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일 목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아타나시오 성인은 295년 무렵 이집트의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알렉산데르 대주교를 수행하여 니케아 공의회(325년)에 참석하였다. 328년 알렉산데르 대주교의 후계자가 된 아타나시오 주교는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해 나가는 가운데 여러 차례 유배를 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성인은 특히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는데, 수도 생활의 창시자인 안토니오 성인의 전기를 써서 서방 교회에 수도 생활을 알리기도 하였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요한 15,9-11)
If you keep my commandments, you will remain in my love, just as I have kept my Father’s commandments and remain in his l
말씀의 초대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한데 모여 율법과 할례 문제에 대하여 논의한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할례를 받지 않은 다른 민족들은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충만한 기쁨을 누리라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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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류시화 시인은 인도에서 전해 오는 다음의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얻어 ‘소금 인형’이라는 시(詩)를 지었다고 합니다. 돌로 만든 인형, 헝겊으로 만든 인형, 소금으로 만든 인형이 있었습니다. 이 세 개의 인형이 바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돌로 만든 인형은 아무 변화가 없었으며, 헝겊으로 만든 인형은 물을 흡수해 잔뜩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소금으로 만든 인형은 바닷물에 녹아 사라져 버렸습니다. 진리에 대한 추구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돌로 만든 인형처럼 진리의 세계에 살면서도 진리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헝겊으로 만든 인형처럼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도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만 늘어 자만심이 더 커집니다. 그 반면 진정한 구도자는 소금으로 만든 인형과도 같습니다. 진리를 깨닫는 순간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 녹아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자 우리가 해야 할 것도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면 결코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없습니다. ‘나’를 죽이고 철저히 그분을 우리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셔야만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기쁨이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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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 열매를 맺는가? 아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이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가? 흙이 없는데 태양이 없는데 물이 없는데 농부가 일하지 않는데 나무가 스스로 과실을 맺는가? 아니다. 그러면 흙이 열매를 맺는가? 아니다. 태양이 열매를 맺는가? 아니다. 물이 열매를 맺는가? 아니다. 농부가 열매를 맺는가? 아니다. 손발이 일을 하는가? 아니다. 일을 하는 것은 손발이 아니다.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 일을 하는가? 흙이 없는데 태양이 없는데 물이 없는데 일거리가 없는데 사람이 저 혼자 일을 하는가? 아니다. …… 흙도 아니면서 태양도 아니면서 물도 아니면서 농부도 아니면서 흙도 되고 태양도 되고 물도 되고 농부도 되는 그 ‘어떤 이’를 가리켜 우리는 할 수 없이 ‘하느님’이라 부른다.” ‘이 아무개’가 쓴 책, 『길에서 주운 생각들』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도 제 스스로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알의 열매를 맺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섭리 안에 머물러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도 이럴진대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꽃들의 향기, 밤하늘의 별들, 아름다운 새소리가 없는데, 세상을 느끼는 눈과 코와 귀가 없는데, 온몸을 타고 도는 더운 피가 없는데, 푸른 하늘을 숨 쉬는 호흡이 없는데, 이웃이 없는데 …… 우리 손발도 아니면서, 눈과 코와 귀도 아니면서, 심장도 호흡도 아니면서, 이웃도 아니면서, 우리 손발이 되고 오관이 되고 심장이 되고 호흡이 되고 이웃이 되는, 우리의 주님! 그분의 섭리 안에 머무르지 않는데, 그분 정원의 한 그루 나무가 되지 않는데, 우리 삶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살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용서입니다. 끊임없는 베푸심입니다. 그러니 ‘겁주는 하느님’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면서 겁을 주고 있다면 이상한 관계입니다. 주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사랑은 많은 것을 묻지 않습니다. 서로 잘 살기를 바라는 관계입니다. 늘 기쁨으로 만나기를 바라는 사이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어두웠기에’ 신앙생활도 어두웠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관계를 기억하며 신앙생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길에는 꽃밭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막과 가시밭도 있습니다. 교만과 방심 때문에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실패와 좌절을 느끼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을는지요? 주님은 포도나무며, 우리는 가지입니다. 잘 못사는 것처럼 느껴져도, ‘나무에 달린’ 가지임을 기억하며 용기를 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늘 기쁨을 주십니다. 그 기쁨을 깨닫기 시작하면 ‘삶의 행복’도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 다 합쳐 주님께 찬미를
-심흥보 신부-
인도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사를 시작하려고 사제가 입당하는데 어떤 여인이 아기를 업고는 사제 앞을 가로막더니 이마에 빨간 점을 붙여주고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장면이라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긴장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갔던 인도 신학생이 사제를 환영하는 인도 교회의 전통적인 풍습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문화와 풍습을 가지고 있기에 같은 장면을 목격하고서도 다른 느낌과 생각을 가지게 되어 당황하거나 어색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각 나라 교회의 신앙행위들은 각 나라와 민족의 풍습을 이용해 나름대로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주님께 감사드린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좋은 말씀과 우리가 지키고 걸어 나가야 할 길을 계명 삼아 알려주고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사도 베드로는 오늘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면서도 그들이 간직하고 살아온 각종 문화와 풍습을 사랑으로 받아주면서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사도 15,8)
살면서 우리 서로가 간직한 갖가지 생각과 행위가 복음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누구 하나 빼지 말고 다 합쳐서 한마음으로 주님을 찬미하기로 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양승국신부-
<개그맨 신부님>
필립보 네리 신부님,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삶을 사신 분입니다. 신부님은 다른 무엇에 앞서 대단한 ‘개그맨’이었습니다. 유머감각이 탁월하셔서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의 배를 쥐게 만들었습니다.
그와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기뻤으면 필립보 네리 신부님의 ‘절친’ 교황 레오 11세께서는 어떤 날 4-5시간 동안 그의 방에서 담소를 나누었으며, 필립보 네리 신부님의 사무실을 가리켜 ‘이곳은 나의 낙원’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 네리 신부님은 늘 호탕한 웃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커다란 삶의 기쁨을 선사하던 대단한 ‘훈남’이셨습니다. 얼마나 원만하고 다정다감한 성품을 지니셨던지, 평생토록 그분의 주변은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그야말로 ‘폭풍인기’를 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필립보 네리 신부님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기쁨, 세상의 즐거움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한 차원 높은 기쁨, 결국 영적인 기쁨, 하느님 안의 기쁨을 추구하였습니다.
필립보 네리 신부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한 차원 더 높은 성화의 언덕으로 이끌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좋아하는 그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결국 그는 오라토리오회를 창설하여 동료들과 함께 기쁨 속에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이렇게 필립보 네리 신부님의 한평생 삶을 관통한 주제어는 ‘기쁨’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잘 믿지 못하시겠지만 우리 인간 각자는 하느님 입장에서 볼 때 기쁨의 원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도 기쁨으로 충만한 생활입니다.
