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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위한 기도(1-3)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제대로 보면, 우리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충만해집니다(히 4:12-13; 요일 1:5). 우리 안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눈이 건강하다”라고 표현합니다. 반면 눈이 악한 것에 고정되어 있으면, 온 몸이 어두워집니다.
1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2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3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1-3)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시를 시작합니다.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라고 간청합니다(1). 자신의 어려운 형편을 외면하지 마시고 굽어 살펴보시고 응답하시며 도와주시기를 구합니다. 시인은 근심과 한탄 속에서 마음이 편치 못하여 방황하며 혼란스럽다고 합니다(2). 3절에서는 고통 속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입니다. 다음 문장에서 이를 자세히 설명하는데, 원수들이 재앙을 내게 쏟아부으며 분노하고 강한 적개심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시인을 향하여 분노와 적개심으로 소리를 지르며 압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고통과 두려움으로 인한 탄식(4-8)
우리 안에 있는 등불은 무엇으로 인해 점점 어두워지거나 밝아지게 됩니까? 우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면 우리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기 때문에, 어두움이 그를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4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5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6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7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8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4-8)
시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묘사한 후, 이 속에서 자신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그립니다(4-8). 마음이 심히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껴 두려움과 떨림으로 견딜 수 없는 상황입니다(4-5). 죽음의 공포와 전율 속에서 시인은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어디론가 날아가서 편히 쉬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멀리 날아가 아무도 없는 광야에라도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합니다(6-7). 광야는 사실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 광야로 가면 편히 쉴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 얼마나 험악한 상황인가를 암시해줍니다. 시인은 피난할 수 있는 곳으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기를 바합니다(8). 폭풍과 광풍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 찬 원수의 소리와 압제(3)를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성내 악인의 멸망을 위한 간구(9-11)
사람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고, 고시를 형성하고, 친구를 사귀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고통과 위협을 당하여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도망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만든 것은 궁극적인 안전장치가 될 수 없습니다. 시인이 겪고 있는 고통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9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 10그들이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 중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으며 11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속임수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아니하도다(9-11)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를 오히려 피난처라고 생각할 만큼 시인이 사는 곳이 험악한 상황임을 앞에서 암시했는데, 이 단락에서는 시인이 사는 성 안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개역개정과 달리 히브리 본문에서는 9절이 원수의 심판을 구하는 간구, ‘멸하소서, 주여(아도나이), 혀를 나누소서(잘라 버리소서)’로 시작됩니다. 평행을 이루는 ‘멸하소서’와 ‘혀를 나누소서’는 혼돈과 나눔(분열)이 일어나게 하여 대적들을 심판해달라는 간구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언어의 혼잡과 나눔으로 심판하셨던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을 생각나게 합니다.
명령형으로 심판을 간구한 후, 히브리 본문에서는 9절 하반절이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심판을 간구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시인이 성내에서 악인으로 인한 강포와 분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내에서 싸움과 분쟁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폭력적인 싸움입니다. 10-11절은 성안의 상황을 더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10절의 “그들”은 강포와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벽 위는 성을 지키는 자들이 성 안팎의 문제들을 빨리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해 보초를 서는 곳인데, 폭력과 싸움을 일으키는 악인들이 밤낮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닌다고 합니다.
악인들이 성안을 휩쓸고 다녀서 성안이 폭력적인 싸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 외에도 성안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고 파괴 행위들이 난무하며, 거리에는 압제와 거짓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생명의 풍성함과 안식을 보장해 주어야 할 성에 온갖 범죄가 자행되어 성안이 거짓과 불의와 억압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입니다.
친구의 배반과 심판 간구(12-15)
눈을 가린 베일이 주님의 형상을 왜곡시키는 것처럼 들보도 동일한 작용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먼저 제거해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다른 형제자매의 눈에 있는 티도 제거할 수 있게 된다는 하십니다. 일단 내 눈의 들보가 맑고 순수한 동기로 남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3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4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15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12-15)
앞에서 성안에 악이 가득 찬 것을 말하다가 12절 이하에서 갑자기 자신의 원수가 친구라는 내용이 나와 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9절 상반절에서 원수를 멸해달라고 간청한 후, 하반절에서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심판을 구하는 이유가 나왔는데, 12절도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므로 심판을 구하는 이유가 연장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2-13절 내용을 보면, ‘원수가 나를 대적하여 과격하게 말한다면 참았을 것이고,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를 대항하여 자기를 높인다면 그를 피하여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수가 나를 대적하면 원수니까 대적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참을 수 있다. 그런데 나를 대적하여 거칠게 말하고 자신을 높이는 자가 원수가 아니라 바로 너다. 나의 동료요,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다.’ 더구나 시인은 그 친구와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고 무리 속에서 함께 성전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14).
이들은 단순히 세상적인 우정만 있는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사귄 믿음의 친구였습니다. 원수의 대적보다 더 괴로운 것은 친구의 배신입니다. 아마도 2b-5절, 9-11절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고통과 혼란스러움의 가장 큰 원인이 친구의 배신일 것입니다. 이에 시인은 원수들에게 어떤 시도도 해볼 수 없을 만큼 갑자기 죽음이 임하기를 구합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거하는 곳마다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