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세가지 문제 (고린도전서 15: 20-22)
중요한 것들은 세가지로 표현하는 것이 많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기독교의 중요한 덕목입니다.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도 정부와 국회 법원의 세 기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을 때도 세가지 중요한 주님의 본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가지 문제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죄와 죽음과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 가득할 것입니다. 죽음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래 사는 것이 모두의 소망이지만 아프지 않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생에 가장 중요한 세가지 문제에 대하여 그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예수를 헛되게 믿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이미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를 다시 정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인생에 가장 중요한 세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첫째,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길을 잘못 들어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사람은 왜 죄를 짓는 것일까? 그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담이 그 나무열매를 보았을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한 탐스런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죄의 지배를 받으면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두 형제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곡식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그 마음에 아벨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왜 너는 분노하고 있느냐? 죄가 너를 지배하려고 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가인은 동생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죄가 문제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두기도 하고 사형을 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12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리셨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4:25에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 나셨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믿는 우리는 의로워 졌고 죄는 용서되었습니다. 우리를 옳다고 하십니다. 십자가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해방된 날입니다. 나라를 잃고 신앙의 자유를 잃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힌 애국자들이 석방되었습니다. 일제로부터 죄인이 되었던 사람들이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조만식이 석방되었습니다. 수많은 애국자들이 석방되었습니다. 김좌진 장군이 옳다고 인정되었습니다. 안중근장군이 옳다고 인정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고문으로 숨진 유관순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일본 경찰을 죽인 김구선생이 당당하게 귀국했습니다. 김구선생이 일제에선 죄인이었지만 해방된 조국에선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모두 당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힌 성도들도 석방되었습니다. 한상동 목사님이 석방되었습니다. 이인재 목사님이 석방되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던 안이숙 사모님이 석방되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석방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옳다고 인정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7일에 일제는 한국의 성도들을 처형하려고 계획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제에 B29, 비행기 이름이 ANGEL,천사를 통하여 원자폭탄을 때렸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항복했습니다. 성도들과 애국지사들은 사면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이 이와 같습니다. 악의 세력을 쳐부수고 의의 세력이 승리했습니다. 부활로 인하여 일생에 죄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히2:15) 우리인류에게 대 사면령을 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둘째,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사람은 왜 죽는 것일까?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생의 중요한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초연한 사람도 혹 있지만 죽음은 우리를 초라하게 만들고 우리의 정신세계를 뒤집어 놓습니다.
아는 집사님이 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남은 수명이 석달이라했습니다.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아, 30대에 내 인생이 끝나는구나...이 집사님이 믿음이 다 날라 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말도 친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는 동안 큰 병원에서 다시 정밀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암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한달 동안 강집사님은 죽어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죽음입니다. 30년전 그 집사님은 한달 수입이 천만원이었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면 돈도 필요 없습니다. 좋은 직장도 소용 없습니다. 죽는 문제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죽음이 내게 닥칠 때 사람은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과학과 의학으로 죽음을 이겨 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습니다. 그 결과 수명이 10-20십년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 앞에 겁내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마치 이것은 뱀과 망구스의 싸움과 같습니다. 무서운 독을 가진 독사와 망구스라는 조그마한 동물이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망구스는 마치 너구리처럼 생겼습니다. 그 망구스가 독사와 싸우다가 독사에게 물렸습니다.
잠시 후 망구스는 죽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눈을 감고 쓰러졌습니다. 죽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망구스가 다시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느릿느릿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뱀을 공격했습니다. 다시 독사가 망구스를 물었습니다.
독사의 날카로운 이빨이 망구스의 발꿈치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독사의 독은 망구스를 해치지 못합니다. 망구스는 독사의 독이 통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망구스가 독사의 목을 잡고 그 머리를 입으로 물었습니다. 싸움은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망구스의 승리입니다. 망구스는 독사를 머리부터 먹어 치웁니다.
하나님은 뱀과 망구스의 싸움을 사람에게 보여 주시며 십자가의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3:15에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에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부활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다 때가 되면 죽을 것이지만 그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죽은 육체를 다시 살려 주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셋째, 인생에서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고통스런 일들이 많습니다. 야곱이 바로 앞에 섰을 때, 바로가 그대의 나이가 얼마인가. 물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년입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야곱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지요. 여러 질병에 시달려 때로는 죽음의 문턱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힘드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배고프고 폭행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실직하고 배신당하기도 하면서 고달픈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인생은 왜 고달픈 것인가? 왜 사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운가? 사람은 고통 중에 태어나고 병들고 다쳐서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고.. 불치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못 먹어 배 고프고, 어릴 때 부터 힘센 아이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하고 갈등하고 싸우고.. 원한과 분노에 벌벌 떨기도 하고... 사는 것이 고생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의 날 수가 칠십이요 건강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했습니다(시편 90편) 인생은 고난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인생은 고해의 바다를 건너간다고 합니다.
사람은 왜 고통을 겪으며 살까요? 왜 우리가 두려워하는 고난이 오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것이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이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은 후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삭막한 세상으로 쫓겨났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지어 저주와 고난이 왔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나올 때 하나님은 여인에게 출산의 고통이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담에게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라 했습니다. 아담이 이마에 땀을 흘리고 고생하여 양식을 얻을 것이라 했습니다. 노동의 고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이 당하는 고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친히 그 몸으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 이하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모욕과 수치를 당했습니다. 온 몸은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몸에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당할 죄의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우리가 앓을 질병을 그 몸에 담당하셨습니다.
고난과 저주는 죄의 형벌이요 대가입니다. 죄는 내가 지었지만 그 대가는 예수님이 치렀습니다. 내가 치를 대가는 없습니다. 오래전에 아는 목사님과 함께 프로방스라는 곳에 갔습니다.
오래전에 연희동에 있는 일식집에 갔습니다. 한자로 복강이라는 음식점이었습니다. 일본어로 후쿠오카라는 일식집이었습니다. 식사를 하다 보니 아는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보니 그 장로님이 카운터에서 우리 식사비를 계산했습니다. 내가 음식을 먹었는데 내가 치를 계산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계산을 끝냈습니다. 내가 치를 대가는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치를 저주와 형벌을 예수님이 다 치르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