이처럼 기쁨은 여러 그리스도교 덕행 가운데 아주 향기로운 덕행입니다. 기쁨은 가장 두드러진 성성의 한 표현입니다. 울적한 성인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충실한 영성생활의 결과는 기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상의 기쁨을 주님 안에서의 기쁨, 영적인 기쁨으로 승화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각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큰 선물인 기쁨을 만끽하지 않고 살았던 것에 대해 마지막 날에 하느님 앞에서 셈을 바쳐야 합니다.”(탈무드)
“세상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죄 안에서 기뻐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허영의 꽃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영원의 희망 안에서 기뻐하십시오.”(성 아우구스티누스)
“슬퍼하는 성인은 불쌍한 성인입니다.”(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필리피 4장 4-6절)
사랑이라는 열매
-허광철 신부-
성경을 기름 짜는 틀에 넣으면 오직 한 가지가 나온다고 합니다. 바로 ‘사랑!’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절절한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마치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처럼 속삭이시며 당신 사랑에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는 포도나무의 비유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비유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포도나무의 열매가 무엇인지 드디어 밝혀집니다. 바로 ‘사랑’이라는 열매입니다. 열매로 농부와 나무와 가지가 하나가 되듯, ‘사랑’이라는 열매를 통해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농부가 포도원을 가꾸는 원리도 사랑이요, 나무가 가지에 주는 양분도 사랑이요,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맺는 열매도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라는 열매는 결국 나무가 준 것이요, 아버지인 농부가 준 것입니다. 이제 가지가 열매를 맺는 방법인 ‘내 안에 머물러라’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는 말씀으로 구체화됩니다. 다시 말해 그분의 현존과 말씀에 머무는 ‘기도’(7절)는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으로 확대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도록 다시 재촉합니다. 사랑은 그 속성상 멈추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친교
- 김선류 신부-
오늘 복음은 삼위일체의 신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 되는 거룩한 사랑의 친교를 묵상케 합니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과 그 사랑에 응답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사랑의 일치로 교회를 세우시어 당신을 믿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사랑과 기쁨을 충만하게 내려주시고자 하는 주님 마음을, 복음은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간혹 우리의 믿음 속에서 이토록 놀라운 사랑의 일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향한 놀라운 사랑의 징표이자 구원의 확증인 성사생활, 감미로운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기도생활, 그리고 사랑을 구체화하고 드러내는 봉사까지 …. 이 모든 삶의 모습은 해야 할 규율이고 의무이기 이전에 우리가 누리는 엄청난 은총이자 기쁨입니다. 바로 이 은총과 기쁨을 먼저 마음에 새기고, 온전히 삼위일체의 친교에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위로는 때로 강력하지만 그만큼 허무하고 잔혹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만남은 부드럽지만 강렬하고, 작은 듯하지만 무한한 사랑을 지닙니다. 오늘 이 사랑의 친교에 마음을 다해 응답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9절)
규정은 최소화, 자유는 최대화!
-김찬선신부-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성령 기도회를 가면 강의나 강론이 대부분 단문입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사랑합시다.” 이런 식입니다. 복잡한 논리를 끌어들이지 않고 수식어도 많지 않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간단명료하게 얘기합니다. 저도 성령의 감도를 받으면 이처럼 강론이 단순해집니다. 머리를 굴리지 않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짧게 얘기하는데 그때 듣는 분들에게도 그 감도가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말씀이 머리로 가지 않고 바로 마음으로 전해집니다.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보면 또한 자유롭습니다. 사람에 따라 살지 않고 성령에 따라 살기에 사람에 의해 구속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속하지도 않습니다. 성령에 따라 살기에 또한 규정에 의해 구속되지 않고 남을 규정으로 구속하지도 않습니다.
당연히 성령의 인도를 받는 공동체는 할 수 있는 한 개인과 성령의 관계를 존중하고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를 존중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것을 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결정들이 성령의 자유로운 이끄심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성령 안에서의 성숙한 개인주의를 볼 수 있고 개인과 공동체의 성숙한 조화를 볼 수 있습니다.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서 다른 민족들 안에서도 활동하심을 인정하기에 성령께서 그들을 Guide하시도록 인간의 Guideline을 최소화합니다. 규정은 최소화, 자유는 최대화! 이것이 성령께서 이끄시는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
- 최병조 신부-
우리는 모두 주님께 속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기쁨과 평화, 생명을 그분한테서 받습니다. 이에 우리는 운명적으로 그분께만 삶의 희망을 두고 올인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사제로서 그분께만 올인하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유혹으로 다른 것에서 위안을 찾으며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분은 깨우침을 주십니다. 작은 시련과 이런저런 경험으로 단련됩니다. 연초에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센터엔 수녀님들과 직원 열한 명이 함께합니다. 저는 센터를 잘 운영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타인에게 지나친 기대감을 갖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분들을 사랑으로 대하기보다 업무적으로 성과를 바라보면서 판단하고 대했습니다. 그들을 존재로 바라보기보다 도구로 대하는 제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내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관리자가 아닌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존재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었고, 지금은 참 편안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제가 사제로서 그분 안에 머물고, 많은 열매를 맺는 방법은 바로 착한 목자로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이를 부드럽게 사랑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주님, 저를 착한 목자가 되게 하소서 ! 아멘.’
어느 과학자가 파리를 잡아 훈련을 시켰는데 자기 지시에 의해서만 날도록 완벽한 훈련을 시켰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파리 날개 하나를 자르고 나서 날라고 지시하자 파리는 간신히 날았습니다. 남은 날개도 자른 뒤에 또 날라고 명하자 날지 못하는 대신 이번에는 뛰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다리 하나를 자르고 나서 뛰라고 하자 빠른 걸음으로 걷습니다.
이렇게 점차 다리 하나씩 자르며 걸으라고 했습니다. 다리가 하나라도 남아 있을 때는 지시에 따르려고 애를 쓰며 조금이라도 움직였는데, 다리를 모두 자르고 나서는 큰 소리로 “기어.”라고 명령해도 꿈쩍도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 모습을 본 그 과학자는 실험일지에다 이렇게 기록했다고 합니다.
'파리가 날개와 다리를 다 잃자 청각장애를 일으켰다.'
정말로 청각장애를 일으켜서 꿈쩍도 않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지요. 과학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이상한 결론을 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일상적 삶 안에서 너무나 자주 나오는 모습입니다. 바로 주님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나를 그리고 세상의 것들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미적 감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미술관에 혹시라도 가게 되면 구경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한 번 휙 지나가면 끝이거든요. 그러면서 함께 갔던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었지요.
“별로 잘 그린 것 같지도 않은데, 저 그림이 그렇게 비싸다며?”
이 말을 들은 친구가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떻게 한 화가의 작품을 돈으로만 판단하려고 하니?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으로 그림을 바라봐봐. 분명히 다른 것을 보게 될 거야.”
많이 반성되었지요. 저는 화가의 마음을 헤아리기 보다는 돈과 물질적인 관점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화가의 마음으로 보려고 노력하니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이 작품을 돈으로써가 아니라, 너무나 멋진 하나의 작품으로 바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작품을 바라볼 때 그 작가의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참된 의미를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지요.
내가 중심이 아니라, 주님이 중심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중심이 아니라, 그보다는 주님의 뜻이 중심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해서 참 행복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나눔만이 나뉨을 막습니다(맥그린치 신부).
사랑 안에
-권태문 신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저는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실용주의적 논리로 볼 때,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행동은 무익하고, 심지어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착한 목자의 태도는 저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남겨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설 때, 그 목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흔아홉 마리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설 때, 그 목자의 마음은 큰 사랑의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을 적시는 큰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무르시면서, 자식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어버이의 얼굴로, 진심으로 걱정하고 안타까운 얼굴로, 우리보다 더 아파하고 도와주시려는 얼굴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너무나 대견하고 사랑스러워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환희의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목자의 비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는 하느님의 참희망과 참사랑의 말씀이며, 주님과 우리의 완전한 일치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그 사랑의 깊이를 느끼고, 참기쁨 중에 살아가시길 저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기도합니다.
사랑 안에 머물다.
-김찬선신부-
사랑 안에 머물다.
