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놈의 박규점이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비염을 고쳐 줬는데도 코고는 상태가 장난이 아닙니다.
빨래찝게로 코를 막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도 카메라 앞에서 대사를 할때는 전혀 킹킹대지 않는답니다.
76년도에 50년만의 추위라는데 논산훈련소를 갔었습니다.
훈련소에서보다 더 혹독한 시련이 있으리란 생각도 없이...
그 많았던 훈련소 동기생들은 다 어디가고 한밤중에 홀로 내려진 곶이 있었습니다.
온통 해골 바가지 밖에 안보이는 곶에서
구르고 또 구르고 갉히고 째지고 터지고 하면서 백골용사가 되었었습니다.
그리고 북한엘 세번 다녀 왔지요.(군사분계선에서의 작전이었지만)
왜 나 혼자만 이 험악한 곶에 남겨졌단 말인가?
첮 휴가를 다녀오고 얼마지나지 않았는데 빨리 휴가 준비를 하랍니다.
다시는 휴가 가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겄만 군대는 명령이니 또 휴가를 가랍니다.
영문도 모르고 제촉하는 발걸음에 이상한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님이 돌아 가신 줄 알았는데 아버님의 삼우제가 끝난 다음에야 분향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을 새로 챙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단장님의 표창장도 있었고 또 휴가를 가게 됐었습니다.
포상금에다 생명수당까지...별것 아닌 사병 월급이었지만 돈 쓸 일이 없어
꽤나 많은 돈을 들고 한걸음에 어머님 월셋방으로 내쳤었지요.
막내동생이... 제대하면 형이나 다니던 대학 잘 다니셨으면 좋겠다고
중학교 입학을 않겠다더라구요.
니가 진학을 안하면 형이 대학을 다닌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며 그 군대에서 받은 돈을 내 놓았습니다.
79년도에 제대하고 충남여고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야방까지 겸하며 많은 일을 했었고 남보다 많은 돈도 챙겼었습니다.
당시에 10.26이 터졌었고 금산농고로 자재를 다 옮겨 놓은 다음에 사장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글쎄...공부가 전부는 아니다만 니가 원한다면...
사장님이 절 놓고 싶지 않은 깊은 생각을 모르는 바는 아녔지만 그 길로 누동학원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 사장님은 별도로 어머님께 제 대학 등록금을 주셨었구요.
누동학원에서 제가 제일 잘몾한것 중에 하나는 규태 어머님께 눈물을 흘리게 해 드린 것입니다.
그 충남여고 공사 현장 사장님의 누님이 김 좀 보내 달라고..,
규태 어머님과 거래상의 뭔가 오해가 있었던듯 합니다.
태안 기름 유출사고때 규태 어머님을 찾아 뵈었었지만 그 옛날 일을 기억할 나이도 지나셨고
그저 누동학원 선생님 오셨다는 기분에만 들떠 계셨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복학을 하고 야학을 열었습니다.
태안에서 눈으로 길이 막혀도 쌀 한말메고 밤새 다락골까지 걸어서 왔던 이범용,
장똘에서 야구하자고 모든 용품 보내주며 격려했던 김장환 등 등의 후원을 업고
그런 후배들의 뜨거운 가슴이 없었으면 감히 도전할 수 없었던 그런 야학 이었습니다.
종미 언니(진희)가 시험지 한보따리 보태주고
애들 수학여행 온다고 4.19기념탑에 가서 기다리다 몾 만나고...
충남여고에서 검정고시 있다하여 내쳐 달려 갔었지요.
그때 수돗가에서 우연히 만난 그 여학생은 제가 그 공사 현장에 있을때부터 나를 좋아했던,
나중에 크리스마스 엽서 한장을 받아 보고서야 그녀의 사랑을 깨달았던 무덤덤한 사람이었지요.
그후로 제가 예산으로 답신을 보냈지만 무응답이었고...
선생님 한분 안계신 누동학원을 다시 찾았을땐
지금의 제 아내가 된 여인이 제 친구를 찾아 왔었습니다.
저는 중앙대 가톨릭 학생회 애들이 점거한 누동학원이 싫어
누동학원을 떠나 바닷가 초가집을 빌려 단소 부는데만 열중하고 있었지요.
그때 제 처남이 안식일교 목사였는데 제 아내가 먹거리를 잔뜩 싸주고 강원도 영월로 가버렸습니다.
대학 졸업식날 먼 발치에서 작별을 고하던 아내의 얼굴만 떠올랐습니다.
졸업식날 어찌나 술을 먹었던지 깨어보니 비행기안이었습니다.
제가 사우디에서 첫 휴가를 나왔을땐 제 딸이 7개월 되었을때 였습니다.
그 드센 모랫바람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구요.
밤이 다 새도록 박규점이 코는 거침이 없군요.
빨래찝게를 새로 사와야 하나?
야...나 이제 한숨 잘테니 빨리 아침 밥좀 해놔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