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그림 가짜 그림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조선 시대에 명화로 소문난 그림이 있었다. 소나무 아래에서 선비 한 사람이 뒷짐을 지고 위를 올려다보는 그림이었다. 소나무도 살아 있는 것 같고 선비의 모습도 생생했다. 그림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이 그림을 본 당대의 유명한 화가인 안견의 귀에도 이 소문이 들어왔다. 그래서 그림을 보러 갔다. 그림 주인은 대단히 기뻐하며 안견을 맞았다. 그런데 그림을 본 안견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띄며,
“잘 그리긴 했는데 조금 아깝구려. 한번 생각해보시오. 사람이 높은 곳을 올려다보면 목뒤에 즈름이 지는데 이 그림의 선비 목에는 주름이 하나도 없지 않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다. 푸른 소나무의 기상도 그것을 바라보는 선비의 마음도 사라진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또 하나의 그림 이야기도 있다. 할아버지가 귀여운 어린 손자를 안고 밥을 떠먹이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 또한 유명한 그림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 소문을 들은 세종 대왕이 이 그림을 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잘 그리긴 했지만,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입이 벌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이 그림 속의 할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정말 그렇다. 어른이 아이에게 밥을 떠먹일 때, 어른은 아이의 입과 함께 자신도 입을 벌리게 마련이다. 화가가 이를 놓쳤기 때문에, 손자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떠 먹이고 싶은 할아버지의 마음이 그 그림에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림 속에 진실한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그림이요, 가짜 그림이다.
송나라 때 증민행(曾敏行)이 지은 독성잡지(獨醒雜誌)라는 고사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당나라 때의 유명한 화백, 대숭(戴嵩)은 특히 소 그림을 잘 그려 말 그림에 뛰어난 한간(韓干)과 더불어 한마대우(韓馬戴牛)로 불렸다. 이름만큼 뛰어난 작품성 때문에 그림값 또한 하늘을 찔렀다.
송나라 진종 때의 재상, 마지절(馬知節)이 어렵게 구한 대숭의 투우도(鬪牛圖) 한 폭을 가보로 여기며 애지중지했다. 옥으로 만든 족자봉에 비단 덮개를 씌워두고, 습기와 좀벌레를 방지하기 위해 수시로 밖에 내다 햇볕을 쪼였다.
어느 날 한 농부가 소작료를 바치러 나왔다가 이 그림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야릇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궁금해진 마지절이 물었다.
“왜 웃느냐?”
“이 그림이 좀 이상해서 웃었습니다.”
“이 그림은 당대의 으뜸 화백, 대숭이 그린 것인데 무엇이 이상하단 말인가?”
일국의 재상 마지절이 노여워하자, 당황한 농부가 벌벌 떨며 아뢰었다.
“저 같은 무식한 농부가 무엇을 알겠소이까만, 저는 소를 많이 키워보고 소가 저희들끼리 싸우는 장면도 많이 보았습니다. 소들은 싸울 때 머리를 맞대고 뿔로 서로 공격하지만, 꼬리는 바싹 당겨 사타구니에 집어넣고 싸움이 끝날 때까지 절대로 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소의 꼬리가 하늘로 치켜져 올라갔으니 이상해서 웃었습니다.”
깜짝 놀란 마지절이 얼굴을 붉히더니 사정없이 그림을 찢으며 탄식한다.
“대숭은 이름난 화가지만, 소에 대해서는 네가 훨씬 유식하구나! 이런 엉터리 그림에게 속아, 내가 평생 씻지 못할 부끄러운 헛일을 하고 말았도다.”
화가는 그림 속에 자기의 진실한 마음을 담아야 한다.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리 사진처럼 똑같이 그린 그림도 죽은 그림이 되고 만다. 그런 그림은 가짜다.
그런데 마음이 바르면 보이지 않은 것도 그릴 수 있다.
옛날 중국의 송나라에 휘종 황제란 분이 있었다. 그는 그림을 너무 사랑했다. 그림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훌륭한 화가였다. 휘종 황제는 자주 궁중의 화가들을 모아 놓고 그림 대회를 열었다. 그때마다 황제는 직접 그림의 제목을 정했다. 그 제목은 보통 유명한 시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었다. 한번은 이런 제목이 걸렸다.
‘꽃을 밟고 돌아가니 말발굽에서 향기가 난다.’
말을 타고 꽃밭을 지나가니까 말발굽에서 꽃향기가 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황제는 화가들에게 말발굽에 묻은 꽃향기를 그림으로 그려 보라고 한 것이다. 꽃향기는 코로 맡아서 아는 것이지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보이지도 않는 향기를 어떻게 그릴 수 있올까? 화가들은 모두 고민에 빠졌다. 꽃이나 말을 그리라고 한다면 어렵지 않겠는데, 말발굽에 묻은 꽃향기만은 도저히 그려 볼 수가 없었다.
모두들 그림에 손을 못 대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젊은 화가가 그림을 제출하였다.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그 사람의 그림 위로 쏠렸다. 말 한 마리가 달려가는데 그 꽁무니를 나비 떼가 뒤쫓아 가는 그림이었다. 말발굽에 묻은 꽃향기를 나비 떼가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젊은 화가는 말을 따라가는 나비 떼로 꽃향기를 표현했다. 다시 말해 나비 떼라는 형상으로 말발굽에 묻은 향기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휘종 황제의 그림 대회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이번에는 이런 제목이 주어졌다.
‘어지러운 산이 옛 절을 감추었다.’
절을 그려야 하지만 감춰져 있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화가들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그려야 할까? 한참을 끙끙대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대부분 산을 그려 놓고, 그 숲속 나무 사이로 절집의 지붕이 희미하게 비치거나, 숲 위로 절의 탑이 삐죽 솟아 있는 풍경이었다. 황제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때 한 화가가 그림을 제출했다. 그런데 그가 제출한 그림은 다른 화가의 것과 달랐다. 우선 화면 어디에도 절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깊은 산속 작은 오솔길에 웬 스님 한 분이 물동이를 이고서 올라가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
황제는 그제야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라고 한 것은 산속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 절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라고 했는데, 다른 화가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절의 지붕이나 탑을 그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절을 그리는 대신 물을 길으러 나온 스님을 그렸다. 스님이 물을 길으러 나온 것을 보니, 근처에 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절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물을 길으러 나온 스님만 보고도 가까운 곳에 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있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아 그리지 못하고, 마음이 바르면 없는 것도 보여 잘 그려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어찌 그림뿐이랴? 만물이 존재하는 가치가 다 그러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이치가 전부 그러하다. 민생을 모르거나 백성들의 마음을 살피지 않은 치자(治者)나, 진리에 어긋나는 사실을 가르치는 교직자나, 부실 제품을 만들어내는 생산자나, 사실을 일시적인 시류에 맞게 왜곡하는 공직자는 다 이와 같은 가짜다.
첫댓글 저는 모 화가의 그림을 한 점 샀습니다 . 새로 이사들어가는 집 벽에 걸어 두려고요. 제목은 수베니르. 여행기념품이라 뜻입니다. 십여년 이 그림을 쳐다보고 있는데 자꾸 그림이 싫어졌습니다. 그 까닭을 요전에 알게 되었는데 이분은 관념으로 사물을 그렸던 것이었습니다.
새를 그렸는데, 새의 무릎이 사람 무릎처럼 앞으로 굽어있었습
니다. 버릴 수는 없고 해서 농막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아무래도 떼어내야 할 듯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