어디에 머물 것인가?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미움 안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무관심 가운데 있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랑 안에 머물 것인가?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 것이다. 인간의 사랑 안에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의 사랑 안에는 더더욱 머물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리아처럼 주님 발치에 앉아 주님 얼굴 넋 놓고 바라보고 턱 괴고 주님 말씀 듣는 것인가?
아니올시다. 그것도 주님 사랑에 머무는 것이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아니올시다.
주님 말씀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그분의 계명은 무엇인가?
그분의 계명도 사랑이다. 그러니 사랑할 때 사랑에 머무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할 때 하느님 사랑에 머무는 것이다.
계명에 따라 살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김기현신부- 병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생리적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병리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먼저 생리적인 접근은 이런 것입니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들리지 않는 상태를 청각장애, 시력의 상실 또는 감소로 인한 장애를 시각장애라고 합니다. 장애 판정은 더 이상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해서 생리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 다시는 들을 수 없고, 지금 볼 수 없는 사람이 다시는 볼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리적인 접근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는 절망적인 접근입니다.
반면에 병리적인 접근은, 그 병이 현재 발전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상태가 더 좋아져서 나을 수도 있고, 악화되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병리적으로 바라보니까 고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병리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가능성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목숨을 살리려면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리를 잘라서 병을 고치려는 것은 생리적인 접근입니다. 자르면 다리를 잃지만 목숨만은 건진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어떤 의사는 지금 당신의 다리가 썩어 가고 있지만, 절단을 하지 않더라도 수술을 해서 고치면 나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새벽에너지’ 참조)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바라볼 때, 생리적으로 접근하시는 분일까요? 아니면 병리적으로 접근하시는 분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생리적인 접근보다는 병리적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생리적으로인간을 바라보셨다면, ‘회개하지 않고 죄를 짓는 사람들’은 모두 심판을 받아 잘려나갔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비록 죄로 기울어지는 큰 병에 걸렸지만, 고칠 수 있다고, 또 살릴 수 있다고 믿으십니다. 그랬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들을 몽둥이가 아니라 따뜻한 포옹으로 맞아주시고, 그들이 병을 고칠 수 있도록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라.’ 는 처방을 내려 주셨을 겁니다. 오늘 복음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그 사랑 안에 머물러야 죄로 기울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나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지 않아도 죄로 기울어지지 않을 수 있어~’ 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과 비슷할 겁니다. 담배 중독자가 흡연실에 가서 ‘나는 담배를 끊을 거야...’ 라고 말하고, 알코올 중독자가 술집에 가서 ‘난 이제부터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 겁니다. 죄로 기울어지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주님의 사랑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체험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 주님의 사랑안에 머무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 봅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양승국신부-
<집으로...>
오늘은 거금을 투자해서 아이들과 영화 "집으로..."를 보고 왔습니다. 거금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였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몇몇 아이들에게 "영화 보면서 너도 할머니한테 삥뜯은 일이 생각나서 그러지?"하고 놀려주었습니다.
첩첩산중에 혼자 살고 계시는 외할머니, 늙을 대로 늙으셔서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외할머니, 게다가 말씀을 전혀 못하시는 외할머니를 처음 대면한 상우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굳은살이 박힌 시커먼 손으로 김치를 떼어 밥에 얹어주시는 할머니, 프라이드 치킨이 먹고싶다고 했는데, 잘못 알아들으셔서 닭백숙을 해오신 외할머니가 상우는 마냥 싫습니다.
첩첩산중인지라 TV는 전혀 나오지 않고, 유일한 소일거리였던 소형 오락기 마저 밧데리가 다 떨어져 못쓰게 되자 상우의 심술은 극에 도달합니다. 오강단지를 차서 깨뜨려버리고, 잠자고 계시는 할머니 머리에 꽂혀있던 은비녀를 몰래 빼내 밧데리를 사러 갑니다.
이런 상우의 "싸가지 없는" 행위에도 외할머니는 한번도 손자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아무리 상우가 버릇없이 굴어도 할머니의 모습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저 안쓰러운 얼굴로 그윽이 상우를 쳐다볼 뿐입니다.
또 외할머니는 상우가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힘닿는 데까지 구해다 줍니다. 상우가 신을 운동화를 사기 위해 기역자로 굽은 허리로 겨우겨우 나물을 캐어 시장에 내다 팝니다.
상우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시는 외할머니, 그러나 상우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섭섭해하지 않는 외할머니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배은망덕하고 염치없다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때로 우리가 그분을 멀리하고 그분을 배척하는 순간에도 그저 안쓰러운 눈길로 우리를 바라다보시는 분, 묵묵히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하느님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인내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스스로 자각할 때까지 하느님은 마냥 기다리십니다. 마치 상우의 외할머니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서울 엄마로부터 편지가 오고 상우는 떠나게 되는데, 외할머니의 크나큰 인내와 사랑을 깨달은 상우는 마지막 밤을 꼬박 새웁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수신인이 상우로 된 "아프다", "보고 십다"라고 크게 적힌 엽서를 여러 장 준비해둡니다.
기쁨
-이정민 신부-
기쁨은 신앙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기쁨을 삶의 목표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방식’이라고 하는 이유는 기쁨이 외적인 삶의 조건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자가 되면, 높은 자리에 오르면, 병이 나으면 삶이 기뻐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또 가난하고 남보다 낮은 위치에 있고 병으로 고통받고 있어도 삶을 훨씬 더 기쁘게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많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기쁨은 마음가짐에 좌우되는 것이지 외적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삶의 목표라기보다는 삶의 방식이 됩니다. 사도 바오로의 “언제나 기뻐하십시오”(1테살 5,16)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러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부담스럽고 힘든 일인데 왜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때만 사람은 참된 기쁨, 충만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예수님의 인간학 강의를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기뻐하라
-이흥우-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전하고자 했던 보물은 바로 평화와 기쁨이다. 가끔 성당에 들어서면서 왜 정면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모셨을까 하고 의아해할 때가 있다.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통스럽게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죄를 뉘우치라는 것일까? 석가여래상이나 성모상의 편안한 미소와 온유한 표정과 달리 왜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통스럽게 보일까? 십자가는 로마 제국에서 가장 참혹한 사형 방법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 십자가는 더 이상 형틀이 아니라 승리와 생명의 표지,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십자가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편적인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되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고통스럽게 보일지라도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간절히 전하고자 했던 말씀은 분명 기쁨에 관한 메시지였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참혹한 고통을 인내하신 예수님은 삶에 대해 기쁨의 자세를 가지라고, 진정 기뻐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고 하신다. 말씀은 기쁨이다.
하느님, 저를 지켜주소서. 당신께 피신합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거룩한 이들과 위대한 이들에게 저의 온 마음이 쏠립니다. 다른 신들을 붙좇는 자들의 고통이 크기에 저는 그 신들에게 피의 제사를 바치지 않으며 그 이름들을 제 입술에 올리지도 않습니다. 제가 받을 몫이며 제가 마실 잔이신 주님 당신께서 저의 제비를 쥐고 계십니다. 저의 차지로 좋은 땅 위에 측량줄 내려지니 저의 재산에 제 마음 흐뭇합니다. 저를 타일러 주시는 주님을 찬미하니 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일깨웁니다. 언제나 주님을 제 앞에 모시어 당신께서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다. 그러기에 제 마음 기뻐하고 제 영혼이 뛰놀며 제 육신마저 편안히 쉬리다. 당신께서는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는 구렁을 아니 보게 하십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면전에서 넘치는 기쁨을,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을 누리리다.(시편 16,1-11)
머묾의 미학
-오상선신부-
"너희는 내 사랑안에 머물러라!"
