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참구하는데 있어서는 일체 긍정을 안 한다.
이래도 때리고 저래도 때린다.
그러니 나쁜데 떨어질 염려가 없다.
거기서는 누구든지 바로 들어갈 수가 있다.
어떤 것도 긍정을 안 했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서울을 부산에서 찾아가는데, 대구에 가니 호화찬란한 빛이 있고 굉장하니까 '여기가 서울인가?'
하고 누구든지 착각한다. 너무좋아서 그만 대구에 떨어져가지고 "나는 서울을 봤다.
" 이러면 그걸 누가 점검을 해주느냐 이거다.
서울을 본 사람만이 그 사람한테 "너는 임마 아직 아니야!" 하고 점검을 해주는데, 서울을 보지 못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대구를 보고 서울을 봤다고 하는 걸 점검해 줄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어떤 것도 긍정을 안 한다. 일체를 긍정 안 해. "무엇인가?
" 이랬을 때 거기서 '나는 본래 무엇인고?' 하고 의심하고 깊이
참구해 들어갈 뿐이다.
일상생활에서 1초도 떨어지지않고 생활하고 움직이고 하는 이놈 자체, 이놈이 본래 무엇인가 하고 의심하고 참구할 뿐이다.
무슨 손을 번쩍 들며 "이거지 뭐." 이 짓 하고, "악! 이거 아닙니까?" 이런 짓 한다면 그건 거기 떨어진 거다.
그래서 못 쓰는 사람이 되는 거다.
어떤 것도 긍정 안 해준다. 그래서 그걸 확실히 아는 사람은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통해서 안다.
그것이 언어 문자를 떠난 격밖의 소식이다. 깨달은 차원에서서로 척 보면 벌써 마음과 마음으로 통해서 알아버린다.
이 사람이 됐다 안 됐다 하는 걸.
서로 마음과 마음 속에서 긍정하고 고개 끄덕하고 알 뿐이지,마음으로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다. 알겠는가?
그러기 전에는 절대 함부로 "이런 것이지 저런 것이지“, "바로 이 자리 이거 아닙니까?“ 이러면 안된다.
'이 자리'라는 말 잘하던데. 어떤 놈인지 기가 차더라고. "본래 이 자리 아닙니까?
" 그러더라. 내가 냅다 한대 때리며, "저 자리는 그럼 어디에
있느냐?"
허허허. 말도 안 되는 짓 한다니까.
그런 생각 가진 거 싹 버려.
일체 없어. 그냥 무엇인가 뿐이야.
모를 뿐이야.
그래서 ‘무엇일까?’ 한다.
알겠는가?
(‘24. 03.17 대원 대종사 소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