻고는,
“그건 당신이에요.”
라는 대답에 만족했던 백설 공주의 계모가 나중에,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백설 공주예요.”
하고 대답하는 거울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던 그 억울한 심정에 나쓰에는 절실히 공감했다.
요코와 함께 거리를 걸ㅇ면 2,3년 전까지만 해도 나쓰에에게 집중되던 사람들의 시선이 지금은 대체로 요코에게 쏠리게 되었다. 싱싱하고 표정이 풍부한, 왠지 타오르는 듯한 요코의 눈길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오늘은 제아무리 도도한 나쓰에라도 자신의 용모보다는 이제부터 일어날 일에 마음이 걸려 거울 앞을 일찌감치 떠났다.
나쓰에가 학교에 도착하자, 졸업식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내빈 축사가 이어졌지만, 나쓰에는 건성으로 들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 나쓰에는 요코가 앉은 자리를 찾기 위해 식장을 둘러보았다. 내빈석과 학부형석이 양쪽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의자가 학생들보다 약간 높았다. 요코는 앞에서 두 번째 줄 한복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요코의 모습을 보자, 나쓰에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요코가 내가 한 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릴까?’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축사 낭독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답사. 제13회 졸업생 대표 쓰지구치 요코.”
몸이 깡마른 교감이 호명했다.
“네.”
맑은 목소리가 울러 퍼지자 요코가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시작되는구나.’
나쓰에는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숨이 가쁠 정도였다. 요코는 내빈석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하고 나서 교사석에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천천히 정서해 온 답사를 폈다.
요코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내빈석이 약간 술렁거렸다. 그러나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누군가의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요코는 원고를 손에 쥔 채 어찌된 일인지 한 마디도 읽지 않았다.
나쓰에는 요코를 보고 있자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회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요코가 천천히 답사를 도로 접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야?”
나쓰에의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감이 당황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쓰에도 덩달아 일어날 뻔해싿.
장내는 더욱 크게 술렁거렸다. 답사는 졸업식의 하이라이트였다.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고 그냥 원고를 접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요코는 다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너무 긴장해서 저러는 걸까?”
“아냐,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모양이야. 누가 바꿔치기라도 한 건가?”
정중히 고개를 숙인 요코는 술렁거리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걸어서 단상으로 올라갔다. 이것은 물론 예정된 행동은 아니었다. 당황하여 뛰어가려던 교감은 주위의 교사들이 말리는 바람에 그대로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단상에 올라간 요코를 보고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 요코를 바라보았다. 요코는 다시 정중히 절을 했다.
“여러분, 이렇게 높은 곳에 서서 매우 실례가 되겠지만 졸업생 일동을 대표하여 한 마디 답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맑은 목소리였다.
나쓰에의 이마에는 진땀이 솟아났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실은 방금 답사를 읽으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그것은 백지였습니다.”
요코는 답사를 높이 쳐들었다. 사람들은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어떻게 되었는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분명히 제 불찰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내빈 여러분, 선생님, 재학생 여러분, 그리고 오늘 영광스런 새 출발을 하게 된 졸업생 여러분, 부디 제 부주의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코는 다시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여러분, 정말로 제 불찰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로서는 며칠이나 걸려 쓴 답사가 백지로 변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너무 놀랐습니다.”
장내는 조용하고 긴장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인생에는 이와 같이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몇 번이나 있다는 가르침을 저는 전에 받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요코의 말에 나쓰에는 입술을 깨물었다.
요코는 말을 계속했다.
“일이 자신이 예정한 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예정한 것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돌한 짓이기는 하지만 지금 예정 이외의 행동을 취하려는 것입니다. 구름 위에는 언제나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말을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해도 곧 당황해하거나 덤벙거리거나 뒤통수를 긁는 버릇이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 구름이 끼어 있을 뿐 그 구름이 걷히면 다시 태양이 비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침착한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그것을 배우게 되어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진학하는 사람과 취직하는 사람의 구별은 있지만, 한 걸음 어른의 세계에 가까이 다가서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른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실례가 되겠지만, 저는 어른들 중에도 마음씨가 나쁜 사람이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처럼 고약한 마음에 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무리 심술을 부려도 끄떡없다는 굳은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울리려고 하는 사람 앞에서 울면 지게 됩니다. 그럴 때야말로 생긋 웃으면서 살아갈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하나만이라도 우리들 졸업생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오늘 축사를 해주신 분들, 선생님들, 그리고 친절히 해주신 분들에 대한 답례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두서도 없이 쓸데없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것으로 제13회 졸업생 일동을 대표한 답사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말을 마친 요코는 정중히 인사를 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일어났다.
나쓰에는 현기증을 느꼈다. 박수를 받고 있는 요코가 미웠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 때문에 큰 봉변을 당할 뻔한 요코를 크게 동정했다. 침착하게 맑은 목소리로 말하는 요코는 무척 장해 보였다. 답사가 끝나도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였다. 그런데 지금은 교사와 학부형과 학생들도 요코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장내에는 일종의 감동이 넘치고 있엇다. 그것은 졸업식이 주는 감상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에 지지 않은 요코를 사람들은 칭찬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박수를 받으며 단상에서 내려오는 요코의 마음은 착잡했다. 직감적으로 요코는 그것이 나쓰에의 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반 아이들 중에서는 누가 바꿔치기를 했을 리가 없었다. 요코는 학교에 와서 한 번도 답사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이다.