내가 머무는 곳, 내 마음이 머무는 곳, 그것이 선이다. 좋기 때문에 머문다. 좋지 않으면 절대로 머물지 않는다.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다.
누구와의 만남이 있을 때 그와 오래 머물고 싶다면 그것은 선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말이다.
내가 무엇에 몰입해 있다면 그것은 선이다. 내가 그것을 좋아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누구에게 머물러 있고 어디에 머물러 있고 무엇에 머물러 있느냐가 문제다.
그 대상이 누구며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이며 그것이 참으로 나를 진복으로 이끄는 것인지에 대한 식별이 필요하다.
오늘 주님은 "내 안에,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너희 안에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내가 참으로 기쁨을 누리기 위해 내가 참으로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된다. 사랑 자체이신 그분의 사랑 안에 누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나는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사랑에 머물다
-김찬선신부-
개가 바람이 나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온 동네를 싸다닌다고 하지요. 전에 성북동 수도원에 수캐가 있었습니다. 제가 새끼 때부터 사랑을 주던 놈이었고 수도원에 사는 덕분에 같이 숫총각으로 늙었는데, 늦바람이 났습니다. 하도 집에 있지 않고 싸돌아다녀 못 나가게 단돌이를 철저하게 하였습니다. 언젠가 나갔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 온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등이 까져 피가 날 정도였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살펴보니 쪽 문 밑으로 겨 들락날락하느라 그 좁은 문틈에 그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전에 두들겨 맞고 와 낑낑댈 때도 그랬지만 한 편 웃음도 나오고 다른 한 편 내 사랑으로 부족하나보다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하십니다. 내리 사랑이 엿보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늘 자식 생각이고, 자식이 자기 곁에 있기를 바라는데, 자식은 그 사랑을 구속으로까지 느끼며, 다른 사랑을 찾아 돌아다니다 잠이나 자러 돌아옵니다.
부모의 사랑에 머물며 다른 사랑을 찾지 않으면 그것도 문제겠지요. 그러니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떠나 다른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바람은 당신 사랑 안에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 안에서 우리가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 사랑을 떠나지 않고, 당신 뜻을 거역하지 않고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춘기 아이마냥 미숙한 사랑을 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무시하고 하느님 뜻을 거역하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사춘기의 특징은 독립투쟁입니다. 그때까지 엄마만 졸졸 따라다니던 놈이 이제 나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립적인 자아의 소유자라는 표시로 밖으로 나돌며 다른 사랑을 찾고 자기도 이제 어엿한 어른이라는 표시로 사사건건 일부러 부모의 뜻과 정 반대로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미숙함은 부모의 사랑을 구속으로 생각하고 부모의 뜻을 간섭이라고 여기기에 거부하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사랑과 도움 없이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랑은 한량없는 부모의 사랑 안에 지금껏 살아왔음을 깨닫고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사랑 안에서 부모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 관계는 어떠한가요? 사랑 밖에서 사랑을 찾나요, 사랑 안에서 사랑을 찾나요? 뜻을 어기면서 자기를 실현하나요, 뜻을 따르면서 기쁨을 얻나요?
-김두유 신부-
저는 가끔씩 길을 가다가 사람들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상대방의 얼굴에서 느끼는 점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무슨 기준으로 생활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지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상대방의 얼굴에서 그 사람의 상태를 충분히 느끼게 합니다. 피곤한 얼굴인지, 상쾌한 얼굴인지, 기쁜 얼굴인지, 슬픈 얼굴인지를 느낍니다. 그 중에서도 연인의 얼굴을 쳐다보면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항상 기쁜 얼굴을 보입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관계에 있으면 제일 기쁜 얼굴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얼굴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상대방의 좋은 얼굴을 기억하고 그대로 쫓아 사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 또한 기쁜 얼굴을 지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데 그것이 뜻대로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잘 안 되는 경우에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기쁜 얼굴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기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생각과 상대방이 기쁠 수 있도록 노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서로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나눔과 일치가 있기 때문에 기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써 기쁜 생활을 하려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생활을 하면 됩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르는 모습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바로 “서로 사랑하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 복음 13장 34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떠나시기에 앞서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시는 것은 세상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큰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당신의 영원한 삶을 함께 누리도록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사랑은 아무런 차별 없이 개개인에게 맞는 사랑을 베푸시어 사람답게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에게는 사랑과 용서를, 병든 이에게는 마음과 몸의 치료를, 우는 이에게는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당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결국 당신 사랑의 최고 표현은 십자가에 당신 목숨을 바치심으로서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남김없이 주신 희생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비천한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는 기쁨을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주님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 자신도 그분 모범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하면 모든 단절을 가져옵니다.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하는 그 단절은 무관심과 미움을 초래하게 되고 우리 모두를 파멸의 길로 가게 만듭니다.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기쁜 모습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사랑이 없는 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의 하느님께서도 기쁜 얼굴로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과 우리 이웃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기쁜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계명이야말로
-김동하 신부-
눈으로 직접 보거나 망원경을 써서 보면 하늘에 무리진 별들은 장관입니다. 얼핏 보면 소금을 뿌려놓은 듯하지만 부딪침 없이 자연스레 운행합니다. 별들이 떼를 지어 움직이면서도 엉키지 않을 뿐더러 참으로 가관인 것은 적절한 거리를 지킬 줄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며(토비 4,15) 나처럼 너를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나도 나답게 되고 너도 너답게 되어 조화롭고 평화로운 우리를 이루는 것입니다.?? 계명이란 사랑에 이르기까지 가장 쉽고 안전하게 이끌어주는 지름길입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여러 유혹들과 꿋꿋하게 맞서 이길 수 있게 해주는 방패입니다.
방패를 들고 지름길을 걷는 것이 사랑을 만나서 사랑 안에서 노닐 수 있는 지혜로운 삶입니다. 계명이야말로 하느님과 적절한 거리로 지켜주는 힘입니다.
배려하는 마음
-고진배 수사-
마리아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에게 그리스도의 잉태 소식을 전해 들은 후 서둘러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6개월이 지나 거동이 불편할 뿐 아니라 태중의 아기 건강도 신경을 써야 할 시기였습니다. 마리아는 자신도 아기를 가졌지만 남을 우선 사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엘리사벳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때 엘리사벳과 태중의 아기가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인간의 음성을 들었고, 요한은 하느님 사랑의 신비로 그 모친의 태중에서 뛰놀았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도착을 알아차렸는가 하면 태중의 요한은 사랑이신 주님의 도착을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성경은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56)고 전합니다. 제 고향에는 어려서부터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휴가 때 고향을 찾을 때마다 만나곤 합니다. 그 친구는 우선 부담이 없어 좋은데,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다른 친구들을 초대해서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시간과 장소를 마련해 준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한 신앙으로 같이 생활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내가 수도회에 입회할 때 "네가 서원할 때 수도복을 맞춰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내가 그 친구 집에 가면 그는 으레 안방을 내줍니다. 그리고 친구 부부는 건넌방에서 잠을 잡니다. 내가 건넌방으로 간다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얼마나 사랑이 많은 친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크고 작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 하는가 하면 동네 일도 서슴지 않고 발 벗고 나섭니다. 그는 나에게만 소중한 친구가 아니라 모든 이에게 소중한 친구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께서 보여주셨던 사랑하는 마음을 내 이웃과 함께 나누고 자연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분명 하느님의 자녀요,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계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부활 제5주간 목요일
- 이세형 신부 -
오늘 아침에 가족들과 축복기도를 하셨나요?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벗어 던지고 축복기도를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이 기도가 우리 가족을 얼마나 사랑의 일치로 이끄는지 그 실례를 들려 들이겠습니다.
