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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설교자로서 설교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기에 많은 분들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얻은 결론은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 유형의 설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저의 개인적 생각이고, 판단이란 점을 분명히 밝혀드립니다.
그 이유는 저만의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인 판단이기에 얼마든지 다른 생각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제가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고, 판단한 세 가지 설교 유형은 WHAT, WHY, HOW 유형입니다.
1. WHAT 유형의 설교
WHAT 유형이란 설교의 줄거리가 기원과 근원, 성경본문의 본래 의도와 의미를 찾는 유형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구원이란, 영생이란, 안식이란, 하늘나라 그리고 하나님과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란 누구신가?”
등등의 주제에 대한 관심과 해석을 하는데 초점을 둔 설교 유형이라고 봅니다.
WHAT 유형의 설교는 대체적으로 당시 상황이라든가, 배경에 대한 소개가 빠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본문에 나오는 단어(용어)의 원어상 의미가 무엇인지 추적을 합니다. 가령 ‘교회’라는 단어가 나올 경우,
“교회란 단어의 원어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인데, ‘에클레시아’란 이러이러한 뜻이고,
구약에서는 이렇게, 신약에서는 이렇게 사용해 왔습니다.”라는 설명이 빠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바른 뜻을 알아야 하고(text), 바른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의 본문이
어떤 배경과 상황에서 말씀하셨거나, 기록하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고(context),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원어의 본뜻을 알아야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갑니다.
저는 이 분들의 설교의 목적은
에베소서 1:17-19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기도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는 말씀의 실현에 있다고 봅니다.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엡3:14-19)이 목표라 봅니다.
이와 같은 WHAT 유형의 설교자를 손꼽으라고 하면
저는 박영선 목사님과 이동원 목사님이 대표적인 분들이라 봅니다.
이 분들의 설교는 설교 제목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이 경우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비전”, “그리스도의 화평”, “성령충만”, “성령의 보증”, “인간의 본질”, “믿음의 본질”,
“신령한 복”,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열심과 인간의 자유”, “믿음이란 무엇인가?” 등 입니다.
“이웃 사랑의 진짜 의미”란 설교에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웃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라는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란 설교에서 “이 질문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란 설교에서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신앙생활의 목표”란 설교에서, “구원의 의미를 바로 알면 신앙생활의 목표가 뚜렷해집니다.” 는 등의 말씀은
WHAT 유형 설교의 대표적 사례라 할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경우는
“오직 믿음으로”, “고난의 유익”, “절망을 넘어서는 소망”, “거룩에 이르는 삶의 길”, “영원한 본향으로서의 천국관”,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염려를 이기는 성경적 처방”, “세상에서 잘 사는 길”, “하나님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
“더 좋은 편을 택하라”, “열매가 있습니까?”, “바른 교훈의 파수꾼이 되라”는 설교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설교 특징은 탄탄한 논리 속에 본문에 대한 주석과 해설이 기본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2. WHY 유형의 설교
WHY 유형의 설교는 신앙의 이유와 목표를 찾는 유형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면 “왜, 구원을 받고, 왜, 영생을 얻고, 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해야 하고,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와 목적 또는 목표를 찾는 유형의 설교라고 봅니다.
이런 유형의 설교자는 대부분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역사와 문학과 철학적 사고를 가진 분들로서,
이러한 바탕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경향이 높다고 저는 봅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진리를 역사와 문학과 철학으로 대처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왜, 신앙을 가져야 하는가?
왜, 구원과 영생을 얻어야 하는가?” 등등의 목표와 목적을 성경의 역사, 성경의 문학적 표현,
성경의 문맥 속에 담긴 그 의미와 뜻을 인문학적 방법론을 통해 풀어가는 유형이란 뜻입니다.