“우러러볼수록 더욱 존귀한 스승의 높으신 은혜….”
노래를 부르다가 흐느끼는 사람이 있었다. 여학생 중에는 소리내어 우는 사람도 있었다. 킬킬거리며 웃고 있는 남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요코는 노래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단순히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진짜 엄마라면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거야.’
요코는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듯한 그런 뼈저린 외로움을 느꼈다.
나쓰에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요코는 졸업생의 한 사람으로 재학생의 박수를 받으며 반 친구들과 퇴장하고 있었다. 나쓰에는 고개를 푹 숙인 요코의 모습을 바라보니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 나쓰에는 요코가 세면장에 있는 동안 몰래 답사를 바꿔치기 했던 것이다. 나쓰에로서는 사이시의 딸에게 도오루가 진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로 답사를 읽게 해서는 안 돼.’
라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그 생각을 나쓰에는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코는 많은 사람 앞에서 백지를 펴게 될 것이다. 읽어야 할 글자는 하나도 없다. 요코는 분명히 새파랗게 질려서 어쩔 줄 모르다가 울음을 터드리고야 말 것이다. 뜻깊은 엄숙한 곳에서 창피를 당한 요코는 완전히 기가 죽어 고등학교 입시에도 실패할지 모른다. 답사를 백지로 바꿔치기 한 것은 질투심이 많은 반 친구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요코는 당분간 울적해져서 더없이 괴로워할 것이다.’
이와 같은 나쓰에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요코에게서는 난처한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오히려 사람들의 동정이 요코에게 일제히 쏠렸다. 나쓰에 뒤에 앉은 사람도,
“침착하고 훌륭한 학생이군요.”
“얄밉기도 해라. 누가 그런 못된 장난을 했을까?”
“아무튼 우리는 흉내도 낼 수 없는 훌륭한 말솜씨군요.”
하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쓰에는 사은회에 참석하기로 한 일정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은회에서도 사람들이 요코를 칭찬하는 말만 할 것이 뻔했다. 집에 돌아오는 도중에 나쓰에의 마음은 너무도 비참하였다. 요코에게 우롱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난처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요코는 마치 그런 일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이 자신에게 맡겨진 역을 충분히 연습한 배우처럼 침착하게 훌륭히 소임을 마치지 않았던가.
‘요코는 내가 한 짓인 걸 알아차렸을까?’
나쓰에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요코가 돌아오면 아주 잘했다고 칭찬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나쓰에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 나쓰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거울 앞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심술을 부려도 끄떡없다고 말한 것은 나더러 들으라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나쓰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지쳐서 그런지 갑자기 무척 늙어 보였다. 나쓰에는 더욱 불쾌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죽은 루리코를 대신하여 복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아 무척 화가 났다.
‘좋아, 정말 그 애가 한평생 괴로운 얼굴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라지…..어떻게 해서든지 욕을 보게 할거야. 그 애의 출생을 알고 있는 이상 난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러나 나쓰에는 이 시간, 요코가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요코는 집 앞까지 왔으나 들어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졸업장과 성적표를 나쓰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요코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봄볕에 녹은 눈에 발이 쑥쑥 빠졌다. 요코는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았다.
‘엄마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아무리 얻어온 아이라도 답사를 읽는 것을 들으면 기뻐해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요코로서는 나쓰에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 엄마가 한 짓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 직접 현장을 본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나쓰에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손에서 한 번도 놓지 않은 답사 원고를 반 친구들이 바꿔치기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쩔쩔매는 꼴을 보면 엄마는 기쁠까? 그렇게 끔찍한 짓을 할 엄마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요코는 문득 초등학교 1학년 때 나쓰에가 자신의 목을 조르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대체 누구의 자식일까? 혹시 엄마가 미워하는 사람의 자식이 아닐까?’
요코는 자신의 친부모를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어떤 사람이 나쓰에에게 미운 사람일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혹시 나를 낳은 엄마와 지금의 엄마는 라이벌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낳은 엄마에게 애인을 빼앗겼을지도 몰라.’
그러나 어째서 그 라이벌의 자식을 얻어오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그 상상은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아, 어쩌면 나는 아빠가 밖에서 낳아온 자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정말 싫다. 남의 부인을 괴롭히는 엄마가 내 친엄마라면 없는 것만 못해.’
요코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쨌든 난 엄마가 싫어하는 사람의 딸일 거야. 어떤 사정이 있어서 엄마가 길렀을지도 몰라. 엄마가 아무 이유없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 그렇다면 내가 너무 불쌍해. 엄마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원망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남을 나쁘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요코의 타고난 성격이었다.
‘나를 낳아 주신 엄마라면 그런 고약한 짓을 했을 리가 없다. 만일 나를 낳은 엄마가 그런 짓을 했다면 정말 서글픈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거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비뚤어지지는 않을 거야. 그만한 일로 남을 원망하여 내 마음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아.’
이렇게 생각하니 요코의 마음은 한결 개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