어느 날, 한 형제님과 미사 후에 대화를 나누다가 저에게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님께서 시킨 대로 저는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아내와 자녀들에게 축복기도를 해줍니다. 간혹 잊어버릴 때는 문자로 축복을 꼭 보냅니다. 3개월 정도 했는데 우리 가정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선 내 자신입니다.아주 짧은 축복기도이지만 그 기도를 통해서 내가 주님께 축복받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집안 분위기입니다. 아침마다 전쟁터처럼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따뜻해 졌습니다. 며칠 전에는 감동으로 울었습니다.” “아니, 왜요?”그 형제님은 지금도 벅찬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신부님, 그게 말입니다. 며칠 전에 회사에서 언짢은 일이 있어서 술을 한잔하고 들어왔습니다. 전에는 제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인사만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이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화가 더 납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녀석들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막 잠이 들려고 했는데, 녀석들이 제 방에 들어오는 겁니다. 아마 제가 자나보다 하고 생각했겠지요. 저는 눈감은 채 모른척했지요. 그런데 첫째는 제 오른손을, 둘째는 제 왼손을 살포시 잡고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데 꾹 참았어요. 아이들이 나가고 난 뒤 감동으로 펑펑 울었습니다. 아! 이것이 가족의 사랑이구나. 그래! 내일 아침에도 기쁘게 하루를 맞이해야지. 주님 감사합니다.”
그 형제는 신명나게 가족자랑을 했습니다. 저도 물론 형제처럼 기뻤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은 표현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도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표현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예수님의 사랑과 가족의 사랑입니다. 항상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기쁨의 충만으로 가족을 향한 사랑을 축복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일터로 확장시키십시오. 특히 지금 나와 불목의 관계에 있는 형제를 향해서 축복의 기도를 행하십시오.
“주님께 노래하여라, 영광으로 가득 차신 분!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셨도다. 알렐루야.”
<독서> : 사랑과 은총의 종교인 그리스도교 -경규봉 신부 -
예루살렘 공회의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과 바울로와 바르나바를 지지하는 주장이 맞서 오랜 시간 동안 열렬히 토론하였다. 마침내 으뜸 사도 베드로가 일어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하느님의 뜻임을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보내주셔서 유대인들과 똑같이 인정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시며 그의 믿음을 보신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동등하다. 할례를 강조하는 행위는 하느님의 일에 간섭하는 불경건한 행위이며 걸림돌이 된다. 유대교의 전통이나 규율과 같은 힘든 멍에는 사람이 질 수 없는 것으로서 강요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이방인이나 유대인 모두 구원받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고 베드로는 강조한다. 이로써 공의회는 바울로와 바르나바의 전교활동을 공인하고 바리사이파 출신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적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을 배격하였다.
그러자 주님의 형제(마태 13,55)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존경받는 지도자인 야고보(12,17; 21,18; 갈라 2,9)가 베드로의 의견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공의회의 결론을 맺는다. 사도 야고보는 무너진 다윗의 집을 다시 짓고 바로 세우리라는 아모스 예언자의 예언을 인용한다.
무너진 다윗의 집을 다시 세우는 목적은 모든 이방인들이 주님을 찾도록 하기 위함이므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이방인의 구원사업을 계속적으로 펼치셨다. 이로써 이방인 전교의 정당성이 구약의 예언(豫言)을 통해 확증되었다.
다만 이방인들도 잘 알고 있는 네 가지 행동을 금하도록 권고한다. 먼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지 말도록 권고하는데, 이는 자칫 우상 숭배로 빗나가지 않도록 경계한 것이다. 또한 이방인들이 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음행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금했다. 이는 구약에서부터 금지된 것으로(창세 9,4; 레위 17,14; 신명 12,16.23) 피를 먹지 못하게 한 규정은 피가 생명을 뜻했기 때문이다(레위 17,11).
유대인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방인들도 자신들처럼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고집은 이방인들에 대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백성이어야 하며, 자신들만이 뽑힌 자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배척하고 멸시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는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며,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부르셨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방인에 대한 배타심이나 우월감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독자적인 길을 걸어갔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이며 은총임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사랑과 은총의 종교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줄 정도로 사랑이 넘치시는 아버지이시다. 아무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하느님을 저주하고 원망하며 배신한 사람들까지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끝없이 넘치는 무한한 사랑이 곧 하느님의 사랑이며, 이러한 사랑이 곧 은총이다.
이 은총은 누구에게나 거저 주어졌다. 다만 은총을 스스로 거부하는 자들만이 은총을 받지 못할 따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거부하는 자들이 선택하는 자유까지도 인정하시고 받아들이시며, 그들의 자유의지를 꺾지 않으실 정도로 존중하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은총을 거부하는 자들만이 은총을 받지 못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거부하지 않는 신앙인,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는 신앙인, 믿음을 통하여 사랑과 은총을 받는 신앙인으로서 살아가자.........◆
사랑에의 초대 말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복음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하신다. 그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그 계명이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얽매어 부담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새로운 삶에 참여하여 세상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우리가 누리 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우리가 당신의 영원한 삶을 함께 누리도록 초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말씀은 어제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 이어 하신 말씀이므로 우리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언제나 주님과 일치되어 있고,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에 연결되어 있으며,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삶의 결실을 통해서 드러나야 한다. 우리가 이 결실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주님께 그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삶이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간의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을 갖고 상대를 인정 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상대가 나보다 낫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 사람을 사귐으로써 어떤 득실을 따져서가 아니라, 그에게 어떤 장점이 있고 배울 바가 있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낳음을 받은 똑같은 생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이유 때문이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당신의 자녀로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상대방의 약점을 그 개인의 약점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결점이며 약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을 인정하고 섬기는 사랑이 없는 참된 봉사가 없는 곳에는 미움과 더 무서운 무관심이 있게 되고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기보다 갈라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마음에 하느님도 우리 자신도 진정한 삶의 뿌리를 내릴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우리 신앙인의 삶이 아니다. 우리 자신 이제 우리 자신의 가정과 직장, 그리고 이웃을 살펴보고 그들에게 어떠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고 있는지 반성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하자. 우리가 생활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사랑을 나눌 수 없을 때 하느님의 사랑도 그러한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우리의 삶 속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생각되는 일까지도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보기로 하자. 그 때에 우리는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 이제 조금씩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신기현신부-
제가 언젠가 한 신자 가정을 방문하였을 때 거실에 이런 시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시의 저자는 그 집의 가장이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내 곁에 네가 있고, 우리 곁에 서로가 있어도 살뜰히 보고픈 우리는 가족입니다.
낯설은 흐린 날을 피하지 않고 힘 모아 창을 열고 나서면 햇발은 산 위에서 동구 밖에서 팔 벌려 품안으로 들려듭니다.
잘 살려는 욕심이야 누구나 있지만 정말로 잘 사는 건 바로 사는 것. 사랑 하나 씨앗으로 뿌린 우리 집에는 웃음의 만찬이 준비됩니다.
마음이 고운이 가슴이 정 다운이는 빛깔 고운 진주 빛 웃음 머금고 오십시오. 그리 크지 않지만 우리 집에선 축복의 손을 내밀겁니다. 진실의 말을 드릴겁니다.