WHY 유형의 설교자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는 말씀과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요일5:19-21)는 말씀에 근거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WHY 유형의 설교자를 손꼽으라고 하면
저는 이재철 목사님, 김진홍 목사님을 손꼽고 싶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 제목 몇 가지를 소개하면,
“나의 행복은?”, “불안에 흔들리며 살기 싫다면?”, “예수 믿지만 옛 삶을 청산 못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저를 축복해주세요. 이 말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의미”,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이런 사람을 말합니다!”, “왜 예수인가?”, “희망과 내일은 이것에 의해 좌우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받기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터널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탄을 만드셨을까?”,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인생에서 이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는 등의 설교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의 경우는
“세상으로 나갑시다.”, “어떤 교회를 세워 나갈 것인가?”, “인생의 벽에 부딪혔을 때 넘어서는 방법”,
“할 수 있다 정신”,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변화되어 변화시키자”, “행복에 이르는 길”,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세상 끝에 일어날 징조”, “세력을 얻는 교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
“흥하는 가정과 쇠하는 가정”, “행복에 이르는 십계명”, “신앙생활의 4가지 기준” 등 입니다.
“여호와께서 붙드심이라”는 설교에서
“5년 후 한국에게 다가올 위기?! 어떻게 대처해야할까?”라고 묻고,
“그리스도의 향기”란 설교에서는 “지금까지 속해있던 사고방식 인간관계 다 털어버려라!!”하고.
“마라와 나오미, 불행과 행복”이란 설교에서는 “불행한 인생이 행복으로 바뀌어 가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
“새로운 시작”이란 설교에서 “망해가는 나라가 새롭게 일어설 수 있다고?”라고 증언합니다.
이와 WHY 유형 설교의 특징은
인생의 의미와 삶의 목적,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하려는데 초점이 모아진다고 봅니다.
3. HOW 유형의 설교
HOW 유형의 설교는 적용과 실천에 목적을 둔 설교 유형입니다.
예를 들면 본문의 가르침과 내용을 어떻게 받아드리고,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유형의 설교입니다.
HOW 유형의 설교자들의 지향하는 목표는
디모데후서 3:14-17절에 나오는 말씀 특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17)는 말씀과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의 방향’을 제시한 데살로니가전서 5:12-22절에 근거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고 하신 말씀에 따라
신앙이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본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HOW 유형의 설교자를 손꼽으라고 하면
이찬수 목사님과 유기성 목사님 일 것입니다. 이 분들의 설교 제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찬수 목사님의 경우
“세상에 역행할 때 얻는 행복”, “뜨겁게 사랑할 때 나타나는 회복”,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
“복음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 “내 의지와 힘이 한계를 만났을 때”, “억울한 일 당했을 때”,
“영혼이 강해지는 30분 묵상법”,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시급한 대안 예수 그리스도”,
“권태가 없는 가슴 뛰는 삶”, “활력을 되찾는 두 가지 방법”, “공격보다 더 무서운 유혹”, “내 힘으로 더는 안 될 때”,
“관계가 너무 힘들 때”, “절박할 때 제대로 엎드리는 방법”, “누구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까?” 등입니다.
특히
“불교 신자가 교회에 보낸 선물. 개그맨 이성미 앞에서 이찬수 목사가 부끄러웠던 이유”,
“개그우먼 이성미 씨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택시 운전을 시작했는데 첫 손님이 스님이었습니다.”,
“장로 아버지의 외도에 충격을 받은 청년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잘 살다가도 결국에는 ‘이것’ 때문에 인생이 망가집니다.” 등의 설교는 HOW 유형의 대표적 사례라 할 것입니다.
유기성 목사님의 경우는
“예수님을 가정에 초청하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라”,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는 방법”,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는 방법”,
“치밀하고 영악한 마귀가 주는 생각 끊는 법”, “기도의 뜨거운 불을 받는 법”, “힘겨운 삶의 짐을 내려놓는 방법”,
“마음이 복잡할 때 평안을 얻는 법”,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 “하나님을 보는 눈을 뜨는 법”, “예수님과 아주 친해지는 법”,
“하나님과 함께 난관을 돌파하는 법”, “고난을 자랑으로 바꾸는 방법”, “마음이 복잡할 때 평안을 얻는 비결” 등 입니다.
