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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연구
갈라디아서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이 두 성경절을 통해 사망, 저주, 축복, 구원에 대해 자세히 살펴 볼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이 두 구절은 우리에게 확실한 십자가의 이해와 구원에 관한 깨달음을 갖게해 줄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로 함께 연구하기를 바랍니다.
사망의 쏘는 것이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이 말씀으로 미루어 사망은 저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무에 달리시므로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를 위하여 저주로 삼으신바 되셨습니다. 저주와 사망은 죄로부터 이르게 됩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은 사망을 낳는다는 것을 갈라디아 3장 10절을 통해서 이미 배운 바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그저 살아있는 모습과는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요 6:53)다고 하시며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죽음 곧 사망의 몸인 것입니다(롬 7:24참조).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며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저주는 가장 매력적인 죄 속에 숨기어져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는 사망인 것입니다.
저주로부터의 구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고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불순종의 저주에서 구속하신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구속을 받았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옳다라고도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저주는 불순종입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갈 3: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롬 8:4)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구속을 받을 수는 있으나 모든 사람이 다 구속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하나님의 선물을 거절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귀하신 피 곧 참 생명으로 온 인류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율법의 모든 의로운 요구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않은데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의미이며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죄의 쇠사슬을 산산조각을 내셨기 때문에 모든 얽매이기 쉬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분의 구원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더 이상 좋고 나은 미래를 위해 헛된 희망을 갖고 또 그것을 위해 애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감옥 문을 활짝 여시고 죄의 포로들인 우리에게 “나오라”고만 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의 승리는 곧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승리를 받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는 말씀은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고후 5:21)바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나무에까지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그의 몸으로” 짊어지셨다는 것은 그저 피상적인 일이거나 상징적인 일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그 일로 인해 죄들이 그 안에 있게 되었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바 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를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몸으로 짊어지신 것은 그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들의 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벧전 2:22;고후 5:21 참조) 사망을 삼키는 무한한 생명의 능력으로 죄를 받으셔서 완전히 삼켜 버리셨습니다. 우리에게 그의 이 놀라운 생명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육신 속에 있는 온갖 죄로부터 해방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들은 이미 정복되었고 쓰러진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패배당한 원수와 싸우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우리 자신을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에 바칠 때에 우리는 그의 이름을 헛되이 지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도이며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그의 위대한 사랑이며 온 인류에게 전하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밝히 보여주신 것
1. 죄와 사망으로 부터의 구속은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되었습니다.
2. 복음은 모두 십자가에 들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 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는 죄에 빠진 인류에게 오직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분으로 드러나 계십니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전하신 모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바울이 알고자 했던 모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입니다.
4. 그리스도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속주로 사람들 앞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주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담당하시는 것으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저주가 있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그 저주를 담당하신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담당하고 계십니다. 즉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땅에 선고된 저주(창 3:18)로 신음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을 받았습니다.(롬 8:19~23 참조)
5.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담당하신 것은 오직 십자가 위에서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위해서 저주가 되신 것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나타났기에 그러합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저주로 부터의 구원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정복자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저주 그 자체는 십자가를 제시하며 우리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6. 저주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지상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 위에는 불완전함이 있습니다. 바로 이 불완전함이 저주입니다. 인간도 불완전하고 아름다운 초목도 그 옛날 하나님께서 좋으셨다고 하시던 그 아름다움으로 보면 불완전한 것입니다(사 26:4 참조).
7. 이 모든 일의 결론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살전 5:9). 저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땅과 인간 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디에나 있다는 놀라운 증거입니다. 모든 풀잎사귀와 모든 꽃과 과일 심지어 매일 우리 앞에 놓여진 음식물까지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인이 찍혀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숨 쉬며 기동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이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이 그가 만드신 모든 만물 안에 나타나 있으며 그 능력이 곧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엡 3:20)인 것입니다.
저주에서 축복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자들
우리가 죄의 깊음 가운데 있으나 살아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자신께서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 심지어는 저주까지도 사실은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죄 됨은 만일 주님을 믿으면 절망의 원인이 되는 대신에 구속의 보증이 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또한 우리가 주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진다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날 것입니다.(고후 4:10,11 참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고후 5:21 참조) 그가 짊어지신 저주를 통하여 우리가 받는 축복은 바로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입니다. 저주는 범법이므로(갈 3:10 참조) 축복은 우리 각자가 우리의 죄와 허물에서 돌아서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주와 사망의 고통을 받으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복은 무슨 복이었을까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참조). 이 축복은 이방인에게 뿐만 아니라 믿는 유대인에게도 임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무할례시에 이 축복을 받고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축복은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이며 저주는 죄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가 십자가를 드러낼 때에 바로 그 저주는 주님에 의하여 축복으로 선포되어 집니다. 비록 우리가 죄인이기는 하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우리의 것이라는 보증이 됩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엡 1:3)주셨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축복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가 이 선물을 원치 않았거나 혹은 고의로 내던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 외에는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 축복을 넘치게 받을 수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받고 믿는다면 죄가 우리를 절대로 지배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이 깨달아 알아야 하는 그 시대의 진리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약속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성령의 선물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잘못 읽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일은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입증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인 것과 구속받는 일은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는 일입니다.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시며(요 16:8참조)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며 성령은 진리이시며(요일 5:7)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5:10). 그리스도는 지상의 사람들 가운데 성령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십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이 증인의 증거를 받을 수 있고 성령의 소유자가 되는 것을 즐거워 할 수 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우리 위에 임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약속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약속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한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기업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기업이며 우리가 믿음으로 그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하신약속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시며 우리가 그의 자녀들로서 같이 참여하는 약속-한 유업의 약속-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의의 유업을 받도록하기 위하여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자기를 하나님께 흠없이 드리어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히 9:14,15 참조)시기에 그러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14).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크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조화되게 하여 아름답게 하나님의 뜻 안에 통일되게 하고자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이 안에 우리들이 잘 조화 되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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