이 시에서 그 가정이 서로 사랑 안에서 기뻐하면서 얼마나 단란하게 가정을 가꾸어 나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누어 보고자 하는 예쁜 마음을 우리는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사랑 안에 머무르는 모습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그 계명이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계명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하라 이르시는 것은 우리를 얽매어 어떤 부담을 주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새로운 삶에 참여하게 하여 세상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큰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기쁨을 우리 모두가 풍성히 누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당신의 영원한 삶을 함께 누리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사랑의 방법을 재정립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 가정 안에서만, 내 자식에게만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보다 더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보편적인 사랑을 가꾸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님의 애틋한 사랑이 자녀로 하여금 부모님의 품안에만 머물게 할 때에는 자녀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없음을 봅니다. 물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고이면 썩는 법입니다. 자녀에게 쏟은 사랑은 그가 또 다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될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이렇게 상대방을 내 품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받은 사랑이 흘러 넘쳐 다른 이 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리셨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했던 기쁨은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 또한 다른 누군가를 향하여 사랑할 때 그 기쁨은 참된 기쁨으로 나아 갈 것입니다.
"공동체 영성"
-이수철신부-
복잡한 신학의 미로나
영성의 미로에서 헤맬 때
즉시 단순한 복음과 미사 전례,
그리고 공동체로 돌아오는 것이
길을 찾는 해결의 첩경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두말 할 것 없이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입니다.
주님의 말씀 역시 늘 제자 공동체를 향하고 있습니다.
어느 개인만이 아닌
공동체의 모든 형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주님의 이 사랑에서 아무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새삼 공동체 내에서 어느 형제를 소외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습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
가만히 가부좌 틀고
주님 사랑 상상하며 머물라는
정적(靜的) 추상적 사랑이 절대 아닙니다.
바로 다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비로소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사실 고요히 잠심 상태에 머물 수 있는 것도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분위기에서 가능합니다.
얼마나 단순한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삶의 원리인지요.
여기서도 수직적 사랑과 수평적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이 서로 만남을 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의 말마디에서처럼,
위로부터의 수직적 사랑인 아버지와 아드님의 사랑이
형제들과의 수평적 상호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새삼 최고의 복음 선포는
사랑의 공동체 자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기쁨이 충만한,
아버지의 영광이 환히 드러나는 공동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가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 수도공동체의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일하는 삶 자체가
가장 좋은 복음 선포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여 많은 이들이 잠시나마
수도공동체의 삶을 체험하고 싶어 수도원을 찾습니다.
이런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공동체의 분별은 정확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회의에서
사도들 공동체의 현명한 분별은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는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오랜 논란 끝에 결론과도 같은 베드로의 말이
좌중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사랑으로 가능한 구원의 공동체요,
공동체 안에 현존하는 사랑의 성령이
올바른 분별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의 공동체를 이뤄주시고
서로 사랑하는 데 지치지 않도록 힘을 주십니다.
아멘.
아버지의 포도 사랑3
-노성호 신부-
포도나무들도 나름대로 자신의 성장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분이나 양분은 얼마나 섭취해야 하고, 자신에게 맞는 일조량과 풍량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나름대로 정해둔 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포도나무들이 그러한 틀을 갖추고 있지 않거나 정해진 틀을 벗어나서 마음대로 성장하려 한다면 제대로 된 열매를 맺을 수 없을뿐더러, 아무렇게나 자라고, 때로는 자랄 수도 없게 된다면 농부인 아버지의 가차 없는 처분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틀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모든 포도나무들에게 언제 어느 때 적당한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 줄 것인지 미리 정해 놓으시고, 늘 관심과 사랑으로 모든 나무들을 올바른 틀 안에서 잘 자랄 수 있도록 돌봐 주시니 말입니다. 예수님도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의 ‘계명’이라고 하는 좋은 틀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모두 좋은 열매를 맺으면서 하느님 아버지께는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우리 자신들은 구원에 이를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이 세상에 전해 주시고자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충만한 기쁨 중에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방법 내지 지름길, 그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틀 속에서 사는 것, 즉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박아미 수녀-
◆‘대∼한민국!’ 지난 3월 한반도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4강 진출로 2002년 월드컵 신화의 감동을 재현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선수들의 선전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면서 카메라가 더그 아웃을 간간이 비춰줄 때 무덤덤하게 선수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감독의 표정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겪은 수많은 승리와 패배로 인한 관록이 마음의 평정을 이뤄 긴장하는 선수들을 따뜻이 감싸안는 듯했다. 오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선사하시는 기쁨 역시 삶의 보람뿐 아니라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체험되는 것이기에(요한 14,28;16,20-24) 그 선물을 받으면서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 오른다. 흥겨운 삶의 표징인 ‘기쁨’은 구약성경에서, 미래에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실 구원과 평화의 시대를 특징짓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주제는 신약성경에도 그대로 이어져 성실한 종에게 주어지는 보상(마태 25,21.23), 세례자 요한 및 예수님 탄생으로 온 백성에게 주어질 구원의 소식(루카 1,14;2,10) 등으로 나타난다. 요한복음에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을 이제부터는 새 생명을 살아가는 제자들이 서로 나누어야 할 것으로 제시된다. 무릇 제자들은 이 기쁨에 사로잡혀야 하고, 또 이 기쁨은 일종의 충만에 다다라야 한다. 인생의 파고(波高)를 거쳐온 감독처럼, 죽음을 통해 부활의 생명으로 건너가신 주님처럼 고통을 잉태한 기쁨이야말로 우리가 누려야 할 충만한 기쁨으로 인도해 줄 것이며, 그때 비로소 우리 안의 기쁨은 저절로 흘러나와 다른 이들의 가슴에 빛이 되어줄 것이다. “보리는 겨울을 지나지 않으면 잎만 무성할 뿐 알곡이 들어차지 않고, 늘 따뜻한 곳에서 자란 나무보다 모진 추위를 견딘 나무가 더 푸르듯이….”(「좋은 생각」 중에서) 오늘 하루 주님의 기쁨이 내 안에 온전히 자리하도록 은총을 청하자.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차를 마시거나 집안일을 하기 전에, 운전을 하기 전에, 무엇보다 슬픔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려고 할 때 잠시 눈을 감고 사랑과 연민이 가득 찬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며 조용히 되뇌어 보자.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양승국신부-
<너무도 멀리 돌고 돌아서>
요즘 농부들의 심정과 고초를 많이 헤아리고 있습니다. 농부들이 이른 봄부터 허리가 휘어지도록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립니다. 한 여름의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 몇 시간이고 서서 구슬땀을 흘립니다.
뿐만 아닙니다. ‘농작물들은 주인 발자국 소리 듣고 자란다’며 수시로 찾아갑니다. 마치 자식 키우는 것 같습니다. 눈만 뜨면 걱정입니다. 잠을 자도 걱정입니다.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그분들이 그렇게 애쓰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오랜 노고를 기꺼이 참아내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가장 큰 기대는 무엇입니까?
풍성한 수확입니다. 알찬 결실입니다.
신앙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 왠지 손해 본다는 느낌 드실 때가 많을 것입니다. 억울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안가면 그만인데도 꿀맛 같은 새벽잠을 포기하십니다. 힘겨운 몸을 이끌고 그 꼭두새벽부터 본당으로 향합니다.
봉헌금도 내야지요, 교무금도 내야지요, 2차 헌금은 또 왜 그리 잦습니까? ‘재수 없으면’ 신축본당으로 떨어져 뭉칫돈을 마련해야만 합니다. 때로 야단맞아가며 내 시간 허비해가며 봉사활동에 전념하지만 그 누구도 칭찬해주지 않습니다. 왠지 손해 보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손해 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언젠가 주님 대전에서 거두게 될 풍성한 영적 수확 때문입니다. 언젠가 그분께서 우리 각자에게 넘치도록 베푸실 영원한 상급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풍성한 영혼의 열매, 신앙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비결 한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그 비결은 아주 간단합니다. 너무 쉬워 웃음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비결은 우리가 그분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일입니다. 그분 말씀을 우리 마음 안에 고이 간직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멀리 돌고 돌아서 제 자리로 돌아와서 보니 절실히 와 닿는 깨달음 한 가지가 있더군요.