어느 설교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제가 서울에서 어떤 거리를 지나온 적이 있는데 며칠 전 어느 권사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우연히 저를 발견하고 제 뒤를 한참 따라오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편지를 받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소개한 내용에서
, HOW 유형 설교의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HOW 유형 설교자의 특징은
자신의 경험이나 고백, 또는 타인의 간증 사례를 전달하는 형식의 설교입니다.
“나는 이런 경험을 했고, 나는 이러저러한 일로 이러한 감동을 받았고, 이러저러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등의 형식입니다.
성경을 통해 깨닫게 된 자신의 삶과 경험은 물론 타인의 증언이나 경험 속에서 교훈이 될 만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함께 공유하고, 함께 결단을 촉구하는 유형의 설교로서 위로와 격려와 소망을 심어주는 것이 특징입니다.
저는 세 가지 유형 중 어떤 유형의 설교가 가장 바람직한 설교인가 하는 문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분들의 성품과 관심과 목표와 목적이 있고, 그분들의 삶과 경험 속에서 축적된 지혜이기에,
제 삼자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다만 WHAT 유형의 설교는 매우 논리적이기에
긴장감의 지속으로 피로감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청중의 관심도를 높일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WHY 유형의 설교는
모든 성경이 요한복음 5:39절이나, 20:31절과 같이 명확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기에
어떤 경우는 논쟁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 예로 김진홍 목사님의 “'서울의 봄' 보다가 영화관 뛰쳐나온 이유?”,
이재철 목사님의 “어떤 목사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설교를 꼽을 수 있습니다.
HOW 유형의 설교는
청중에게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본문에 대한 이해와 접근과 해석이 빈약하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밝힌
설득의 수단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 중에
WHAT 유형은 로고스,
WHY 유형은 파토스,
HOW 유형은 에토스에 가까운 형이라고 구분한다면
저의 가당치 않는 논리적 비약일까요?
만일 어느 분이 저에게,
“당신의 설교 유형은 어떤 유형인가?”라고 묻는다면 저의 설교 유형은 변천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대략 40대까지는 WHAT 유형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관심과 의문이 많았기에 그 의미와 뜻을 찾는 일에 열중해 왔습니다.
그러나 50대에 접어들면서 WHY 유형의 설교를 첨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청중이 어떻게 그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에 봉착하면서
HOW의 문제로 결론을 맺으려 시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제 고충은 짧은 시간에 이 세 가지 문제를 안배하여 설교한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저의 개인적 판단은 설교란 길어야 30분이고, 대체적으로는 20-25분이 적절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간 동안에 WHAT과 WHY와 HOW의 문제를 담아낸다는 것은 여간 버겁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50대 후반부터는 고심 끝에
이를 시간대별로 구분하여 시도해 보았습니다.
주일 낮 예배는 대부분 신앙의 연조나 관심사가 각기 다른 다양한 청중들이기에 전문적인 것보다는 접근하기 쉽고,
공감을 유도할 수 있는 유형의 설교가 필요하다고 여겨 HOW 형식을 취했습니다.
오후 예배는 초신자보다 신앙의 연조가 있는 분이 대부분이기에 이때는 WHY 유형의 설교형식을 택했습니다.
수요일의 경우는 신앙의 연조가 깊거나, 관심이 높은 분들이기에
성경공부라는 형식을 빌려 WHAT 유형의 설교를 진행했습니다.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설교 역시 설득의 과정이기에, 무엇을(WHAT), 왜(WHY, 어떻게(HOW) 설득할 것인가의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설교자로서 ‘지금’ 선포하는 ‘메시지’가 과연 하나님이 설교자에게 맡겨주신 그 말씀을 전달하려는 대언자(代言者) -
맡겨진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서의 ‘하나님의 관점에 부합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저는 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환호한다 할지라도
설교자의 본분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대언자의 역할이라는
그 사명을 결코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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