연약한 우리이기에, 흔들리는 우리이기에 가끔씩 우리가 그분을 떠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큰 위안으로 다가오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떠나간 순간에도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저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묵묵히 침묵하십니다. 빨리 돌아서기만을 간절히 고대하십니다.
자꾸만 그분으로부터 도망가려는 우리, 자꾸만 엉뚱한 길로 접어드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우리의 힘보다 훨씬 더 센 힘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도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강영구신부-
복음사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4,16)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낮추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낮추어진 사랑 위에 우리는 두 발을 딛고 섭니다. 나무가 대지에 뿌리 내리듯이 우리도 낮추어진 하느님 사랑 안에 인생의 뿌리 내리고 삶의 자양분(滋養分)을 빨아올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내어주시는 사랑을 받아먹고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먹는 우리는 하느님을 닮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같아지는 사랑입니다. 동체자비(同體慈悲)를 실천하시는 예수님은 죄인들과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나누며 동고동락(同苦同樂)합니다. 눈높이를 맞추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곳에서 하늘나라(天國)가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죽는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고 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죽음 같은 사랑으로 우리는 부활復活하고 생명을 누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당신은 행복합니다. 당신 또한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족과 이웃과 형제들을 살려내기 바랍니다.(一明)
사랑실천과 계명 준수는 동시사건
-박상대 신부-
포도나무의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고서 포도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정립하시고, 제자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예수께 끝까지 머물러 있으라고 당부하셨다.(15,1-8) 오늘 복음에서도 전체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모티브는 열매를 맺기 위한 포도나무와 가지의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가지인 제자들이 머문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조건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명하시는 것은 아니다. 스승인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은 아들을 사랑하신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따라서 스승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그 기초가 된다.(9절)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조건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이 먼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을 모델로 제시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예수님께서는 아들로서의 자신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사실을 대단히 기뻐하신다. 제자들이 스승을 따라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문다면 마찬가지로 기쁨이 보장될 것이며(11절), 이 기쁨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제자들에게까지 베풀어주시는 기쁨이다. 계명을 지킴으로써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사실상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난 뒤 새 계명을 선포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 이렇게 계명과 사랑은 서로 묶여 있다. 구약성경을 따르는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계명과 사랑이 서로 별개의 것이며, 사랑이 계명에 종속되어 계명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신약성경 후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구약의 율법은 있고, 이 율법으로부터 물려받은 십계명도 여전히 효력을 발생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명들 속에서 사랑을 솎아내어 계명 위에 세우셨고 모든 계명의 골자로 사랑을 제시하셨다. 그래서 모든 율법과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지를 묻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이렇게 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사랑의 이중계명으로서 모든 계명의 핵심이요 골자다. 이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의 전부를 지키는 것과 같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사랑이 추상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사랑의 구체적인 모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13,34)이라는 모범 안에 들어 있다. 여기서의 사랑은 낙관주의(樂觀主義)자들이 생각하는 화사하고 달콤한 로맨스(romance)에 등장하는 낭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모델은 곧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 앞에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리 2,8) 세상에 내어놓은 사랑이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당장 제자들의 목숨까지 요구하면서 사랑하라는 것은 아니다. 우선 ‘스승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의 교과서는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그 책 안에 들어 있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배워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숙제이다. 숙제를 하면서 늘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는 황금률이 아니겠는가? 결국 사랑하는 동시에 계명 준수가 이루어진다. 물론 사랑한다는 것이 자칫 추상적인 관념에만 머물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했을 때 계명 준수가 이루어진다. 만약 사랑의 실천이 잘 되었는지, 그래서 계명 준수가 잘 이루어졌는지 알아보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기쁨이 동(動)하고 있어야 한다. 기쁨은 곧 만족감이며, 이 기쁨은 바로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기쁨이다.(11절) 이 기쁨으로 자신을 충만케 하려면 사랑의 실천이 일상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
†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 -두올묵상팀-
하느님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는 에덴동산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하여 십자가의 사랑으로 끝맺음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더욱 깊이 느낍니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과 함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면서 더욱 따뜻한 하느님의 숨결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구약시대 예언자들을 통하여 증거하신 많은 율법 조문과 규례들을 보면, 사랑으로서 완전하게 이룰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율법과 사랑과의 관계에 대해서 성서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3,8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주님에게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해 온 울법학자에게 첫째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예언자들이 지금까지 증거해 온 강령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이 말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새 언약을 제정하시고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만이 나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하여 오직 하느님 한분만을 사랑하도록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은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귀한 표본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에 의해 조롱과 수모를 당하셨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이루시기 위한 하느님의 큰 뜻이 그 속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당하심을 오히려 마땅함으로 생각하시고, 이 땅에 생명의 씨앗을 뿌려 사랑이라는 생수로 가꾸어 나가시는 길만 향해 가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여 대신 죽어 주셨다는 사실로써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 사랑의 깊이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에페소서 3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무한대 사랑'으로 찬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 이 모든 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내세워 이루시려고 작정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살게 되어 확신을 가지고 서슴지 않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느라고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이것은 여러분에게 오히려 영광을 가져 오는 것이니 나 때문에 낙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드립니다. 넘쳐 흐르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의 힘을 돋구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 속에 들어 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 감으로써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 감으로써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놓여 있지만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대신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시면서, 너희도 이와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요한 14,15) 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 같이 우리도 형제를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이요 새 언약의 중심된 사상입니다.
다시말하면“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라고 (1요한 4,20-21)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느님을 마음 중심에 두고,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은 결코 형제를 미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눈에는 형제가 밉게 보일 찌라도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사랑을 베풀어 자녀로 삼으시고 더 큰일을 주시려고 하셨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고 계시는 자녀를 내가 미워한다면 결국은 미움의 화살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가 밉더라도, 그 미움은 사랑 안에서 용해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형제도 서로 싸웠다가는 금방 화해하고, 또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서로 나눠 먹으려고 하는 것이 세상의 일반사인데, 하물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하늘의 형제들이 내 형제를 원수와 같이 여기고 미워한다는 것은... 나를 죄짓게 한 형제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자신이 아직은 덜 닦여진 모난 성품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죽기까지 사랑하는 하늘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의 묵상글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하느님의 계명에 대해 요악한 짧은 글이 너무 마음에 와 닿기에 여러분에게 소개 합니다. 묵상해 보십시오.
사랑은 주어야만 하고, 사랑은 죽어야만 하고, 사랑은 희생해야만 하고, 사랑은 참아야만 하고, 사랑은 순종해야만 하느니라.
주는 것은 겸손이다. 죽는 것은 표양이다. 희생은 덕이다. 참는 것은 지혜다. 순종은 영광이다.
이 다섯가지는 이웃사랑 계명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
그러면 지금부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을 함께 공부해 보겠습니다.
1. 먼저 사랑하는 자세(마음)를 갖는 것이다.
오늘복음 12절 말씀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16절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바치는 사랑에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스스로 주셨습니다. 그것도 넘치는 사랑으로, 공짜로 말입니다.
또 구약성서에서 보면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친구, 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고보서 2장 23절에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친구라고 불리었던 것입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야 41장 8절에는 "너, 이스라엘, 나의 종, 너, 내가 뽑은 자, 야곱아,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후예야..." 라고 하였습니다....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진정한 사랑은 친구ㅡ벗의 관계로 아루어지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자기의 친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정말 아브라함 편에서는 상상을 불허하는 황감한 말씀이었습니다. 어찌 아브라함 편에서 ‘하느님은 나의 친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느님 편에서 먼저 택해주시고 친구라고 불러주시고, 또 벗의 사랑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0절에는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사랑을 할 때는 벗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어릴 때 개울가에 모여 발가벗고 놀던 벗, 그 친구들은 항상 좋은 마음으로 우리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 친구에게는 무엇이든지 도와주고 싶고, 무엇이든지 좋은 것을 주고 싶습니다. 계산을 하지 않고, 먼저 주고 싶습니다. 덤을 더 주고 싶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벗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먼저 주셨고, 더 주실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좋은 우정을 세워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먼저 사랑함으로 세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먼저 사랑을 베플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제복음(포도나무 비유편)에서 보면 주님께서 제자를 친구(포도나무가지)로 선택하신 동기는 질 좋은 열매을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삶이 열매로 풍성해진 모습을 보시기 원해서 그들을 포도나무가지로 선택하여 사랑(줄기와 가지의 관계)하신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주님은 당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16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더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얻기 위해서만 친구를 선택한다면 그 우정은 이기심에 근거한 상대방을 이용하고 조작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선택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랑은 순수한 우정으로 발전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삶에 축복이 되어주기 위해 사랑을 베풀 때 아름다운 우정을 세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덕을 보기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의 인생 속에 축복이 되어주기 위해서 내가 그들의 친구가 될 때 사랑의 우정을 세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런 우정으로 세워져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나눔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만남이 진솔한 우정으로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눔이라는 하나의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눔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 깊은 내면을 열어서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비밀을 나눌 수 있는 나눔이여야 합니다. 이 비밀을 나누지 않고 우정은 깊이 있는 우정으로 발전해 갈 수가 없습니다.
심리학자인 [폴 투리니에] 는 그 비밀관리를 중심으로 한 인간 성숙의 발달단계를 세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첫 단계는 어린이의 삶의 단계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비밀을 간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어린이의 특성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사춘기의 삶의 단계입니다. 사춘기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비밀을 갖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부모에게 얘기 안하고 비밀이 생깁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춘기에 들어선 우리의 자녀들은 비밀을 간직하면서 그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찾기 시작합니다. 이때 좋은 친구를 갖게 되면 건강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또 그렇지 못하면 매우 불안한 성장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성인의 단계입니다. 성인의 단계에 있어서는 자기의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가정을 꾸며 부부를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부란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친구의 발견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내 약점도 나누고 아픔도 나누고 좌절도 나누고 실패도 나눌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부부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이런 이성 배우자만으로 우리의 마음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자기 동성관계의 건강한 친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친구들을 통해서, 또는 그 배우자와 함께 건강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인격의 형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 친구라고 말하는 이 시점을 우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요한복음의 15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주었다.”
오늘 이 말씀이 '이제(부터)' 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당신 생애에 거의 마지막 끝자리 단계에 와서 비로소 가장 중요한 비밀인 십자가의 비밀을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십자가의 엄청난 비밀을 말씀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진정한 친구란 어떤 관계이여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정말 깊이 있게 삶을 나누는 친구는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친구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밀을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은 중요한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뢰라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시인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 1802~1885)는 “사랑한다는 것은 믿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신뢰의 관계가 없이는 아무도 비밀을 말하지 않습니다. 비밀을 말했다가는 큰일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뢰 할만하다!' 라는 어떤 수준에 도달하면 우리는 비밀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진짜 친구 벗이 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이런 친구를 구할 수가 있을까요? 제 소견으로는 교회라는 공동체야 말로 가장 좋은 신앙의 친구를 얻을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진정한 우정을 세워갈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서로 신뢰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형제, 자매들에게 신뢰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것을 내어 놓아도 내가 비판받지 않고 오히려 이해 될 수 있는 그런 신뢰받는 형제자매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다운 우정을 세워가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될 때 미사 가운데서 교제 가운데서 치유가 일어나게 되고요, 우리 안에 건강한 삶이 형성됩니다. 우리 가톨릭신자들은 고해성사라는 제도를 통해서 비밀을 속 시원히 털어놓고, 그래서 신뢰할만한 산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3. 희생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희생이야 말로 우정을 세워갈 수 있는 중요한 사랑의 요소입니다. 요한복음 12-14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주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시점이 언제입니까?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이 없는데 주님은 생명을 우리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면서 사랑하셨습니다. 요한일서 3,1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의 이해관계를 생각지 않고, 당신의 권리도 주장하지도 않고, 오로지 미천한 우리만을 생각한 나머지 당신을 희생하시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여 벗(친구)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구체적인 희생이었고, 섬김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친구가 되는 데는 예수의 목숨이 희생되고, 지불되었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주님처럼 희생적인 사랑을 통하여 우정을 세워가는 참다운 신자들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아시아의 폴리니 총독의 보고서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렇게 보고 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정찰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들인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정찰하면서 로마의 총독에게 보고 하기를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로마의 귀족들 간에 그리스도인들을 비꼴 때나 그들의 삶을 부러워할 때 그들의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한 유명한 유행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보라,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초대교회를 향해서“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다.”“보라 얼마나 사랑하는가?”라고 말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까요? 희생적인 사랑을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희생적인 사랑을 하여 아름다운 우정을 세워가는 신자, 그리고 교회가 되도록 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은 친구로 정말 만난 적이 있습니까? 주님을 만났다면 형제, 자매된 지체들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였듯이 사랑하며 친구의 우정을 세워가고 있습니까? 내가 먼저 사랑하고, 마음을 서로 나누며, 희생적인 사랑을 함으로 친구의 우정을 세워가며 주님을 섬기는 놀라운 행복, 감격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사랑의 우정을 세워가는 우리가 됩시다.
오늘복음의 묵상 마무리입니다. 우리는 오늘복음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애 대해 묵상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라 - 이 사랑은 신적인 사랑이며 아가페(Agape)적인 사랑입니다. 제 몸을 사랑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그리스도로부터 은총을 받은 숭고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으로써 우리가 서로 사랑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형제끼리의 사랑입니다. 미워하는 형제가 있으면 화해하고, 가장 미운 형제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를 인정해 주라는 것,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누구나 미워하는 형제가 있습니다. 화해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도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한 사랑 안에 머무르는 모습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그 계명이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계명이며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우리를 얽매이게하고 또는 어떤 부담을 주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새로운 삶에 참여하고,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고저 하는 기쁨을 우리 모두가 풍성히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죽음으로써 우리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영원한 삶을 함께 누리고자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러한 사랑에 머무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들 생활 속에서 서로 간에 사랑이 이루워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관심을 갖고 상대를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즉 상대가 나보다 나아서라기 보다 그를 사귐으로써 나에게 어떤 득실을 따지는 것보다 혹은 그에게 어떤 아름다움과 장점이 있고 베울 바가 있어서라기 보다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낳음을 받은 똑같은 한 생명을 갖고 살아가며, 또한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무시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로서 자녀들인 우리를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기쁨에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다면, 사랑이 없는 곳은 지옥입니다.
내가 생활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사랑의 정이 매마를 때, 하느님의 사랑도 그러한 나와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임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다" 우리 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사랑을 간직해 봅시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체험하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하신 말씀을 듣고 기쁨과 충만된 생활이 되도록 합시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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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